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괴담⌟이 말하는 한일의정서 배후에 있는 친일파 매국노 고종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무엇을 배우는가?
과거를 통해서 오늘 문제 해법을 찾는가?
과거를 통해서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보는가?
임진년과 정유년 조일전쟁 그리고 정묘년과 병자년 조청전쟁에 대하여 조선은 왜놈과 오랑캐인 악랄한 침략자의 만행을 규탄할 뿐 뼈를 깎는 내부의 개혁과 갱신을 도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10년 조선은 지구 역사에서 퇴출하였다. 그런데 오늘날도 조선시대와 별 다를 바가 없다.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슬픈 역사에 대하여 누구도 치열하고 준엄하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당시 조선사회를 지배하였던 왕과 관료들 그리고 양반과 유교 지식인들의 망국책임과 죄과에 대하여 진지하게 시시비비를 언급하지 않는다.
식민지 역사가 끝난 지 78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조선 멸망의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여 두 번 다시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국가적, 민족적인 뼈저린 반성과 자각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도 값싸고 안이하게 조선 멸망의 원인을 을사오적, 경술국적의 매국 행위라고 매도한다. 그들의 부일행위, 친일행적을 정당화, 합법화시키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선입관과 편견을 버리고 더 깊이 생각해보자. 과연 한 나라가 왕도 아니고 군대를 지휘하는 총사령관도 아닌 몇 명의 문신 관료 때문에 망할 수 있는가?
역사의 대 사건을 몇 사람의 매국행위로 매도하며 망국의 책임을 슬며시 떠넘기고 반성하지 않는 조선의 왕가, 관료, 유교 지식인들과 양반들의 기득권자로서 위선과 무책임은 역사의 진보를 막는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인 우리 자신의 무비판적인 세뇌된 역사인식 또한 역사 진보에 거대한 장애물이다.
우리는 치열하게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우리의 역사가 음모의 술수, 투쟁과 대립의 어두운 역사였다 할지라도 우리는 픽션이 아닌 팩트를 찾아야 한다. 애국애족의 감정으로 사람을 선동하는 드라마나 소설이 아닌 진실의 역사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준엄한 역사의 심판의 소리를 듣고 새 역사를 위하여 변화와 혁신을 소신껏 펼쳐야 한다. 국민이 함께 잘 사는 나라를 위하여. 아무나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썩지 않는 건강하고 활기찬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조선의 망국의 과정에는 고종과 민비가 깊게 관여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는 그들에 대하여 아주 관대하여 그들을 일제에 저항한 투사로 여기며 망국에 대한 책임을 전혀 묻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과 당시 관리들과 야인들의 기록들, 기타 외교문서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망국 드라마의 주역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우리에게 알려진 한•일의정서에 관한 일반적인 스토리다.
한•일 의정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조약을 준비하기 위한 전 단계의 조약으로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치루기 위하여 대한제국을 전쟁의 기지로 삼고자 1904년 2월 23일에 대한제국과 사이에 체결한 조약이다.
대한제국과 만주의 영토 주도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러시아와 일본 양국은 1904년 2월 6일 국교를 단절하고 2월 8일 여순항에서 전쟁을 시작하였다.
2월 9일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한양에 들어왔고, 2월 10일 일본이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두 강대국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안간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일본공사 하야시가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을 통해 고종을 알현하였다. 그는 고정에게 일본에 협력할 것을 요청하였고 대한제국의 중립국선언을 송두리째 무시하였다.
2월 12일,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가 러시아병사 호위아래 서울을 떠났다.
일본공사 하야시는 함께 참전할 것과 전쟁에 협조할 것을 골자로 하는 한일 간의 의정서를 강제하면서 친로파였던 탁지부대신 겸 내장원경인 이용익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하였다. 또한 반일파로 알려진 몇 사람을 감시하였다. 그리고 공수동맹을 위한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조인된다.
전문은 6개조이며 아래와 같다.
제 1조 한•일양국은 항구불역할 친교를 보지(保持)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대한제 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를 확신하고 시정의 개선에 관하여 충고를 들을 것.
제2조 대일본재국정부는 대한제국 황실을 확실한 친의(親誼)로써 안전•강녕하게 할 것.
제3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것.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황실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국정부는 속히 임기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하며,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前項)의 목적이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할 수 있을 것.
제5조 대한제국정부와 대일본제국정부는 상호의 승인을 경유하지 않고 훗날 본 협정의 취지에 위반할 협약을 제3국간에 정립할 수 없을 것.
제6조 본 협약에 관련된 미비한 세조는 대한제국외부대신과 대일본제국대표자 사이에 임기 협정할 것.
한•일의정서 6개 조항 중에서 핵심은 제4조이다. 주 내용은 대한제국 영토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나 내란을 일본군이 진압하겠다는 것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을 위하여 전비를 부담하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건물이나 토지를 임시로 수용하도록 협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협정서로 말미암아 일본은 대한제국 내에서 군사행동과 토지의 수용과 강점을 제멋대로 행하였으며 많은 토지를 군용으로 강제로 점령하였고 3월 말에는 한국의 통신 기관도 강제로 접수하였다.
대한제국은 한일 의정서를 지키기 위하여 러시아와 체결한 모든 조약과 협정을 폐기하였고 러시아인이나 러시아회사에 주었던 모든 권리를 취소하였다. 또한 경부선과 경의선 철도부설권을 군용으로 일제에게 제공하였다. 또한 한일 어업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여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 3도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인들에게 넘겨주었다.
아래는 우리가 잘 모르는 일본과 외국의 외교문서가 남겨 놓은 한•일의정서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다. 박종인 저, ⌜광화문 괴담⌟,300~305쪽에서 옮겨 적는다.
전략
그해 2월 23일 일본은 대한제국 땅을 군용지로 사용할 수 있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전운이 감돌던 1904년 1월 10일 밤 대한제국 외부대신 이지용이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를 찾아갔다. 이지용은 하야시에게 “황제의 의사가 거의 확정돼 적당한 시기에 밀약을 체결할 단계에 도달했다”고 궁재 상황을 전했다. 다음 날 하야시는 이지용에게 ‘운동비’1만 엔을 전달했다. 1월 19일 이지용이 궁내부 특진관 이근택, 군부대신 민영철을 대동하고 황제 위임장 초안을 들고 하야시를 찾았다. 이들은 “생명을 걸고 본건 성립에 온 힘을 다할 작정이니 제국 정부에서도 충분한 신뢰를 해 주기 바란다”고 요구했다.
2월 12일 대한제국 정부는 각 군 단위 행정구역 ‘군내 통과 일본군에 숙박 및 군수 일체를 협조하라’고 지시했다. 발신자는 외부대신 임시서리 겸 법부대신 이지용이었다.
2월 21일 역시 외부대신 이지용은 한성 판윤 김규희에게 “북진 일본군 군수품 수송을 위해 매일 인부 600명을 지체 없이 모집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이틀 뒤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 그러니까 이미 나라는 조약 체결 전에 팔려나가고 있었다.
23일에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난 후, 1904년 2월 28일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고종 본인과 두 아들인 황태자와 영친왕 이름으로 러일전쟁 군자금 명목으로 일본에 백동화 18만 원을 기부했다. 그리고 3월 18일 일본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으로 와서 고종을 알현했다. 이토는 일본 천황 메이지가 보낸 국서를 고종에게 봉정한 뒤 ‘군자금 기증에 대한 천황의 감사인사’를 전했다. 대화 도중 고종이 이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특파대사로서 오래 머물지 못하겠지만, 국정에 대해 경으로부터 들을 이야기가 많다. 그러니 짐의 최고 고문이 되어서 평상복을 입고 언제든지 짐의 자문에 답해주기를 희망한다.”
3월 20일 이토가 두 번째 고종을 알현했다. 국제 정세를 논하던 중 고종이 이렇게 이토를 추켜세웠다.
“서양인들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독일 비스마르크와 청나라의 이홍장과 함께 경을 ‘근세 4걸’이라 한다. 이토가 답했다.” 천황의 의지가 확고해 잘 보필한 덕분이다.”
다음 날 이토가 궁내부대신 민병석을 숙소인 정동 손탁 여관으로 불렀다. 자기 숙소 옆방에서
이토가 은밀하게 민병석에세 이렇게 제안했다.
“군자금을 받은 답례로 일본돈 30만 엔을 황제에게 바치려 한다.”
3월 22일 고종은 “거절은 예의에 어긋난다”며 이를 수락했다.
이토는 30만 엔이 입금된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 예금통장을 민병석을 통해 고종에게 헌납했다.
24일 이토는 궁내부 철도원 감독 현운영의 처를 통해 엄비에게 1만 엔, 황태자에게 5,000엔, 황태자비에게 5,000엔을 각각 상납했다.
돈을 받은 것이다. 앞으로 자기 나라 땅을 멋대로 군사용지로 쓰려고 (흑심을 품고) 찾아온 일본 거물을 극구 칭찬하면서 뒤로는 돈을 받은 것이다. 1904년 당시 30만 엔은 현재 시가로 300억 원이 넘는 거액이다.
‘착하고 약한 조선’과 ‘강하고 악한 일본’이라는 대립구도 속에서 망국 원인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일본 측 기록을 믿지 않는다. 어떻게 (나쁜 놈들의 기록을) 믿느냐는 것이다. 그래, 이들 문서도 ‘간악한 일본이 왜곡해놓은 외교문서’라서 믿을 수 없다고?
그렇다면 영국외무성의 기록은 어떤가?
이토 후작은 메이지 천황 국서를 조선 외부에 사본을 남기지 않고 직접 황제에게 전달했다. 그래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런데 민영환이 그날 면담 내용을 이렇게 전달했다. “대사는 황제에게 천황 선물이라며 30만 엔을 주었다. 그리고 경부선 철도에 고종이 가진 지분을 보장하고 향후 경의선 지분 또한 보장한다고 확약했다. 이토 후작은 같은 방식으로 50만 엔을 궁중 참석자에게 나눠주고, 이번 방문 관계자들에게도 귀중품을 선물했다.
3월 31일 접견식에 배석했던 이토 히로부미 영접 위원장 민영환이 영국공사관을 방문해 공사 조던에게 이토 방문에 대해 설명했다. 위인용은 조던이 영국 외교장관 래스다운에게 보낸 면담 기록이다. 여기에는 일본 외교문서에 빠져있는 고종의 경부선 지분 보장 약속까지 언급돼 있다. 이 기록까지 불신하는 독자라면 이 책은 시간 낭비이니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
30만 엔 헌납 이틀 뒤인 3월 24일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대한제국 최고 훈장인 금척대수장을 수여했다. 국서 봉정 이틀 뒤인 3월 20일부터 25일까지 고종은 주한 일본공사관 직원 전원과 대사 수행원 전원, 이토가 타고 온 군함 함장까지 ‘일본인 전원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이런 고종이야말로 자신과 왕실만의 무사와 안일을 위하여 일본에 적극 협조한 친일파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언제 우리 모두가 권력자들과 지식인들, 충성의 관점이 아닌 민과 생명, 공생과 평화의 시각으로 역사를 볼 것인가?
2023.1.16. 월요일 새벽
우담초라하니
참고서적
박종인 저 ⌜광화문 괴담⌟, 와이즈맵,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