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갑/장영랑
겨울 추위가 쫓겨 가는 날이다. 아침 설거지를 하고 젖은 손을 털고 있는데 남편이 불쑥 뒷산을 가잔다. 남편 말에 발 먼저 나서고 보니 맨손에 스치는 바람이 제법 매섭다. ‘이런, 장갑을 못 챙겼네’ 혼잣말에 남편이 주머니를 부스럭거리더니 목장갑을 건넨다.
모양 없이 어떻게 끼냐고 눈을 흘겼지만 생각지도 않은 목장갑이 내심 반갑다. 투박하고 억센 느낌일거라는 생각으로 대충 꼈는데 의외로 무명실이 전해주는 온기가 손을 녹인다. 꼼지락꼼지락 목장갑의 따뜻한 기운이 마음 풍선을 데우더니 아버지의 목장갑을 기다리던 어린 시절로 살랑 날아오르게 한다.
아버지는 큰 공장의 현장 반장이었다. 목재에서 나온 펄프를 농축하여 롤러에 밀어 절단기로 자르면 종이가 되는 제지공장이었다. 쉼 없이 기계를 돌리기 위해서 수시로 기름을 치고 기계를 조이고 맞추는 작업이 아버지의 일이었다. 기계를 만지는 아버지의 주머니에는 늘 목장갑이 들어 있었다. 하얀 목장갑이 기름때로 까맣게 절어 오는 것이 아버지 일의 마침표였다. 철없던 나는 까만 목장갑이 좋았다. 아버지가 곧 나와 함께 놀아 줄 시간이 되었다는 신호와도 같았으니까.
가족 나들이가 귀했던 시절, 아버지는 자주 나를 유원지에 데리고 갔다. 목장갑을 벗고 비누 냄새를 풍기던 아버지의 손에는 다정함이 넘쳤다. 포마드 기름칠로 한 올 남김없이 올린 머리에, 선글라스를 끼고, 조끼까지 깔 맞춤한 양복 매무새는 당시 잘 나가던 유명 배우 같았다. 그 순간 아버지에게는 목장갑을 낀 고단한 노동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낙엽조차 시려서 뒹굴어 다니던 그 날도 나는 아버지의 까만 목장갑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에서 사람이 찾아왔고 엄마는 허둥거리며 집을 나갔다. 해거름이 되어서 돌아온 아버지는 목장갑 대신 미라처럼 손에 흰 붕대를 감고 있었다. 절단기에 손가락이 잘려 수술을 하고 온 거였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아버지의 표정은 낯설고 슬펐다. 미닫이문 사이로 밤새 아버지의 신음이 새어 나와 내 마음을 옥죄였다. 모로 누워서 다친 손을 붙잡고 고통에 끙끙대는 아버지가 방문 틈으로 보였다. 얼마나 아프실까 내 손가락을 깨물어 보며 눈물이 났다. 아버지의 출근을 기다리는 툇마루 구석 목장갑도 나처럼 떨고 있었다.
아버지는 붕대를 감고 출근했다. 일을 마치고 오면 소독을 하고 다시 붕대를 감고 아버지의 잘린 손가락 마디도 상처가 무디어지고 바알간 새 살이 올라왔다. 하얀 목장갑이 까맣게 변해오는 일상이 돌아왔지만 나는 아버지의 따뜻한 맨손을 잡고 유원지에 갈 수 없었다. 잘린 손가락만큼이나 아버지의 자신감도 상실되었을까. 뒷주머니에 차던 목장갑을 아버지는 집에서부터 손에 끼고 나갔다. 손가락이 하나 없는 손을 내놓고 다니기는 두려웠으리라. 차마 자식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으리라.
목장갑은 가장으로서 아버지의 상징이었다. 신성한 노동의 징표였으며 우리에겐 아버지의 수고로움을 보여주는 흔적이었다. 밤새 무거운 눈으로 졸음을 참으며 일을 하고, 찰나의 순간 손가락을 잃었다. 다시 목장갑을 낀 아버지는 기름때를 만져 우리에게 밥을 주고 아랫목을 주었다.
아버지는 20여 년 현장 감독직의 공로를 인정받아 자재창고과 사무직으로 발령받았을 때도 목장갑을 벗지 못했다. 새로 들어오는 기계 부품 목록을 확인해야 하는데 이름이 모두 영어로 적혀 있었다. 만주를 떠돌아다니며 피난살이를 했던 아버지가 영어를 배웠을 리 없었다. 나는 영어 부품 이름을 한글로 소리 나는 대로 적어 주며 아버지 눈치를 보았지만, 아버지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목장갑에 부품 이름을 적어 외우면서 장갑을 끼고 일했다. 아버지에게 목장갑은 허전하고 시렸던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해준 싸개이자 당신과 가족을 지켜주는 방패와도 같았을 것이다.
지금도 길을 가다 공사장 인부들이 목장갑을 끼고 일하는 모습을 보면 거룩한 가장들을 마주하는 듯하다. 잠시 목장갑을 벗고 담배 한 개비로 힘에 부친 노동을 달래거나, 장갑을 뭉쳐 그걸 베고 잠시 쉬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울컥하다. 목장갑이 주는 노동과 휴식의 현장을 보면 먼 기억 속 아버지가 곁에 있는 듯 그 자리를 서성이게 된다.
남편과 연애 할 때 제일 먼저 받았던 선물이 빨간 양피 장갑이었다. 어찌나 부드러운지 손에 끼는 대로 착 안겼다. 금빛 로고는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투박하고 거친 아버지의 목장갑과는 완연히 달랐다. 이 남자와의 앞날이 내 손가락에서 맘대로 움직여지는 양피 장갑처럼 유순해 보여 선뜻 마음을 받아들였다.
잠깐은 그럴싸했을까. 쉽게 스크래치가 나고 조심스러워 함부로 낄 수 없는 장갑이었다. 외출 시에만 끼고 떠받들 듯 모셔 두어야 했다. 아들 둘을 낳아 제 삶을 찾아가도록 키우며 살다 보니 양피 장갑과 같이 포시랍은 날은 며칠 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은 예기치 않은 일이 생기는 공사현장과도 같았다.
대학을 갓 졸업한 나이에 애를 낳고 보니 엄마로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이정표 없는 낯선 길에 차를 모는 사람마냥 허둥대고 불안한 나날이었다. 큰 애는 유난히 열병을 자주 앓아 응급실을 들락거리게 하며 나를 힘든 엄마로 만들었다. 일하랴, 학위 준비하랴 바쁜 남편은 제 앞가림에 지쳐 모든 집안일을 떠안겨 나를 외로운 아내로 만들었다.
목장갑을 끼고 휘뚜루마뚜루 모든 일에 나서던 아버지가 내 일상의 교과서로 펼쳐졌다. 일터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목장갑을 낀 아버지는 엄마의 아쉬운 소리가 나올 새도 없이 집안 구석구석을 손질하였다. 엄마의 손이 쉽게 닿을 수 있게 선반을 달아주고, 겨울철 스케이트가 없다고 징징대는 나에게는 뚝딱 썰매를 만들어 주었다. 오빠의 등굣길 자전거 바퀴는 늘 기름칠 손질로 매끄럽게 해주었다. 아버지의 목장갑 속에는 서투른 내 삶의 정답이 숨어 있었다. 목장갑 같은 삶이 되어야 했다.
왼손 오른손 구별 없는 목장갑처럼 아이들 뒤치다꺼리는 가리지 않고 나서 주어야 탈이 없었다. 크기 구분이 없어 적당히 장갑에 손을 맞추듯 두루 뭉실 살아나가야 집안이 편했다. 따박따박 이유 따져가며 남편과 대거리 하다 보면 마음만 상하게 되었다. 공사장에서 급하게 물건을 괴거나 구멍을 막을 때 목장갑을 둘둘 뭉쳐 쓰듯 삶의 구석구석을 함께 채워 나가야 보듬어 살아나갈 수 있었다. 미끄러운 물건을 꽉 잡아주는 목장갑처럼 서운한 마음도, 넘치는 마음도 잘 잡아주어야 마음이 미끄러져 상처 주는 일이 없었다.
한 켤레에 오백 원이 안 되는 목장갑이 주는 가치를 깨치며 살아가는 날들이었다. 삶의 고비마다 목장갑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노동의 고단함도 잊은 채 내 손을 잡아주던 아버지, 언제나 묵묵히 장갑을 끼고 일터로 나가던 아버지의 모습이 가르침이 되어 가정이라는 내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어설픈 봄 햇살이 산등성이를 어루만진다. 한참 산을 오르다 보니 몸에도 손에도 땀이 난다. 짐이 된 장갑을 벗어 슬쩍 남편에게 건넨다. 목장갑을 낀 남편은 연장을 받은 듯 쓰러진 나뭇가지를 손으로 툭툭 쳐 내어 지팡이를 만들어 나에게 준다. 가파른 산길에 지팡이를 의지하니 한결 수월하다. 얼굴을 치는 날카로운 가지를 젖혀주고 돌부리를 치워주며 길을 만들어 준다.
훠이훠이 목장갑을 끼고 앞서가는 남편의 등짝 위로, 당신은 손가락을 잃고도 괜찮다 하시며 내 손의 조그만 생채기에도 안쓰러워 조심해라, 다치지 마라, 내가 다 해주마, 말씀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목장갑 같은 사랑이 포슬포슬 만져진다.
첫댓글 '한 켤레에 오백 원이 안 되는 목장갑이 주는 가치를 깨치며 살아가는 날들이었다. 삶의 고비마다 목장갑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노동의 고단함도 잊은 채 내 손을 잡아주던 아버지, 언제나 묵묵히 장갑을 끼고 일터로 나가던 아버지의 모습이 가르침이 되어 가정이라는 내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목장갑에서 읽어내는 아버지의 사랑과 목장갑 같은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나를 잘 엮어내어 가슴 뭉클합니다. 일상에서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는 관찰력이 돋보이는 글입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양피장갑을 끼고 살아갈 인생을 꿈꾸며 시작했지만 산다는 것은 예기치 않은 공사현장 같았고
남편이 할일, 내가 할일을 구분해 살 수 없어 목장갑을 끼고 헤쳐나갔다는 님의 이야기에 공감합니다.
목장갑을 끼고 든든하게 가장의 역할을 다 하신 아버님을 기억하는 님이 참 부럽기도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모두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목장갑을 끼고 탄탄하게 가정을 일구어낸 님에게 큰 박수를 보냅니다.
수상을 깊이 축하해요.
아버지의 고단한 일상!
일부 사람들은 허투루 여겼을 목장갑의 거룩한 용도!
짜임새있는 글! 요란 떨지않은 문장!
감동이 넘칩니다.
수상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