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열었다. 멀리 보이는 산의 나무들이 빛바랜 옷을
갈아 입고 서 있는 모습이, 내가 있는 발포니 창으로 살며시 몰려왔다.얇은 옷을 입고 있는 나의 몸은 찬기가
폐부를 뚫고 들어오자 움츠리고 두려워 한다. 잠시 서있는 창가에는 더욱 매서운 바람이 두팔에 머문다.
팔에 소름이 돋자 한기가 몰려 오고, 상념에 젖어 있던 나를 깨운 것은 휴대폰 진동이었다.
카톡 알림 문자가 도착 했나 보다. 휴대폰을 가지러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 커피 한잔을 내렸다.
쓴 커피가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 차가운 심장에 닿았다.
심장은 움찔 움찔 팔딱거리며 망각의 세계를 엿 보려 한다.
한참 동안 식은 커피잔을 바라보다 창문을 닫고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낙엽이 나무에서 떨어져, 시나브로 바람에 날리는 11월이 되면 그날의 붉은 장미는 향기로운 꽃으로
승화 되지 못하고, 시든 낙엽이 되어 어느 청소부의 비질에 쓸려 어디론가 목적지도 없이 스러졌다.
비에 젖어 쓸쓸 하게 길바닥에 버려진 낙엽은, 초라하고 비루먹은 말처럼 시들어
초점 없는 눈동자는 생기를 잃어 누구를 바라보는지 알 수 조차 없다.
그러나 그날의 선명했던 기억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눈앞에서 낡고 빛바란 사진첩에서 툭 튀어나와
나의 유년시절을 어두운 암실로 만들어 놓고 사라진다.
6살 꼬마 아이였던 나는 엄마를 따라 우물가에 갔다.
우리동네에 유일한 공동 우물은 동네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
그날 엄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기거하는 대문 옆 사랑방 까지 오셔서
내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셨다. "은주야 은주야?"
내가 입에 곶감을 물고 있어 얼른 대답을 못했는데, 전에 없이 엄마의 목소리에는
어떤 비장함마져 감돌았다. 내가 방문을 열며 엄마 얼굴을 보았다.
"왜 그래 엄마?
"은주야?"
"엄마가 부르는데 대답도 하지 않고 방에서 뭐하는 거냐?"
그날 난 엄마의 심각한 얼굴을 지금도, 잊지 못하는데 그때 엄마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무엇인가 무의식에 이끌리어 내 손을 우물로 이끌었는지 모른다.
우물가는 다른 날 보다 한산했다. 엄마는 가존들 점심 식사 준비를 하느라, 밭에서 막 따온 고추며 오이
가지등 푸성귀를 씻었다. 나는 엄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아빠에게 배운 ㄱ.ㄴ.ㄷ를 막대기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그때 엄마가 하얀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물었다.
"우리 은주 학교 가서 공부 잘해서 상도 타고 선생님께 칭찬 받는 모습 보고 싶다." 면서
하얀 찔레꽃처럼 맑은 미소를 지으셨다. 그때 엄마 나이는이제 겨우 25살, 볼에는 새색시 특유의 수줍음을 머금고 있었고 무거운 물항아리를 이고,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은 살찐 암송아지의 탄력 있는 엉덩이가 실룩거리며
꽃밭 위에 앉아, 꿀을 빨던 벌과 나비들의 시선을 붙잡아 매는 향기를 발산 했다.
농사꾼인 아빠를 만나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삼촌들의 도시락이며
빨래 수발을 드느라, 고왔던 처녀의 손은 물마를 새도 없이
거칠어 갔다. 남자와는 손 한번 잡지 못하던 시골 처녀인 엄마는
건너 마을 동갑내기 총각이 성실 하다는, 말을 듣고
아빠와 19살에 결혼해서 살림 밑천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던 첫딸인 나를 낳고 부부 금슬이 좋아, 동네 아낙들의 부러움을 사던 차에
아빠 닮은 사내 아이를 낳고 시부모의 극진한 사랑과 쌀 가마를 번쩍들어 나르던 남정네의 속 깊은
사랑을 누리다 병이 들었다. 낮에는 농사일로 고단 해도
밤이면 넓은 품에 안겨 세상 시름을 잊던 새댁이 몹쓸 병에 걸린 것은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농촌에 없는 도시의 대형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으면 지금의 나의 삶은 달라 졌을 것이다.
엄마의 폐결핵은 은 아버지의 무지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철이 든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날 엄마 옆에서 흙장난을 하던 나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산과 들에 찔레꽃이 하얀 꽃을 피우는 5월이 되면 찔레꽃 머리 위에서
윙윙 대는 벌들의 날개짓만 보아도 심장이 터질것 같아 길을 걷다 그대로 길에 주져 앉아 엉엉 운다.
엄마의 허상이 내게로 온 것처럼 심하게 앓는다. 엄마는 우물가에서 푸성귀를 씻어 바구니에 담고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고 이고, 한손으로는 나의 손을 잡으셨다.
엄마의 손은 따스하고 축축했다. 엄마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 나지 않지만 예쁜 엄마 옆에서
걷는게 좋아서 철부지처럼 웃으며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내손을 꼭 쥐고 걷던 엄마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것은 집을 불과 30미터 앞두고 였다.
엄마의 입에서는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엄마는 가슴을 쥐어 뜯으며 괴로워 했다.
"은주야? 얼른 외삼춘 외숙모 불러와."
"응, 엄마 왜 또 아파?"
나는 영문도 모르고,엄마가 넘어진 모습에 놀라 동네 어귀에 사는 외삼촌을 부르러 뛰었다.
어린마음에 엄마가 죽을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게 이상했지만, 외삼춘 집에 도착 했을때
들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마당을 들어서는 외삼촌 부부를 만났다.
외삼촌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이고 " 엄마가 엄마가 피피피." 여기 까지 말하고는
그만 마당에 주져 앉아 엉엉 울었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때, 엄마는 마루에 누워 있었는데
힘없이 축 늘어진 엄마 옆에서 3살 짜리 남동생이 엄마의 어깨를 흔들며 보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엄마는 나의 바람과 가족들의 애처러운 눈빛을 외면 한채 며칠뒤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엄마의 장례식은 날은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에 없다.
이모의 손을 잡고 서울이라는 곳으로 머나면 여행을 떠난것은, 엄마를 하늘로 보내 드린 그해 늦가을이었다.
이모는 엄마의 언니로 자식이 없었다. 이모부는 주한 미군이었는데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고 혼자 사시다, 엄마 없는 나를 불쌍히 여겨 아빠와 할아버지 할머니를 설득해서 서울에서 공부를 시키기 위해 나의 고향을 찾은거였다. 집을 떠날때 고모와 삼촌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셨고
아빠는 뚱한 얼굴로 작별 인사를 대신 했다.
마을을 떠날때 동네 어귀에는 들국화가 벌들을 유혹하고 있었는데,
노란 들국화를 따서 내머리에 꽂아 주시던 생각이 불현듯 떠올라 이모에게 말했다.
"이모? 이 국화꽃 꺾어도 되요?" 내가 물었다.
이모는 서울 색시의 새초롬한 표정으로
"왜, 꽃이 좋으니?"
이모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모의 말씨는 서울 말로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웠다.
"우리 은주가 꽃을 좋아 하는 모양이네."
"응, 꽃을 보니까 엄마 생각이 나요."
내가 시무룩하게 대꾸를 하자 이모는 밝던 얼굴이 순시간에 어두워졌다.
이모의 집은 서울에서 아파트 단지가 몰려 있는 동네 도로를 사이에 두고 4층 짜리 연립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아이가 없는 이모집은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지만 사람의 훈기가 없이 적막했다.
서울에 도착후 이모를 따라, 큰 시장에 갔다. 시장은 내가 엄마를 따라 구경 하던 시골의 5일장과는 달리
온갖 진기한 물건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이모는 인파들을 뚫고 이리저리 점포들을 돌더니 여자 아이들 옷을 파는
점포에 멈췄다.그리고 "은주야? 너 이옷 어떠니?
나는 이쁜 옷을 바라보며 어안이 벙벙 해서 이모 얼굴만 바라 보았다.
"괜찮아 이모 돈 많아, 그러니까 걱정 말고 골라 보렴."
약 2시간 이모는 양손에 옷과 신발을 담은 비닐 봉투를 낑낑거리며 걸었다
그리고 나는 난생 처음 공주가 되었고, 얼굴이 까만 촌스런 계집아이는 유치원에서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친구들은 대학입시에 매달리는데, 나는 공부에 집중 할 수가 없었다.
겨우 중학교만 졸업한 삼촌들과 고모들을 장가 보내고 시집 보내르라, 집안의 땅을 팔아 치운 아빠는
당신 자식인 우리들에게도 대학은 꿈도 꾸지 못한 아주 먼나라 이야기처럼 했다.
농사꾼인 아빠는 여자는 고등학교만 졸업 하고, 좋은 남자 만나 결혼 하면 된다는 말로
나의 향학 의지를 여지없이 꺾고 말았다. 집안 형편상 대학 등록금을 댈수 없다는 아빠를 졸랐지만 우직한 아빠의 변명은
동생들 앞길을 가로막지 말라였다. 아빠는 새엄마와 재혼후 남동생2명과
여동생을 두었고 친 남동생 까지 우리 형제는 모두 5남매 였다.
이때 새엄마가 아빠를 설득해서, 대학 등록금만 해결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나는
새엄마와 거리감이 있었고.엄마를 대신 해서 아빠를 차지한 새엄마가 무척 미웠기 때문에 고교 졸업후 뒤돌아 보지도 않고 고향집을 떠나 이모와의 추억이 있는 서울로 돌아왔다.
새엄마 몰래 모은 꼬깃한 돈은 호주머니 깊숙이 넣은 나는 무작정 걸었다. 그리고 찾은 곳은 남대문 시장이었다.
그곳에서 점원 모집이라는 문구를 보고 취직을 하고 제2의 서울 생활을 시작 했다.
초등학교 입학식날 이모 손을 잡고 넓은 운동장을 걸을 때도, 이모가 아닌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3월 입학식날 바람이 불자 모래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갑자기 거짓말처럼 눈물이 났다.
내가 울자 이모는 엄마 생각에 우는줄 아시는지 나를 달랬다.
"이모? 모래가 눈에 들어가서 아파요., 모래가 미워요."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 나는 아빠가 새엄마와 재혼 했다는 소식을
이모를 통해 들었다. 며칠에 한번씩 전화 통화 할때
아빠는 매번 자식들인 나와 남동생만 보고 살겠다고 했는데
그런 아빠가 우리들을 배신 했다. 아빠가 미웠지만 나에게는 아빠를 말릴 힘이 없었다.
이모가 없는 이모의 집은 언제나 적막했다.학교에서 돌아오면
식탁에는 내가 좋아 하는 빵이 올려져 있고 어느날에는 노란 바나나가 얌전하게
바구니에 담겨 있었지만 배고프지도 않고 전혀 식욕이 돌지 않았다.
도시락을 먹는 점심 시간이면 친구들은 언제나 내 책상에 몰려 들어 이모가 만든
반찬에 군침을 흘렸다.
이모는 늘 바빴다. 이모부 사망 보험금으로 생활 할수도 있지만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작은 가게를 하는 이모는 가끔 저녁 늦게
들어올때면 몸에서 술냄새가 풍겼고, 그럴때마다 나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어느날 이모가 나에게 이런말을 했다.
"은주야? 너 이모 말고 엄마라고 부르면 안돼?"
"난 말야... 은주에게 이모 보다는 엄마로 불리고 싶어.".알콜 기운으로
불과 해진 이모의 얼굴은 신혼 첫날밤 신부의 얼굴처럼 흥분으로 가슴이 울렁이는 것이 보였다.이때 나는
무슨 말을 할까. 다음에 계속 이모의 말이 이어졌다.
"너 하고 싶은 공부 마음껏 하게 해 줄수도 있는데...
"피아노도 배우고 그리고 스케이트도 가르쳐 줄수 있어.
우리 남들이 그렇듯 모녀 사이로 보이잖아.
사실 가끔 나도 이모가 새엄마 보다 좋았다.
새엄마는 달려라 하니에 나오는 고은애의 몸매에 심술궂은 표정은 콩쥐팥쥐의 계모처럼 비위가 상했다.
방학이면 이모는 나를 데리고 아빠가 계시는 고향으로 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 계실때는
친절을 가장해 친딸에게 하듯이 친근감을 표한다고 억지로 웃어 보이더니,
두분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아예 남보다 못하다.
그럴때마다 나는 엄마가 너무나 그리웠다.
"우리 은주 엄마가 못 본 사이에 많이 컷네."라는 친절을 가장한 전처 딸을
찔레꽃 가시를 숨긴체
아주보고 싶어 미칠것 같은 표정으로
아빠 옆에서 웃고 있는 새 엄마의
가면 뒤의 숨은 얼굴을 찾기
위해 천진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면
속에서는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배 아파 낳은 딸 보다
내가 예쁘게 자라는 모습에
시샘이 나는지.
이모가 잘 해주는 모양이지 라고
샐쭉 했다. 이럴때 마다 아빠는 껄껄 웃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나는 그런 아빠가 미웠다.
오랜만에 만나면 아빠는 "우리 은주가 이제 아빠 만하게 컷구나 허허."
이모부 없이 혼자 외로움을 견디던 이모는 한국에서 재혼 하지 않고
살았다. 몇년 후 딸처럼 나를 키워 주신 이모는
시댁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이모는 나를 미국에서 함께 살기를 희망 했지만, 아빠는 어린 딸자식을 머나먼 타국으로 보낼수 없다는 말로
나의 의사와 상관 없이 미국행을 포기 했다.
또 다시 나는 엄마 없는 외로운 둥지에
버려지듯이 버려 졌고
서울 생활을 접고
농촌에 내려와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나의 하루는 꼬꼬댁 울어대는
닭들의 아침 잠을 깨우는 소리로 시작 해서, 저녁이면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의 고요한 침묵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이었다.
서울 전학생이 된 나는
하얀 얼굴에 예쁜 학용품과
우수를 담고 있는 미소 뒤에 어린
이질감이 자리 했고, 이모의 화려한 도시락 대신 투박한 도시락을 들고
다니며 중학생이 되었고
꿈꾸는 여고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