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
신용목
어느 날 화분이 배달되었다
나에게도
땅이 생겼다 부드러운
흙, 나는
저기에 묻힐 것이다
화원 앞을 지나다 보면 유리창 너머
관짝들이 황홀하게 놓여 있다 아름다운 봉분처럼
자라는 나무들, 꽃들
스무 평의 적막에도 햇살과 바람이 흠모하듯 스며와
지금은 저기에 양란이 꽃을 피우고 등 구부린 시간이
신혼처럼 살고 있다
내 무덤은 향기로울 것이다
먼 나라의 춤을 추는 나비처럼은 아니지만,
언젠가 꽃이 진 허공, 그 맑은 높이에 나는
내 영혼을 띄워둘 것이다
저 둥긂을 안고 기다리면 아프지 않게 늙을 수 있겠다
수치를 꽃대처럼 비우고 나면
거친 그리움도 이제는 자연사할 수 있겠다, 있겠다
어느 날,
술 취한 발이 화분을 깨뜨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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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용목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에서
신용목 1974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민들레
신용목
가장 높은 곳에 보푸라기 깃을 단다
오직 사랑은
내 몸을 비워 그대에게 날아가는 일
외로운 정수리에 날개를 단다
먼지도
솜털도 아니게
그것이 아니면 흩어져버리려고
그것이 아니면 부서져버리려고
누군가 나를 참수한다 해도
모가지를 가져가지는 못할 것이다
<2004년>
신용목(34)은 젊은 시인이다. 요즘 젊은 시인들 시가 너무 난해하다고 고개 젓는 독자분도 많지만, 오해를 푸시길. '진정성'이라는 말이 낡아 보이긴 해도 예나 지금이나 '진정성' 있는 시의 마음은 통하게 되어 있으니. '진정성'이라는 낡고 오롯한 마음을 바꾸어 말하면 곧 사랑의 마음이겠다. 신용목은 삶에 대한 조촐한 사랑의 마음이 시의 근원자리임을 아는 시인이다. 그래서 신용목은 동시대 사람들의 남루한 삶의 곡절에 진득하니 귀 기울인다. 시를 짓는 그의 태도는 담박한 낡음을 옹호하고 그가 펼쳐 보이는 시의 감각은 청신한 젊음을 섭렵한다. 좋은 궁합이다.
이 시 〈민들레〉는 '오직 사랑'을 향한 간결하고 빛나는 뼈대를 담백하게 드러낸다. 모호함으로 무언가를 감추려 하지도 과장되게 드러내려 하지도 않는다. 설명이 필요 없다. 심심해서 그에게 이 시를 쓴 때가 언제쯤인지 물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왠지 자꾸 실연당한 기분이 들었단다. 실제로 실연당한 것도 아닌데! 세상이 나만 왕따 시키는 것 같은 꿀꿀한 느낌도 그 비슷한 언저리에 있을 게다. 질풍노도의 청춘에 자신이 믿었던 신념, 그것을 실천하는 일의 어려움, 당장 코앞에 닥친 먹고 사는 문제 등이 난마처럼 얽혀 안팎으로 우울하던 때를 겪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란다. 사랑이란 '있지도 않은 약속' 같은 거라는. 그리고 사랑이란 '있지도 않은 약속을 꼭 지키고 싶다는 다짐' 같은 거라는. 어느 날 문득 스스로에게 다짐하기를, 있지도 않은 약속일지 모르지만 자신을 다 걸자! 고 했단다. 그렇게 자신을 다 거는 사람만이 고독할 자격이 있는 것 같다고 사투리 섞인 어눌한 말투로 그가 말한다. 햐! 환하다. 있지도 않은 약속에 자신을 다 걸고 처형되는 민들레처럼.
'밤의 입천장에 박힌 잔 이빨들, 뾰족하다// 저 아귀에 물리면 모든 罪가 아름답겠다// 독사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별의 갈퀴// 하얀 독으로 스미는 罪가 나를 씻어주겠다'(〈별〉). 죄를 씻는 것이 사랑임을, 사랑으로 스스로를 정화하기 위해 사랑의 뾰족한 이빨에 기꺼이 물려야 함을 그는 알고 있다. 아직 젊은데 이 조숙함은 어디서 왔을까. 하긴 그는 지상의 남루를 견디는 갈대들, 그 아버지들 뼛속 바람까지 보는 아들이다.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가장(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갈대 등본〉). 지상의 쓸쓸한 어버이들이여. 수고를 그만 떨치시고 다음 세대로 확산되는 사랑의 풍욕을 즐기시길. 시인 아들이 걸어서 도착할 바람의 끝에서 새로운 사랑의 역사를 받으시길!
아무 날의 도시
신용목
식당 간판에는 배고픔이 걸려 있다 저 암호는 너무 쉬워 신호등이 바뀌자
어스름이 내렸다 거리는 환하게 불을 켰다
빈 내장처럼
환하게 불 켜진 여관에서 잠들었다
뒷문으로 나오는 저녁
내 머리 위로도 모락모락한 김이 나는지 궁금하다 더운 밥이었을 때처럼
방에 감긴 구불구불한 미로를 다 돌아
한 무더기 암호로 남는 몸
동숭동 벤치에서 가방을 열며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내과술에 대해 생각한다
꺼낼 때마다 낡아 있는 노트와 가방의 소화기관에 대해
불빛의 내벽에서 분비되는 어둠의 위액들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 나는
너를 잊었다 너를 잊고 따뜻한 한 무더기
다른 이야기가 될 것 같다
한 바닥씩 누운 배고픈 자들이 아득히 별과 별을 이어 그렸을 별자리 저 암호는
너무 쉬워 신호등이 바뀌자
거리는 환하게 어둠을 켰다 빈 내장처럼
약국 간판에는 절망이 걸려 있다
―《시인세계》2009년 봄호
우연한 序數
신용목
아버지의 세 번째 친자이고 어머니의 구 번째 義子이다 꼭 같은 서수일 필요는 없다 나에게 세 번째인 그녀와 그녀에게 두 번째인 나처럼, 신호등의 순서와 버스의 차례를 보도블록 칸칸으로 밟으며
서점에서는 고객이고 고지서에는 체납자,
자정에는 애인이 된다
사번출구 앞 웨이터 유재석의 명함은 몇 장째일까 꼭 같은 呼稱일 필요는 없다 두 번째로 간판이 바뀐 순대국집에서 아득하게 떠는 첫 술과 마지막 술의 국물처럼
한 옥타브 높은 파 음계의 목소리로,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파 음의 십육분음표로 앉아 오선지 다섯 칸이 다 차도록 술을 마신다 누군가의 첫날이고 누군가의 끝날이며 나의 일만이천오백이십오일째 날, 어떤 이별에게는 일백구십사 일째 영원한 부재의 하루이다
나는 형제들 중 다섯 번째 孤兒이다.
―《시인시각》2009년 봄호
격발된 봄
신용목
나는 격발되지 않았다 어느 것도 나의 관자놀이를 때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폭발하지 않았다
꽁무니에 바람 구멍을 달고
달아나는 풍선
나의 방향엔 전방이 없다 끝없이 멀어지는 후방이 있을 뿐
아무 구석에 쓰러져 한때 몸이었던 것들을 바라본다
한때 화약이었던 것들을 바라본다
봄의 전방엔 방향이 없다 끝없이 다가오는 허방이 있을 뿐
어느 것도 봄의 관자놀이를 때리지 않았으므로 봄이 볕의 풍선을 뒤집어쓰고 달려가고 있다
살찐 표적들이 웃고 있다
—《현대시》2009년 6월호
위험한 서지
신용목
소에게 풀을 먹이고 그것이 뿔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구름의 행군이 오래 계속되었다
집들은 양말처럼 현관을 가졌고
어제가 벗어놓고 간 날씨 같았다.
그 집에 사는 동안 아는 것은 비밀밖에 없었고 모르는 건 소문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침묵
거울에서 가면을 꺼내 쓰고 기다린다 거울이 피부가 될 때까지
가위표 마스크를 쓰고 달력은 날마다 어제 속으로 연행되었다, 가면은 그림자를 오려 만든 것
가위는 혐의를 입증하는 증거이므로
거울은 여러 장의 페이지로 넘어간다
그 집은 너무 많은 그림자로 더러워졌다 구름의 왼발과 오른발 혹은 오리다 만 눈과 코 —그럼에도 침묵!
열릴 때마다 현관은 안과 밖을 뒤집었으며
거울에는 흰 소가 검은 소로 비쳤다,
풀에 받친 바람이 풀 아래 쓰러지듯
소에게 풀을 먹이고 뿔에서 꽃이 필 때까지 기다린다
—《시인세계》2009년 가을호
웅덩이
신용목
네가 펼쳐놓고 간 페이지
끌리는 한쪽
다리로
이제 추억은 바뀌지 않아
휘갈겨 쓴,
구름들
누가 먹다 버린 사과 반쪽
같은
내가 웅덩이를 남기면
얼굴을 비춰주렴
나머지 반쪽은 저무는 해가 베어먹고 있다
붉은 자국
가을처럼,
허공의 웅덩이인 구름
아무도 물의 표면을 닦지 않아서
아무도 빳빳한 첫 장을
열지 않아서
너는 낙엽 한 장 자물쇠처럼 띄워놓았다 그리고
내 고백은 바퀴자국
서서히 내 몸의 진창이 마르고 있어
네 얼굴이
붉게 빛나던 표정이,
절뚝이는 태양 아래
추억의 긴 먼지바람이 분다
ㅡ《시와 정신》2010년 봄호
투명한 순간 (외 1편)
신용목
과거는 주민등록등본 속에 잘 있고
미래는 보험증권 속에 맡겼으니,
이제 최초의 나를 찾으러 가자 —그것은 구름이 허공에 떠 있는 첫 번째 조건
놀이터에 아이가 벗어놓고 간 잠바처럼
그네 위에 앉은 새처럼
나무들이 제 잎의 초록을 산책할 때, 잎에서 그림자까지 투명하게 던져놓은 낚싯줄로 혹은
뿌리가 허공에 펼쳐놓은 그리움으로
내 몸은 의사가 말해주고
생각은 公安의, 검사가 가늠해주니 —이제 최초의 울음이 사라진 그곳으로
최후의 울음을 울러 가자
구름이 허공을 가두는 마지막 조건처럼
비가 내린다,
떨어질 때에만 잠깐, 유효한 이름으로 비가
쏟아질 때에만 잠깐, 완전한 몸으로 비가
흩날릴 때에만 잠깐, 퍼지는 생각으로 비가
부서질 때에만 잠깐, 과거를 돌아보는 비가
버려질 때에만 잠깐, 미래를 내다보는 비가
사라질 때에만 잠깐, 죽음을 비추는 비가
허공에서 바닥까지 투명하게 당겨놓은 가닥으로 혹은 그 가닥을 뜯고 가는 시간으로
비가 제 몸의 투명함을 산책할 때,
비로소 처음의 지붕을 처음의 창문을 처음의 도로를 달리는 차들과 나무와 잎과 피어오르는 공기를,
마지막으로 —그것은 구름이 허공을 가지는 유일한 조건
나는 아이가 벗어놓고 간 잠바처럼
그네 위에 앉은 새처럼
빨간날의 학교
구름은 구겨진 종소리처럼 흩어져 있다 쓰다가, 북북 찢어버린
편지처럼
종소리에 소인을 찍어 멀리, 보내고 싶었으나
태양은 구름 밖으로 굴러떨어졌다
지붕 아래는 텅 비었다, 그것은 빈 상자이거나 기껏 교회의 장식장 같은 것
가끔 동생들이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자주 사도신경의 마지막 구절을 틀렸다
그때마다 잘못 떨어진 태양이 나무와 꽃 위에 걸려 있었다, 차라리 울어버려
이파리에 파랗게 질린 잎맥처럼
한결같이 서 있는 나무의 체육시간 혹은 화단마다 묽게 달린 꽃들의 명찰에 대하여,
손바닥에 빼곡이 답을 적어놓았지만
이파리는 늘 잎맥 속에 갇혀 있었다
죄를 사하여 주신 것과 몸이 다시 사신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은,
죄를 앞질러 형벌을 사는 것
태어나는 순간, 곡을 하는 아이들처럼
없어도 좋을 기적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 믿으면, 쑥쑥 자라는 십자가들
다시 편지를 쓴다, 텅 빈 상자 속
이제 어둠을 흔들어 보일 때가 왔다,
개봉되지 않은 울음을 가늠해 볼 때
저녁은 종탑에 올라 한 장 한 장 구름을 찢어 불사른다
종소리가, 검은 재가 되어 떨어진다
—《현대시》2010년 10월호
칼끝에 혀끝을 대보는 순간
신용목
칼끝에 혀끝을 대보는 순간,
개수대에 물이 사라지고
크르르륵 물소리가 수만 가닥 혈관을 타고 공중의 피부 속으로 스며들고
손잡이가 부러진 칼처럼, 문득
거꾸로 떨어지는 형광등빛―갈비뼈를 밟고 지나가는 시간의 하얀 발바닥,
이중 새시 너머 상가 불빛이
껌을 씹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 담겨 있다고 믿는다 쏟아지지 않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잠시 구정물에 뜬 얼굴로
출렁이다 크르르륵,
소용돌이 아래부터 빠져나갈 몸은 한 바가지 몸, 사는 것의 불빛 속에 잘못 고일 때
도마의 칼자국처럼 새겨지는
정적 속으로 문자가 온다 낙엽은
자살인가요 타살인가요―누구도 답해주지 않는 함구의 현장으로 강도처럼
손잡이가 부러진 칼처럼, 문득
떨어지는 붉은 혓바닥
보십시오 고요가 순간을 찌르고 있습니다
이곳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살해를 한다,
개수대에 물이 사라질 때
먼빛이 가까운 빛에 섞이고 난도당한 순간이 제 시신을 공중에 흩어놓을 때
—《작가세계》 2009년 겨울호
꽃들의 귀가 (외 1편)
신용목
관이 이동한다 땅을 덮은 아스팔트를 따라
둥근 바퀴를 달린다
어디에 닿아도 무덤이므로
지구는 뜨거워지고 있다 풀잎도 지기 전에
먼저 뿌리를 태운다
어디를 가도 화장터이므로
모든 행성은 천국을 향해 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누구도 태어난 곳에서 죽지 못한다)
나는 버스 안에 있다
이 별에서 왜 우리는 모두 같은 배역을 맡았을까
사각의 관 속에서도 나는 주인이지 못했다
나는 시간의 부장품이다
삶이 녹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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敵國의 가을
나무마다 붉은 심장이 내걸린다, 저 맹세들
어떤 역모가 해마다 반란의 풍속을 되살리는가 허공을 파지로 구기며 진격하는 북국의 나팔소리
바람의 오랜 섭정에 나는 부역의 무리가 되어버렸다 도망하라 화를 피해 그러나
살갗을 벗기며 저무는 황혼의 저녁
붕대로 풀어지는 구름의 거적과 벌겋게 나뒹구는 태양의 해골바가지
모든 문자가 추억처럼 타올랐으므로 한 장 한 장 시절이 실연을 흔들며 투항하는 시간의 유적지에서
연기의 문장으로 원군을 청하는 늦은 후회여
계절의 부장품은 기다림이다 반란의 나팔소리가 허공을 디디며 번져가는 파지의 밤
구겨진 산과 구겨진 강과 구겨진 채
날이 밝으면 빈 나뭇가지에 낮달이 반지처럼 끼워져 있을 것이다 도망하라 화를 피해 그러나
나무마다 붉은 심장이 뛰고 있다, 저 맹세에
내 눈물도 역모의 증거임을 안다 돌아가지 못할 길에서 진압당할 마음이 돌멩이처럼 떨어져내릴 것을
신용목의 시 '갈대 등본' 감상 / 문태준
갈대 등본
신 용 목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설산(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모의(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가장(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젊은 시인 신용목(34)은 "바람 교도(敎徒)"(시인 박형준의 말)다. 그의 시 곳곳에는 바람이 불어오고 멈추고 쌓이고 흐른다. 독특한 것은 그가 포착하는 바람의 속성인데, 그의 생각에 바람은 쌓이는 것이면서 강하게 '무는 힘'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바람이 비의 칼집을 잡고 서는 날"(〈바람 농군〉)에서처럼 바람을 정지시켜 묶어두거나, "느닷없이 솟구쳐 오르는 검은 봉지를/ 꽉 물고 놓지 않는/ 바람의 위턱과 아래턱"(〈새들의 페루〉), 혹은 "나는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에 물려 있다"(〈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라고 써서 바람의 '무는 힘'을 강조한다. 아무튼 '바람 교도'답게 그의 시집을 펼치면 바람이 와르르 쏟아진다.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는 문장이 모 기업의 에어컨 광고 문구로 사용되어 더 많은 이에게 알려진 이 시에도 바람이 등장한다. 시인은 폐(廢)염전을 걸어가고 있다. 저녁 무렵이었을 테고, 갈대가 있는 곳에서 멈춰 섰을 것이다. 바람 속에서 갈대는 갈대숲에 깃든 새들을 "통증처럼 뱉어내"고 있었을 것이다. 늦가을이었으므로 갈꽃이 진 갈대는 '촉'처럼 '화살'처럼 서 있고 시인은 그 갈대들을 보면서 세월의 한 참극과 풍파를 기억해 냈을 것이다. 아마도 가족사에 해당될 사건들을. (그래서 제목이 〈갈대 등본〉 아닌가. 우리가 동사무소에 가서 한 장씩 떼는 '주민등록등본'처럼.) 가족사 가운데서도 아버지와 관련된 과거의 일을 시인은 떠올렸을 것이다. 갈대처럼 누추를 입고, 뼛속까지 바람의 지층이 나 있고,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이제는 꺾인 아버지를 보았을 것이다. 지금 시인이 서 있는 공간, 즉 폐염전과 빈 둑과 꺾인 갈대와 바람이 부는 이 공간이 마치 아버지라는 존재의 영역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는 표현에는 개인적인 참회를 통해 아버지와의 관계를 복원하려는 결심이 담겨 있는 것이다.
노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 《나비 눈》의 대본을 쓰기도 한 신용목 시인은 우리 주변 사람들의 '허기'를 돌본다. 이주노동자, 구두수선공, 시장통 사람들이 등장하는 그의 시는 따뜻하고 서글서글하다. '등이 굽은 가축'인 우리를 돌보는 아파트 경비원 정씨는 "어제는/ 물통을 청소하고 오늘은/ 배설구를 씻는다 가축은/ 정갈해야 하므로 내일은/ 쥐똥나무를 전지하고 모레는/ 짜기철망을 손질한다 가축은/ 안전해야 하므로/ 정해진 시간마다/ 상한 데는 없는지 손전등을 들고/ 고삐를 훑으러 간다"(〈경비원 정씨〉)
신용목 시인은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젊은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음과 같은 시는 그런 평가에 대한 신뢰를 갖게 한다. "밤의 입천장에 박힌 잔이빨들, 뾰족하다// 저 아귀에 물리면 모든 죄(罪)가 아름답겠다// 독사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별의 갈퀴// 하얀 독으로 스미는 죄(罪)가 나를 씻어주겠다"(〈별〉)
붉은 솥 (외 2편)
신용목
어둠의 거푸집을 비집고 나온 붉은 주물들
새벽이다, 가을의 터진 속살에 연못을 건 숲의 아궁이
팔을 저을 때마다 붉은 반죽을 떼며
나무는 말간 물 앞을 서성인다 먹고 싶었을 뿐이야, 허기 속에서만 그리운
어떤 기다림이 먼 숲까지 거닐어 저 솥을 걸었나요 이 빠진 세월의 둥근 결 위로
거품처럼 떠다니는 잎들,
온 밤 타버린 돌멩이들은 낙엽처럼 흩날리고 만다는 것을
부글거리는 하늘에 꽂힌 나무여 출렁이며, 불길의 연한 춤을 추는데
어떤 기다림이 예까지 번져와
세월의 반죽을 불게 하나요 하루 낮을 다 살면 캄캄한 돌덩이로 돌아가고 말
허기를 짚고, 어머니
어느 가지를 꺾어 저 끓는 솥을 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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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새
함양 상림 떡갈나무숲을 지나며 바람이 머리를 땋는 것을 보았다 누구나 처녀였던 것처럼, 어느 처음엔 한 덩어리였을 바람 강물이 교각 사이를 지나며 물결을 얻듯 바람은 나무 사이를 지나며 결을 얻는다 서 있는 것들에 찢겨져 얻게 되는 무늬, 오래 거쳐온 것일수록 가늘게 갖는 결을 나는 늙은 여자의 몸속에서 만났다 붉은 속살이 열어놓은 일몰의 깊이로 빳빳한 허기를 세워 밀어넣었다 세월의 조각도가 새기는 어둠마다 나날이 첫 피가 비쳤으니 훗날, 어느 저녁의 갈피가 나를 탁본해낼 것인가 지나간 것들이 모른 듯 긋고 간 만큼씩의 상처를 강물이 교각 둘레에 물이끼를 치듯 서 있는 것들도 제 속에 주름으로 새기는데 시간의 갈비뼈에 꽂힌 여자여, 먼 함양 상림이 너절한 치마폭을 펼치는 저녁, 한 그릇 세발 바람을 비벼먹는 어둠의 혓바닥 처음처럼 붉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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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이 있는 잔치
칼이 정곡을 찌르자 붉은 여울이 생겨났다 일생 속으로만 돌았을 길을,
남은 박동이 몸밖으로 퍼내고 있다
주민들의 칼에
돼지는,
덩어리진 몸을 풀어놓는다 능선을 넘어온 가죽과 설키다 만 산나물 풀뿌리와,
허공에 찔러놓은 비명 한 자루
칼은 속맛을 안다 그러나 칼이 지나고 나면 모든 속은 겉이 된다 오로지 처음이 마지막인
그대가 지나간 길
옹벽 너머, 파헤쳐진 붉은 황토가 여울처럼 부려져 있다 가장 캄캄한 곳을 택하여
환하게 지나가는,
아픔은 상처를 두 번 통과하지 않는다 상처가 또 하나
아픈 몸으로 일어서는
거기,
돼지가죽에 찍힌 파란 글씨의 낙인처럼, 새로 뚫는 길가에
붉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위태로운 지주대 그 끝에서 펄럭이며
그믐의, 흰 칼이 지나가는 중천으로 대낮이 검은 피를 뿌리며
사지를 풀어놓을 때
대책 없이 날아오르는 공사판의 흙먼지들
돼지는 주민들의 가죽에 담겨 걸어갈 것이고 주민들은 돼지의 가죽처럼 어디론가 흩어질 것이다
새들의 페루 (외 1편)
신용목
새의 둥지에는 지붕이 없다
죽지에 부리를 묻고
폭우를 받아내는 고독, 젖었다 마르는 깃털의 고요가 날개를 키웠으리라 그리고
순간은 운명을 업고 온다
도심 복판,
느닷없이 솟구쳐오르는 검은 봉지를
꽉 물고 놓지 않는
바람의 위턱과 아래턱,
풍치의 자국으로 박힌
공중의 검은 과녁, 중심은 어디에나 열려 있다
둥지를 휘감아도는 회오리
고독이 뿔처럼 여물었으니
하늘을 향한 단 한 번의 일격을 노리는 것
새들이 급소를 찾아 빙빙 돈다
환한 공중의, 캄캄한 숨통을 보여다오! 바람의 어금니를 지나
그곳을 가격할 수 있다면
일생을 사지 잘린 뿔처럼
나아가는 데 바쳐도 좋아라,
그러니 죽음이여
운명을 방생하라
하늘에 등을 대고 잠드는 짐승, 고독은 하늘이 무덤이다, 느닷없는 검은 봉지가 공중에 묘혈을 파듯
그곳에 가기 위하여
새는 지붕을 이지 않는다
―시집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
신용목
식당 간판에는 배고픔이 걸려 있다 저 암호는 너무 쉬워 신호등이 바뀌자
어스름이 내렸다 거리는 환하게 불을 켰다
빈 내장처럼
환하게 불 켜진 여관에서 잠들었다
뒷문으로 나오는 저녁
내 머리 위로도 모락모락한 김이 나는지 궁금하다 더운 밥이었을 때처럼
방에 감긴 구불구불한 미로를 다 돌아
한 무더기 암호로 남는 몸
동숭동 벤치에서 가방을 열며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내과술에 대해 생각한다
꺼낼 때마다 낡아 있는 노트와 가방의 소화기관에 대해
불빛의 내벽에서 분비되는 어둠의 위액들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 나는
너를 잊었다 너를 잊고 따뜻한 한 무더기
다른 이야기가 될 것 같다
한 바닥씩 누운 배고픈 자들이 아득히 별과 별을 이어 그렸을 별자리 저 암호는
너무 쉬워 신호등이 바뀌자
거리는 환하게 어둠을 켰다 빈 내장처럼
약국 간판에는 절망이 걸려 있다
어둠을 길러
하늘로 올려보낸 두레박
줄 끊어진
두레박,
재개발지구 깨진 지붕에
엎어져 둥둥 뜬 두레박
어둠이 튀어오르는
두레박
혼자 사는 할머니가
마시는 두레박, 엄마
없는 아이들이
손 담그고 노는
두레박
붉은 가위표 담벽마다
어둠의 해골해골들,
첨벙대는 두레박
―신용목, 「보름달」(《애지》, 봄호) 전문
"재개발지구"의 한 마을을 연상하게 만드는 이 시는 가난이 묻어 있는 초라하고 쓸쓸한 사람들의 내면의 아픔을 눈물겹게 묘사하고 있다. 전래동화나 전설에 나오는 "두레박"은 비루한 현실로부터 인간을 구원해주는 사물로 곧잘 등장한다. 간절히 소원을 비는 사람들은 짐승의 도움이나 신의 허락으로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두레박이 없다면 이 세상은 먼 우주와 단절되어 버린 곳이 유배의 공간이 될 뿐이다.
하지만 현실은 동화의 세계일 수 없다. 때문에 "어둠을 길러/ 하늘로 올려보낸 두레박"은 이미 "줄 끊어진/ 두레박"이 되고 만 것이다. 줄이 끊어졌기에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은 묘연하다. 다만 하늘을 바라보고 자신의 간절한 꿈이 다시금 이루어지길 소망할 뿐이다. 가난한 재개발지구 마을에 둥둥 뜬 두레박은 다름 아닌 "보름달"이다. 여기서 달은 자연의 달이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화 된 달이라 할 수 있다. "혼자 사는 할머니"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달이며, "엄마/ 없는 아이들"의 허전하고 아린 마음을 위로해 주는 따뜻한 달이다. 그러나 또한 재개발지구 위에 뜬 달은 "붉은 가위표 담벽마다/ 어둠의 해골해골들"을 보여주는 죽음의 달이기도 하다.
신용목은 재개발지구의 가난과 위태로운 삶, 누추하지만 소중한 인간미가 살아 있는 마을의 풍경, 그 속에 숨쉬는 나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 깨어진 염원과 비루한 현실을 시인은 두레박이라는 하나의 상징물을 통해 통합해낸다. 신용목의 시의 탁월함은 사물성의 이미지를 풍부한 정서적 변용물로 치환시키는 시적 상상력을 지녔다는 점이다. 두레박과 보름달의 형태적 유사성, 두레박이 암시하는 동화적 세계의 지향, 또한 동화적 세계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는 광포한 현실에 이르기까지 두레박의 상징은 이 세계의 다양한 삶의 풍경을 다채롭고도 일관된 형식미로 통합해낸다.
시인은 현실을 가공한다. 가공된 현실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유는 현실에 내재된 숨어 있는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서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시인은 독설의 언어로 현실을 비판하고, 또 어떤 시인은 풍경의 방식으로 이 세계의 맨 얼굴을 보여준다. 시인의 렌즈에 포착된 세계는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삶의 비의를 발견하는 것이며, 지나가는 사물 속에서 문제적 현실을 읽어내는 것이며, 변화무쌍한 세계의 속도 속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금 고쳐 세우는 성찰의 결과이다. 때문에 불확실한 세계의 창을 끊임없이 닦아내려는 시인의 치열한 사유는 숭고하고 의미 있는 작업인 것이다.
― 김선우 (시인)
폭우 지난
신용목
낙태 된 아이의 태몽 속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달려나왔다
달릴 때마다 가죽에서 벗겨지는 검은 줄무늬가 올가미로 바닥에 던져져 있었다
지난 밤,
나는 검은 올가미에 묶여 빗속을 끌려다녔다
햇살이 무지개를 펴는 저녁에도 젖니로 반짝이는 구름보다 등 뒤로 떨어지는 그림자를 나는 더 많이 보았던 탓이다
굴속이여, 한 끼니 사냥의 먹이로 잡혀간 캄캄한 어둠에서 똑똑 듣던 물소리마저 끊어진
자궁이여, 송곳니의 빗물로 파는 깊이에서
문득 번개에 찔리는 정신으로 살았으므로
문득 천둥소리를 듣는다 산 넘어 강 건너
아침에 떼는 한 장 화투패로 뒤집히는 몸,
해몽의 긴 사설을 감고 호랑이가 마침내 하얀 가죽 볕 아래 펼쳐 놓아도
알고 보면,
검은 줄무늬에 묶인 식사와 알고 보면 끌려가는 버스와 알고 보면 굴속의 행선지를 따라
알고 보면, 무지개는 햇살에 물린 구름이
바닥에 흘리고 간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지난 밤, 호랑이 한 마리 꿈속으로 뛰어들었다
알고 보면,
모든 빗물은 검은 올가미를 바닥에 두른다 묶인 자리에서 끌리던 꿈이 밑 없는 깊이에서 흩어지고
갑자기 모든 아이들이 자명종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 『현대시학』2010.11월호
숨바꼭질
신용목
나는 종의 멸망을 걱정하지 않는다
고양이 한 마리
까마귀와 한 점 고기를 다투다 반짝, 눈알을 토해내며 서글픈 뒷모습으로 사라진다
어둠의 육질은 질기다
찰칵대는 심장이 마음의 캄캄한 암실에서 제 몸을 현상한다 해도
어둠의 안팎,
살갗은 아픈 경계일 뿐― 고양이와 까마귀의 육체가 바뀌어도
어둠은 살을 나누지 않는다
멸종은 숨바꼭질 같은 것이다 어둠에 숨은 짐승의 기척
혹은 수음으로 잉태된 생명
마음처럼, 나는 네 발을 달고 달려나오는 어둠을 잡으려 한낮의 모든 우리를 열어놓았다
동쪽 능선이 검은 이빨을 드러내고
아침이 아가리를 벌릴 때까지
모든 생물은 투명하다 어둠의 지우개가
낯선 생성에 몰두할 때
이를테면, 고양이가 고기를 씹으며 허기를 죽이는 때 어둠 속에서 배어나오는 숨결 혹은 냄새 같은 것
밤하는 저 끝에서
모든 경계는 추억 같은 것― 천상의 짐승들은 왜 한쪽 방향으로만 이동하는가
나는 종의 멸망을 걱정하지 않는다
낮잠 자고 일어나면
밤낮이 사라지고,
고양이가 어둠이 되는 것처럼 어둠이 고양이가 되는 것처럼 혹은 까마귀처럼
반짝, 점멸하는 순간 속에서
나의 운명은 당신의 운명과 섞여 있다― 귀를 자르면 소리가 사라지고 코를 자르면 냄새가 사라지고 그리하여
세상은 숨기에 적당한 곳,
술래는 순서를 정하지 않는다
진화와 퇴화가 서로 탐하며 제 살을 부빌 때, 미련하여 밝아진 눈앞에서
인간과 인분은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 <시와정신> 2010.봄호
갈대 등본 / 신용목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