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그러면서도 공짜나 덤만큼 솔깃한 유혹도 없다. 마트의 ‘일 플러스 일’ 상품이라든지 백화점에서 서비스로 끼워 주는 하찮은 생활필수품 하나에도 주부들은 끌린다. 복잡미묘한 감정을 소유한 사람이지만 ‘덤’ 앞에서는 어이없게 단순해 진다. 그녀도 그랬다.
행사를 벌인 가게는 집에서 가까운 거리여서 외출길에 쉽게 들었다. 가게 앞엔 그녀처럼 광고를 보고 왔을 여남은 명의 아주머니들로 일렬의 줄이 형성되는 중이었다. 숫자로 미루어 대략 십 분 정도면 차례에 닿을 것 같아 긴가민가하던 그녀도 어색하게 합세한다. 막 뽑아낸 엿가락처럼 뒷줄이 늘어남과 동시에 예상대로 그녀의 순서가 팍팍 앞당겨지고 있다. 그때였다.
“내가 앞에 가서 한번 보고 올게.”
뭘 보시겠다는 건지. 중요한 일이라도 되는 양 총총히 앞으로 걸어 나가는 사람은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다. 누가 부탁한 건 아니겠고, 우리나라 용감한 아주머니들보다 아무래도 할머니가 한 수 위 인가.
동네의 한 침구류 판매점에서 기획한 이벤트였다. 오늘 하루 선착순으로 베갯잇 두 장씩을 준다는 것인데 소규모 가게의 마케팅 전략치고는 실로 감동적인 수준이다. 거기다 그녀의 사정은 또 어찌 알았는지, 마침 새 베갯잇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참에 날아든 전단지의 타이밍이 절묘했다. 꼭 사야 할 필수품을 쇼핑에 나서는 길에 그냥 준다면…….
“할머니는 방금 받으셨잖아요!”
깜짝이야. 조금 전 그 할머니다. 차례를 앞서 나가셔서 ‘보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받으시고 본래 자리로 되돌아왔다가 뒷사람에게 퇴박을, 맞는 모양이다. 차곡차곡 쌓인 두 종류의 베갯잇 분배에만 열심인 가게 주인은 그러한 소란쯤은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멀쩡한 상품을 공짜로 얻은 할머니께서는 가슴속 억척 모성에 그만 견물생심이 발동하셨나. 좌우간 진짜 민첩하시다.
그녀는 어쨌을까. 깔끔하게 비닐커버까지 씌운 베갯잇 두 장을 무난히 획득했다. 그것도 원하던 분홍색 계열로 골라서다. 기억으론 그녀 스스로 찾아가 취한 공짜 물건이란 처음인가 싶다. 그리 용감하지도 뻔뻔하지도 못한 그녀가 한 것이라곤, 부디 주인의 사업이 불꽃처럼 일어나 번창하기를 속으로 빌었을 뿐이다. 그런데 약간의 쑥스러움과는 딴판으로 꽃잎 무느가 다문다문 새겨진 베갯잇은 마음에 쏙 드나 보다. 쇼핑 거리 하나를 해결한 만족감에다 공짜 맛이라도 곁들여졌는지 기분은 완전 ‘땡큐(thank you)’ 모드다.
그녀가 언제 공짜를 선호하기나 했던가. 공짜라면 왠지 속임수가 든 것, 같아 손사래를 치거나 서둘러 외면하는 편이다. 거저 준다는 말엔 ‘노 땡큐’로 응수한다는 게 평소 그녀의 설(說)이다. 혹 누구로부터 산해진미를 대접받는 자리라 해도 되갚아야 한다는 조급함에 절대 살이 되지 못함이 그녀의 체질인 것을. 한데 말이다. 예기치 않게 취득한 베갯잇 두 장은 차치하더라도 공짜에 대한 그녀의 설이 조금 아리송 해 진다.
기실 홈쇼핑에서 서비스로 받은 물품이 몇 가지쯤 된다. 무선 청소기는 기다란 스틱만 빼내어 운동 기구로 사용하며, 전골냄비는 수년째 싱크대 아래 보관함의 신세를 지고 있다. 제대로 쓰는 거라면 일인용, 라면 냄비 하나지만 그게 덤으로 얻은 물건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까맣게 잊은 걸까. 하기야 세상살이가 요지경이니 흔들리는 마음이나 깜빡하는 기억도 어쩔 순 없겠다.
이젠 아스라한 그녀의 이십 대 시절, 하루 여행을 떠나 벌어졌던 사건도 가물거리는 풍경이다. 그날, 단짝 친구와 하필 독하기로 소문난 대구의 맹추위를 뚫고 팔공산 ‘동화사’ 엘 갔는지, 스케이트 경기를 보러 꽁꽁 언 ‘수성못’엘 갔는지는 지금 헷갈린다. 다만 돌아오는 길에 대구 시내 주말 인파가 몰려든 D백화점에서의 장면만은 되살아 난다. 그것도 초대형 공간에서 얼결에 획득한 물건 때문이다.
처음 보는 신세계였다. 어마어마하게 넓고 고급스런 공간에 층층으로 돌아가는 에스컬레이터 하며 구색 맞춰 호화롭게 진열된 상품들이 엄청난 곳, 오로지 ‘사고 싶다’는 욕망만을 팔팔 부추기는 그런 데는 처음이었다. 서울 다음이라면 부산에조차 그만한 백화점이 들어서기 전이었으므로, 어디로 어떻게 들어가 어디를 통과했는지도 모른다. 무아경으로 돌고 돌다 물건 값을 계산하려는데 이럴 수가, 그녀들은 이미 매장 밖으로 나와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계산대는 보이지 않고, 출입구도 분간키 어려운 북새통 안을 다시 찾아 들어갈 수도 없고, 기차 시간은 임박했다. 거기에 천방지축이던 나 이였음이라.
우왕좌왕, 결국엔 동대구역으로 직행하기에 급급하고 말았다. ‘세미 롱’의 파마머리가 어깨너머로 남실대는 그녀의 손엔 샴푸와 린스 세트가, 쓴 커피 맛이 기차다고 하던 친구의 손에는 커피와 프림 세트가 다정히 들려진 채다. 기차에 올라서야 이 황당한 사건에 실감이 났다. 그러면서 마음고생은 잠시, 발을 구르고 눈물을 찔끔대며 터져 나오는 웃음이라니. 그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커피 한 통 더 갖고 올 걸 그랬다며 한술 더하는 친구와 박장대소까지…….
대형 백화점 초창기에 철없는 아가씨들의 해프닝이긴 하다. 그렇더라도 사방이 불빛으로 대명천지인 공간에서 버젓이 취한 장물일 수도 있겠다. 뒤늦게 공짜 아닌 공짜 물건이 가책으로 남았으되, 무모하여 용감하고 거칠 것, 없던 그 나이만은 어느결에 그리운 그녀다.
인생은 그녀에게 공(空)으로 얻어지는 건 없다며 야박하게 가르쳐줬다. 물론 삶의 희비로 우여곡절인 세상살이에도 뜻밖의 우수리 같은 소소한 ‘덤’이 가끔 있긴 했다. 불완전한 사람이 그것마저 어쩔 수 있으랴. 아무튼, 그녀는 허위단심 ‘공짜는 노 땡큐’임을 설파한다. 어느 백화점에서 당당히 제 돈 내고 구매한 상품에 AS까지 보장받겠다고 주장하는 소비자가 그녀다. 그래야만 안심이 되고 편안하다. 한데 무례하지 않으면서 단호한 거절의 뜻으로 맞춤한 그녀의 ‘노 땡큐가 단지 공짜가 덤이라는 물건을 두고 한 말일까. 어쩜 영혼 없는 말과 웃음들이 마트의 상품처럼 널린 세상에, 대책없는 자신을 지키고 싶음인지도 모른다.
누군들 가능하면 뜻대로 우아하게 살고 싶지 않으리. 기왕 먹는 나이라도 그윽하게 나이 듦을 누구보다 소망하는 사람 또한 그녀다. 못마땅한가?
첫댓글
데이빗님 감사합니다.설명절 가족과더불어즐급고,행복하게 지내셨는지요. 늘건강하시길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