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6번째 시간으로서 “위험한 착각” 危険な勘違い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이 말씀, 우리가 지금 읽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는 당시 상황으로 보아 상당히 과격하고 충격적이고
혁명적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핵심이 되는 두 단어를 꼽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과 <할례>입니다. 오늘 본문인 다섯
구절 중에서 율법은 28절을 제외한 네 구절에 언급되어 있고, 할례는 다섯 구절 전체에 언급이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율법과 할례라고 하는 것은 단순이 오늘 본문에만 강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율법>과 <할례>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유대인을
상징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고 광야에 들어갔을 때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바로 율법이요, 그리고 그 중 핵심이 십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돌판,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십계명이 적혀 있었는데, 그 돌판을 법궤에 넣어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면서 계속해서
가지고 다녔고,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도 오랫동안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여겨져 왔습니다.
그리고 할례라고 하는 것도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17장 10절~14절
10.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次のことが、わたしとあなたがたとの間で、またあなたの後の子孫との間で、あなたがたが守るべきわたしの契約である。あなたがたの中の男子はみな、割礼を受けなさい。
あなたがたは自分の包皮の肉を切り捨てなさい。それが、わたしとあなたがたとの間の契約のしるしとなる。
あなたがたの中の男子はみな、代々にわたり、生まれて八日目に割礼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家で生まれたしもべも、異国人から金で買い取
られた、あなたの子孫ではない者もそうである。
あなたの家で生まれたしもべも、金で買い取
った者も、必ず割礼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わたしの契約は、永遠の契約として、あなたがたの肉に記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包皮の肉を切り捨てられていない無割礼の男、そのような者は、自分の民から断ち切られなければならない。わたしの契約を破ったからである。」
즉 이 말씀은 무엇이냐 하면 할례를 받아야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언약이 맺어진 것이요,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게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시기 훨씬 이전인 아브라함에게 먼저 말씀하신 내용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율법과 할례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것이야말로 선민사상,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았다고
하는 민족이라고 하는 표징이 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참으로 놀라운 말을 합니다.
우선 오늘 본문 말씀도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부분은 25절~27절까지이고, 뒷부분은
28절~29절입니다.
먼저 25절~27절까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2장 25절~27절
“25.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5.もしあなたが律法を行うなら、割礼には価値があります。しかし、もしあなたが律法の違反者であるなら、あなたの割礼は無割礼になったのです。
26.ですから、もし割礼を受けていない人が律法の規定を守るなら、その人の無割礼は割礼と見なされ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27.からだは無割礼でも律法を守る人が、律法の文字と割礼がありながらも律法に違反するあなたを、さばくことになります。
이제 바울은 이방인을 향하여 선교를 나서게 되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할례였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할례를 받아야지만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외국에 나가서도 선교를 하게 되면 할례를 베풀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지요.
만약에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면 선교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어려움이 뒤따랐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바울은 뭐라고 했냐 하면, 우선 할례의 절대성을 부정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할례만 했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니다. 할례를 하고 율법,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킨다면 의미가 있지만,
할례를 하고 율법을 어기게 된다면 그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면 어떻게 되냐 하면, 그것은 바로 할례를 받은 사람이나 마찬가지가
된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대단히 놀라웠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만 받으면 하나님 말씀에 의한 언약백성으로서 틀림없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리고 할례를 받지 않은 저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게 된다면 마치 자기들 유대인처럼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유대인들로부터 크나큰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는, 그와 같은 놀라운 주장이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은 그냥 바울이 좀 선교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멋대로 만들어낸 논리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예레미야서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エレミヤ書
エレミヤ書
예레미야 4장 4절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ユダの人とエルサレムの住民よ。主のために割礼を受け、心の包皮を取
り除け。そうでないと、あなたがたの悪い行いのゆえに、わたしの憤りが火のように出て燃え上がり、消す者もいないだろう。」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마음 가죽을 베라고 말씀하십니다. 표면적인 할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인 구약에서 이미 그
할례를 마음에 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9장 25절~26절
25.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26.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見よ、その時代が来る──主のことば──。そのとき、わたしはすべて包皮に割礼を受けている者を罰する。
エジプト、ユダ、エドム、アンモンの子ら、モアブ、および荒野の住人で、もみ上げを刈り上げているすべての者を罰する。すべての国々は無割礼
で、イスラエルの全家も心に割礼を受けていないからだ。」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날이 이르면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만이 아니라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벌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은 사람에 대해서도 벌하시는 그 이유에 대해서 26절에 보면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리 형식적인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벌하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 후반부를 봅니다.
로마서 2장 28절~29절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28.外見上の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はなく、また、外見上のからだの割礼が割礼ではないからです。
29.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사도 바울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마음에 하는 할례를 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기독교가 없었습니다. 오직 유대교
뿐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리고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안 좋게
보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누구였냐 하면 당시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누구보다도 믿음이 좋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사람들인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 대표적으로는 안식일을 어긴다고 말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모욕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5장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わたしが律法や預言者を廃棄するために来た、と思ってはなりません。廃棄するためではなく成就するために来たのです。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믿음이 좋다는 이들이 예수님을 박해했던 이유, 그것은 다름아닌 성경을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 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와 같은 성경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다고 자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성경을 오해하고 예수님을 오해함으로 인하여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서
죽게 하는 크나큰 범죄를 저지르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제 성경을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시각에서 보게 된다면 구약성경이 새롭게 보이게 됩니다. 아, 이게 이와 같은 말씀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할례만 받았다고 다 끝난 게 아니다. 진정한 할례는 마음에 해야 된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때까지의
잘못된 착각들을 깨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때로는 유대인들과 크게 논쟁을 벌이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멋대로 해석한 성경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올바른 복음을 전하려고 힘썼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잘못된 착각과의 싸움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일어난 종교혁명은 또한 무엇이었습니까.
당시 루터는 가톨릭 사제였습니다만, 그 가르침이 너무나도 성경과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잘못된 착각
속에 갇혀진 틀을 깨고,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기치들 들고 일어섰던
것이 바로 종교혁명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당시에는 일부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었던 라틴어 성경을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해서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국어로 된 성경을 갖는다고 하는 것이 지금으로 본다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성경에 뭐가 적혀 있는지 모르고 그저 교회에만 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올 따름이지요.
이 종교혁명으로 인해서 가톨릭으로부터 많은 반발이 있었으나, 여기에 대항해서, 성경에서 멀어지고 있던 신앙을 다시 성경으로 끌고 왔던
것이 바로 이 종교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에 대해서 기독교,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는데, 이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는 것은 <저항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비 성경적인 잘못된 가르침, 위험한 착각을 깨기 위한 저항이자 올바른 믿음을 이루기 위한 저항이 바로 이 기독교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기독교의 모습 보면 어떻습니까.
제가 예전에 학생시절, 어떤 후배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락 그룹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락 중에서도
헤비메탈 그룹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그쪽 음악에 대한 조예가 별로 깊지 못해서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합니다만, 당시 한국의
어떤 헤비메탈 그룹이 있었는데, 그 그룹의 한 멤버가 이제 군대에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입대 전날에 머리를 빡빡 깎았는데,
마침 그 날 공연이 있었다는 거예요.
보통 락이나 메탈 그룹이라고 하면 남자도 화려한 장식을 하고 거기에 긴 머리를 막 흔들면서 기타나 드럼도 치고 노래도 하고 그런
모습을 연상하게 되지요.
그런데 다음날 입대하는 이 멤버가 공연에 등장했는데, 헤비메탈 밴드 공연인데 빡빡 깎은 머리잖아요. 그래서 그대로 무대에 설 수가
없으니까, 긴 머리 가발을 어디서 구해가지고 와서 쓰고 공연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좀 웃기기는 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좀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락이나 메탈이라고
하는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파격적인 모습을 하고 연주를 하는 이유는, 기존 음악의 틀을 벗어나기 위한 저항, 말하자면 어떠한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표현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음악을 연주할 때에 빡빡 깎은 머리라 하더라도 충분히 고정관념을 깨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 그런 음악도 언제부턴가 또 하나의 새로운 고정관념이라고 하는 틀이 생겨나서, 결국 다른 락 그룹이나 메탈 그룹 사람들 같이
가발까지 써가면서 공연을 해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뭐, 음악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의 믿음이나 구원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유대교에 갇혀 있던 틀을 예수님에 의해 깨고, 그리고 성경에서 멀어진 여러
틀을 성경으로 깼던 종교혁명으로 이루어낸 것이 현재 기독교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시간과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과 희생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각 교회마다 얼마나 여러 틀이 많이 존재하는지 모릅니다. 물론 성경적인 가르침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닌, 성경에서 벗어난 우리의 위험한 착각은 줄어들지 않고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걸 하면 안 돼, 저걸 하면 안 돼. 도대체 성경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서로 모른 채 사람들을 속박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일부 목회자들은 끊임없이 사리사욕을 채우고, 그리고 뿐만 아니라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짓까지도 저지르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 23장 27절~28절
“27.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わざわいだ、偽善の律法学者、パリサイ人。おまえたちは白く塗った墓のようなものだ。外側は美しく見えても、内側は死人の骨やあらゆる汚れでいっぱいだ。
同じように、おまえたちも外側は人に正しく見えても、内側は偽善と不法でいっぱいだ。
누가복음 11장 46절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しかし、イエスは言われた。「おまえたちもわざわいだ。律法の専門家たち。人々には負いきれない荷物を負わせるが、自分は、その荷物に指一本触れようとはしない。
2천년 전에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했던 일들이 어쩌면 지금 우리 교회의 단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벗어난 이런저런 짐들, 이런저런 규제들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닌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제가 오해를 가지게 해드릴 수도 있기 때문에 일일이 거론을 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교회에서 만들어낸 규제들, 목사님들이 만들어낸 그와
같은 성경에서 벗어난 규제들을 지키면 구원을 받을 수가 있나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무엇으로 이루어집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이 임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마지막 구절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2장 29절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29.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우리는 할례를 마음에 하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할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의 징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고 하는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할례, 마음에 새겨야 할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다름아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제물(宥(なだ)めのささげ物)로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라면 하나님과 우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합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그렇습니다. 이 언약의 징표, 사랑의 징표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끝으로 오늘 말씀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말씀을 꼽으라고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무엇을 꼽으시겠습니까.
오늘 말씀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2장 25절~29절
25.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25.もしあなたが律法を行うなら、割礼には価値があります。しかし、もしあなたが律法の違反者であるなら、あなたの割礼は無割礼になったのです。
26.ですから、もし割礼を受けていない人が律法の規定を守るなら、その人の無割礼は割礼と見なされ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27.からだは無割礼でも律法を守る人が、律法の文字と割礼がありながらも律法に違反するあなたを、さばくことになります。
28.外見上の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はなく、また、外見上のからだの割礼が割礼ではないからです。
29.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저는 이 말씀 중에서 27절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놀랍고 놀랍습니다.
로마서 2장 27절
27.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7.からだは無割礼でも律法を守る人が、律法の文字と割礼がありながらも律法に違反するあなたを、さばくことになります。
여기서의 할례는 형식적인 할례, 표면적인 할례를 뜻하는 것이겠지요. 이 말씀은 그러니까, 처음에는 무할례자였는데 이 사람이 율법을 잘
지켰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할례를 받은 사람을 오히려 죄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실감나게 바꾸어본다면요, 내가 비록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교회에 오래 다녔어요. 수 십 년을 다녔고,
이런저런 높은 직분도 많이 맡았습니다. 교회에서는 교회 목사님을 비롯해서 나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이제 마지막 날이 되어서 예수님 앞에 섰더니만, 내가 천국에 갈 것인지 지옥에 갈 것인지에 대해서 예수님이 누구한테 의견을 물어요.
그런데 그 사람을 보니까 자기가 다니던 교회에서 제일 낮은 직분을 받은 사람. 맨날 가난하게 헌 옷이나 입고 다니고 궂은 일이나
하고, 내 심부름이나 했던 바로 그 사람한테 의견을 묻게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기가 막힐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그와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보면 정치인들이 무선 선거철에 출마를 합니다. 거기 출마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눈이 반짝반짝 빛나요. 이번
선거에서 자기는 반드시 당선할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막 넘쳐납니다.
하지만 누구는 알아요? 국민들은 다 압니다. 아이고, 저 사람 나와봤자 안될 걸. 왜 나왔을까.
하지만 누구는 몰라요? 예, 자기는 모릅니다. 자기는 반드시 이번 선거에서 당선될 거라고 확신을 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보게
되지요.
그래요. 그렇게 출마할 정도라면 많이 배웠을 것입니다. 좋은 학교에서 석사, 박사까지 딴 사람들도 요즘은 많습니다. 판사 검사
변호사를 한 사람들도 있고, 여러 가지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많이 배우고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자기는 반드시 당선한대요. 그런데 학력이나 경력 같은 것이 그 사람보다 한참 못 미친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국민들은 아, 저 사람은 안 될 거야……라는 것을 아는 경우가 정말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마지막 날에 여러분이 천국에 가신다고 확신을 하십니까. 예, 구원의 확신,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와 같은 확신을
가진 분들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신이 확신을 가진다고 해서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을까요. 저는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았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제 사상입니다.
만약에 천국에 가는 것이 다수결로 가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내가 사는 동안 만나왔던 모든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그 중에는 내가 존경하던 사람,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만, 또한 그 중에는 내가 싫어했던 사람, 내가
무시했던 사람들도 거기 있을 지도 모르지요.
자, 그 자리에 수 백 명, 수 천 명이 모였습니다. 이제 그 사람들이, 하나 둘 셋, 하면 단추를 누릅니다. 찬성이 50% 이상이면
천국, 50%가 안 되면 지옥. 이라고 칩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떨까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아, 그래, 저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있을 거야. 아, 저 사람은 가지 못할 거야……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은 어떠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생 중에서 알아왔던 사람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서 여러분이 천국에 갈 것인지
지옥에 갈 것인지 단추를 누른다면, 여러분께서는 50% 이상 천국……이 될 자신 있으십니까.
아니, 예수님. 내가 교회에 얼마나 오랫동안 열심히 다녔는데, 내가 얼마나 많이 공부했는데, 내가 얼마나 많은 책을 썼고 논문을
썼고, 얼마나 화려한 경력을 가졌는데, 내가 천국에 갈 것인지 지옥에 갈 것인지를 저런 사람들한테 맡긴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이렇게 따지는 여러분한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뭐랬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랬잖아.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너의 이웃이었던 사람들이야.”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 때 가서 후회를 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는지 갈 수 없는지, 오늘 말씀에 의하면 어쩌면 과거에 할례자였던 유대인이 무할례자인 이방인을 무시했던 것처럼,
우리가 무시하고 업신여겼던 사람에 의해 결정될지도 모르는 일인 것입니다.
내가 교회에 오래 다녔으니까, 내가 직분을 받았으니까, 하물며 내가 목사니까 나는 천국에 갈 수 있을 거야. 구원 받을 수 있을
거야. 하는 것은 어쩌면 대단히 위험한 착각, 우리를 타락시키는 착각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것들을 자랑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요? 그것은 우리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しかし私には、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以外に誇りとするものが、決してあってはなりません。この十字架につけられて、世は私に対して死に、私も世に対して死にました。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표면적인 직분이나 세상적인 능력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해주시고 그 증거로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내가 구원 받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자랑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위험한 착각, 잘못된 착각을 버리고, 진정한 구원, 진정한 우리의 자랑이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 이웃을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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