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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2022년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700리 종주이야기 (12)
퇴계 선생의 발자취, 경(敬)으로 따르다
2022.04.04~04.17.(14일간)
* [제12일] 4월 15일(금) 풍기관아 은행나무(풍기초교)→ 영주 두월리 (20km)
* [1569년 기사년 음력 3월 15일] 퇴계 선생의 귀향길
◎ 마지막 귀향 당시 퇴계선생은 영주(榮州)에서 사흘을 묵었다. 이곳에서 선생의 고향 예안까지는 하루 안에 갈 수 있는 거리인데, 그 연유가 무엇인지 자세하게 알 수는 없다. 당시 예안의 계상에 역병이 돌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피병하느라 일시 머무를 수도 있고, 선생의 첫 부인 ‘김해 허씨의 산소’와 아울러 처가의 전장(田莊)도 이곳에 있었으므로 며칠 지냈을 수도 있다. 선생의 문집이나 연보에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 영주의 이산면에는 ‘이산서원(伊山書院)’이 있다. 1558년, 이 고장 유림이 세운 이 서원의 요청을 받은 선생은 ‘이산서원 원규(院規)’를 지어 보냈는데, 이것은 이후 영남지방 각 곳에 세운 여러 서원의 원규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선생의 문인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의 후손들에 의하면, 선생이 영천(榮川, 영주의 옛 지명)을 지날 때마다 이산서원에 들러 이 고장 유생들과 강학하였다고 한다. 1570년 선생의 별세한 뒤, 이곳 유림들은 선생의 위패를 사당에 봉안(奉安)하였는데, 당시 박승임이 지은 봉안문에는 귀향하는 선생이 이산서원에서 제자들과 문답하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문구가 있다.
厥初經營 實稟栽鐫 처음 경영할 때 선생께 품의하여
記之規之 曲示諄詮 기문 받아 원규 삼으니, 곡진한 가르침이 교훈이 되도다.
卷懷言返 亦駐行韉 마음 거두어 고향으로 가실 때도 행차를 멈추시고
質議屢滿 誘掖拳拳 질의가 넘쳤는데, 정성스럽게 일러주고 인도하셨네.
이 중 뒷부분의 ‘고향으로 가실 때도 행차를 멈추시고 / 질의가 넘쳤는데, 정성스럽게 일러주고 인도하셨네’에서 귀향 중의 선생이 이산서원에 머물면서 유생들과 강학하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산서원은 선생 생존 시에 지어진 서원이고, 선생의 별세 뒤에 선생의 위패(位牌)를 가장 먼저 모신 서원이라는 점에서 매우 각별하다.
* [2022년 4월 15일 금요일] — 귀향길 재현단
오늘의 출행
풍기관아(터)에서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까지
▶ 오전 8시, 귀향길 재현단이 오늘의 일정을 위해 풍기초등학교(옛 풍기관아터) 은행나무 아래에 집결했다. 이틀간 비가 내리고 난 뒤, 하늘은 쾌청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4월의 햇살이 하늘에서 내린다. 오늘은 귀향길 여정 제12일째 되는 날, 풍기초등학교 은행나무를 출발하여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까지 20km를 걷는다.
‘재현단’은 옛 풍기관아터 잔디광장에 크게 원을 그리며 둘러섰다. 서로 마주보고 상읍례를 한 후, 김병일 원장은 오늘의 일정과 함께 인사말을 하고, 오늘 우정 참석하신 인사를 소개했다. 오늘은 특별히 김휘동(金暉東) 전 안동시장을 비롯한, 성함을 알 수 없는 명사도 몇 분 참석하였고, 안동에서 올라온 유림(儒林)과 후손방손 등이 다수 참여하였고, 귀향길 재현 행사를 취재하기 위하여 〈UCN 유림방송〉 이찬규 님도 참석하였다.
도산서원 이동신 별유사의 진행으로 〈도산십이곡〉 제11곡(후6곡 중 제5곡)을 스파트폰 반주음에 맞추어 다함께 노래 부르고, 준비운동까지 했다.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애 프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애 그치지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지 마고 만고상청(萬古常靑) 하리라
— 푸른 산은 어찌하여 언제나 푸르르며 흐르는 물은 또 어찌하여 항상 그치지 아니하는가? 여기에서 제시된 자연은 한결같은 그 무엇이다. 학문수양의 일관성(一貫性)을 드러내고 있는 비유적 대상이다. 우리도 (흐르는 물처럼) 그치지 말고 (푸른 산처럼) 변함없이 나아가리라. 청산(靑山)이 보여주는 한결같은 진리의 생동감과 유수(流水)가 보여주는 쉬지 않고 제 길을 가는 정진, 그것은 진리를 탐구하고 학문에 정진하는 삶이다.
풍기 남원천 둔치의 길
▶ 오전 8시 50분, 풍기초등학교(옛 풍기관아)를 출발했다. 오늘도 이한방 교수가 기수가 되어 앞장을 서고 의관을 갖춘 김병일 원장, 김휘동 전 안동시장을 비롯하여, 오늘 구간에 참여한 명사(名士)와 안동의 여러 인사들, 그리고 진병구, 이상천, 오상봉 님 등이 대열을 이루었다. 풍기관광호텔 앞 시내의 인도를 경유하여 ‘풍기인삼교’ 앞에서 남원천 둔치의 산책길로 내려섰다. 죽령의 산곡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남원천은 어제 재현단이 걸어온 죽령옛길이 이어진 하천이다.
눈부시게 청명한 날씨, 아침의 풍기 남원천 둔치의 산책로는 한적했다. … 돌아보니, 어제 우리가 넘어온 죽령을 중심으로 서쪽의 도솔봉과 그 동쪽으로 이어지는 연화봉-국망봉-비로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소백산 줄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장엄하게 펼쳐진 산맥을 배경으로 풍기(豊基)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 환하게 열린 남원천 둔치의 길을 지나, 오전 9시 45분, 팔각정과 여러 가지 조형물을 갖춘 소공원에 도착했다. 소공원에는 ‘인삼내음쉼터’라는 푯말이 있다. 길목에 ‘풍기읍 3km, 영주시청 10km’가 적힌 이정표도 있다. 재현단 행렬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휴식을 취했다. 저만큼 둔덕에는 군락을 이루고 있는 노란 개나리와 연분홍 산도화가 화사하게 피어있고 길목의 벚꽃은 시나브로 하얀 꽃잎을 흩뿌리고 있었다. 이곳은 풍기읍 동부리 남원천에 금계천(錦溪川)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 금계천 *
금선계곡 • 금선대 • 금선정
금계천(錦溪川)은 백두대간 소백산 최고봉인 비로봉 남쪽의 산곡, 풍기읍 삼가리에서 발원하여 삼가지(금계저수지)를 이루고 이어서 동양대 영주캠퍼스 앞을 지나 풍기읍 동부리에서 이곳 남원천에 합류한다. 소백산의 영봉 비로봉에서 남으로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금계저수지 아래 속칭 ‘장선마을’이 있다. 이 마을을 안고 약 1.5㎞에 걸쳐 형성된 계곡이 바로 ‘금선계곡(錦仙溪谷)’이다.
금계천 최상류 금선계곡은 소백산의 승지(勝地)로 퇴계가 사랑한 제자 황준량(黃俊良)이 공부하고 노닐던 곳이다. 금선계곡은 기암괴석의 골짜기와 노송이 우거져 빼어난 경관을 지니고 있다. 계곡 중간의 물가 절벽위에 ‘금선정(錦仙亭)’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주변이 경관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정자 아래에는 널찍한 반석이 있는데 이 고장 풍기의 대표적 유학자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이 ‘금선대(錦仙臺)’라 이름 하였다.
이후 1756년 부임한 풍기군수 송징계(宋徵啓)가 ‘錦仙臺’란 세 글자를 바위벽에 새겼으며, 황준량의 후손들이 여기에 ‘금선정(錦仙亭)’을 건립하였다. 금선정 서쪽 산 중턱에는 황준량이 학문을 연마하던 ‘금양정사’(錦陽精舍,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88호)가 있다.
금계(錦溪)는 생전에 금선정을 건립하지 못하였으나 계곡에 정자를 지을 곳을 ‘금선대’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금계는 정자 터를 잡아놓고 시를 지었다. ☞ 〈錦溪卜亭基〉(금계복정기, 금계에 정자터를 잡다) 《금계집》 외집 권6
尋源終日坐苔磯 심원종일좌태기 종일 근원을 찾다가 물가에 앉으니
壺裏乾坤隔翠微 호리건곤격취미 푸른 산 너머 바로 별천지이네.
物理靜觀皆得意 물리정관개득의 만물을 살펴보니 저마다 본성 얻어
我心隨處自忘機 아심수처자망기 내 마음 곳곳마다 저로 기심 잊었네.
— 금계는 정자(금선정) 지을 터를 잡기 위해 금선계곡을 오르내리며 고심하였다. 그러다가 이곳에 머물러 기심(機心)을 잊은 무념무상 상태에 들게 된다. 이는 퇴계가 도산서당의 천연대에서 하늘의 솔개와 물속의 물고기를 바라보면서 삼라만상의 이치를 이해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풍경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遊錦仙臺(유금선대)〉《금계집》 외집 권6
探勝襟懷洞八窓 탐승금회동팔창 승경 찾으니 팔방 창문 연 시심이 이는데
詩才何必借潘江 시재하필차반강 어찌 굳이 반악에게 시 짓는 재주를 빌리랴.
虹明澗瀑飛晴雪 홍명간폭비청설 무지개 드리운 폭포수에 물방울 날리고
錦擁煙花照石矼 금옹연화조석강 비단을 휘감은 봄꽃이 돌다리를 비추네
小白雲霞誰第一 소백운하수제일 소백산 운하가 어찌 제일 좋을 쏘냐
仙臺風月自無雙 선대풍월자무쌍 금선대 풍광과는 짝하지 못하리라.
爲披春服尋芳去 위피춘복심방거 봄옷을 지어 걸치고 꽃을 찾아가다가
倦倚松陰倒玉缸 권의송음도옥항 소나무 그늘에 쉬면서 술동이 기울이네.
— 아름다운 금선대 바위 위에 앉아보니 팔방의 창문을 활짝 연 듯한 시심이 절로 발동하였다. 그래서 굳이 반악(潘岳)의 시 짓는 재주를 빌린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다. ‘潘江’(반강)은 중국 서진(西晉) 시대의 시인 반악(潘岳, 247년~300년)을 가리킨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금계는 금선대에서 바라보이는 작은 폭포수와 아름다운 봄꽃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금선대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이 소백산 운하보다 더 빼어나다고 자부하고 있다.
금계 황준량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은 소백산 풍기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다. 일찍이 퇴계(退溪)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는데 문재가 아주 뛰어났다. 1537년(중종 32) 생원이 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관직에 나아가 1542년 성균관학유가 되었다. 1548년 공조좌랑에 재직 중 상을 당해 3년간 시묘한 뒤 1550년 전적에 복직되었다. 이어 호조좌랑으로 전직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했으며, 《중종실록》·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1년 경상도 감찰어사(慶尙道監察御史)로 임명되고, 이어 지평에 제수되었다.
그는 청렴한 선비의 표상이었다.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한 목민관이었다. 지방의 수령으로 나아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가는 곳마다 백성의 칭송이 자자했다. 신녕현감으로 있을 때 굶주린 백성을 잘 돌보아서 소생하게 하였다. 특히 1557년(명종12년)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5천 자가 넘는 상소(上疏)를 올려 명종 임금의 마음을 움직였고, 단양군민들은 이후 10년간 가혹한 공납과 세금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1560년 성주목사로 4년간 재임하면서 영봉서원(迎鳳書院)의 증수, 문묘의 중수, 그리고 공곡서당(孔谷書堂)·녹봉정사(鹿峰精舍) 등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금계는 목민관이 지켜야 할 네 가지 잠언을 ‘거관사잠(居官四箴)’이라 하여 새겨 뒷사람에게 남겼는데, 청렴(淸廉)·인자(仁慈)·공정(公正)·부지런함[勤勉])이 그것이다. 그는 당시 목민관의 사표였다. 우애가 돈독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평생을 스스로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퇴계 선생은 황준량에 대하여 학문적으로도 크게 기대하였다. 그러나 1563년 스승에 앞서 이 제자가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매우 상심하고 애통하여 직접 쓴 만사(輓詞)와 제문(祭文)을 써서 그 슬픔을 담았고, 장례 때에는 명정(銘旌)까지 손수 써서 제자의 영혼을 위로하였으며, 뒷날의 행장(行狀)까지 지었고, 그의 문집(文集)도 스승이 손수 간행하였으니,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었던 것이다.
황준량은 자식이 없어 아우 수량(遂良)의 아들로 양자(養子)를 삼았다. 풍기의 욱양서원(郁陽書院), 신녕의 백학서원에 제향 되었다. 풍기 금계촌의 평해 황씨 금계종가에서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저서로는 『금계집(錦溪集)』이 있다.
금계집(錦溪集)
… 퇴계는 안동 봉정사에서 《錦溪集》(금계집)을 교감하였다. 66세의 스승 퇴계(退溪)는 스스로 지은 금계에 대한 행장(行狀), 제문(祭文), 만시(輓詩)를 손수 다시 한번 점검하여 문집을 정리했다. 금계집(錦溪集)은 황준량(1517~1563)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584년에 간행한 시문집이다. 내집 5권, 외집 9권, 합 14권 5책. 목판본. 내집은 1584년(선조 17) 동생 수량(秀良)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말에 이산해(李山海)와 이광정(李光庭)의 발문이 있다. 규장각 도서와 장서각 도서에 있다.
내집은 권1∼3에 시 235수, 권4·5에 잡저 17편, 발 1편, 행장·제문 각 1편, 외집은 권 1∼6에 시 562수, 권7·8에 소 2편, 전 3편, 서(書) 19편, 잡저 26편, 제문 2편, 묘지명 2편, 대책 2편, 권9는 부록으로 행장 1편, 제문 5편, 반사 2수, 기문 2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집은 시(詩)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산해는 발문에서 그의 시는 성정(性情)에 근본을 두고 음률에 맞아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그 뜻이 심원하다고 평하였다. 서(書)는 스승인 이황(李滉)에게 보낸 것이 많으며, 대부분 유학·교육·학문 등에 관한 단편적인 의견들을 제시하고 있다.
내집의 「청혁양종소(請革兩宗疏)」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보우(普雨)를 등용해 불교의 부흥을 꾀하고,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켜 승과(僧科)를 시행하는 데 이르자, 그에 반대하는 내용의 상소문이다. 「여녹봉정사제생서(餘鹿峰精舍諸生書)」는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 권면하는 내용이다. 이밖에 상산사호(商山四皓)의 실존여부를 논변한 「사호유무변(四晧有無辨)」이 있다.
외집의 「단양진폐소(丹陽陳弊疏)」는 단양군수로 있을 때 군민의 실정을 보고한 것으로, 단양은 본래 원주의 속현인데 적을 잘 막아서 군으로 승격이 되었으나, 40호 밖에 되지 않으므로 부역과 세금을 경감해줄 것을 청한 내용이다. 「답퇴계선생논사칠변서(答退溪先生論四七辨書)」는 이황의 사칠논변 가운데 의문이 나는 곳을 지적, 논변한 것이다.
그밖에 형(刑), 인정(仁政), 군자의 학문 등을 논한 「책문(策問)」, 정전법(井田法)에 대해 의견을 피력한 「균전의(均田議)」, 『동국통감강목』을 찬진(撰進: 임금에게 책을 만들어 바침)하면서 그 내용을 설명한 「예조청찬동국통감강목전(禮曹請撰東國通鑑綱目箋)」 등이 있다.
장장 5km 서천(西川)의 긴 제방 길
영주시 안정면 내줄리—상줄리 그리고 영주시 상줄동
▶ 금계천을 받아들인 남원천은 이제 영주의 서천(西川)으로 불린다. 제방의 길이 영주시 영역(안정면 안심리)으로 접어든 것이다. 제방 길은 서천의 동쪽 제방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신안교를 건너면, 영주시 안정면사무소가 있는 신전리이다.
오전 10시 정각, 여기 신전리에서부터 길은 서천의 서쪽의 긴 제방 위로 이어진다. 신전리에서 안정면 내줄리 일원교 앞을 지나, 안정면 상줄리와 영주시 상줄동 제방을 지나면 36번 도로가 지나가는 서천대교(영주시 가흥동) 교각에까지 이른다. 왼쪽에는 서천이요, 오른쪽은 들판으로, 장장 5km의 제방 길이다. 청명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사월의 햇살을 받으며 걸어가는 제방 길, 참으로 멀고 지루한 여정이다. 그러나 이 길은 퇴계 선생이 고향으로 가시던 길이다.
▶ 오전 11시 30분, 드디어 가흥동 서천대교(西川大橋)에 이르렀다. 서천을 가로질러 가는 서천대교는 영주에서 봉화로 통하는 36번 국도의 교량이다. 직진하는 서천대교 교각 아래에는 좌측으로 서천을 건너는 다리가 있다. 이 다리[창진교]를 건너면 영주시 창진리이다. ― 서천대교 좌측(북쪽) 영주 창진리에는 죽계천(竹溪川)이 서천(西川)에 유입한다.
죽계천
영주 창진리에서 서천(西川)에 유입하는
소백산 국망봉의 산곡 배점리 초암사에서 발원한 ‘죽계천’은 순흥향교, 소수서원 앞을 지나 순흥(면)을 경유하여 흘러내려오다가, 영주시 안정면 동촌리에서 단산면 좌석리 소백산 (연화동)에서 발원하여 단산(면)을 경유하여 내려온 ‘사천’과 합류하여 이곳 창진리(서천대교) 앞에서 ‘서천’에 유입된다. 죽계천 상류에는 순흥지(順興池)가 있고 그 아래쪽에서 순흥향교(順興鄕校)와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자리잡고 있다.
회헌 안향
죽계 백운동에 최초의 서원을 건립하다
순흥(順興)은 고려시대 중국으로부터 유학을 도입한 안향(安珦)의 관향(貫鄕)이다. 그러한 연고로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을 배향하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우고 그 다음에 군수로 온 퇴계(退溪)가 사액을 상주(上奏)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을 받았다,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은 1286년(충렬왕 12)에 정동행성의 좌우사 낭중과 고려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었으며, 같은 해 왕을 따라 원(元)나라에 건너갔다. 연경(베이징)에서 처음으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기뻐하여 유학의 정통이라 하여 그 책을 베껴 쓰고, 또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돌아와서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주자를 숭배하여 그의 초상을 항상 벽에 걸어 두고,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의 회(晦)자를 따서 스스로 호를 회헌(晦軒)이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이것은 주자의 저서를 보고 거기에 심취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그를 우리나라에 맨 처음 주자학을 받아들인 ‘최초의 주자학자’라 보고 있다.
근재 안축의 죽계별곡
죽계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경기체가
고려 충숙왕 때, 안향의 후손인 근재(謹齋) 안축(安軸:1287~1348)은 순흥 죽계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죽계별곡〉을 지었다. 〈죽계별곡(竹溪別曲)〉은 고려 때 경기체가(景幾體歌) 형식으로 쓴 작품으로, 작가의 고향인 죽계 지방, 즉 지금의 경상북도 순흥면의 아름다운 산수와 미풍 속에서 흥에 젖어 있는 모습을 읊고 있다. 전 5연인데, 제1연은 소백산 남쪽에 위치한 죽계의 경관을, 2연은 죽계의 숙수루(宿水樓)·복전대(福田臺)·승림정자(僧林亭子) 등에서 취해 노는 모습을, 3연은 향교(鄕校)에서 학자의 제자들이 육경(六經)에 심취해 있는 정경을, 4연은 좋은 시절이 돌아와 꽃이 만개하는 모습을 보며 천리 밖에 왕을 그리는 신하의 정을, 5연은 꽃·방초·녹수(綠樹) 등이 어우러진 운월교광(雲月交光)의 경치를 읊었다.
고려 신흥 사대부의 자신감 넘치는 생활 정서가 담겨 있으며, 문학성이 뛰어나지 않지만 당시 한문체 가사에서 널리 유행했다고 한다. 경기체가〈관동별곡〉과 함께《근재집》에 실려 있다.
퇴계 이황의 풍기군수 약사
퇴계 연보에서 발췌
◦ 1548년 11월, 9개월간의 단양 군수에서 풍기 군수에 부임하였다.
◦ 1549년 1월에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지은 백운동서원 상향 축문과 진설도 및 홀기를 개정하였다. ◦ 2월 순흥향교에서 석전(釋奠, 선성(先聖)•선사(先師)에게 올리는 제사의식)을 올리고, ◦ 3월 백운동서원 곁 시냇가[죽계천]에 암석을 다듬어서 평대(平臺)를 만들어 송(松), 죽(竹), 백(柏)을 심고 취한대(翠寒臺)라 명명하였다. ◦ 4월 백운동서원 방문하면서, 풍기 동헌에 있는 대나무와 소나무를 옮겨 심고, 대나무를 옮겨 심은 후 48句의 〈군재이죽(郡齋移竹)〉 시(詩) 지었다.
◦ 1549년 4월 22일 백운동서원을 방문하여 제생(諸生)들에게 시(詩)를 지어 보였다.
◦ 4월 22일~26일까지 4박5일 동안 소백산(小白山)을 유람하고. ◦ 5월 5일 동헌에서 “소백산유록(小白山遊錄)”을 썼다.
◦ 9월 휴가를 받고 온계리 고향에 갔다. ◦ 10월 중형인 온계 이해를 죽령의 촉령대에서 전송하였다. ◦ 10월 21일 헌관으로 지진 해괴제를 올렸다. ◦ 10월 아들 준(寯)이 순흥향교에서 참강하였다. 그리고 10월 1차 사직상소 올리고, ◦ 12월 심통원(沈通源) 경상감사에게 백운동서원 사액을 상주하는 글을 올렸다. ◦ 12월 3차 사직상소 올렸다. ◦ 세 차례의 사임 상소 후 면직령이 내리기 전에 임소를 떠났다.(1550년 정월) ◦ 1550년 2월에 탈고신 2등의 처분을 받았다.◦ 학봉 김성일의 기록에 보면 “선생은 여가가 있을 때마다 서원을 방문하여 유생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곤 하셨다.” 고 적고 있다.
퇴계의 소백산 유람
소수서원 • 죽계천 • 초암사 • 석륜사 • 국망봉 • 비로암 • 금계천
퇴계는 풍기군수 재임 중 1549년 4월 22일~4월 26일까지 4박 5일 동안 소백산 유람하였다. 부석사 주지스님의 안내하고, 민서경, 민서경의 아들 민응기, 종수 스님과 몇 분의 스님, 종자 등이 배행했다.
퇴계는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에서 높고 험한 소백산을 오르는 뜻을 밝히고 있다. 퇴계는 소백산을 유학의 본령에 비유하고 있다. —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큰 유학자가 서로 이어져 출현 했지만 이 산을 방문하여 유람한 자의 수가 적고 유람기를 남긴 문헌도 드물다.(鴻儒碩士相踵而作 彬彬如也 則來遊者古今何限 紀述之可傳者 亦何止於是乎)’ 유학의 역사는 유구하지만 학통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산 절벽에 새긴 전각도 없고, 문구를 입으로 외는 선비도 없다.(山無崖刻 士無口誦)고 하여 유학에 뚜렷한 성취가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퇴계가 병약한 노구를 이끌고 철쭉이 만개한 소백산을 오른 것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조선의 유학자로서 사도의 학통을 확고한 반석에 올리기 위한 필사의 구도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퇴계에게 있어서 산(山)을 오르는 것은 학문의 묘리를 터득하는 과정이다. 그것을 시로 표현했다.〈讀書如遊山(독서여그유산, 글 읽기는 산을 유람함과 같다)이 그것이다.
讀書人說遊山似 독서인설유산사 사람들 말하길 글 읽기가 산 유람함과 같다지만
今見遊山似讀書 금견유산사독서 이제 보니 산 유람함이 글 읽기와 비슷하구나.
工力盡時元自下 공력진시원자하 공력을 다했을 땐 원래 스스로 내려오고
淺深得處摠由渠 천심득처총유거 깊고 얕음 아는 것 모두 저로부터 말미암네.
坐看雲起因知妙 좌간운기인지묘 앉아서 피어오르는 구름 보며 묘리를 알게 되고
行到源頭始覺初 행도원두시각초 발길이 근원에 이르러 비로소 처음을 깨닫네.
絶頂高尋勉公等 절정고심면공등 높이 절정을 찾아감 그대들에게 기대하며
老衰中輟愧深余 노쇠중철괴심여 늙어서 중도에 그친 나를 깊이 부끄러워하네.
○ 퇴계의 소백산 유산로(遊山路)는, 소수서원(1박) 출발→ 안간교→ 초암사→ 철암→ 명경암→ 석륜사(1박)→ 백운암→ 석름봉→ 국망봉→ 중백운암→ 석륜사(1박)→ 상가타→ 중가타→ 금당, 하가타→ 관음굴(1박)→ 박달현→ 소박달현→ 대박달현→ 비로사—비류암→ 욱금동으로 하산했다. 죽계천을 따라서 국망봉에 올라가서 하산은 비로사―금계천으로 내려왔다.
퇴계는 소백산을 유람하며 곳곳에 이름을 지었다. 주세붕이 초암사 앞의 암석을 백운대(白雲臺)라 명명했는데, 이를 ‘청운대(靑雲臺)’로 고쳤다. ‘산대바위’라는 속명을 ‘자하대(紫霞臺)’로 고치고 주변의 무명봉들을 ‘백학(白鶴)’, ‘백련(白蓮)’이라 이름 지었다. 상가타 부근의 폭포를 ‘죽암폭포(竹岩瀑布)’라고 하고, 계곡의 넓은 돌에 앉아 ‘비류암(飛流岩)’이라 명명했다.
이밖에도 소수서원 ‘취한대(翠寒臺)’, ‘송석대(松石臺)’ 등을 명명했다. ‘송석대(松石臺)’는 퇴계가 59세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풍기 부근에 큰 소나무가 있고 돌을 쌓아 축대를 만든 곳에서 쉬면서 송석대라 이름 지었다. 하지만 《영주지》에서는 ‘문순공(文純公, 퇴계)께서 정자(洪亭子)의 남쪽 소나무가 우거진 기슭을 보시고 자못 유정(幽靜)하여 쉴만한 곳 이라 하면서 길을 인도하는 사람을 시켜 대를 쌓으니 마침내 유명한 곳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석륜사 서쪽에 있는 ‘광풍대(光風臺)’에서 퇴계선생이 시를 지었다. 석륜사는 퇴계가 소백산 유람 중 국망봉 오르내리는 길에 두 번이나 유숙한 절이다.
美名感余衷 아름다운 이름에 마음이 감동하여
策杖尋古臺 지팡이 끌고 옛 대를 찿았노라
僧言周去後 스님말이 주신재(주세붕) 가신 뒤론
遊人莫往來 놀러 오는 사람이 없다고 하네
絶壁梯可升 벼랑이야 사다리로 오를 수 있고
荒榛翦可開 가시덤불은 베어내면 트이련만
祗恐光霽處 비 개이어 바람 맑은 곳에
不在南溟杯 바다를 퍼마실 잔이 없으니 어쩌나
欲問無極翁 좀 물어보리다. 무극옹이여
眞知竟誰哉 참으로 아는 사람이 정말 누구인지를
* 주신재(周愼齋) 시에 “북두칠성을 술잔으로 삼아 남해바다를 퍼마시리라”라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창진로]―가흥동 서천의 제방 도로
▶ 재현단은 36번 국도 서천대교 아래를 지나, 영주시 가흥동 아파트 군 앞의 제방도로[창진로]의 인도를 따라 걷는다. 왼쪽의 서천의 강안은 습지이고 오른쪽은 명성아파트—시영아파트가 이어진다.
서천교를 건너다
▶ 낮 12시 정각, 영주 가흥동 서부초등학교 앞 서부사거리에서 서천교를 건넜다. 영주동 인공폭포[서천폭포] 앞 소공원을 지났다. … 영주시 시내의 주택가 완만한 언덕의 도로를 따라 걷는다.
* * *
— 그런데 서천교를 건너자마자, 서천의 둔치를 오른쪽에 끼고 서천을 따라 내려가면 ‘영주교’를 지나 왼쪽 절벽 위에 ‘구학산’이 나온다. 서천이 내려다보이는 산록에 위치한 ‘구학공원’에는 영주의 유서 깊은 명소(名所)가 있다. 제민루와 삼판서고택이 그것이다.
제민루(濟民樓)
영주 서천의 영주교—둔치—구학공원
영주 서천의 산록에 ‘제민루’와 ‘삼판서고택’이 있다. 제민루(濟民樓)는 경상북도 영주시 선비로 181번길 56-1(가흥1동 산 9-8번지)에 있는 이층 누각으로, 조선시대에 의국, 의약소 역할을 하던 곳이다. 태백산, 소백산에서 자생하는 약재를 저장하면서, 조정(朝廷)에 약재를 공급하고, 고을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던 곳으로 오늘날의 보건소와 같은 역할을 했다. 양반 자제들에게 의술을 가르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퇴계 이황도 19세 때(1519년, 중종 14)) 이곳에 와 공부를 하고 의원(醫員) 일을 도우면서 6개월간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원래 제민루는 영주시 구성산 남쪽 기슭에 있었으나, 1961년 홍수로 인해 건물이 붕괴되면서, 1965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고, 2007년 노후된 누각을 개축(改築)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삼판서 고택(三判書古宅)
정운경·황유정·김담 세 판서가 살았던 집
제민루 앞에 있는 한옥이 바로 ‘삼판서고택’으로 정도전의 생가로 알려져 있다. '삼판서(三判書)'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세 분의 판서(判書)가 이 집에서 연이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판서는 이곳 영주 출신의 정운경, 황유정, 김담을 가리킨다.
이 고택의 첫 주인은 정운경(鄭云敬, 1305~1366)으로, 고려 공민왕 때 형부상서(조선시대 형조판서에 해당)를 지냈다. 바로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인 정도전(鄭道傳)의 아버지이다. 황유정(黃有定, 1343~?)은 조선 태조에서 태종에 걸쳐 공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는데, 정운경의 사위이다. 황유정은 정도전과는 처남매부 사이이다. 황유정은 다시 외손자인 이조판서 김담(金淡, 1416~1464)에게 이 집을 물려주었는데, 이때부터 김 판서의 후손들이 살았다.
이 고택에서는 세 분의 판서를 비롯하여 조선 개국 일등공신인 정도전, 사헌부 지평 황전(黃銓), 집현전 교리 김증(金曾) 등 수많은 학자와 명신들을 배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향각지의 많은 선비들과 교류한 조선시대 명문가로서 명성이 높았다.
원래 삼판서고택은 구성공원 남쪽(영주동 431번지)에 있었는데, 1961년 대홍수 때 기울어지게 되었는데 한국 전쟁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수할 여력이 없었다가 수년 후 철거되었다. 세월이 흘러 선비의 고장 영주의 상징인 삼판서고택을 복원하는 것이 세 분 판서와 정도전의 선비 정신을 잇는 것이라는 지역민들의 요청에 따라 2008년 10월 서천이 내려다보이는 이곳 구학공원에 복원되었다.
서천 앞 절벽에 구학폭포가 있다. 구학 폭포는 여러 개 돌을 쌓아 올려 만든 최고 높이 14m, 폭 40m 규모의 인공폭포로 주 폭포와 보조 폭포에서 물줄기가 연못으로 쏟아지는 장관을 연출한다.
영주 시가(市街)의 도로
▶ 12시, 퇴계 선생의 귀향길 재현단은 … 서천폭포(인공폭포)가 있는 서천교(西川橋) 사거리에서 도시의 옛길(두서길 19번길)을 이용하여 ‘영광중학교’를 지나고 나서, ‘영주근대문화의 거리’(-도로원표)로 들어섰다. 그리고 길목에 있는 ‘영주초등학교’에 들어가 교정의 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길을 건너 대동한의원 앞 ‘중앙로’를 경유하여 중앙약국 네거리에서 좌회전 ‘영주로’를 따라가다가 하망동 성당 앞을 경유, 12시 40분 영동선 철길을 지나 원당천 ‘용암교’를 건넜다.
이어서 언덕의 도로(이산로)를 넘어 ‘영주고등학교’ 앞을 지나고 나니, 935번 지방도로(영봉로) 동산고등학교 앞이다. 도로 건너편에 한국국제조리고등학교가 있다. … 오후 1시 15분, 영주의 충혼탑 옆에 있는 청운식당에 도착, 다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오후의 여정
(용상골-동창재 넘어 두월리 삼거리)
▶ 점심식사 후 오후 2시 15분, 오후의 일정에 돌입했다. 높다란 충혼탑이 서 있는 935번 지방도로, 453년 전 퇴계 선생이 가셨을 길은 따라 가는 여정이다. 지금은 포장된 2차선의 차도만 있고 인도가 없다. 이동신 별유사가 경봉(警棒)을 들고 앞장서서 차가 올 때마다 재현단 행렬의 안전을 도모했다.
완만한 고개를 넘어가니, 오후 2시 56분, 용상골 마을로 들어가는 작은 도로 입구에 ‘칠성루 / 휴계재사’와 ‘박봉산-동창재’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다. (박봉산) ‘동창재 길’은 빙 돌아가는 935번 도로를 질러가는 지름길이다.
용상골 팔각정의 도산십이곡
▶ 일행은 한적한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오후 3시 22분, 완만한 고개를 넘어가니 바로 용상골이다. 동네의 길목의 팔각정이 있어, 재현단은 정자 위에 올라가 다리를 풀었다. 권갑현 교수가 김병일 원장의 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여 퇴계 선생의 〈도산십이곡〉을 노래했다. 퇴계학진흥회에서 제작한 CD(정경찬 편곡)가 나오기 이전에 권 교수 나름으로 부른 곡이었다. 부드러운 봄바람 부는 정자에서 권 교수의 도산십이곡 열창은 재현단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칠성루(七星樓)와 휴계재사(休溪齋舍)
▶ 오후 3시 36분, 용상리를 지나 박봉산의 고개를 올라가는 길목, 좌측의 산록에 잘 다듬어진 묘원과 그 아래 고택이 시야에 들어왔다. 앞서 가던 이한방 교수가 직접 찾아가 둘러보고 왔다. 그곳은 용상리 마을길 입구의 표지석에 적힌 ‘칠성루(七星樓)’와 ‘휴계재사(休溪齋舍)’의 현장이었다.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은 옥천 전씨(沃川全氏)로 단종 때 상장군이었는데,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관직을 버리고 이곳 휴천(休川, 영주시 상망동)에 은거한 사람이다. 칠성루(七星樓)는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의 유덕을 추모하여 1631년(인조 9) 그의 5대손인 설월당(雪月堂) 전익희(全益禧)가 창건하였다. 휴계재사(休溪齋舍)는 산록에 모신 휴계공의 묘소를 모시기 위하여 그의 증손인 망일당(望日堂)이 1576년(선조 9)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동창재 ― 두월리 삼거리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 박봉산 넘어
▶ 4월의 맑은 햇살을 등으로 받으며,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 박봉산(389m) ‘동창재’를 넘었다. 이동신 별유사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차가 다니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사람이 다니지 않아서인지 길은 잡초에 묻혀있고, 고개를 넘어 내려가는 길은 아주 가팔랐다. 막바지 내려가는 길, 나무와 나무 사이로 내성천(乃城川)의 수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 오후 4시 15분,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 삼거리 주차장, 지원단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두월리 삼거리에 도착했다. 오늘의 ‘걷기 여정’은 여기까지이다. … 그런데 그곳에는 도포와 의관을 정제한 전 경상국립대 허권수 박사, 물빛 고운 한복을 차려 입은 경상대 학생처장 안미정 교수가 진주에서 올라와 귀향길 재현단과 합류했다.
▶ 귀향길 재현단은 버스 편으로 이동하여 이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자리하고 있는 퇴계선생의 정경부인 김해 허씨 묘소(墓所)를 찾아 참배하고, 이어서 석포리에 있는 이산서원(伊山書院)을 탐방한다.
퇴계 이황과 영주(榮州) 이야기
☞ 김태환 (영주향토사연구소 소장) 〈퇴계 이황과 영주(榮州)〉
영주(榮州)에는 퇴계(退溪)의 유적과 흔적들이 많아 있다. 퇴계의 영주에서의 첫 인연은 청년기 영주에서 수학(修學)을 시작으로 해서 혼인(婚姻), 임관(任官), 교육, 경향왕복행차(京鄕往復行次) 등으로 인해 곳곳에 그 흔적들을 남겼다. ☞ 이하의 내용은 영주향토사연구소 소장 김태환이 쓴 〈퇴계 이황과 영주(榮州)〉를 인용했다.[필자]
【19세】 ― 퇴계, 영천(榮川, 영주)의 의원(醫院)에서 공부하였다.
《퇴계연보》에서 퇴계의 영주관련 기록은 1519년(중종 14) 19세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선생이 약관일 때 여러 친구와 함께 영주의 의원(醫院)에서 공부하였다. 그때 진사 박승건(朴承建)이 아직 소년으로 『소학(小學)』을 배우고 있었는데, 선생의 몸가짐을 자세히 보더니 자신이 읽고 있는 《소학》과 합치하므로 "공은 일찍이 소학을 읽은 일이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선생은 웃으면서 "아니요" 하였다. — 정순목 《퇴계연보》 지식산업사, 1993
영주에 있는 의원에 가서 이업(肄業, 학문을 배우고 익힘)하다. (弱冠時 與諸友肄業于榮川醫院.....) — 권오봉 《퇴계선생연표》 여강출판사, 1989
《퇴계연보》를 보면, 퇴계가 처음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한 것은 6세에 이웃의 노인에게 천자문(千字文)을 수학한 것이 처음이다. 이후 12세에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에게 『논어(論語)』를 배웠다고 한다. 그 후 19세에 영주의 의원(醫院)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퇴계연보》에서 말하는 의원은 지금의 ‘제민루(濟民樓)’로 추정된다. 당시 지방의료기관이 확립된 것은 단종 즉위년인 1452년인데 이때 의원에는 각 도에서 교수관을 파견하고 계수관(界首官, 국도변에 있는 큰 고을 원)마다 의원을 설치하여 양반자제를 선발하여 의서를 교육하던 기관이다.
청년 퇴계가 영주의 의원에서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몸이 약한 그가 당시로서는 장수라 할 수 있는 70수까지 누렸다든가, ‘활인심방’과 같은 도인법을 공부하였다는 것, 또한 매사에 규칙적이고 위생적인 건강관리를 생활화하였다는 점들을 살펴볼 때 「영주 의원」에서의 교육은 퇴계의 삶에서 특기할 사항이다. 이후에도 퇴계는 영주의 의원에서 전별모임을 가지고 손자인 안도(安道)를 보내 의학을 강습(講習)받게 하였다.
이미 퇴계가(退溪家)와 영주의 연비연사(緣臂緣査,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친척이나 인척)는 선대로부터 결연(結緣)되었고 퇴계와 그 아들 준(寯), 손자 안도(安道)가 영주의 의원(醫院)에서 지내면서 수학(修學)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퇴계 자신도 혼인(婚姻)을 통해 그러한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이후 풍기 군수(豊基郡守)로 재임(在任)해 비록 1년을 채우지는 않았지만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만드는 등 치적을 남겼다. 또한 당시 영주 군수이던 안상(安瑺)과 제현(諸賢)들이 영천(榮川, 영주) 최초의 서원인 이산서원(伊山書院)을 건립할 때 많은 자문을 해주는 등 이산서원 건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퇴계는 이산서원이 건립된 후 서원의 기문(記文)과 편액을 쓰고, 우리나라 서원 원규(院規)의 기본이된 ‘이산원규(伊山院規)’를 짓기도 했다. 이밖에도 퇴계는 소수서원의 유풍(儒風)을 크게 진작시켰으며 영주지역에 많은 급문제현(及門諸賢)들을 배출시켰다.
【20세】 ― 퇴계, 소백산에서 《주역(周易)》을 읽고 그 뜻을 강구하며 침식을 잊다
허목(許穆)의 《미수기언(眉叟記言)》에 의하면, 「하루는 선생께서 소백산에서 《주역(周易)》을 읽고 있었는데 어떤 늙은 스님이 구두점을 바로잡아주기를 매우 자세히 하였다. 선생께서 그 사람이 정허암(鄭虛庵, 정희량) 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스님은 주역을 아십니까?” 하였더니 그 스님은 “잘 모릅니다.” 하였다. 재차 묻되 “그대는 정 허암을 아십니까?” 하니 “잘은 모르지만 그 사람의 이름은 들어서 알고 그의 행적도 대강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선생께서 “허암(虛庵)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였더니 스님이 대답하기를 “정 아무개는 여막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였으니 불효이고, 군명을 어기면서 도망을 쳤으니 불충입니다. 불효와 불충의 죄는 무엇보다 큰 것인데 어떻게 무슨 면목으로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이윽고 인사를 하고 가버리니 그가 간곳을 알 수 없었다.」라 하였다.
선생의 수록 가운데 ‘허암(虛庵)이 집의 벽속에다 사초(史草)를 감추어 두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만약 소백산에서 『주역』을 읽고 있을 때 늙은 스님과의 문답이 있었다면 이 일에 관하여서도 약간의 언급이 있었을 것이다. 위의 일의 사실여부는 준신(準信)할수 없으나 다만 여기에 첨가하여 둘뿐이다. — 이야순 《퇴계선생 연보보유(退溪先生年譜補遺)》 1807년
이 글은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 퇴계의 9대손)이 1807년(순조 8)에 쓴 《퇴계선생 연보보유(退溪先生年譜補遺)》의 20세에 실린 내용이다. 이야순(李野淳)은 *성호 이익의 글을 준신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성호 또한 이글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19세 때의 영주 의원 공부와 20세 때(1520년)의 소백산에서의 주역공부, 21세 때의 혼례 등 퇴계에게 있어서 젊은 시절 영주는 남다른 곳임에는 분명했던 것 같다. ☞ (문맥으로 보아, * 성호 이익은 ‘미수 허목’을 잘못 쓴 듯하다 [필자주])
후에 퇴계는 월천(月川) 조목(趙穆)에게 준 편지에서 “내가 젊을 때 망령되게 뜻한바 있었으나 학문하는 방법에 어두워 공연히 지나치게 각고하였으므로 몸이 파리하게 되는 병을 얻었다.” 고하였다.
퇴계는 《주역(周易)》을 이곳 소백산 어느 자락에서 읽고 그 뜻을 연구하며 잠자고 먹는 것도 잊어버렸다. 이로부터 건강을 해쳐서 오랫동안 질병에 시달렸다. 이렇듯 영주는 퇴계 학문의 기초가 형성되는데 큰 역할을 한 곳으로 볼 수 있다.
* * * * * * * * * * * * * *
☞ 그런데, 권오봉 교수는 《퇴계선생일대기》에서, ‘… 19세 때는 영주 의원에 가서 의학강습을 받았다’고 하고, ‘20세 때는 용두산 용수사에서 역학공부를 몰두하였고 …’ 라고 하여, 퇴계의 역학공부가 ‘소백산’이 아니라 ‘용두산 용수사’라고 밝히고 있다. — 권오봉 《퇴계선생일대기》 (교육과학사, 2012) p.21
☞ 정석태 교수가 편저한 《퇴계선생년표월일조록·1》에서 ‘… 선생이 소백산에서 주역을 읽었다. …’ 이하의 글은 경신년(1520년, 퇴계 20세)의 일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빼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고 고증(古證)하고 있다 — 鄭錫胎 편저 《退溪先生年表月日條錄·1》(퇴계학연구총서 제3집) (사단법인 퇴계학연구원, 2001) p.66
【21세】 ― 퇴계, 영주의 김해 허씨 부인에게 장가를 들다.
퇴계는 21세인 1521년 영주 초곡(草谷, 사일, 푸실) 출신인 김해 허씨인 진사(進士) 묵재(黙齋) 허찬 (許瓚, 1481~1535, 1501년 진사)의 맏따님(퇴계와 동갑)에게 장가를 들었다.
처 외조부는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 으로 그는 2녀만 두었는데, 김해 허씨 허찬(許瓚)은 그의 맏사위로 의령(宜寧)에서 영주 초곡(草谷)으로 옮겨와 살면서 처부모를 봉양했다. 이런 연유로 허씨 부인은 영주의 초곡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퇴계의 처조부는 예촌(禮村) 허원보(許元輔)인데 소과를 거친 선비로 고성에서 의령으로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이다. 그는 의령의 가례(嘉禮)마을에 있는 백암산수가 마음에 들어 그곳에 정착한 후 정자를 지어 김일손(金馹孫), 김굉필(金宏弼), 문경동, 김영(金瑛) 등과 교류하면서 시를 읽고 학문을 강론했다.
퇴계의 장인인 묵재(黙齋) 허찬(許瓚)은 바로 허원보의 둘째 아들이었다. 허찬이 문경동(文敬仝)의 사위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허원보와 문경동의 교분 때문이었다. 또한 퇴계가 허찬의 사위가 되었던 것은 처 외조부인 창계 문경동과 숙부인 송재 이우와의 친분 때문이었다. 그래서 창계는 외손녀인 허씨 부인을 퇴계에게 시집을 보내게 되었다.
청풍 군수를 지낸 창계 문경동은 살림이 넉넉하였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의 재산을 사위인 허찬(許瓚)에게 물려주었다. 허찬의 재산 역시 의령과 영주에 산재하였으므로 매우 부유하였다.(『언행록』권 1) 허찬의 묘는 경남 의령읍 소지동에 있고 외손자 채(寀, 퇴계의 둘째아들)와 아들 사렴(士廉)의 묘도 함께 있다. 이는 허찬이 죽은 후 퇴계의 처가는 영주에서 의령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허찬이 죽은(1535년 12월 29일) 뒤 다음해인 1536년 8월 퇴계가 의령처가에 가서 허찬의 영정에 곡(哭)을 했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허씨 부인은 1522년 10월 18일 맏아들 준(寯)을 출생하고, 1527년 11월 차남 채(寀)를 낳고 한 달 후 향년 27세에 돌아가셨다. 허씨 부인은 2남(준과 채)을 두었는데, 준(寯)의 아들은 안도(안도, 상계파), 순도(의인파), 영도(하계파)이다.
퇴계는 3년 후인 1530년 권질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퇴계는 자주 처가인 영천[영주]의 초곡에 들렀는데 퇴계의 초곡(草谷)에 대한 시 한편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일이 있어 곧 서울로 돌아갈제 영천(榮川)에 이르러 병을 얻어 푸실(草谷) 밭집에서 묵다.(以事當還都至榮川病發輟行 草谷田舍)》
少日書紳服訂頑 젊을 때 명심하여 정완(訂頑)을 일삼더니
至今慒學但慙顔 여태껏 배움 아득 얼굴빛만 부끄러워라
狂奔幸脫天里險 겹겹이 험한 곳은 행여나 벗었지만
靜退纔嘗一味閒 잠자코 물러오니 한가한 맛 보았구나
羈鳥有時依樹木 얽맨 새도 이따금은 짙은 숲을 의지하고
野僧隨處著雲山 들의 스님은 곳을 따라 구름에 몸을 붙인다
後園化萼猶爭笑 뒷동산 꽃 봉오리 오히려 웃음 짓되
何必區區病始還 어찌 그리 구구히도 병들어야 돌아오는가
* ‘정완(訂頑)’은 ‘완고함을 바로 잡는다’는 뜻
정경부인 김해 허씨 묘소의 고유제
퇴계 선생과 허씨 부인
◎ 퇴계 선생은 21세인 1521년 영주 초곡(草谷, 푸실)의 김해 허씨, 진사(進士) 묵재(黙齋) 허찬(許瓚, 1481~1535)의 맏따님에게 장가를 들었다. 허씨 부인은 공교롭게도 퇴계 선생과 생년월일이 같다고 한다. 허씨 부인(許氏夫人)은 1522년 10월 18일 맏아들 준(寯)을 출생하고, 1527년 11월 차남 채(寀)를 낳고 한 달 후 향년 27세에 돌아가셨다. ― 허씨 부인은 준과 채 두 아들 두었는데, 당시 장남 준은 다섯 살이고 차남 채는 태어난지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이었다. 준(寯)의 아들은 안도(安道, 상계파), 순도(純道, 의인파), 영도(詠道, 하계파)이다. 허씨 부인은 훗날 선생의 품계를 따라서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되었다.
정경부인 허씨 묘소의 고유제
▶ 퇴계 선생의 초취부인 김해 허씨의 묘소(墓所)는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사금마을에 있다. … 귀향길 재현단 일행은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산소(山所)에 올라갔다. …
묘소 바로 앞에 ‘貞敬夫人金海許氏之墓’(정경부인김해허씨지묘)라 새긴 비석이 있고 그 앞의 상석에는 이미 제물(祭物)을 진설해 놓았다. 봉긋하고 장중한 봉분 산소에는 연분홍 철쭉 한 그루가 소복히 피어 있었다. 오늘 풍기관아터에서부터 걸어온 김병일 원장을 비롯한 재현단의 인사들 외에, 전 안동문화원장 이동수 박사, 도산서원 별유사 이태원 님, 서울의 이중환 님 등 선생의 후손방손들을 비롯하여 김휘동 전 안동시장 등 외부의 저명인사 등 많은 분들이 산소에 모였다. 특히 진주에서 전 경상국립대 허권수 박사와 경상대 학생처장 안미정 교수, 서울에서 정학섭 전북대 명예교수 등이 자리하였다.
▶ 정경부인 허씨 부인 묘소의 고유제(告由祭)는 한국국학진흥원 권갑현 교수의 집례로 진행되었다. 도산서원 참공부모임의 멤버인 허권수 박사는 오늘 고유제의 초헌관으로 첫잔을 올리고, 아헌관은 박원재 님, 종헌관으로 경상대 안미정 교수가 잔을 올렸다. 실재(實齋) 허권수(許捲洙) 박사가 짓고, 안미정 교수를 대표로 하는 고유문(告由文, 한문 원문)은 문영동 교수가 정중하게 독송하였다. 이날 고유제의 알자(謁者)는 이동걸 님, 찬인(贊引)은 이동채 님, 봉향(奉香)은 이상천 님, 봉로(奉爐)는 진현천 님, 전작(奠爵)에 이원봉 님, 봉작(奉爵)에 이동신 님, 진설(陳設)에 오상수, 오상봉 님이 역할을 맡아, 정성으로 제(祭)를 올렸다. 귀향길 재현단과 고유제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엄숙한 마음으로 참례했다.
▶ 절차에 따라 고유제를 정중하게 올린 후, 산소 앞에 자리를 마련하여 음복(飮福)을 나누었는데, 음식을 들기 전에 허권수 박사가 스스로 찬한 한문 고유문(告由文)을 우리말로 번역한 내용을 조용히 읽어 내렸다. 정경부인에 대한 추모(追慕)의 정을 모두가 공유하는 의미에서, 제례 중에는 엎드려 한문 고유문을 독송하였으므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다시 우리말로 풀어서 들려준 것이다. 참으로 감동적인 내용이었다.
2022 퇴계선생 귀향길 정경부인 묘소 고유문
遵行退溪先生歸鄕之路 行過貞敬夫人佳城時 告由文
퇴계선생 귀향길을 따라오다가 정경부인의 묘역을 지날 때의 고유문
維歲次壬寅三月甲申朔 유세차 임인(2022)년 삼월 갑신삭
十五日戊戌慶尙國立大學校 십오일 무술에 경상국립대학교
學生處長安美貞敢昭告于 학생처장 안미정은,
先師退陶李先生貞敬夫人 선사 퇴도 이 선생의 정경부인 김해 허씨의
金海許氏之靈. 존령에게 감히 밝게 고하나이다.
伏以 엎드려 생각하나이다.
金官許門(금관허문) 김해 허씨의 집안에,
有女貞淑(유녀정숙) 곧고 착한 따님 있었나니,
嫺雅有儀(한아유의) 얌전하고 고상하여 법도가 있어,
君子好匹(군자호필) 군자의 좋은 배필이 될 만했습니다.
天定嘉緣(천정가연) 하늘이 아름다운 인연 정해 주었나니,
良人是孰(양인시숙) 훌륭한 신랑감은 누구였습니까?
溫惠李郞(온혜리랑) 온혜 땅 이씨 집안의 낭군,
身修學熟(신수학숙) 몸은 수양 되었고 학문은 숙성하였습니다.
生年旣同(생년기동) 태어난 해가 이미 같은데,
月日亦埒(월일역랄) 달과 날까지도 같았습니다.
普天之下(보천지하) 넓은 하늘 아래서,
斯緣可覓(사연가멱) 이런 인연 찾을 수 있겠습니까?
相敬相和(상경상화) 서로 공경하고 서로 화합하여,
無比琴瑟(무비금슬) 비할 데 없을 정도로 금슬이 좋았습니다.
內助浹洽(내조협흡) 충분히 내조하였기에,
無憂治學(무우치학)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嚴霜酷襲(엄상혹습) 차가운 서리 매섭게 덮쳐 와,
馨蘭倏折(형란숙절) 향기로운 난초 갑자기 꺾였습니다.
天與何豐(천여하풍) 하늘은 어찌 하여 풍부한 자질 주었으면서,
天壽何嗇(천수하색) 수명은 어찌 그리 아끼셨는지요?
茫茫蒼天(망망창천) 아련한 푸른 하늘에,
何理欲質(하리욕질) 이 무슨 이치인지 묻고자 하나이다.
先生悵酸(선생창산) 선생의 슬프고 쓰라린 마음,
可推而測(가추이측) 미루어 짐작이 되나이다.
往來京陶(왕래경도) 서울과 도산을 오가시면,
程經墓域(정경묘역) 길이 이 묘역 지나게 되어 있습니다.
婦家仍留(부가잉류) 처가가 그대로 남아 있어,
顧念無斁(고념무두) 돌보아 생각하는 것 줄지 않았습니다.
未艾之情(미애지정) 다하지 못 한 정이야,
難表筆舌(난표필설) 붓이나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至情無文(지정무문) ‘지극한 심정은 글로 표현할 수 없다’는
古語不忒(고어부특) 옛말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遵先生路(준선생로) 선생 가시던 길 따라 가다보니,
今歲亦歷(금세준력) 올해도 묘소 지나게 되었습니다.
拜展佳城(배전가성) 절하고 살피고서,
奠告由式(전고유식) 예법에 맞추어 음식 드리고 고유하나이다.
夫婦良範(부부양범) 부부간의 좋은 법도,
於斯可學(어사가학) 여기서 배울 수 있습니다.
降格賜誨(강격사회) 강림하시어 가르침을 내려 주시면,
敬承療俗(경승료속) 경건하게 받들어 풍속을 고치겠나이다.
先生婦裔 許捲洙 謹製 (선생부예 허권수 근제) 선생 부인의 후예 허권수 삼가 짓습니다.
퇴계(退溪)와 영주의 혼인맥(婚姻脈)
퇴계가(退溪家)와 영주 사족들과의 혼인으로 이어진 인맥(姻脈)을 살펴보면, 먼저 퇴계의 처 외조부인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은 딸만 둘을 두었는데, 맏딸은 진사 허찬(許瓚)에게 출가시켰는데 허찬이 곧 퇴계의 장인이다. 둘째딸은 인동 장씨 생원 장응신(張應臣)에게 출가시켰다. 그러므로 장응신은 퇴계의 처 이모부가 된다. 장응신의 아들 과재(果齋) 장수희(張壽禧)는 처이종(妻姨從)이면서 퇴계의 문인이다.
처 외조부인 통훈대부성균관사성 창계(滄溪) 문공(文公, 文敬仝)의 묘소는 허씨 부인 묘소의 아래쪽에 있다.
퇴계 선생이 쓴 창계(滄溪) 문공(文公, 文敬仝)의 묘갈명(墓碣銘)의 일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공의 사람 됨됨이는 모습이 보통 사람과는 달라 허심탄회하고 마음이 활달하여 구속됨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과의 처신에는 경계를 만들지 않고 거리낌 없는 말과 익살로 일찍이 세무(世務)에는 유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정(事情)에 어둡다고 여겼으므로, 평생토록 여기에 연좌되어 침체되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글짓기를 잘하였으며 더욱 사부(詞賦)에 능하여 과거를 보는 유생이었을 때는 이르는 곳마다 장중(場中)에서 제일 뛰어났으므로, 그가 지은 것을 후생(後生)들이 다투어 전습(傳習)하였다.”
“… 배위(配位)는 평해 황씨(平海黃氏)로 건공장군(建功將軍) 황태손(黃兌孫)의 딸이다. 2녀를 낳아서 맏이는 바로 진사(進士) 허 공(許公, 허찬(許瓚))에게, 다음은 생원 장응신(張應臣)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진사의 2남은 진사 허사렴(許士廉)과 허사언(許士彦)이며, 2녀는 공조참판(工曹參判) 이황(李滉)과 충의위(忠義衛) 김진(金震)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생원[장응신]의 3남은 장윤희(張胤禧), 장순희(張順禧), 장수희(張壽禧)이고, 2녀는 울진 현령 (蔚珍縣令) 김사문(金士文)과 습독(習讀) 이효충(李孝忠)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선성 김씨 김사문(金士文)은 마음을 나누는 친구이자 장응신의 사위로 퇴계와는 처서종(妻婿從) 동서이다. 따라서 김사문의 아들인 백암 김륵(金玏)은 퇴계의 처제종질(妻梯從姪)이 된다. 퇴계의 제자이다.
퇴계의 처남인 진사 허사렴(許士廉)은 딸만 둘을 두었는데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맏아들인 박록(朴漉)을 사위로 맞았다. 소고는 퇴계의 문인이기도 하면서 처남의 사돈(査頓)이기도 하다.
죽유(竹牖) 오운(吳澐)은 퇴계의 종자형(從姊兄) 오언의(吳彦毅)의 손자이다. 죽유 또한 진사 허사렴의 여서(女婿)로서 초년과 만년에 영주의 초곡(草谷, 푸실)에서 살았다. 이런 이유로 죽유 오운(吳澐)은 허씨 부인의 묘갈명을 썼다. 오운(吳澐)이 처고모를 위해 쓴 묘비명에 허씨 부인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 선생은 스물한 살 때 허씨 부인에게 장가를 드셨는데 서로 손님같이 경대를 했다. 평소 거처할 때와 서로 대화를 주고받을 때 보면 사이가 좋지 않은 것같이 보였다. 처음에는 누가 보든지 금슬이 좋지 않은 듯 의심을 하지만 오래 지내보면 부부의 두터운 정을 알게 된다.’
― ‘경대(敬待)’란 ‘공경하여 대우한다’는 말이다. 부인을 손님처럼 공경하여 대우하는 모습[相敬如賓]은 퇴계가 제자와 손자에게도 언급한 적이 있다. 이를 통해 퇴계 부부가 6년 동안 살아온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듯하다. — 황상희 집필, 이광호 외 지음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푸른역사, 2021.) p.253
또 퇴계의 백씨(伯氏, 맏형) 이잠(李潛)의 딸은 문수의 만방리의 생원 민시원(閔蓍元)의 질녀서(姪女婿)이고, 민응기(閔應祺), 민응록(閔應祿)은 종외손(從外孫)이며 퇴계의 문인이다. 퇴계의 형인 온계(溫溪) 이해(李瀣) 또한 이산의 연안 김씨인 김복흥(金復興)의 사위이기도 하다.
또 고령 박씨 박려(朴欐)는 퇴계(退溪)의 손서(孫壻)이고, 그의 부친 박대령(朴大齡)은 친구간이다. 이와 함께 옥천 전씨 전응방(全應房), 전응벽(全應壁), 전응삼(全應參)은 형제간인데 퇴계와는 외계(外系)로 8촌간이었다.
이산서원(伊山書院)
선생의 위패 앞에 귀향길 재현을 고유하다
▶ 정경부인 김해 허씨 부인의 묘소에서 고유제를 올리고, 일행은 내성천 다리 건너 이산면 석포리에 위치한 ‘이산서원(伊山書院)’을 탐방했다. 이산서원은 건립부터 강학에 이르기까지 퇴계선생의 손길이 들어간 곳이기에 아주 특별한 곳이다. 서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의관을 갖춘 서원의 관계자 여러 분이 서원의 지도문 앞까지 나와서 김병일 원장을 비롯한 재현단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
이산서원(伊山書院)은 영주의 첫 서원으로 1558년(명종 13)에 군수 안상(安瑺)이 창건하였으며, 1572년(선조5) 사당을 세워, 퇴계 이황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1574년(선조 7)에 사액을 받았다. 예로부터 영주는 문예를 숭상하는 기운이 높았던 곳으로, 이곳 이산리에는 선비양성을 위한 기금이 약간 마련되어 있었으나, 관사(館舍)가 없어서 선비들이모일 장소가 없었다. 마침, 새로 부임한 군수 안상(安瑺)이 인재양성, 교학부흥에 뜻이 있어, 선비들의 뜻을 수렴하여 학사(學舍)를 건립하니, 이때 경비나 노역을 일체 민간에게 부담시키지 않아, 안 군수는 마을 주민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퇴계 선생은 이 서원에 대해 손수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를 쓰고, 원생들이 지켜야 할 행동지침과 공부하는 방법, 학문의 목표 등을 소상하게 담은 원규(院規)를 함께 만들어주었다. 1559년 찬한 이산서원 원규는 우리나라 서원 원규의 효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원 운영의 정형화를 제시한 것으로 전국적인 전범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퇴계 선생은 주 건물인 경지당(敬止堂)을 비롯, 동재인 성정재(誠正齋), 서재인 진수재(進修齋), 관물대(觀物臺), 지도문(志道門) 등 이름도 손수 붙였다. 거기에다 이산서원은 퇴계학문을 집약하는 성학십도(聖學十圖)의 판각을 보관하고 있었던 서원으로 더욱 유명하다.
이산서원은 1871년 훼철되었다가 1996년에 강당을 다시 세우고 2021년 예전 규모로 복원하면서 퇴계선생의 문인인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1517~1586)과 백암(栢巖) 김륵(金玏, 1540~1616)을 종향하였다.
▶ 오늘 서원에 당도해 보니, 서원의 정문인 지도문 밖 좌측에 이층 다락 형태의 ‘관물대(觀物臺)’가 있다. 정문인 ‘지도문(志道門)’에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경지당(敬止堂)’이 자리하고 있으며, 널따란 마당을 가운데 두고 동재인 ‘성정재(誠正齋)’와 서재인 ‘진수재(進修齋)’가 마주 보고 있다. 사묘는 강당 우측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밖에도 전 영주군수 금의(琴儀)가 창건하여 어린이들을 가르치던 양정당(養正堂)을 학사 옆에 옮겨 세웠다.
▶ 우리 귀향길 재현단 일행은 사묘(祠廟)에 모셔진 퇴계선생의 위패—‘退陶李先生’(퇴도이선생) 앞에 부복(仆伏)하고 고유(告由)했다.
오늘 이산서원 향사에 모인 모든 인사들이 경지당(敬止堂)에 모여 다과를 들며 토론하고 덕담을 나누었다. 먼저 이산서원 원장이 인사말과 환영을 말씀을 나누고, 재현단의 이끄는 김병일 원장의 퇴계선생 귀향길 재현 행사의 의의와 선생과 이산서원의 특별한 관계를 말씀하고, 이어 서원이 현대의 인성교육에 요람이 되어야 한다는 전 경상국립대 허권수 박사의 말씀이 이어졌다.
― 경지당(敬止堂) 강담회를 마치고 마당에 내려와 둥글게 서서 상읍례를 했다. 이렇게 하여 오늘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
… 서원의 정문 담장 외벽에 ‘伊山書院享祀奉行 / 2022.03.15.(양 04.15) 11:00’라고 쓴 플랜카드를 걸어놓았다. 작년 2021년에 복설 개원한 이산서원은 오늘 오전 11시에 올해 첫 향사를 거행한 것이다. 역사적인 날이다. ‘2022년—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재현단’이 이산서원에 당도하는 날, 새로 복설한 서원에서 향사를 올렸으니 참으로 오묘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오늘 오전에는 이산서원이 자체로 향사를 했다면 오후에는 퇴계 선생을 그리며 걸어온 재현단이 향사를 했다.…♣ [계속]
* [퇴계집] 伊山書院記 退溪先生文集 卷之四十二 / 記
榮郡據小白之南。地靈而風美。號稱人才之淵藪。其俗尙文藝。尤好爲羣居肄業。名之曰居接。一境之士咸萃焉。亦有自他方負笈而來者。雖多不厭。皆官措供給。殆無闕歲。其來尙矣。…
소백산 남쪽 영주 고을은 그 땅이 신령하고 풍속이 아름다워 인재가 많은 곳으로 일컫는다. 이곳 풍속이 문예를 숭상하고 특히 여럿이 거처하면서 학업을 익히기를 좋아하니 그 명칭을 거접이라 하였다. 온 경내의 선비가 다 모여들고 다른 지방에서도 책을 끼고 오는 자가 있었다. 그 수가 많았으나 마다하지 않고 모두 관아에서 비용을 대서 빠뜨린 해가 없었으니, 그렇게 해온지가 벌써 오래다.
嘉靖甲寅冬。順興安侯瑺來莅是郡。勤謹職事。政通弊祛。尤以右文興學。激勸人才爲先務。郡之諸士以及父老相與謀曰。我侯。文成公之後也。觀其所以存諸中與夫施諸政事者。其能知治本。以不爽先志乃如此。吾鄕學舍之作。若以請於我侯。宜無不成者。時哉不可失也。遂以白侯。侯慨然曰。是固吾志。矧諸君之所以責我者如是。我何敢不力。乃卜基於郡之東。…
가정 갑인년(1554년) 겨울에 순흥 사또 안상이 이 고을에 부임하여 정무를 부지런하고 신중하게 처리함으로써 행정이 원활하고 폐단이 제거되었으며, 더욱 학문을 숭상하여 인재를 권장하는 것을 선무로 삼았다. 고을의 여러 선비와 부로가 함께 의논하기를 “우리 사또는 문성공(안향)의 후예이다. 그가 지닌 포부와 정무 처리를 보니, 그는 다스림의 근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선조의 뜻을 이와같이 계승하였으니, 우리 고을의 학사 건립을 우리 사또에게 청하면 성취하지 못할 리 없다. 기회를 잃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사또에게 말하였다. 이에 사또가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실로 나의 뜻이다. 더구나 여러분이 나에게 이렇게 청하니, 내 어찌 감히 힘쓰지 않으랴.” 하고 즉시 고을 동쪽에 터를 잡았다. …
侯於是。量事功。計徒役。辦需費。父老諸生。莫不感侯之義。出穀與物有差。俾士人全應璧,賓守儉,安彭壽等爲之監董。經始於戊午七月。歷四朔而功告訖。… 於是。立規約。定員額。增贍穀數百餘石。給良賤若干口。乃大會儒生。以落成焉。旣而咸曰。學則成矣。不可以無名與記。乃遣儒生張壽禧。來屬於滉。… 請因其本地之號而稍變之。名曰伊山書院。其正堂曰敬止。東齋曰誠正。西齋曰進修。門曰志道。臺曰觀物。庖廚庫藏。無一不具。自是。士之來遊者。無問於遠近。其至如歸。而無向來假容旋罷之患矣。
사또가 이에 공사를 계획하고 인부를 계산하고 비용를 마련하자, 부로와 제생들이 사또의 뜻에 감복하지 않는 자가 없어, 곡식과 물자를 냈다. 사인 전응벽, 빈수검, 안팽수 등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고 무오년(1558년) 7월에 시작하여 4개월이 지나 공사를 마쳤다. … 이에 규약을 정하고 원액을 정하여 수백여 섬의 곡식을 비축하고 양인과 천인 몇몇을 준 다음, 널리 유생을 모아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윽고 모두 말하기를 “학사가 이루어 졌으니 그 명칭과 기문이 없을 수 없다.” 하고 즉시 유생 장수희를 보내 나에게 부탁하였다. … 그 本地의 이름에 따라 약간 바꾸어 ‘이산서원’으로 정하게 하였다. 그 정당을 경지, 동재를 성정, 서재를 진수, 문을 지도, 대를 관물이라 하였는데, 주방과 창고 등 하나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이로부터 와서 공부하는 선비는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자기 집처럼 머물게 하여, 전일처럼 고을의 의원을 임시로 빌려 수용하다가 공부모임이 끝나면 곧바로 끝나는 걱정이 없게 되었다.
抑嘗聞之。人之有道也。無敎則近於禽獸。聖人有憂之。敎以人倫。…
또 일찍이 듣건대 사람에게 도리가 있는데 가르침이 없으면 곧 금수에 가깝기 때문에 성인이 이를 걱정하여 인륜을 가르쳤다.
然則今何所從事而可乎。本之五倫。而以窮理篤行爲學者。朱先生白鹿洞規也。志伊學顔。而誠明兩進。敬義偕立者。又其見於賦詠者然也。仁以傳道而欲濟斯民。張南軒所望於岳麓諸子者重矣。養其全於未發之前。察其幾於將發之際。善則擴而充之。惡則克而去之。又朱先生示夫石鼓諸生以下學之功者至矣。故於是幷取。以爲諸君誦焉。如使異日朝命。設山長。得鉅儒而倡敎。其所以爲敎者。亦不過是。而實具於諸君所性之中矣。尙何竢於他求哉。諸君其勉之。
嘉靖己未冬。眞城李滉。記。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오륜을 근본으로 삼아 이치를 궁구하고 행실을 돈독히 하여 학문을 하는 것은 주 선생(주희)의 백록동강규이다. 그리고 이윤을 바라보고 안연을 배워 성과 명을 아울러 기르고 경과 의를 함께 세우는 것은 또 그 시부를 노래한 데서 보인다. 인으로 도를 전하며 그 백성을 제도하고자 함은, 장남헌(장식)이 악록서원의 제자에게 크게 기대하던 바이다. 감정이 아직 생기기 전에 그 미발의 온전함을 기르고 감정이 드러날 때 그 기미를 살펴 선한 것을 확충하고 악한 것은 극복하여 제거하는 것은,또 주 선생이 석고서원의 제생들에게 하학의 공부로써 보인 것이 지극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취택하여 제군에게 강송하게 된다. 훗날 조정의 명으로 산장을 정하고 거유를 얻어 가르침을 연다하더라도 그 가르치는 방법은 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실로 제군들의 본성 안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어찌 다른 곳에서 구하기를 기대하랴. 제군들은 이에 힘쓸지어다.
가정 기미년(1559년) 겨울에 진성 이황은 쓴다. — 퇴계선생문집 권 42 /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