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활동과 체포 소련 유학과 수학
1928년 11월초 연해주에 체류하였다. 1928년 11월 5일 갓난 아기와 주세죽을 데리고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김단야와 고명자의 환영을 받고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김단야는 6.10만세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뒤 1926년 8월 모스크바로 망명, 레닌대학교에 다니며 코민테른 극동아시아부 조선담당 조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고명자는 아직 동방근로자 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박헌영 가족은 모스크바에서 '정치망명객들을 위한 집'이라는 임시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1928년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박헌영은 안정된 조건 속에서 자신의 이론적 전망을 확대하고 싶어했다. 그는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하겠다고 청원했다. 당시 모스크바에 체류하던 김단야가 박헌영의 입학을 지원했다. 박헌영은 자신의 이론을 보다 확대하고 배움을 얻고자 하는 희망을 말하였고, 김단야 등의 추천으로 1928년 11월 국제레닌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주세죽도 고명자가 다니는 동방근로자대학에 입학했다. 박헌영은 아내에게 '꼬레예바'라는 가명을 지어 주었고, 이들 부부는 학업에 전념하면서 딸 비비안나를 키웠다.
김단야는 1926~28년 시기에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했으며, 그 즈음에는 코민테른 동양부 한국 담당 조사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국제공청 집행위원회 비서부가 박헌영의 입학을 추천했다. 결국 1929년 1월에 박헌영의 국제레닌학교 입학이 허용됐다. 당시 작성된 박헌영의 입학 관계 서류철에 따르면, '구사할 수 있는 언어' 항목에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 중국어' 네 가지가 적혀 있다. 그때만 해도 박헌영은 러시아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의 의사 교환 수단은 영어였다. 이력서는 물론이고 신원조사표도 영어로 작성되어 있다. 그는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영어로 강의가 이뤄지는 영어반에 소속돼 있었다.
1929년 1월 박헌영은 국제레닌대학교에 입학했고 2월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여 당원이 됐다. 국제레닌대학교에 재학 중에는 호치민 등과 만나 교류했고 친분관계를 쌓았다. 호치민은 목민심서와 정약용에 관심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와 친해지게 되었다. 1929년 초 국제레닌대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에서 모스크바 공산대학이라 불렸던 동방근로자대학을 다녔다. 동방근로자대학 2년과정을 졸업하였다. 소련에서 유학생활 지냈을때, 그는 논을 가는 써레와 농작물을 끌어 모으는 고무래의 한자어를 합쳐 '이정(而丁)'이라는 가명을 지었고, 러시아 발음인 '이춘'으로 등록했다. 이는 '하층 농민계급의 마음으로 살겠다.'는 뜻이었다. 이후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는데, 31년말 동방노력자공산대학 2년 과정을 마칠 때까지 그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박헌영은 국제레닌학교 재학 중에도 한국 혁명운동의 최일선에 있었다. 1929년 중에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57] 이 위원회는 1928년 말에 코민테른 지부 승인이 취소된 조선공산당을 대신하여 한국 사회주의 운동을 지도하는 최상급 기관이었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사에서 '국제선'이란 이 기구[57]였다. 1929년 11월 3일 조선에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벌어지자 그는 배후 선동 혐의로 체포령이 떨어졌다. 그는 귀국하지 않고 1931년까지 러시아에 체류하게 되었다.
1931년 3월 김단야는 상하이에서 잡지 코뮤니스트를 발행했고, 박헌영은 모스크바에 머무르면서 코뮤니스트 편집위원이 되었고[58], 이후 소련과 상하이를 수시로 오가기도 했다. 3월 코민테른으로부터 상하이로 가 국내의 조선공산당을 지도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는 빨리 중국 상해로 돌아갔다. 4살이 된 딸 박 비비안나는 모스크바 근처 이바노바시에 있는 스타소바 육아원에 맡기고 아내 주세죽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후 부모의 얼굴을 몰랐던 박 비비안나는 한동안 자신이 고아인 줄 알고 자랐다고 한다.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프랑스 조계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상하이에 거점을 확보하고 언제 체포될지 모르는 김단야로부터 잡지 관련 업무를 인수인계 받았다. 1931년 10월 그는 출옥한 고명자와 연락하였고, 김형선을 통해 국내와도 접촉을 시도했다. 1932년 1월 박헌영은 코민테른의 지시로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지령을 받고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박헌영이 상해에 체류하고 있을 1932년 4월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거가 발생하였다. 박헌영은 윤봉길 의거 등을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뒷받침하지 않은 극소수에 의한 폭력'행위 라며 부정적으로 평가 하기도 하였다.
상하이에서 잡지「콤무니스트」지를 만들어 국내로 밀반입시켰으나 발각되고 말았다.[20] 이 잡지는 1933년 7월호까지 발간됐다. 박헌영은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지하에 공산주의조직을 만들고 국내 공산주의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운동을 지도했다. 당시 국내 공산주의운동에서는 그가 지하에 설치한 단체를 '국제선'이라 불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