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참으로 정직하다. 신록으로 눈부시던 5월도 어느새 저물고, 녹음이 짙어지는 성하의 문턱에 들어섰다. 세월은 백구과극이라는 말처럼 눈깝짝할 사이에 흘러간다. 그렇게 맞이한 5월의 마지막 날, 사자중대 전우들은 서울 석관동에 자리한 조선왕릉 의릉을 찾아 역사와 우정을 함께 품는 시간을 가졌다. 예전의 중대 모임은 오찬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전현철 지회장이 부임한 뒤부터는 역사문화유적지를 먼저 탐방하고 식사를 함께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성유경 회장의 적극적인 제안이 더해져 건강도 챙기고 역사도 배우는 뜻깊은 모임으로 자리 잡았다.
몸과 마음을 함께 살찌우는 참 좋은 변화였다. 약속장소는 돌곶이역 8번 출구. 정오가 되자 사자 13명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였다. 생도 시절 몸에 밴 시간 엄수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반가운 악수를 나누며, 의릉으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오랜 전우들를 만난다는 설렘이 묻어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동 캠퍼스를 지나 울창한 숲길 끝에 의릉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서 성유경 회장은 하루 동안 역사해설가로 나섰다. 조리있는 설명과 유쾌한 입담은 모두를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정말 완석점두라는 말이 떠오를 만큼 그의 설명은 생동감이 넘쳤다.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 앞에 서니 파란 하늘과 천장산의 푸른 숲, 그리고 넓게 펼쳐진 잔디가 한폭의 산수화처럼 시야를 채웠다. 사자들은 저마다 '이렇게 아름다운 능이 있었나' 하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의릉은 조선 제20대 임금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능이다. 화려한 왕궁의 삶 뒤에는 누구보다 고단한 운명이 숨어 있었다. 희빈 장씨의 아들로 태어나 당쟁의 한가운데에서 살아야 했던 경종은 병약한 몸과 정치적 갈등 속에서 짦은 생을 마쳤다. 소론과 노론이 첨예한 대립은 결국 신임사화라는 비극을 낳았고, 그의 재위 기간은 조선 당쟁의 절정기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와 패자의 기록만은 아니다. 경종은 서양식 화기의 제작을 장려하고,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기록한 남구만의 <약천집>을 간행하는 등 국정을 위해 애쓴 군주이기도 했다. 짧은 치세 속에서도 자신의 소임을 다하려 했던 그의 삶은 의릉의 고요한 풍경과 겹쳐지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의릉을 둘러본 뒤 숲길 산책에 나섰다. 아름드리나무들이 만들어 낸 초록 터널 아래로 피톤치드 가득한 향기가 페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얼마 걷지 않아 수령 200년 가까운 향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붙잡았다. V자 형태로 갈라진 줄기 가운데 한쪽은 이미 생명을 다했지만, 다른 한쪽은 여전히 푸른 잎을 달고 있었다.
마치 숱한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살아온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이어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강당을 지나며 역사의 또 다른 장면을 떠올렸다. 한때 민족 화해의 상징으로 기대를 모았던 약속들이 지금은 빛이 바랜 채 남아 있는 현실은 역사가 얼마나 냉정한지를 새삼 일깨워 주었다. 결국 역사는 기록보다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산책길 양옆에는 산딸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십자가를 닮은 꽃잎과 붉은 열매를 바라보며 예수의 수난을 떠올리는 전설도 함께 들었다. 자연은 계절마다 꽃을 피우지만, 사람은 이야기를 피운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탐방을 마친 우리는 능이마을로 자리를 옮겼다. 능이버섯 향이 진하게 배인 오리백숙 한 상이 차려지고, 막걸리와 소주잔이 오가며 분위기는 금새 무르익었다. 생도 시절 4년을 함께한 전우들이기에 서로의 웃음은 꾸밈이 없었고, 오래 묵혀 두었던 이야기들은 술잔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함께 웃고 추억을 나누는 그 시간만큼은 모두가 다시 청춘이었다. 화재는 역시 건강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만큼 소중한 재산은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절감하고 있었다. 규칙적인 운동과 건강한 식습관, 정기적인 검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무엇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여섯 전우를 떠올리며 지금 함께 걷고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 더욱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날 사자중대는 대열구국동지회에 성금을 전달하기로 뜻을 모았다. 작은 정성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었다. 우정은 함께 웃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함께 나누는 데서 더욱 빛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돌곶이역에서 서로의 건강을 기원하며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대부분의 전우들은 이날 처음으로 의릉의 존재와 그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책에서 읽는 역사보다 직접 현장을 걸으며 배우는 역사는 훨씬 깊이 마음속에 남는다. 흔히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의릉은 왕 한 사람의 무덤이 아니라 권력의 허망함과 인간의 삶, 그리고 시대의 아픔을 품은 공간이었다. 그 역사 위를 함께 걸은 사자들의 우정 또한 세월 속에서 더욱 깊어질 것이다. 푸른 숲길을 함께 걸으며 웃음을 나누었던 하루. 그날의 의릉은 우리에게 과거로 돌아보게 했고, 현재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으며, 앞으로도 함께 걸어갈 우정의 길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준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