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고개 순교성지는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성지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서 41명의 순교자가 목숨을 잃은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이곳 저잣거리의 상인들은 음력설 대목장에는 처형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여 서소문 밖 형장을 피해 조금 한강가로 나간 곳이 당고개다. 원효로 2가 만초천(蔓草川) 변에 위치한 이곳은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 양일에 걸쳐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장소다.
6호선 삼각지역 11번 출구로 나와 3번 버스를 타고 e편한세상 하차를 하면 신계역사 공원 이정표가 나온다.
신계역사 공원 안에 당고개 순교성지가 있다.
신계역사 공원 안내도
신계역사 공원
신계역사공원은 종교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던진 순교자들의 영혼이 차분하고 단아한
한옥에 머물고 있는 천주교 순교성지이다.
당고개 순교성지
당고개 순교성지는 9분의 성인과 '복녀' 이성례(마리아)가 순교한 곳으로 1839년 기해
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땅이다.
"당고개 순교성지" 라는 이해인 수녀님 시비
당고개 순교 성당
온화한 표정의 한복을 입고 계신 당고개 성모님께서 우리를 맞이해 준다.
성당 내부
성당 안은 온통 노란 빛으로, 노랑은 ‘하느님 나라’를 상징하며, 제단은 흰돌로 꾸며 '하느님의 영광'을
표현하고 있다.
제대의 구유모양의 십자고상 위로는 원형의 유리창을 두어 제대에 빛이 들어오도록
설계되어 있다.
전시관
‘천국’과 ‘순교’를 표현한 그림들과 당고개 순교자들의 성인ㆍ복자화, 복녀 이성례의
일생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꾸며져 있다.
한복을 입은 성 가족상 옆에 아기를 업고 있는 이가 바로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복녀 이성례다.
1839년 12월27일 박종원(아우구스티노), 홍병주(베드로), 손소벽(막달레나), 이성례(마리아), 이경히(아가타), 이인덕(마리아), 권진이(아가타) 등 일곱분이, 12월 28일 홍영주(바오로), 이문우(요한), 최영이(바르바라) 세 분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이 분들 중 9명의 순교자는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되었고, 최양업 신부님의 어머니인 이성례(마리아)는 2014년 프란체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기도실
전시실 한쪽에는 기도실이 마련돼 있는데 한복을 입은 ‘당고개 성모님’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1801-1839)
최창흡베드로 성인의 아내이자 최영이 바르바라 성녀의 어머니로 "제 목숨은 제 것이 아
닙니다.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삶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천주를 배반해야 할 터이니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라고 당당하게 신앙을 증언하셨던 분이라고 한다.
성녀 최영이 바르바라(1818-1839)
성녀는 최창흡 베드로와 손소벽 막달레나의 11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혼인을 할 때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부유함이 아닌 오직 "저는 그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글을 많이
배운 혼인했으면 한다"고 말하며 성가정을 이루기만을 원하였다. 기해년 7월에 체포된
성녀는 "죽을지언정 천주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하고 답변하시고 순교하였다.
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노(1792-1839)
일명 '이선'이라고도 불리는 성인은 약국의 거간꾼으로 서울의 중인 교우 집에서 출생했다.
고순희 바르바라 성녀의 남편이기도 한 성인은 가장으로서도 훌륭했고, 편신도 회장으로서
겸손하고 온유하며 친절한 성품을 지녔던 분이셨다고 한다.
성 이문우 요한(1809-1839)
성인은 5살 때 부모를 여의고 독실한 신자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결혼해 두 자녀를 두었지만,
아내와 자식을 모두 잃고 모방신부의 복사를 하면서 전교에만 온 힘을 다했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된 교우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의연금을 모으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다가
자신도 체포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셨다.
성녀 이경이 아가타(1813-1839)
성녀는 천주교인 양반집에서 태어나 고자에게 속아 혼인했다가 앵베르 범 주교에 의해
혼인 무효판정을 받은 후, 친정을 떠나 권진이 아가타 모녀에게 의탁하여 열심히 계명을
지키며 살았다. 기해년에 체포되어 옥고 6개월만인 27세에 당고개에서 참수로써 동정과
순교의 이중 월계관을 쓰셨다.
성녀 권진이 아가타(1819-1839)
성녀는 양반가의 딸로 13세에 혼인을 했으나 남편이 너무 가난해 데려가지 못하고 있다가,
유방제 신부의 식복사가 된 성녀는 기해박해로 형조로 끌려가 "나는 교우요, 죽는 날까지
교우로 있겠습니다."라고 당당히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던
아픔을 하늘을 향한 열정으로 바꾸셨다.
성녀 이인덕 마리아(1818-1839)
어머니는 조 바르바라이고, 언니는 이영덕 막달레나로 천성이 온유하고 조용했던 성녀는
외인인 아버지의 반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교우 집으로 피신하여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나, 기해박해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목격하는 시련과
서소문에서 순교하는 언니를 떠나 보내는 고통을 겪으며 당고개에서 22세로 순교함으로
동정과 순교를 동시에 완성하였다.
성 송병주 베드로(1798-1839)
홍영주와 홍병주 성인은 형제로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복자' 홍낙민 루카는 할아버지고,
전주에서 순교한 홍재영 프로타시오가 삼춘이다. 신앙의 유산으로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천상의 행복을 꿈꾸던 형제들은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선교사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죄로 체포되어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지켜내었다.
홍영주바오로(1801-1839)
홍병주와 홍영주 성인은 형제로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복자' 홍낙민 루카는 할아버지고,
전주에서 순교한 홍재영 프로타시오가 삼춘이다. 신앙의 유산으로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천상의 행복을 꿈꾸던 형제들은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선교사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죄로 체포되어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지켜내었다.
복녀 이성례 마리아(1800-1839)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아내이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인 순교자는 기해년에
체포되어, 한 때 옥에서 죽어가는 어린 자식 때문에 흔들렸지만 맏아들 최양업 신부로
인해 다시 체포되었을 때는 용감히 배교를 취소하고 끝내 순교하였다.
성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복녀 이성례 마리아가 큰 아들 최양업 신부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서는 모습과,
신앙생활을 하는 중 감시 당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신앙을 위해 한 밤중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보습이다.
최양업신부가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으로 떠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체포하러 온 군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순교지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그린 장면이다.
옥에서 죽어가는 어린 막내 아들 때문에 흔들리는 성녀의 고통을 바위에 눌려 있는 모습으로, 그 아들이
죽어 하느님께 보내드리는 모습이다.
어린자식들 때문에 배교하게 될 것이 두려워 자녀들을 외면하는 모습과, 옥으로 찾아 온 둘째 아들의 머리를 빗어주면서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하는 장면이다.
순교할 수 밖에 없었던 어머니를 위해 자식들이 희광이를 찾아가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로 가도록 해 달라고 청탁하는 장면과 어머니의 순교장면, 하늘로 보내드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와 그의 가족들
성당 옥상에는 ‘어머니의 품’을 주제로 정원이 꾸며져 있는데, 당고개 성모상과 순교현양탑, 야외 성인상과 제대, 당고개 순교자 모자이크화, 십자가의 길 등이 조성되어 있다.
찔레꽂은 순교자들의 박해의 칼 아래 흘린 피를, 매화꽃 향기는 춥고 아픔을 견디어낸
천상의 향기를 나타낸다 이 곳을 찔레꽃 아픔이 매화꽃 향기로 가득 찬 어머니의 성지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쪽에 놓여 있는 장독들이 옛스러움을 더하는 느낌이다.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
십자가의길 중간 중간에 당고개 성인들의 성화가 있다.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시간(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는 기도이며,
고통의 길이라고도 한다.
한복을 입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곳에서 순교한 10분의 순교자들의 청동 부조상이다.
당고개 성모님
순교현양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