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3일(연중 제28주일) 군인 주일 강론
오늘 복음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계명을 잘 지킨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착한 부자 청년은 이 대답에 침울한 표정으로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우리 모두 무난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를 더 요구하십니다. 우리 모두 또한 착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리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뭐, 이 정도면 됐지! 나는 주일에 미사 참례도 하고, 헌금도 내고 또 악한 일도 하지 않고 사는데!”하며 자족감에 빠져 있는 수가 있습니다. 이 자족감에 빠져있는 우리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부자 청년처럼 근심하며 침울해 질 수 있는 우리입니다.
부자는 천당에 가기가 무척 어렵다고 했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그만 기가 질려서 무슨 뜻이냐고 질문합니다.
부자다 또는 가난하다 하는 것은 돈이 많다, 또는 적다하는 외적인 물량의 척도로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복팔단, 즉 여덟 가지 행복된 사람의 조건 중 첫 번째 나오는 말씀은 그냥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하지 않았고, “마음으로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매우 가난하지만 욕심이 많아서 남의 것을 탐만 내고, 자기의 현재 위치를 불평이나 하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온갖 사리사욕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부자는 사랑이 없는, 자선심이 없는, 이기적인 부자를 두고 말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우리에게 굶어 죽을 정도로 비참하게 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왕이면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환경에서 풍부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며, 가르침입니다. 다만 이러한 재물, 또는 환경, 지위에 너무 집착되어, 이런 것에는 온 정신을 쏟으면서 우리의 신앙 생활, 하느님께 관한 내적 생활, 이웃을 위한 사랑의 행위를 등한히 하는 마음을 꾸짖는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모인 우리들 모두는 다 착한 신앙인들이며 또 열심인 분들입니다. 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도 모두 지켜왔습니다.
“너, 꼭 하나가 부족해!”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세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어휴, 그것은 못하겠군!”하며 떠나가는 무리와 “그것은 약간 곤란한데”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부자 청년의 모습과 “우리는 모든 것은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 애덕에는 ‘이 정도면 됐다’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더 벌어서 더 큰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그만큼 하느님을 위해서 남을 더 도와줘야겠다는 애덕이 동반될 때, 비로소 우리는 신자된 보람과 기쁨을 맛보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도와주는 기쁨, 애덕의 기쁨, 이것이 바로 천국의 기쁨이며, 성인성녀의 기쁨입니다.
그러한 기쁨을 누리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하며 이 미사 열심히 봉헌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