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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3장 8-13절. 하나님의 은혜를 축원함. 요약설교
8-10절.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구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온전케 되는 것>이고, 바울 사도가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8절.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1. 바울 사도는 앞 절에서 자신은 버림받은 자 같을지라도 오직 고린도 교인들만은 조금도 악을 행치 않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하면, 바울을 대적하고 범죄 한 고린도 교인들이 <아, 바울이 우리들을 봐주려고 그런가 보다> 하고 오해할 소지가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본 절에서 <우리는 진리를 거슬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대적하고 범죄 한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을 회개하고 올바른 길로 걸어가는 것이 살길이고 복 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2.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 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생명과 축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신명기 28장 6절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30장 19-20절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생명이요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여호수아 1장 8절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왕은 죽으면서, 열왕기상 2장 3절에서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하기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따라 사는 것이 생명과 축복인 줄 아시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복된 한 해와 복된 일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성도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려면, 진리를 거슬러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거스르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채찍을 통해서라도 기어코, 진리 가운데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한 번,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는 진리 되신 예수님을 거스르고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마치, 자연법칙을 거슬려서는 인간이 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4. 요나가 좋은 예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지 않고 회피하고 싶었습니다.
즉, 요나는 원수의 나라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요나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하면,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고 살 것이고, 요나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요나는 원수의 나라 백성들이 회개하여 살기보다는 벌 받아 죽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육로로 북쪽에 있는 니느웨 가는 길을 피하여, 유럽 대륙의 서쪽 끝인 다시스로 가려고 배를 탔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광풍이 일어나서 뱃사람이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간섭이었습니다.
결국 선원들이 제비 뽑아서, 요나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풍랑이 대작하는 것을 알고, 안타깝지만 요나를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이처럼 요나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큰 물고기 배 속에서 요나는 죽지도 못하고, 큰 물고기가 채 해서 바닷속에서 요동하는 죽음의 고통을 당하면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자기의 목숨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사람이 죽는 것이 얼마나 불쌍한 것인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 뜻대로 살기로 했고, 어떠한 죄인도 회개하고 구원받아야 한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순종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섭리로 큰 물고기가 요나를 니느웨 가까운 바닷가에 토해내서,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도 살 수가 없습니다.
5. 그리고 성도의 삶은 오직 진리를 위한 삶이 되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즉, 성도의 삶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생명이 있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행복이 있습니다.
이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 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진리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또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따라서 살아야 영적 생명과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6장 68절 말씀대로 “주님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성령님)을 모시고 살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에게 어떻게 대하셨는지, 가련한 죄인에게 어떻게 대하셨는지, 부자나 교만한 자에게 어떻게 대하셨는지, 예수님 모시고 예수님처럼 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성경을 표현한 실제적인 삶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예수님(성령님)과 성경대로 살아갈 때, 성도는 든든히 진리 안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진리를 따라 살 때, 모두가 성공적인 인생이 됩니다.
이것은 개인이나 교회나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고, 진리 되신 예수님(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공적이고 형통한 가정과 일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9절.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1. 전 절에서는 바울 사도가 오직 진리대로 행할 뿐이라고 말함으로써, 마치 고린도 교인들에게 냉정한 모습을 보인 것 같았습니다.
사실 바울 사도는 범죄 한 교인들이 회개하지 않는데도 무작정 용서하고 사랑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비록 우리는 약할지라도 고린도 교인들이 강한 것을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바울 사도는 성도들로부터 여러 면에서 시원치 않고, 약하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바울이 시원치 않아도, 그가 전하는 말씀은 강력하고 힘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은 감추어지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강하게 부각 되어서,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강하게 되는 것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인기가 떨어지거나, 설교가 박력이 없다고 하거나, 외모가 볼품이 없다고 해도 상관없고, 오직 성도들이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성장하고, 굳건해지는 것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오직 성도들이 잘 되기를 소원하고, 성도들이 악을 떠나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3.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들이 죄를 지으면, 용서하지 않고 꾸짖고 매를 때립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심정은 오직 자식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4. 오늘날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기도 생활을 안 하고, 교만하게 행동하면, 꾸짖고 야단을 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오직 교인들이 믿음 생활 잘해서 하나님께 복 받고 사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5. 이러한 바울 사도의 태도는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성도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영적 부모의 심정’(mind of spiritual father)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17절에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이 헌금한 선교헌금을 받고, “내가 내 몸을 희생제물로 바치더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자기가 전도한 고린도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권위나 이해타산이 온전히 멸시되고 사라질지라도, 오직 고린도 교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참으로 대단히 겸손하고, 겸허한 사도였습니다.
이런 바울 사도의 모습을 볼 때, 오늘날 우리는 눈물이 날 정도로 안쓰럽고 지극한 감동과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지극히 성도를 섬기는 성자 바울 사도의 모습에 감탄과 존경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 놀라운 바울 사도이시여! 주님의 큰 축복을 받으소서!’
마치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보답하려는 것처럼, 우리는 바울 사도에 대해서 감사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송가 3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1.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온전한 성도가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바울이 지금까지 권면하고 책망하고 교훈한 말들은 어떻게 잘못 보면,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잘해달라고 하는 말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legalistic false apostles)이 바울을 거짓 사도요 도둑놈이라고 비난하는데,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을 따라가지 말고, 바울편을 들어 달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마감하면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고린도 교인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고린도 교인들은 거짓 사도들의 잘못된 율법주의 교훈에 끌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면, 온전한 성도로서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이 편지를 마감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온전하게 되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3. 그리고 바울 사도는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이 온전한 신앙인이 되기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책망하더라도,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성도들이 깨닫지 못하고, 점점 더 멀리 오해하고 삐뚤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4. 그러면 온전한 성도란 어떤 사람입니까?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라.
즉, 온전한 성도란 예수님을 알고 닮아가서,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갖춘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기도하여 예수님(성령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쉘돈(Chalse M. Scheldon: 1857-1946년)이라는 분이 <그 분의 발자취를 따라>( In His steps)를 썼고, 그 손자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What would Jesus do)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을 처리할 때 잘 모르겠으면, 예수님이라면 이때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5. 또, 온전한 사람이란, 에베소서 4장 14절에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휼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라”고 했습니다.
즉, 온전한 사람이란 세상 풍조에 휩쓸려 흔들리는 어린아이의 삶을 벗어버리고, 어른처럼 세상 풍조에 요동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날은 세상 불신 풍조가 만연한 시대입니다.
이것을 소위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주의)이라고 하고, <뉴에이지>시대, 혹은 <다원주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기독교의 진리와 반대로 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온전한 성도는 이 세상 불신 풍조에 동요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 따라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입니다.
즉 다 술 마실 때 안 마시고, 다 담배 필 때 안 피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입니다.
다 식사 기도 안 할 때 식사기도 하고, 다 우상 제사 지낼 때 제사 안 지내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입니다.
다 죄짓고 살 때 죄 안 짓고 사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 ‘온전한 사람’이란 이런 용감한 신앙인을 가리킵니다.
7. 또, 온전한 사람이란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그리스도니라”고 했습니다.
즉, 온전한 사람이란, 예수님처럼 사랑 안에서 참된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이 다 잘못된 말을 해도 나는 신앙 양심을 가지고 올바른 말을 하는 것이 온전한 신앙인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온전한 신앙인은 하나님 말씀 따라 온전히 헌신한 사람이고,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특히 이런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은 권력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잘못된 것을 뻔히 알면서도 대항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권력 있는 사람에게 잘못 보이면, 지역에서 생활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온전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아무리 권력자 앞에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옳으면 옳다고 주장하고 나가는 사람이 온전한 성도입니다.
특히 시골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주일날 교회에 가는 것이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안 믿는 이장(예비역 대위 출신)이 교회 가지 말라고 하면, 무서워서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권력 있는 장로’가 새벽기도에 나가지 않으면, 새벽기도에 잘 나가던 사람들도 눈치 보면서 새벽기도에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직분자는 목사가 새해에 직분 임명을 했으면, 그대로 충성해야 하는데 ‘권력 있는 장로’ 눈치 보느라고 직분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건축에 대한 건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바를 주장했으면, 아무리 권력 있는 장로가 압력을 행사해도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해야 하는데, 권력자 말을 듣고 금방 달라져 버린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 말씀 따라서 온전한 신앙생활 할 수 있겠습니까?
8. 한편 온전치 못한 사람은, 참말을 한다고 하면서, 남에게 해가 되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사람은, 사실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교회와 성도에게 덕이 되지 못한 말은 하지 않습니다.
9. 이처럼 바울 사도는 자기는 약할지라도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강해지고 온전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한 권력자와 타협하는 약한 사람을 따라가지 마시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은혜를 받아서, 강하고 온전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기쁨의 신앙생활 하시고,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0절. 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1. 여기 ‘그러므로’란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강하고 온전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므로’란 뜻입니다.
즉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강하고 온전한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쓴다는 것입니다.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1. 바울 사도는 지금 빌립보 교회에서 이 고린도후서를 써서 먼저 디도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에 보냅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은 그 후에 빌립보 교회를 떠나 남쪽의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게 될 것입니다.
2. 이처럼 바울이 직접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기 전에 먼저 이 고린도후서를 써 보낸 이유는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을 회개하여,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고린도 교인들을 책벌해서 넘어뜨리지 않고, 엄하게 처벌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이 고린도후서 편지를 받고 회개함으로써, 막상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는 한 사람도 책벌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고린도 교인들이 이 고린도후서 편지를 받고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해서는 반드시 책벌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
1. 바울이 떠나 있을 때 편지를 써 보내는 이유는, 편지에 있는 말씀을 받아서, 회개한 후에 만남으로써, 책벌하지 않고, 올바른 신앙 가운데로 세우려고 함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교회에 사역자를 보내신 이유는, 어찌하든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장차 예수님 앞에 설 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서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종은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에게 책망을 하고, 권면을 하여, 성도들이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세상으로 가지 않도록 경계하기도 합니다.
2.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기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용히 말로써 타이를 때, 말을 듣는 자녀는 잘 됩니다.
그러나, 어떤 자녀는 짐승처럼 때려야 말을 듣고, 바른길을 가는 미련한 자녀가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누구나 자식을 때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부모의 말을 잘 들어서 매를 안 맞고 자라기를 바랍니다.
3. 이와같이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종들도 성도들을 사랑만 하면서 대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이사야 1장 5절에서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나라의 멸망과 백성들의 포로 됨을 예언하면서, 눈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렘 9:1, 18 등)
4. 마찬가지로 바울 사도도 고린도 교인들을 책벌하는 것을 정말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기 전에 고린도 교인들이 이 편지를 받고 어서 회개하기를 촉구한 것입니다.
5.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권세는 성도들을 넘어뜨리려는 것이 아니고 세우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만이 아니라, 오늘날 목사들도 할 수 있으면 성도들이 복 받고, 건강하고 잘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나 목사들도 주님의 교회가 더욱 부흥성장 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 어기고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이 책망을 받고 회개하기를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준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 여기서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엄하게 책벌하지 않게 하려 한다는 뜻입니다.
즉 바울은 이 편지를 쓰면서 어서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하여 겸손해지므로, 막상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갔을 때는, 고린도 교인들이 짠하고, 불쌍해서 용서하고, 사랑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나 오늘날 목사나 가정의 부모님들도 성도들과 자녀들에게 성내는 것을 원하지 않고, 사랑으로 섬기고 봉사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이고, 자녀들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자녀들이 좋은 말로 타이를 때 말을 들으면 사랑스러운 자식이고, 큰소리로 야단을 쳐야 들으면, 노예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매를 때려야 들으면 그것은 짐승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히 전해도 잘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목회자가 화가 나서 책망할 때 들으면 그것은 사랑하는 자녀라기보다는 노예인 것입니다.
나아가서 목회자가 처벌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라기보다는 멸망하는 짐승처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편 49: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큰 복을 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1절.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1. 바울 사도는 지금까지 책망의 말씀이나, 권면이나, 바울 자신의 신상에 대한 비참한 삶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마음이 이 편지를 읽고 심란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2.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자녀들이 슬퍼하거나 화가 나 있으면, 부모의 마음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기뻐하고 있으면, 부모의 마음이 행복합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뻐해야 좋아하십니다.
3. 그러면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하게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특별히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환난 중에 인내하면 믿음이 더욱 굳세어져서 소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3-4절.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또한 환난 중에도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구원해준다고 했습니다.
시편 50:14-15.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그래서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질 위험 속에서도 하루에 세 번씩 무릎 꿇고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단 6:10)
그러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기적적으로 구출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난을 만나서 원망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환난 중에 연단 받고 믿음이 더욱 굳세어지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온전하게 되며>
1. 온전케 되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불완전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마지막으로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 믿었다고 해서, 단번에 온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장성한 사람이 되는 데도 20년씩 걸립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서, 온전하신 예수님처럼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습니까?
정말 완전히 온전케 되는 것은 부활하여 천국에 갔을 때, 이루어집니다.
2. 그러나 이 세상에서도, 늘 성령님의 충만함과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 수 있고, 성령님의 은혜로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날마다 기도하여 주님(성령님) 모시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힘을 얻어서, 온전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3. 요한계시록 3장의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회개하여 온전한 신앙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3:2-3.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리고 에베소 교회는 목사의 지도를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감으로써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4:11-13.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라.
<위로를 받으며>
1. 지금까지 바울 사도는 범죄 한 고린도 교인들을 권면도 하고, 책망도 하고, 용서하지 않고 처벌한다고 협박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두 하나님의 크신 위로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2. 이처럼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전투와 같습니다.
밖으로 생존경쟁의 투쟁이 있고, 내 안에도 죄성으로 인한 투쟁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힘만으로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으므로, 성령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님이 ‘참된 위로자’(true Comforter)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님께 위로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2. 바울 사도는 사형선고를 받는 것 같은 환난을 당했으나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고린도 교인들도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기 바랐습니다.
고린도후서 1:3-5.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린도후서 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마음을 같이 하며>
1.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 성도들은 한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세상의 애국지사들도 오직 나라를 위한 한마음을 가지고 죽도록 충성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국민들도 월드컵 축구 경기를 하면, 온 백성들이 한마음이 됩니다.
이와같이 백성들이 나라를 위할 때 한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성도들의 마음이야, 구원의 감격 속에서 정말 쉽게 한마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이처럼, 성도들이 주님과 주님의 나라 즉 교회를 위하려는 한마음을 가질 때, 교회는 평안하여지고, 성도들의 마음도 평안하여집니다.
<평안할지어다>
1. 앞에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면서, 용서하지 않고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본심은 고린도 교인들이 평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바울 사도가 권면하고 책망한 모든 말씀은 결국 성도들이 평안하고, 교회가 평안하기를 원해서 한 말들이었습니다.
즉 ‘사랑의 권면’(encouragement of love)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화를 내는 것도 결국 자식이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부모인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을 권면하고 책망한 것도 결국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1. 사실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늘 성도들과 교회에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아갈 때,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 그리고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으로 축복하는 축도입니다.
즉 바울은 이 말씀으로써 평강의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 당시에 인사는 부모가 자식에게는 볼에다 입 맞추고, 친구끼리는 이마에 입 맞추고, 부부끼리는 입과 입으로 입 맞추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하게 입 맞추라는 말씀은 이렇게 예의를 갖추어서, 인사하고 교제하라는 말씀입니다.
2.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이런 성경적인 문화가 형성되지 않아서 만일 교회에서 이런 입맞춤을 하면, 신문에 대서특필이 날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은 이런 입맞춤의 문화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흥사 목사님들이 외국에 가서 집회를 하면, 은혜받은 여성도들이 강단에 올라가서 목사님에게 입맞춤을 합니다.
예전에 조용기 목사님(1936~ 2021년)이 그러는데, 여성도들이 입 맞추는 것은 괜찮은데, 남자들이 입 맞추면 징그럽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3. 그런데 우리 교회는 너무 한 것 같아요.
저는 도시 교회에서 여성도들과 악수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는데, 여기서는 악수도 안 하니 너무 냉정한 것 같습니다.
특히 청년회에서 사역할 때는 젊은 청년들과 포용도 하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입맞춤은 못 할지라도 악수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도시에서 오신 성도님들은 자연스럽게 손을 내미는데, 우리 교회 여성도님들은 악수를 안 하니 오히려 이상합니다.
하여튼 초대교회부터 성도들끼리 친밀한 인사와 거룩한 교제는 불신자들이 비난할 정도로 친밀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끼리 분파 싸움을 그만하고, 이제는 서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평안하시고, 성령님의 위로를 받으시며, 서로 입맞춤으로 문안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행복한 교회 생활을 하시고, 복된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12절.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 당시에 인사는 부모가 자식에게는 볼에다 입 맞추고, 친구끼리는 이마에 입 맞추고, 부부끼리는 입과 입으로 입 맞추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하게 입 맞추라는 말씀은 이렇게 예의를 갖추어서, 인사하고 교제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 문안 인사는 중요합니다.
문안 인사를 안 드리면, 친척 간에 미움과 다툼이 생깁니다.
그러나 문안 인사를 잘하면, 사업에 성공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인맥 관리’를 잘하면, CEO로 성공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보험사 직원이나 다단계 사원은 사람 관리를 잘해서, 연간 1억을 번다고 합니다.
2. 그러기 때문에 명절에 인사를 잘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정치하는 분들은 사람 관리를 잘해야 하기 때문에, 명절이면 인사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래서 애경사에 꼭 참여하고, 평상시에도 인사와 선물을 잘합니다.
3. 이처럼 평상시에 인간관계를 잘해놓으면, 무슨 일을 당할 때 해결을 부탁하기도 하고, 또는 자녀 문제로 부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평상시에 이런 인간관계를 잘해놓지 않으면, 무슨 문제에 부딪쳤을 때, 부탁을 할 수 없습니다.
4. 그래서 어떤 사람을 객관적으로 아는 것 하고, 어떤 사람과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천양지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 이명박씨가 대통령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압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과 아는 사이가 되어서, 전화하면 받아주고, 부탁도 할 수 있는 관계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5.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물질보다는 인간관계를 잘 유지해야 합니다.
즉 물질은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인간관계를 좋은 관계로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친구나 친척이나 자녀라도 물질에 좀 손해를 보더라도 인간관계가 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과거에 약 3년간 정성을 쏟아부은 사람이 있었는데, 마음을 상하게 하고 헤어져서, 다시는 볼 수 없는 악한 관계가 되고 만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는 너무나 화가 나서 그랬지만, 지혜가 없었던 거지요.
그 후로는 연락도 끊어버리고, 미안하다는 말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천국 가서나 주님 앞에서 볼 때, 서로 좋은 얼굴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주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이 세상에서도 좋은 얼굴로 볼 수 있으면, 한없이 감사할 일이고요.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군생활 할 때 사이가 틀어진 사람(부연대장), 신학교 교수 시절에 틀어진 한 사람, 목회하면서 틀어진 사람(김*석)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과 이 세상에서 화해하고 환한 얼굴로 볼 수 있으면, 주님의 크신 은혜이고, 그렇지 못하면 장차 천국에 가서 환한 얼굴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부모 형제에게도 잘못한 일들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요, 장차 천국에 가서 용서를 구하고 효도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6.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16장 9절에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안 인사를 잘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시고, 복된 삶이 활짝 펼쳐지시기를 축원합니다!
13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1. 성경에는 축도들이 여럿이 나오지만, 그 중에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이 대표적인 축도입니다.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요한복음 20:19.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로마서 16:20.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고린도전서 16:23-2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갈라디아서 6: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에베소서 6:23-24.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빌립보서 4: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골로새서 4:18.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데살로니가전서 5:2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데살로니가후서 3: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디모데전서 6:21.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디모데후서 4:22.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디도서 3:15.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빌레몬서 1: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히브리서 13: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베드로전서 5:14.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베드로후서 3:18.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유다서 1:25.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요한계시록 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이처럼 축복 기도는 다양합니다.
일반적인 것은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입니다.
그런데 오늘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은 성삼위 하나님의 복을 축원하는 대표적인 축도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이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축도를 예배 끝에 축원하곤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1.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즉 마태복음 20장 28절과 마가복음 10장 45절에는 우리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3장 24-26절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은혜는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를 가리킵니다.
2. 성경에서 ‘은혜’란 거저 주는 혜택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혜택은 우리 주 예수님의 대속적인 고난 덕택으로 주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속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영생을 얻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가난해지심으로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병을 대신 짊어지심으로 우리가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지옥 형벌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영생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 다섯 가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어떤 교단에서는 <5중 복음>(fivefold gospel)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는 속죄와 영생 천국의 구원을 얻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예수님 덕분으로 모든 하나님의 축복을 은혜로 거저 받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사랑>
1. 원래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을 향해서 무섭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시편 7편 11절에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바냐 3장 17절에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2. 그래서 로마서 5장 10절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십니다.
로마서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습니다.
로마서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성령의 교통하심 >
1. 성령님의 교통하심이란 성령님과 우리가 서로 교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원래 우리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거룩한 성령님(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만일 더러운 우리가 성령님(하나님)을 가까지 하려고 하면 죽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우리가 성령님(하나님)과 교제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처럼 성령님의 교통이 이루어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래서 거룩한 성령님이 우리와 교통하시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교통은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축복입니다.
이 성령님의 은혜는 불신자 아닌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누리는 복입니다.
요한복음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 성령님은 우리를 천국까지 인도하시는 보증인이 되십니다.
에베소서 1:1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성령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이 성령님이 우리를 천국 구속의 날까지 인치셨습니다.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까지 인도하시는 보호자가 되시는 성령님을 늘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이처럼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갈 때 성령의 열매들을 맺으며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22-25.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
이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와 직임을 따라 교회에서 봉사직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7-11.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이처럼 바울 사도는 가장 좋으신 삼위 하나님의 축복을 고린도 교인들이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축복 기도를 함으로써 고린도후서를 마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님들과 자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