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匿名의 C법사
『당신은 이번에 국회의원이 될 것이고, 의원이 되면 초선의원답지 않게 요란법석하게 활동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질 것이다. 그 뒤에는 다시 잘 되고 의원으로서의 생명력도 길어진다』
이 얘기의 주인공은 朴智元(박지원) 청와대 정책수석비서관이다. 在美 사업가 시절, 朴수석은 미국에서 한 점술가로부터 그의 「정치적 운명」을 들었다. 이 말대로 朴수석은 1992년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처음 금배지를 달았으나 다음 총선에서 낙선했다. 朴수석은 시사주간지 週刊朝鮮과의 인터뷰(1998년 1월22일자)에서 자신의 정치역정을 예언한 점술가가 「C법사」라고 밝혔다.
영문 이니셜 「C법사」라는 익명은 5·16 쿠데타에 가담한 백태하 장군의 회고록 「반역자의 고백」에도 나온다. 백태하 장군은 5·16 쿠데타 당시 張都暎(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권총으로 위협, 쿠데타를 지지하게끔 만든 주인공이며, 중앙정보부 서울지부장 시절에는 金炯旭(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경향신문사를 접수한 사람이다.
백태하 장군은 1996년에 출간된 「반역자의 고백」 서문에서 『내가 감히 모든 것을 쓸 수 있었던 용기를 가진 것은 C법사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에 C법사님의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것을 상당히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기아자동차 사태 직전인 1997년에 출간된 기아그룹 金善弘(김선홍) 회장의 자서전 「이대로 멈출 수는 없다」의 서문에도 『회사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찾았다. 그 知人(지인)의 힘을 빌어 이 책을 발간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 지인도 익명의 「C법사」로 거론되었다. 만화가 송창국씨가 1996년에 펴낸 「YS 나라 바로 세우기」란 책에도 『이 책을 기획하고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해 준 C법사님께 감사드린다』는 말이 기록돼 있다.
도대체 C법사가 누구이기에 그의 익명이 회자되고 있는가.
『다리가 하나밖에 없다!』
지난 8월3일 새벽,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 위치한 소극장 「혜화동 1번지」. 극단 후암에서 기획한 영혼 연극 「救命施食(구명시식)」이 끝난 뒤, 배우들은 무대 해체작업을 하고 있었다. 극단 대표 차현석씨, 기획자 김한상씨, 배우 최승준·김태호씨 등이 그 자리에 있었다. 연극 장면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살피던 기획자 김한상씨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 김지나씨 다리가 하나밖에 안 나왔네』
순간, 극장 안에는 냉기가 흘렀다. 차현석 대표와 배우들이 사진을 확인해 보니 놀랄 일이 발생했다. 연극 「救命施食」에서 신부 역을 맡았던 배우 김지나(21)씨의 다리가 사진에 하나밖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진 속 그녀가 입고 있는 치마도 연극에서 입었던 치마보다 세 뼘이나 길었다.
이 사진 외에 총 80장의 사진 중 예닐곱 장에서 누가 봐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靈駕(영가·영혼)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작지만 윤곽이 또렷하고 창백했다. 다음 날 아침, 차현석 대표는 사진을 찍은 연상민(25·사진 촬영기사)씨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으나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연극 「救命施食」은 厚岩精舍(후암정사) 會主(회주)인 車吉辰(차길진·54) 법사가 자신이 행하고 있는 招魂(초혼·죽은 사람의 혼을 부름) 의식의 실례들을 연극으로 再구성한 작품이다. 이 연극의 대본은 귀신을 부를 줄 알고, 귀신과 대화가 가능한 靈(영) 능력자로 알려진 車吉辰 법사가 직접 썼다. 앞에 언급한 익명의 C법사가 다름아닌 車법사다.
車법사는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 산 자와의 恨(한)의 고리를 풀어 주는 救命施食을 14년째 해오고 있다. 救命施食은 본래 불가에서 靈駕를 薦度(천도·영혼으로 하여금 정토나 천계에 태어나도록 기원하는 법식)하기 위해 올리던 救病施食(구병시식)에서 유래한 것인데, 車법사가 「病」자 대신 목숨 「命」자를 넣어 「목숨을 구한다」는 뜻의 救命施食으로 바꾸었다.
연극 「救命施食」에서는 車법사로부터 救命施食을 받은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초대되었다. 입장권에 位牌(위패)를 디자인한 靈駕 초대장을 만들어 관객들 스스로 자신이 초대하고 싶은 靈駕들의 이름을 쓰게 했는데, 이 때문에 「초대받은」 靈駕들이 연극에 출연하는 해프닝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배우들은 공연 도중 괴이한 일이 잇따라 발생했다고 말했다. 「외다리 사진」의 주인공 김지나씨는 『사진에 나온 한 쪽 다리 역시 내 다리가 아니다. 연극 도중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냉기를 느꼈다』며 몸을 떨었다. 車법사 역을 맡은 배우 김태호씨는 공연 기간 내내 밤마다 가위눌림에 시달리며 출연한 모든 靈駕들을 꿈속에서 만났다고 했다. 어떤 배우는 공연 내내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시달려 뒤를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는 벽뿐이었다고 말했다.
이 괴이한 사진들에 대해 사진 전문가들은 『조작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 사진들은 지난 8월7일 스포츠조선에 크게 보도되었다. 한여름 극장가에 엽기적인 「귀신 소동」을 일으킨 車吉辰 법사는 누구인가.
첫 만남
필자는 東亞日報 편집국장을 지낸 朴權相(박권상) 現 KBS 사장 자택에서 車법사를 처음 만났다. 朴사장의 伯氏이며 전라북도 언론계에서 이름을 날린 朴龍相(박용상) 선생과 車법사 선친인 故(고) 車一赫(차일혁) 총경이 막역한 친구여서 두 집안은 世交(세교)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車一赫 총경은 6·25 전쟁 휴전 후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위해 설치된 서남전투사령부 2연대장 재직중 빨치산의 전설적 총수였던 남부군 총사령관 李鉉相(이현상)을 사살한 사람이다.
필자는 朴權相 사장의 소개로 車법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新東亞와 女性東亞에서 5년 간 기자생활을 했던 필자는 국내의 수많은 기인과 도사, 술객들을 취재할 기회를 가졌는데, 세계적인 靈능력자라는 車법사의 첫 인상은 지극히 수더분했다. 그러나 20년 가까이 그를 만나면서 그 깊이와 폭이 가늠하기 힘든 妙(묘)한 인물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는 영혼을 불러내는 靈능력가인가 하면, 미래를 예시하는 예언가로, 때로는 벤처사업을 하는 사업가로, 또 「애정산맥」을 비롯한 수많은 소설의 작가로 다양하게 활동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광고, 언론, 멀티미디어 등의 분야를 강의하고 있는 지금의 필자에게 있어서 車법사는 취재원이자 영원한 관찰 대상이었다.
車법사를 잘 아는 조선일보 논설주간 柳根一(류근일)씨는 『車법사를 靈능력자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는 우수한 논픽션 작가이면서 동시에 소설가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평했다.
車법사는 문단에 정식 데뷔한 작가다. 그는 선친 車一赫 총경이 지리산 빨치산 토벌 시절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록한 「陣中기록」과 「작전일지」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이란 책을 써, 1989년 월간중앙 논픽션 공모에 당선되었다.
多作
그 이후 그는 끊임없는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과 빨치산 여인 신정하와의 이념을 넘나드는 사랑을 현대사의 비극 속에 그려낸 「애정산맥」을 중편소설로 발표했고, 救命施食과 靈的 체험을 소설로 쓴 최초의 영혼세계 안내서 격인 「영혼의 목소리」와 「영혼의 X파일」, 「영혼은 비자가 없다」는 책은 영혼세계를 불신하는 선입관에 경종을 울렸다.
「救命施食」 경험자들이 겪은 놀라운 영혼의 기적을 담은 책 「영혼을 다스리는 마흔 아홉 가지 이야기」, 각 스포츠 신문에 연재되어 인기를 끌었던 「영혼을 팔아먹는 남자 이야기」 등도 그의 작품이다. 이 중 1994년에 출간된 「한 마리 까치 되어」라는 책은 7만 부 이상이나 팔렸고, 영혼세계에 대한 깊은 체험을 바탕으로 쓴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신문연재도 저서만큼이나 많다. 1991년 월간 「직장인」에 「車박사의 석세스 프로모터」를 연재, 직장인들에게 삶의 재미와 지혜를 안겨 주었고, 1991년 3월에는 토요신문에 6·25 전후 빨치산 전투를 배경으로 한 자전적 소설 「미완의 약속」을 발표했다. 前生(전생)에 관해 사회적 관심이 대단했던 1998년에는 스포츠서울에 「쇼킹 前生의 X-파일」을 연재, 스타들의 前生을 밝히기도 했다. 1999년에는 일간스포츠에 「靈媒(영매)의 고백」이라는 코너를 담당, 평범하게 살아가고픈 靈媒의 고뇌를 흥미롭게 털어 놓았고, 올해 초부터는 스포츠조선에 「고스트버스터 車吉辰의 영혼 이야기」를 인기리에 연재중이다.
『저 사람은 오래 못 산다』
1998년 6월 초, 서울 용산의 캐피탈 호텔 한식당에서 필자의 주선으로 車吉辰 법사와 풍수지리가 孫錫佑(손석우)옹, 그리고 某 고위 경찰 간부가 자리를 함께 했다.
上通天文(상통천문)한다는 車법사와 下達地理(하달지리)한다는 孫도사의 만남은 우주와 철학을 논하는 선문답식 高談峻論(고담준론)으로 시종일관했다.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오래된 道伴(도반)을 만난 것처럼 談論(담론)이 풍성했다. 이날 자리가 끝날 무렵 필자는 孫옹에게 이런 제의를 했다.
『오는 6월20일 오후 3시 지리산 화엄사에서 車법사의 선친 車一赫 총경을 위한 공적비 제막식이 열립니다. 車一赫 총경은 6·25 전쟁 때 빨치산의 온상이라는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지만 문짝만 불태워 국보인 화엄사 각황전을 보존시킨 분입니다. 이를 기리기 위한 제막식에 같이 가면 어떻겠습니까』
孫옹은 『마침 화엄사에 가고 싶었다』며 『내가 그 자리에 꼭 참석하겠습니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車법사가 느닷없이 『아마 가지 못할 겁니다』라며 찬물을 끼얹었다. 며칠 뒤 車법사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두고 보십시오, 저분은 살 날이 별로 안 남았습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6월20일 화엄사에 도착하니 孫옹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무렵 갑자기 쓰러져 두 달 뒤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화엄사에서 열린 故 車一赫 총경 공적비 제막식에는 宋月珠(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공적비의 비문은 詩人 고은이 썼다.
필자가 전남 나주의 동신대학교에 재직할 때, 지방 여행중이던 車법사가 들렀다. 車법사와 함께 학교 근처 경원유원지 부근의 음식점에 갔다가 항상 비치돼 있는 화투가 있어 車법사의 신통력을 시험해 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화투를 뒤집어 놓고 맞춰 보라고 했다. 세로가 아닌 가로로 화투를 섞은 車법사는 화투장을 한 장씩 뽑아내면서 무슨 패인지를 모두 알아 맞췄다.
미심쩍어 한 번만 더 해보자고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는 동행한 여교수의 속옷(?) 색깔까지 정확하게 말해 여교수의 얼굴을 붉히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靈 능력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면서 다시는 자신을 시험하는 장난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와의 시간은 이처럼 흥미진진하다. 작게는 화투장 놀이부터 크게는 인류의 미래까지 들려 주며, 사람을 편하게 해줌과 동시에 끊임없이 샘솟는 지혜를 안겨 준다. 이 모든 것은 그가 겪어온 험난한 세월들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유년 시절
車吉辰 법사는 1947년 전주 태평동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부터 그는 특이한 아이였다고 돌아가신 그의 모친은 필자에게 술회했다. 만 세 살 때, 6·25가 발발하면서 어린 吉辰은 갑자기 실어증에 걸렸다고 한다. 전쟁이 터지고 남쪽으로 피란민이 몰려오던 무렵, 吉辰은 어머니 팔을 끌고 전투가 치열한 북쪽으로 가자고 했다. 逆피란이었다. 당시 그의 부친 車一赫은 육군 7사단 소속 대위로서 소백산에서 전투중이었다.
그 도중에 생긴 일화 하나. 피란 길에 水原 근교의 民家에서 잠을 청하던 중, 어린 吉辰이 옥수수가 먹고 싶다며 어머니를 졸라 근처 옥수수 밭으로 나갔다. 먹을 만한 걸 구하려고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民家(민가)로 돌아왔더니 이게 웬일인가. 방금 전까지 있었던 民家가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진 것이다. 母子가 옥수수를 따러 나간 사이에 民家에 폭탄이 떨어져 그곳에 묵고 있던 피란민들이 몰살당했다.
그가 다섯 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한쪽 팔 부상으로 軍에서 제대하고 18전투경찰 대대 대대장(경감)으로 특채되어 전북 任實(임실) 경찰서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때 吉辰은 동네 아이들과 숨박꼭질하다 방공호 안에서 남녀노소가 뒤섞인 한 무리의 영혼들을 보게 된다. 이 말은 들은 그의 부친은 방공호에 얽힌 사연을 수소문해 보았다.
문제의 방공호는 6·25 전쟁 초기 북한군 치하에 있을 때, 軍警(군경) 가족과 우익 성향의 양민들이 무차별 학살당했던 곳이었다. 아들의 부탁을 받은 부친은 죽은 영혼들을 위한 천도제를 올려 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 任實 경찰서장으로 재임하던 車一赫 경감은 「抗美(항미) 연대 연대장」격인 외팔이 빨치산 李相允(이상윤)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려 총경으로 진급, 서남지구 제2연대장으로 영전하게 된다.
영혼을 보기 시작한 후, 吉辰은 큰 비극을 겪게 된다. 1958년, 그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때, 밤마다 아버지가 물 속에 잠기는 영상이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경찰서장 관사 마당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 靈駕가 무언가 말하고자 했던 애처로운 눈길도 잊혀지지 않았다 한다. 그러다, 기어코 사건이 터졌다.
여름이 끝나가던 어느 날, 吉辰은 公州(공주) 경찰서장이던 부친을 따라 금강으로 물놀이를 갔다. 엉덩이에 큰 종기가 났던 그는 왠지 가기 싫었지만 어른들 손에 끌려 따라갔다고 한다.
이날 금강에서 수영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졌다. 곧이어 수색작업이 벌어졌다. 공주경찰서 직원과 소방대원들이 동원돼 실종된 車一赫 서장을 찾았지만 옷조각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울다 지친 吉辰은 잠시 꿈을 꾸게 된다. 물 속에서 가라앉은 탱크를 끌어안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영상으로 떠올랐다.
『탱크 있는 데 아버지가 계세요!』
수소문해 본 결과, 현장에서 2㎞ 떨어진 곰나루 부근에 渡江(도강)하다 가라앉은 북한군 탱크가 있었는데 차갑게 식은 車一赫 총경의 시신이 그곳에 있었다.
『아버지!』
吉辰은 아버지의 시신을 대하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시신의 다섯 군데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반가운 사람이 오면 터진다는 피였다. 吉辰은 죽은 아버지의 선명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 죽다니 억울하구나. 통일만은 꼭 보고 싶었는데…. 그때까지 나는 알류강(압록강)에 있겠다』
「시한부 인생」 선고받다
吉辰의 유년 시절은 충격적인 아버지의 죽음 등 아픈 추억으로 남았다. 그 뒤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이사와 지내는 한동안 영혼과의 어떤 접촉도 없었다.
吉辰이 덕수중학교 1학년 재학중 4·19가 터졌다. 그는 시위현장에서 또 한 번의 靈的 체험을 갖는다. 소방차 위에서 『타도! 이승만』을 외치던 선배가 바로 옆을 지나던 전동차용 고압선에 감전돼 그대로 추락사하는 장면과 함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현상을 목격하게 되었다.
서울 경신고 2학년 재학중에는 옆집 대문에 弔燈(조등)이 걸려 있는 幻影(환영)이 보였고, 그 다음날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옆집 아주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吉辰이가 차돌을 쥐면 차돌에 손자국이 깊이 패고, 화가 나면 吉辰이 차고 있던 시계가 갑자기 멈춰 버리는 이상한 사건들이 잇따라 터졌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동국대 경찰학과를 지망할 것인지, 육군사관학교를 지망할 것인지를 놓고 갈등하다 동국대 경찰학과에 응시해 합격했으나 이내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시험을 준비해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한다. 하지만, 이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학교를 다니면서 돈을 벌 수 있는 곳을 원했던 것이다.
이듬해인 1968년, 그는 건국대 야간 법경대학에 응시해 전체 차석으로 입학하고, 당시 서울 을지로3가 한일은행 빌딩에 있던 경부 고속도로 건설사무소에 취직했다. 도로공사의 前身(전신)이었던 이곳에서 그의 靈 능력이 시도때도 없이 일어났다. 함께 일하던 총무과 직원 某씨가 곧 감옥에 가게 될 인데, 얼마 후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되리라는 것을 예언했고, 사무소 관리과장이 소개해 준 어떤 부인에게는 남편의 승진 사실과 승진 날짜를 알려 주었다. 그가 예언한 날에 그 사람은 공병감으로 승진했다.
이 일이 소문나자 청소부 아줌마에서부터 사무소 全직원의 부탁이 줄을 이었다. 밀려드는 면담 요청에 그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직장을 그만둔 후, 법학연구실에 들어가 사법시험 준비에 몰두하던 중 그는 심한 독감에 걸려 괴로워하다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그에게 죽음을 선고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결핵성 관절염에 폐결핵으로 폐 한쪽이 모두 썩은 상태입니다. 젊은 나이에 유감입니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를 「시한부 판정」이었다.
대학시절엔 미팅에서 만난 여자 파트너의 속옷 색깔을 맞춰 퇴짜도 맞고, 등록금 때문에 걱정하던 친구에게 시험문제를 찍어 줘 장학금까지 받게 해줬던 그였지만, 폐결핵에 걸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상, 그는 세 발자국만 걸어도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임종을 앞둔 「말기 폐병 환자」였다.
시련기
내일이 불투명한 그는 투병을 위해 무작정 길을 떠났다. 발길이 머문 곳은 충남 공주의 마곡사. 그는 마곡사 부근의 토굴에서 기침을 할 때마다 각혈을 하며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필사적인 투병생활을 했다. 이곳에서 그는 前生에 불(火)로 운명한 아버지와 금강산 마하연사에서 참선을 하는 前生의 자신을 본 이후, 아버지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대화할 수 있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6개월여의 목숨을 건 수도생활 끝에 그는 건강을 회복했다. 그후 그는 그동안의 삶을 반추하며 자신을 숨기고 여기저기 떠돌며 온갖 궂은 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다 부산까지 내려갔다. 1969년이었다. 그는 부산역 광장 근처 목욕탕에 때밀이로 취직했다. 1971년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그는 때밀이 생활을 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목욕탕집 안주인의 죽은 남편은 남로당 경남지부 문화부장으로 있다가 총살당했다. 금년 7월 車법사는 부산에 내려가 목욕탕집 안주인을 위해 팔순 잔치를 베풀어 보은했다.
시시때때로 발휘되는 靈능력을 애써 숨기며 열심히 때를 밀었던 그는 그를 알아보는 동창들이 목욕탕에 찾아오자 때밀이 생활을 청산하게 된다. 그 뒤 車법사는 평범하게 살겠다는 생각으로 지금의 부인과 결혼하고 부산에 정착했다.
그러나 車법사는 자신이 평범하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말한다. 밤마다 자신의 주위를 떠도는 빨치산 靈駕들, 선친과 인연을 맺은 靈駕들의 울부짖음에 괴로워하며 이들의 영혼을 달래야 하는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자문을 거듭했다. 그는 집안 살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국의 사찰과 암자를 돌아다니며 불법에 정진했고, 주변에 초상이 나면 殮襲(염습·죽은 사람의 몸을 씻긴 뒤에 옷을 입히고 염포로 묶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1974년 정부는 故 車一赫 총경을 국가유공자로 선정하고 공덕비를 세우라며 유가족에게 300만원을 전달했다. 車법사는 이 돈을 지리산 부근의 9개 사찰에 보내 빨치산 薦度(천도)를 위해 佛事를 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중앙정보부 조사를 받게 되었다.
조사를 마친 정보부는 車법사가 朴대통령의 만수무강을 위해 佛事를 했다고 보고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具滋春(구자춘) 서울특별시장 시절에 국가 유공자에게 주는 용달차 면허 허가를 받아 사업가로 변신하게 되었다. 「귀신은 공짜밥을 먹지 않는다」는 말을 車법사 스스로 실감한 셈이 되었다.
1979년 10월17일, 維新(유신) 기념파티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중앙정보부의 고위 간부가 『朴正熙 대통령과 저녁을 하기로 했다』며 자랑했다. 그런데, 구석에서 잠자코 있던 한 청년이 『朴正熙 대통령은 10월26일 이후에 밥숟가락을 들지 못하니, 댁에서 저녁 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고 핀잔을 줬다. 고위 간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하면서도 평소 버릇대로 수첩에 그 말을 메모했다.
「車모 법사, 10월26일 이후 朴대통령 밥숟가락을 못 들게 될 것이라 언동」
이것이 화근이 될 줄이야. 朴대통령 시해 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되면서 수첩의 메모가 문제가 되었다. 『암살이 사전에 계획된 것 아니냐』는 수사관들의 집요한 추궁에 車법사는 곤욕을 치렀지만 神力(신력)의 도움이 있었던지 무관함이 증명되었고 「車씨 성을 가진 예언가」 얘기가 파다하게 퍼졌다.
그 직후 車법사는 몸을 숨기고 칩거하면서 그를 찾는 정계 인사들의 측근에게 「국가 중대사」에 대해 「암시」를 던져 주며 영계와 통하는 堂上卜者(당상복자)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필자에게 고백했다.
靈능력자로 다시 태어나다
자신의 靈능력을 「종교」로 발화시키고자 결심한 車법사는 조계종 포교사가 되어 법당을 설립한다. 최초 법당이 서울 남산의 후암동 가정집에 설립한 「厚岩精舍(후암정사)」다. 이 집은 日帝 때 경무국 국장의 관사였고, 그 뒤 영화배우 김지미씨와 前 법무부 장관 李모씨가 살았다. 평소 車법사를 존경하던 사람이 이 집을 사서 마음놓고 쓸 수 있게끔 빌려 준 것이었다.
땅의 기운이 대단해 법당으로 쓰기에 適地(적지)였던 이 집에서도 해프닝이 있었다. 법당을 차린 직후의 어느 날, 쏟아지는 폭우로 집에 빗방울이 새기 시작했는데 법당에 모셔 놓은 부처님 상 뒤에서 『어서 오십시오』라는 일본 여성의 음성이 들린 것이다.
두리번거리는 車법사 앞에 백색 기모노를 정갈하게 차려입은 모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천하 절색인 이 모녀 靈駕는 車법사에게 『부디 저희들의 恨을 풀어주세요』라고 절하고는 사라졌다 한다.
이 靈駕는 일제시대 경무국장의 아내와 딸로 그 집에서 전염병으로 숨졌는데, 수 십 년이 지나도록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車법사는 집주인과 함께 연탄 아궁이가 있던 지하실에 팥죽을 떠놓고 靈駕들을 위로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집주인은 某 자동차 회사의 서울총판권을 따내 벼락부자가 되었다 한다.
이런 類(유)의 입소문이 퍼져 그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자 車법사는 혼자 공부하고 정진할 장소가 필요해 서울 잠실로 厚岩精舍를 옮겼다. 이곳은 마라난타(백제에 최초로 불교를 전파했다는 인도의 승려)가 최초로 불법을 전파시킨 자리로 알려져 있으며, 근처 백제고분은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이라고 한다.
법당을 옮긴 뒤, 그는 특정한 날에만 법당 문을 열었다. 厚岩精舍가 문을 여는 날은 救命施食과 車법사와의 면담이 있는 날 뿐이다. 잠실로 이사한 뒤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車법사는 미국行을 결심했다고 한다.
미국 뉴저지 厚岩精舍 시절
1990년 미국 뉴저지에 정착한 그는 교포들에게 희망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라디오 1480」이라는 在美교포 라디오 방송국 설립에 나섰다. 그 당시 뉴욕에는 FM 라디오가 잘 나오지 않았고 나온다 해도 대부분이 미국 현지 라디오 방송으로 교포사회와는 상관이 없었다. 이에 車법사가 『在美교포만의 라디오 방송국을 갖자』고 제안했으나 교포사회의 파워가 약해 설립 허가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집념 어린 노력으로 「라디오 1480」이라는 在美교포 라디오 채널이 탄생했다. 동아방송 출신 김병오씨와 고려대학교 출신의 여걸이었던 김혜련씨의 합작품이었다.
「라디오 1480」을 운영하던 시절, 車법사는 방송의 위력을 십분 활용, 마피아와 담판 승부를 지었다. 뉴욕 사회에서 在美교포가 성공하는 지름길은 델리 가게나 슈퍼마켓 경영이었다. 이 경영에서 가장 이윤이 많은 장사가 꽃 장사인데, 불행히도 꽃시장 독점권을 마피아 조직이 쥐고 있었다.
車법사는 이를 지켜볼 수 없어 마피아를 향한 기상천외의 테러를 구상한다.
『동부의 라스베이거스라 불리는 애틀랜틱 시티의 카지노를 대부분 마피아가 소유했는데, 主고객이 우리 한국인이었습니다』
이 점에 착안, 그는 「라디오 1480」을 통해서 카지노 출입금지 캠페인을 벌였다. 덕분에 애틀랜틱 시티의 카지노에 한국인들의 발길이 끊겨 마피아의 수입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마피아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그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카지노에 출입하지 말라는 권고 방송을 중단하는 대신, 마이애미 직판장과 꽃을 직거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도 교포 분들이 카지노에 가지 않아 마피아들은 적자를 보고 말았습니다』
1991년 9월4일자 주간지 토요신문에는 前 주한 미군사령관 고문 제임스 H. 하우스만 최초 인터뷰란 기사가 실렸다. 하우스만은 35년 간 한국에 체류하며 한국군 총참모장의 특별고문, 美 육군성 한국담당관, 주한 美8군사령관 특별고문 등을 역임한 한국 정보통이다. 인터뷰어는 토요신문 비상임 편집위원이었던 車법사였다. 입 안 열기로 소문난 고집불통 미국 노인을 설득해 특종 인터뷰를 한 것이다.
이 인터뷰에서 하우스만은 대한민국 건국에서부터 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대통령의 성격을 이렇게 분석했다. 李承晩 대통령은 미국의 약점을 교묘히 이용한 분이며, 朴正熙 대통령은 즉흥적인 성격이라 껄끄러운 사이였고, 全斗煥 대통령은 우회할 줄 모르는 정통 군인이며, 盧泰愚 대통령은 德이 있는 사람이라 평가했다. 車법사는 하우스만을 이렇게 평가했다.
『하우스만은 아주 치밀한 인물이다. 장시간의 인터뷰 중, 한국어에 능통하면서도 영어를 구사했고 한국에 익숙하면서도 단 한 번도 한국적 습관을 드러내지 않았다』
車법사는 1996년 봄, 햇수로 6년 만에 서울 성파구 잠실의 후암정사로 돌아왔다.
救命施食
1998년 10월30일 밤 11시15분, MBC TV는 「다큐멘터리 이야기 속으로-車吉辰의 영혼탐험」을 방영키로 예고했다. 救命施食 사례들을 취재한 이 프로그램은 그러나 방송이 되지 않았고, 그 한 달 뒤에 「車吉辰의 영혼탐험」 일부분만 방송되었다. 이 방송도 본래 50분 분량이었으나 대량 삭제당한 뒤 15분짜리 에피소드 중심으로 방송되었다. 장장 7시간 동안 救命施食 장면을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하던 도중 갑자기 카메라에 화면이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10년 경력의 카메라맨은 『이런 일은 처음이다』고 말했다.
삭제당한 내용은 救命施食 후 살아난 뇌사자의 증언과 우리나라 연극계의 중진인 밀양연극촌 대표 李潤澤(이윤택)씨의 前生 체험담 등이다.
MBC 측은 『救命施食은 과학적인 검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부득이 방송을 취소하게 되었다』고 일간지를 통해 해명했다. 車법사는 『한국은 영혼세계에 대해 상당히 닫혀 있지만 언젠가는 영혼세계가 증명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救命施食은 車법사의 특허품이다. 목숨을 구한다는 救命施食은 한밤중에 이뤄진다. 불이 꺼지면 鬼哭聲(귀곡성·귀신의 울음소리)에 맞춰 영혼을 달래는 살풀이춤과 곡조마다 절절한 恨이 배어 있는 巫歌(무가)가 참관자들의 심금을 울린다.
車법사의 짧은 법문이 끝나고, 한 차례 영혼의 마음을 풀었다 죄고 나면, 그날 오는 靈駕들을 招魂하는 순서가 기다린다. 이 순서에서는 그야말로 각본 없는 드라마가 연출돼 책을 내도 끝이 없을 만큼 구구절절하고 기가 막힌 사연들이 넘쳐난다. 조선대 의대 전홍준 교수는 『구명시식은 훌륭한 종합예술이다』고 평했다.
필자는 1980년 광주사태와 관련해 해직되고 투옥되었다. 이 일로 필자의 어머니는 心火病(심화병)을 얻어 뚜렷한 병세도 없이 쉰네 살에 돌아갔다. 어머님을 천도하기 위해 필자도 車법사로부터 구명시식을 받았다. 필자는 車법사를 통해 어머니와 영혼 대화를 하고 나서 半信半疑(반신반의)하던 영혼의 문제에 대해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귀신을 불러내 대화한다는 현장을 직접 목도하고는 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海公 선생 急逝의 의문
산 자와 죽은 자가 交通(교통)하는 救命施食은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현장이다. 까닭에 車법사는 역사 속에서 의문사 당한 한국의 위인들을 救命施食에 초청, 그들의 恨을 달래 주곤 했다. 대통령 당선을 눈앞에 두고 急逝(급서)한 海公 申翼熙(신익희) 선생 靈駕를 부른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나는 평소 홍차를 즐겼다. 당시 호남선 열차를 타고 자리를 잡았을 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홍차를 한 잔 마셨을 뿐이다. 그런데, 마시고 난 뒤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는 한 마디 말도 못 하고 죽은 것이다』
海公 선생 靈駕의 주장은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海公 선생은 걸물답게 자신이 암살당한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원망하거나 저주를 내리는 언동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제헌국회 의원이었던 趙漢栢(조한백)씨는 海公의 죽음에 대해 『홍차를 마신 뒤, 병원으로 가기 전 사망했다. 심장마비사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車법사는 4·19 직후 발생한 李起鵬(이기붕) 부통령 일가족 자살 사건에 대해서도 『그들처럼 묘한 죽음은 없습니다』며 死因(사인)에 의문을 제기했다. 李起鵬 일가의 구명시식에 나타난 李起鵬 靈駕는 車법사에게 『강석이가 죽인 게 아니라, 외부인에 의한 일가족 몰살사건이다』고 주장했다 한다.
4·19 당시 1군 부사령관이었던 민기식 장군은 『이기붕 일가족 자살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심증만으로는 부족하나 절대로 이기붕씨가 자결할 생각으로 아들에게 총을 쏘게 할 인물이 아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법무관으로 현장을 지켜본 李宅敦(이택돈) 前 국회의원 역시 車법사에게 『자살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따라서 이 사건은 조작이라는 심증이 간다』고 증언했다.
車법사가 靈駕로 만나본 이기붕씨는 상당히 온화한 사람이었으며, 감리교 신자라 자살할 분이 아닌 듯했다고 말한다. 車법사는 더 이상의 의문은 제기하지 않았다. 진실은 죽은 자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救命施食에는 섬뜩한 엽기괴담도 있지만, 훈훈한 미담도 많다. 지난 1월호 某 월간지에는 車법사가 주관한 救命施食에서 효험을 본 「경주 최 부잣집 스토리」가 소개되었다. 3代도 힘들다는 부자를 12代까지 잇게 한 경주 최 부잣집에는 나름대로의 비결이 있었다. 그것은 대대로 내려오는 家訓(가훈)을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가훈은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말 것, 재산은 만 석 이상 모으지 말 것.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 가훈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 집의 장남이 한두 번도 아니고 열 번이나 사법고시에 낙방한 것이다. 그 어머니가 찾아간 사람이 車법사였다. 車법사는 돌아가신 최씨집 증조부께서 손자가 판사되는 것을 막고 있었는데, 이는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는 가훈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車법사는 救命施食에서 증조부를 설득, 벼슬을 하지 않겠다는 가훈을 어기지 않겠다 맹세하고 검사가 아닌 변호사로 활동하겠다 약조한다. 이듬해, 손자는 열한번째 도전 끝에 사법고시에 합격하니 救命施食의 영험함을 직접 체험하고는 기쁨을 금치 못했다 한다.
車법사는 救命施食의 세계를 이렇게 말했다.
『地藏經(지장경) 제7품에 「죽은 자를 위해 제를 베풀면 죽은 자는 그 은공의 7분의 1을 갖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산 자가 7분의 6을 갖는다는 말이나, 엄밀히 따지면 죽은 자는 100% 중 단 1%만 가져가고 나머지 99%는 산 자의 차지입니다. 救命施食은 죽은 자를 위한 천도의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나를 위한 천도의식으로 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孝가 중요합니다. 조상에게 잘하면 내게도 복이 오니까요』
그래서일까. 그는 유달리 돌아가신 아버지 車一赫 총경과 어머니 진복희 여사에게 최선을 다했다. 돌이켜보면, 그가 행했던 이벤트는 모두 부모님을 위한 효도였다. 車법사는 후암정사 법당에 나란히 모셔놓은 부모님 영전에 매일 기도한다. 두 분은 車吉辰 법사에게 있어서는 부모님임과 동시에 그를 지켜 주는 수호신이다. 강력한 아버지 靈駕가 있었기에 그동안 숱한 靈駕들의 공격에 버텨낼 수 있었고, 어머니의 무서운 모성애로 救命施食에서 「한 생각」도 놓지 않고 매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적중 예언을 쏟아내는 車법사는 『예언은 틀려야 한다』는 아이러니컬한 믿음을 갖고 있다. 그는 예언을 쉽게 던지지 않는다. 자신은 셀 수 없을 정도의 크고 작은 예언들을 적중시켰지만, 불행한 예언들은 맞지 않았으면 한단다. 그런 그에게 現정국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물어 보았다.
한국의 미래는 밝다
─한국의 미래는 어떤 모습입니까.
『2024년에 한국은 최고의 브레인을 보유한 국가가 됩니다. 全세계에 유학중인 한국 人材들이 우리의 소중한 재산입니다. 21세기 한국은 몽골과 하나가 되어 全 세계에 國運을 떨치게 될 것입니다. 중국령이 된 내몽골을 뺀 현재의 몽골은 반도체를 만드는 희귀한 광석이 무진장 매장된 지하 자원국으로 국토는 한반도의 일곱 배이지만 인구는 200여만명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필요로 합니다. 全 세계 구리 매장량의 70%를 차지하는 자원 부국 몽골과 「넘치는 인구와 기술대국」인 한국이 손을 잡아 몽골리언 벨트를 구축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아주 밝습니다』
─요즘 정국은 잡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과연 밝은 미래가 보장될지 걱정입니다.
『한국은 다소의 시차는 있지만 20년 주기로 큰 변혁이 반복돼 왔습니다. 1900년대 들어 조선 왕조체제가 붕괴하기 시작해 그 20년 뒤인 1919년 3·1 운동으로 일본은 문화정치를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실질적인 의미의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1940년에 일본이 中日전쟁을 벌였고, 이듬해 태평양전쟁을 시작하면서 서서히 패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1945년 광복이 되었습니다. 일제 말기 그 누구도 일본이 전쟁에 지리라고는 생각을 안 해 이광수·최남선 같은 민족지도자들도 훼절해 창씨개명에 앞장설 정도로 광복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지요.
李承晩 정권이 1960년 4·19로 붕괴되고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국가적 변혁이 이뤄졌습니다. 그 20년 뒤 영원할 것 같던 朴正熙 정권도 1979년 10·26으로 막을 내리고 1980년 5·17로 全斗煥 장군을 비롯한 군인들이 정권을 장악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2000년대 초가 바로 이 20년 주기에 해당합니다. 조만간 1980년대 초보다 더 강력한 변화가 와서 혁신을 이룰 것으로 보입니다』
─DJP 공조 붕괴, 민주당 당내 갈등 등 自中之亂(자중지란)을 거듭하고 있는 DJ정권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요.
『혼란의 결과는 白日下(백일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山하고 인연이 많은 이가 등장』
─白日下에 드러난다면 100일 안인데, 그렇다면 금년 중에 모든 게 결정된다는 말인가요.
『그렇죠. 20년 주기설에 해당하는 금년 연말을 전후해 엄청난 국가적 변혁이 불가피합니다. 사회 곳곳의 독버섯이나 사상적 혼란이 수습되어 씻겨 나가는 큰 홍수가 올 것 같습니다』
─차기 대권은 어떻게 됩니까?
『제가 말하게 되면, 하늘은 다른 사람을 찍을지도 모릅니다』
─암시만이라도 주십시오.
『동해의 용오름 현상을 보셨죠. 갑작스레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물기둥처럼, 오랜 기간 정치권에서 潛龍(잠용)하다 승천하는 이가 대권을 잡을 것으로 봅니다』
─潛龍이라면 용띠 生을 상징하는 말입니까.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있는, 독재자형인 리더가 정치권에서 등장할 것입니다. 내년 5~6월쯤이면 그 정체가 서서히 드러날 것입니다. 李光耀(이광요) 前 싱가포르 수상 같은 스타일의 리더로서 山하고 인연이 많은 이가 등장할 것입니다. 히틀러 같은 독재자는 곤란하지만 선의의 독재자가 필요한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내년 5~6월이면 여야의 전당대회와 맞물리는데요.
『그때와 맞물려 모습을 드러냅니다』
─최근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 맨해튼과 국방부에 테러가 있었는데, 한국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발생할 우려는 없습니까.
『한국은 동북아 4강의 이익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된 곳입니다. 중국은 세계 제1의 인구를 갖고 있는 나라로서 미국과 경제·문화적인 충돌이 예상됩니다. 2002년 월드컵을 한국과 공동 개최하게 될 일본 역시 경제대국인데, 현재 일본은 경제만으로는 안 된다는 정신적인 위기에 쌓여 자위대를 강화하는 등 정치·군사적인 면으로 대국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미국과 군비 경쟁에서 패퇴한 나라이지만 핵무기와 우주 정거장 등 막강한 군사력과 첨단과학의 국가입니다. 초일류 강국인 미국은 한국에 교두보를 두고, 한국의 모든 군사 작전권을 미군에 귀속시킨 상태입니다. 이를 종합적으로 고찰해 볼 때, 한국이야말로 태풍 속의 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풍 속에서는 바람도 안 불고 조용하지만, 태풍을 감지하지 못하는 곳이 태풍의 눈입니다』
물 테러 위험
─남한에 테러가 발생할 경우 가장 우려되는 사항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물입니다. 인구 1000만명이 서울에 밀집되어 있고, 수도권에 1500만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엄청난 인구의 식수원은 팔당 수원지입니다. 식수원 주변에는 차량 통제가 엄격하지만, 신경가스 운반차라든지 기름탱크를 적제한 트럭이 추락해도 3분의 2의 인구는 물을 공급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어떻게 대비를 하면 됩니까.
『미국 LA만 해도 처음에는 후버댐에서 오는 송수관이 하나였으나 테러를 대비해 다섯 개로 분산했으며, 독일도 히틀러 때부터 한 곳의 수원지에 의존하는 것을 피해 다변화를 시도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테러보다 물에 대한 공격이 가장 심각한 테러입니다. 이런 점에서 동강댐 백지화는 再考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경제는 어떻게 됩니까.
『현재 한국은 중국 농수산물로 인해 농수산물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상태에 다다랐습니다. 식탁의 90%가 중국産 농수산물입니다. 모든 전자제품과 자동차까지도 중국産의 침투가 예상됩니다. 이를 미리 조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독특한 문화상품을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동차만 해도 그렇습니다. 자동차라는 것은 산업의 구조상 경쟁업체가 있어야 합니다. 독점은 毒藥과 같습니다. 경쟁사가 없을 경우, 외제차가 빠르게 한국 시장을 잠식해 나갈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올바른 지도자가 나오고, 단결된 힘을 보여 준다면 한국은 세계의 중심에 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통일은 언제쯤 되겠습니까.
『이미 靈界에서는 통일이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가 마음 상하지 않게 합치는 것입니다. 恨이 맺힌 상태에서 통일이 되면 禍(화)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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