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첨단 과학산업단지의 출현 ---스탠퍼드, SLAC, 실리콘 밸리---
20세기에 들어와서 과학기술이 폭발적으로 발달하면서 과학을 연구하는 개별 연구기관의 차원을 넘어서서 거대한 대단위 연구단지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즉, 대학의 연구실, 산업체의 연구소, 국방연구소 등 다양한 연구시설들이 한 지역을 중심으로 모여들면서 일종의 거대한
과학산업 단지를 형성하는 것이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cf. 1 , 2 ).
이제 과학은 학술 연구의 차원을 넘어서 지역 개발의 차원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이런 거대한 테크노폴리스가 세계 도처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스탠퍼드대학
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20세기 전자 혁명을 주도했던 실리콘 밸리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탠퍼드 대학에서의 물리학과 전자공학의 협동연구
전후 스탠퍼드 대학를 대표하는 첨단 연구소로는 마이크로웨이브 연구소 (Microwave Laboratory)와 스탠퍼드 선형가속기
센터 (Stanford Linear Accelerator Center), 그리고 전자공학연구소(Electronic Research Laboratory) 등을 들 수 있다.
이 첨단 연구소들은 모두 전후 스탠퍼드 대학에서 공대 학장을 맡았던 터먼 (Frederick E. Terman)의 집요한 대학 육성
전략에 의해서 이룩된 것이었다.
즉, 스탠퍼드는 모든 분야에서 자신의 경쟁자였던 MIT 를 따라 잡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쟁자들이 등한시하고
있으며, 또한 새로운 산업적, 정치적 연결을 가능케하는 몇몇 경쟁 가능한 분야만을 집중적이고 장기적으로 육성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에서 물리학과 전자공학의 협동연구는 스탠퍼드 대학 성장 전략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미 1920년 스탠퍼드는 MIT에서 물리학자 웹스터 ( David Locke Webster )를 임용해서 물리학과의 진흥을 도모했었다.
그는 학과의 강좌를 현대화시키고, 강한 연구 프로그램을 진행시키는 등, 스탠퍼드 대학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는 로렌스 와 밀리컨 과 같은 버클리 나 칼텍 의 경쟁자들에 비해 공익재단의 기금이나 기업의 용역을 확보
하는 데에는 재주를 보이지 못했다.
한 예로 1935년 스탠퍼드 대학은 초고전압 X-선 관을 개발할 것을 계획했었지만, 기금을 확보하지 못해서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당시 스탠퍼드의 윌버 ( R.L. Wilbur ) 총장은 MIT의 컴프턴 총장과는 달리 외부 지원을 받는 데에 있어서 연방정부를
철저히 배제했다.
핸슨과 스탠퍼드 클라이스트론의 개발
스탠퍼드의 마이크로웨이브 연구는 물리학과 전기공학 모두에 관계하고 있었던 핸슨(William Hansen)에 의해서 시작
되었다.
핸슨은 1936년 전자를 가속시킬 수 있는 정상파 전기장을 만들어내는 장치인 럼바트론(rhumbatron)을 개발했다.
핸슨의 이 럼바트론은 1937년 스탠퍼드 최초의 마이크로 웨이브를 생산, 증폭, 탐지할 수 있는 진공관인 클라이스트론
( klystron )이 나오게 하는 데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장치는 러셀 배리언 (Russell Varian)이 고안해 낸 것이었지만, 그의 형제인 시거드 배리언 (Sigurd Varian), 핸슨,
웹스터 등과의 협동작업의 산물이기도 했다.
클라이스트론은 곧 산업적, 군사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스페리 자이로스코프 회사 (Sperry Gyroscope Company)가 이
발명품의 후원자로 나섰다.
그러나 이 산학협동 과정에서 스페리 회사가 연구에 대해서 간섭하게 되면서, 특히 웹스터가 이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었고, 대학연구실과 산업체 사이에 충돌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웹스터는 1939년 12월 "과학과 특허는 물과 기름이 서로 섞이는 것보다 어울리기 어렵다."라는 말을 남기며 이
클라이스트론 계획에서 빠졌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 계획에 계속 참여했다.
제2차세계대전 동안 스탠퍼드 과학자들은 팔로 알토(Palo Alto)를 떠나 로스 앨러모스, MIT, 하버드 등의 국방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전쟁기간 중의 이런 국방연구를 통해서 그들은 스탠퍼드 대학의 발전에 연방정부가 중요한 역할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즉, 클라이스트론의 군사적 중요성을 강조해서 연방정부로터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내고, 이런 지원을 바탕으로 기업의
간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될 수 있으며, 결국에는 대학에서의 순수 연구도 할 수 있게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리하여 전쟁을 거치면서 연방정부는 스탠퍼드 대학의 새로운 후원자로 떠올랐다.
프레드릭 터먼과 스탠퍼드 대학의 개혁
클라이스트론은 스탠퍼드 대학의 물리학과에서만 연구한 것은 아니었고, 전기공학과 에 있던 터먼에게도 이것은 중요한
연구 주제였다.
프레드릭 터먼 ( Frederick Emmons Terman , cf. 1 )은 저명한 스탠퍼드 심리학자 루이스 터먼 (Lewis Terman)의 아들로서
MIT의 부시 밑에서 배웠던 전기공학자였다.
1930년대에 그는 줄곧 스탠퍼드에서 통신공학 분야의 연구 전통을 세우려고 노력했는데, 이 과정에서 물리학과에 있던
핸슨과 협동연구를 하게 된 것이다.
전쟁 중 그는 스승인 부시의 추천으로 MIT 래드랩 의 하위 연구소로서 하버드에 위치했던 전파통신연구소(Radio Research
Laboratory)의 책임자로 일하면서 레이다에 관련된 연구를 했다.
이미 클라이스트론의 개발 과정에서 물리학과 전자공학의 협동 연구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그는 이런 전쟁 기간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마이크로웨이브 전자공학의 혁신은 물리학과 전기공학의 학제간 협력과 아울러, 대학, 산업체, 연방정부
사이의 결합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믿음을 더욱 굳히게 된다.
1943년 윌버 총장이 물러나고, 터먼의 죽마고우인 트레시더 (Donald Tresidder) 가 새로운 총장이 되었다. 트레시더는 전임 윌버 총장과는 달리 산업체와의 협력을 강조했던 터먼과 핸슨의 마이크로웨이브 연구소 계획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트레시더 총장과 좋은 관계 속에서 터먼은 1945년부터 무려 10년간 스탠퍼드 대학의 공대 학장으로 있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의 터먼의 노력으로 스탠퍼드에서는 연구 구조의 일대 변화가 나타나고, 대학 또한 비약적으로 성장해서, 마침내 2류대학이라는 불명예를 씻고, MIT와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일류대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1945년 대학 본부는 마이크로웨이브 연구소 의 설립을 승인했다.
이 연구소는 이학부에 소속을 두었지만, 공학부와 긴밀한 연결을 가지도록 구성되었다.
즉, 물리학과에 있던 핸슨이 연구소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터먼의 학생이었던 긴즈튼 ( Edward Ginzton )이 그 아래 직책을 맡았다.
이리하여 이 연구소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행해진 물리학과 전자공학 사이의 학제간 연구의 전형을 이루게 되었다.
1949년에 이르면 스탠퍼드 대학 물리학과는 이 연구소 덕분에 ' 해군연구국 '( Office of Naval Research )을 비롯한 연방정부의 지원 으로 아주 재정이 풍족한 학과로 발전한다.
또한 스탠퍼드 물리학과에서는 연방정부의 돈으로 응용연구뿐만이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웹스터가 전쟁 전에 바랬던
순수과학 연구의 꿈도 실현시킬 수 있었다.
마이크로웨이브 연구소가 명성을 얻어감에 따라 터먼은 육·해·공군으로부터 계속 더욱 많은 연구계약을 맺을 수 있게
되었고, 이런 재정적인 안정 속에서 후일 스탠퍼드의 전자공학연구소라고 불리게 되는 핵심적인 연구 프로그램을 진행
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성장을 바라보면서 1951년 터먼은 이제 스탠퍼드의 전자공학은 규모에 있어서는 MIT에 뒤질지 모를지라고, 그 질과
생산성에 있어서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고 자부하게 된다.
SLAC의 출현
스탠퍼드 선형가속기 센터 ( SLAC )라는 거대한 선형가속기 연구소가 스탠퍼드에 만들어지게 되는 데에는 핸슨의 럼바트론을 비롯해서, 스탠퍼드의 개발품인 클라이스트론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전후에 핸슨, 긴즈튼과 그들의 학생들은 도파관(waveguide) 속에서 전자들을 가속시키기 위해서 마이크로파를 이용하는
선형가속기 건설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즉, 핸슨은 1940년 일리노이 대학 의 커스트 (Donald W. Kerst)가 만든 가속장치인 베타트론(cf. 1 ) 보다 더욱 강력한 가속기를 만들기 위해 전자를 강력하게 밀어보낼 클라이스트론을 개발하려고 했던 것이다.
1947년에 핸슨이 최초로 만든 Mark I 선형가속기는 약 3피트의 관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으로 그는 전자를 약 1.5 MeV(150만 전자볼트)로 가속시킬 수 있었다.
이런 예비적 모형으로 그는 보다 강력한 클라이스트론과 더 긴 선형가속관만 있으면 10억 전자볼트의 가속기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전후 마이크로웨이브 연구소에서는 기존의 20킬로 와트 급 클라이스트론을 이보다 휠씬 높은 약 30 내지 50 메가 와트 급으로 발전시키고, 이를 이용해서 10억 전자볼트 이상을 가속시킬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의 선형가속기를 만들려는
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1949년 핸슨의 갑작스런 죽음에도 불구하고 긴즈튼이 곧 그의 후임이 되면서, 이 계획은 오히려 더 가속화되었다.
스탠퍼드의 고에너지 물리학 연구
연구소가 성장함에 따라 마이크로웨이브 연구소는 두개의 거대한 연구소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그 하나는 옛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마이크로웨이브 관의 연구와 설계를 계속 담당하는 연구소로 발전했고, 그 다른 하나는 핵물리학 프로그램을
진행시키기 위해 거대한 입자가속기를 이용하는 고에너지 물리학연구소(High Energy Physics Laboratory)로 변모·발전했다. 1950년대 초에 이 고에너지 물리학 연구소는 호프스태터 (Robert Hofstadter) 와 파노프스키 (Wolfgang Panofsky)를 추가로
끌어들여 1-GeV(10억 전자볼트)의 Mark III 가속기 프로그램을 진행시켰다. 특히 호프스태터는 1954년 이 가속기를 이용해서 원자핵의 크기와 구조에 관해서 연구했는데, 그는 이 연구에 대한 공로로 1961년 노벨상을 받았다.
Mark III 가속기를 완성한 뒤, 스탠퍼드에서는 더욱더 거대한 가속기를 건설하려는 프로젝트 M (Monster)을 세웠다.
이제 가속기의 규모가 점점 커지게 되면서, 이 계획은 물리학과의 통제 범위를 훨씬 벗어나고 있었고, 심지어는 대학의
차원도 넘어서고 있었다.
스탠퍼드의 과학자들은, 비록 연방정부기관인 원자력 위원회 (AEC)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다 하더라도, 될 수 있으면 국가 설비가 아니라 자신들이 연구장치를 쉽게 통제할 수 있는 대학 설비를 세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길이가 약 2마일이나 되는 거대한 가속기를 만드는 데 엄청난 돈을 대는 AEC는 만들어질 가속기 연구소가 될 수
있으면 국가 연구소의 성격을 띠어서 자신들이 직접적인 통제를 가할 수 있기를 원했다.
1930년대에 클라이스트론이 개발될 때 물리학자와 산업체가 연구 프로그램의 통제 문제를 놓고 다투었는데, 이제는 연방
정부와 물리학자들이 서로 연구의 자율성 문제를 놓고 힘겨루기를 하게 된 것이다.
거대 과학을 둘러싼 논쟁
엄청난 규모의 연구장치를 세운다는 데에 대해서 물리학자들은 대체로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타났다.
우선 유럽공동원자핵연구소 (CERN)에서 책임자로 일하던 펠릭스 브로흐 ( Felix Bloch , cf. 1 )는 거대 규모의 물리학을
하면서 지금까지 대학에서 하던 방식대로 연구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호프스태터도 자신이 Mark III 계획에서 얻은 경험으로부터 프로젝트 M을 국가 연구소로 조직하는 것을 반대했다.
만약 국가 연구소의 형태가 되면 자신들이 마음대로 실험장치를 사용할 수 없고, 거대한 중앙관료 조직이 연구 프로그램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우려 반, 기대 반의 상황에서 프로젝트 M에 참여하는 물리학자들, 학과, 대학본부, AEC 사이에는 밀고 당기는 긴장 관계가 조성되었고, 열띤 논쟁도 벌어졌다. 논쟁의 중심 주제는 크게 누가 가속기 연구소의 설계와 건설을 맡을 것인가, 연구 프로그램은 누가 통제할 것인가, 대학과 가속기 연구소 가운데 누가 연구원들의 봉급을 지불할 것인가 하는 것들이었다.
아무튼 1957년 호프스태터, 긴츠튼을 포함한 고에너지물리학 연구소와 마이크로웨이브 연구소의 간부들은 서로 협의한
끝에 국방부, 국립과학재단, 원자력 위원회에 동시에 SLAC의 건설 계획 안을 제출했다. 결국 많은 토론 끝에 아이젠하우어 대통령은 건설 계획을 허락했고, 마침내 1961년 SLAC의 건설 계획이 의회에서 승인이 나게 된다.
새로운 가속기 연구소가 국가 연구소(national laboratory)냐 아니면 물리학과 연구소냐 하는 문제는 기존의 물리학과 교수진 외에 독자적인 교수진을 갖춘 국가 설비(national facility)라는 형태로 SLAC이 설립됨으로써 결판이 났다.
독자적인 교수진을 갖추게 된 것은 대학교수라는 직함이 있어야 우수한 연구자를 SLAC으로 끌어올 수가 있었기 때문이
었다.
물론 교수의 수는 스탠퍼드 대학 본부가 통제했다.
이리하여 5년이라는 오랜 건설 기간 끝에 1966년 이 거대한 입자가속기 연구소는 가동을 시작했다.
실리콘 밸리의 형성
1950년초부터 스탠퍼드의 ' 산업단지 '(Industrial Park)에는 스탠퍼드 대학과의 산학협동 을 노리며 여러 산업체들이 입주
하기 시작한다.
이미 1938년 스탠퍼드 동창들인 윌리엄 휴렛 (William Hewlett) 과 데이비드 페커드 ( David Packard )는 휴렛-페커드 (Hewlett-Packard)회사를 팔로 알토에 창립했었다.
1951년 배리언 조합 (Varian Associate)이 입주한 것을 필두로 해서, 제너널 일렉트릭사 의 마이크로웨이브 부서가 입주하는 등 여러 기업들이 1950년대에 스탠퍼드와의 산학 협동으로 스탠퍼드 산업단지 내의 부지를 임차해서 입주하게 된다.
하지만 1955년 터먼 의 적극적인 권유로 쇼클리 (William Shockley) 가 벨 연구소를 떠나 팔로 알토에 쇼클리 반도체 회사 를 세울 때까지는 스탠퍼드 산업단지의 주요 업종은 반도체산업이 아닌 마이크로웨이브 산업이었다.
쇼클리 반도체 회사는 입주한 뒤 게르마늄을 이용한 쇼클리 다이오드를 생산했다.
이 쇼클리 다이오드는 무엇보다도 전화 산업에 이용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다이오드 생산의 새로운 후보인 실리콘을 이용한 다이오드 기술은 게르마늄에 비해 무척 힘이 들었고, 또한 개발비 자체도 쇼클리 반도체 회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규모였다.
이에 따라 쇼클리는 실리콘 기술 개발을 주저했는데, 이때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에서 실리콘 반도체를 연구하던 로버트 노이스 ( Robert Noyce ) 를 비롯한 8명의 연구자들은 쇼클리 회사를 빠져나와 새로운 투자자를 찾았다.
쇼클리가 '8명의 배신자들'이라고 불렀던 이들은 마침내 페어차일드 (Fairchild) 사진기 회사에 접근해서 1957년 팔로 알토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 라는 새로운 회사를 차렸고, 여기서 실리콘 반도체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스탠퍼드 산업 단지는 이후 집적회로와 마이크로프로세서 개발 등을 선도하면서 20세기 반도체 혁명을 주도했다. 1
959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회사 (Texas Instrument Co.)의 킬비 (Jack St. Claire Kilby)와 페어차일드 회사의 노이스(Robert
Noyce)는 최초의 집적회로인 IC(Integrated Circuit)을 개발 했다.
이후 IC는 더욱 집적화가 진행된 대규모 집적회로(LSI)로 발전되었다. 1968년 페어차일드의 노이스(Robert Noyce)와 고든
무어(Gordon Moore), 그리고 앤드류 그로브(Andrew Grove)가 주축이 되어서 Intel ( Integrated Electronics )이 실리콘 밸리에 입주하면서 창립되었다.
Intel은 일본의 계산기 회사인 비지콤(Busicom) 과의 계약(cf. 1 )을 바탕으로 스탠퍼드 대학 화학과 교수였던 테드 호프 ( Ted Hoff , cf. 1 )의 감독 아래 단일한 칩 속에 모든 연산과 논리 회로가 가능한 특별한 목적의 칩을 개발 했고, 마침내 1971년 11월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Microprocessor)를 개발, 시판 하게 되었다.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 Intel 4004 는 2,250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한 것이었다.
결국 1957년 페어차일드 반도체 회사가 설립된 이후 20년 동안 스탠퍼드 대학 주변에는 약 100여개의 반도체 회사들 이
분할과 합병을 거듭하면서 생겨났고, 예전에 오렌지 농장들이 있었던 산타 클라라 지역에는 새로운 첨단산업단지인
'실리콘 밸리'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대학-정부-산업체의 연결
그러나 스탠퍼드 대학만이 실리콘 밸리의 형성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 지역의 항공산업이 대학을 변화시킨 것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54년부터 록히드 항공회사 의 미사일 부서 가 서니베일에 있던 미항공우주국(NASA)의 전신인 미국항공자문위원회
(National Advisory Committee on Aeronautics)연구소 와 스탠퍼드의 전자공학 연구소 근처에 자리잡았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은 극비의 미사일 연구를 비롯한 초고속 항공역학 연구의 중심지로 부상되었다.
이런 외부 조건에 부응하기 위해서 스탠퍼드 대학의 항공공학 , 재료공학 관계자들은 자신들의 학과들을 이에 맞도록
개편해 나갔다.
더욱이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호가 발사된 뒤로는 우주개발 경쟁이 가속화되었고, 이에 따라 항공기술과 아울러
트랜지스터를 비롯한 소형 반도체 기술이 급속도로 필요하게 되면서, 실리콘 밸리의 산업체들과 스탠퍼드 대학에서는
더욱 활발한 군·산·학 협동작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록히드 항공회사, 국방부, NASA 등도 실리콘 밸리가 형성되는 데 일조하게 된 것이다.
이 경우에는 전자공학의 경우와는 달리 대학이 외부적 조건의 변화에 순응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이렇게 클라이스트론을 개발해나가는 과정에서 나타났던 경우처럼 스탠퍼드 대학이 자신들의 연구 방향에 맞도록 지역
산업의 형성을 주도해 나가거나, 이와는 반대로 항공 관계의 경우처럼 외부적 요구에 맞도록 대학의 연구 방향을 적극적
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정부, 기업체, 대학이 서로 연결되는 실리콘 밸리라는 거대한 첨단 과학산업 단지가 형성되게 되었
던 것이다.
군산학 복합체에 대한 비판
전후에 나타난 냉전시기의 군비경쟁에는 미국 유수의 대학들과 산업체들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즉 MIT에서는 방공망 체계의 건설을 비롯한 많은 국방연구가 진행되었으며,
스탠퍼드와 그 주변의 실리콘 밸리는 우주개발과 미사일 개발과 긴밀한 연관 아래 성장했고,
버클리, 시카고, 프린스턴 등의 대학들과 듀폰트사을 비롯한 여러 산업체들은 핵무기 개발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핵잠수함 계획, 핵발전소 계획, 핵융합 발전 계획 등도 이런 군산학 복합체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심화되면서 펜타곤과 대학간의 연결을 비롯한 군산학 복합체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었다.
『일차원적 인간』 (1964)의 저자인 마르쿠제 ( Herbert Marcuse )는 거대한 기술 관리 체계가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문명비판적인 차원에서 거대 기술체계를 비판했다.
마침내 1969년 3월 4일 48명의 MIT 교수진들은 미국과학의 군사화를 경고하고 나섰다.
곧 이어 스탠퍼드 대학에서도 전쟁 연구를 반대하는 학생들과 교수진들의 서명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 대학의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의 소리였다.
물론 이들이 제기했던 비판의 소리는 당시에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거대한 군산학 복합체의 위세에 밀려 현실화가
되지는 못했지만, 인간을 위한 과학기술을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추구한 운동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cf. 1 , 2 )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미국 사회의 신보수화 경향에 따라 다시금 군산학 복합체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되었다.
레이건 행정부와 수폭개발에 앞장섰던 에드워드 텔러가 주축이 되어 추진되었던 '별들의 전쟁계획'이 이것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80년대의 군산학 복합체의 재건계획은 제2차세계대전기간에 지녔던 추진력을 갖지는 못했다.
급기야 1990년대에 이르러 냉전 시대가 종식됨에 따라 더욱더 근본적인 변화가 오게 되었다.
즉, 냉전 종식 이후 미국에서는 연방정부의 국방연구에 대한 투자가 급격히 감소하고, 따라서 연방정부와 대학간의 협력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