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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歲寒圖) 1844, 국보 제180호, 추사 김정희 (1786~1856) 세한도는 세로 23cm, 가로 108cm의 족자 형식을 빌려 그린 문인화이다. 긴 화면에 단지 쓰러져 가는 오막집과 그 좌우에 소나무·잣나무를 대칭되게 그렸을 뿐, 여백의 텅 빈 화면을 보노라면 한 겨울 추위가 매섭게 전해져 뼛속까지 시리다. 화면 오른쪽에는‘세한도(歲寒圖)’라는 화제(畵題)와‘우선시상완당(藕船是賞阮堂)’이란 관지(款識)에 정희(正喜)·완당(阮堂)이라고 새긴 낙관이 찍혀 있다.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용비늘이 덮인 노송과 가지만이 앙상한 늙은 잣나무를 통해 작가의 농축된 내면세계가 담백하고도 고담(古淡)한 필선과 먹빛으로 한지에 스며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세한도는 지극히 절제되고 생략된 화면에서 험한 세상을 살면서도 지조를 잃지 않으려는 선비의 고졸(高拙)한 정신이 엿보인다. 왜냐하면 병제(竝題)에도‘날씨가 차가워진 뒤에야 송백만이 홀로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했듯이 황량한 세상에 지조 높은 선비를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는 귀양살이하던 김정희(1786∼1856)와 제자 이상적(1804∼1865) 간의 끈끈한 사제의 정이 흠뻑 배어 있는데, 문인화의 인위적인 기교를 훌훌 털어 버려 선비의 맑은 문기(文氣)가 넘쳐흐른다. 김정희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며 서화가로 본관은 경주이고 호는 추사(秋史)이다. 증조부되는 김한신(1720∼1758)이 영조의 첫째 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해 열 셋에 월성위에 봉해지고, 부마가 된 월성위는 예산 오석산 근처의 땅을 하사받아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지금의 ‘추사고택(秋史古宅)’이 바로 그 집이다. 김정희는 증조할머니가 옹주였으니 집안의 범절이나 내력이야 더 할 나위 없는 명문가의 자손으로 병조판서 김노경(1766∼1840)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젊어서는 청나라를 왕래하며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등과 사귀며 그들로부터 금석문(金石文)의 감식법과 서법(書法)을 익혔다. 김정희의 또 다른 호 ‘완당(阮堂)’은 당시 옹방강에게서 ‘해동 제일의 문장’이란 칭찬과 함께 지어 받은 것이다. 또 금석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도 힘써 신라 진흥왕이 세운 북한산 순수비를 발견하는 쾌거도 올렸다. 1819 년, 30대 초반에 문과에 급제한 김정희는 예조 참의, 병조 참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면서 순탄한 벼슬길을 걷는 듯 보였다. 그러나 부친이 비인 현감(현재 충남 서천 소재)을 지내면서 김우영을 파직시켰는데, 그 일로 안동 김씨의 탄핵을 받아 김정희는 고금도로 귀양을 갔다. 순조의 배려로 귀양에서는 풀려났으나, 헌종이 즉위하며 안동 김씨가 다시 득세하자, 1840년 제주도 정포에 또다시 유배, 안치되었다. 아버지인 김노경은 그 해 사약을 받고 죽었다. 김정희는 영의정이며 친구였던 조인영의 도움으로 죽음은 모면했으나 제주도 서쪽 백리 거리의 외딴 집에서 8년간이나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그 세월 동안 김정희는 권력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하여 오로지 학문과 예술에만 정진해서 마침내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어냈다.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 가던 길에 전주에 들러 71세의 서예가 창암(蒼巖) 이삼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독학으로 바닥에 글을 쓰면서 글씨를 연습하고 깨우친 인물로, 황모필로 쓴 그의 글씨는 거칠고 다소 촌스런 면이 있었다. 글씨에 대한 평을 부탁 받은 추사,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문화에 젖어 있었던 추사로서는 도무지 좋은 평을 할 수 없었는지 “글씨로 밥은 먹고 살겠습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창암의 제자들이 분기탱천하자 창암은 제자들을 말리며 “글은 잘 알망정 갈라지는 갈필의 맛과 조선 한지와 먹의 번지는 느낌은 모르는 모양이다”라고 말하며 말렸다 한다. 추사는 이렇게 창암에게 모욕을 주고 떠났다. 산광수색(山光水色), 창암 이삼만, ‘산은 높고 물은 맑다’ 조선시대 3대 서예가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1770~1847)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눌인 조광진(訥人 曺匡振, 1772~1840) 촌부의 거친 붓놀림을 업신여겼던 추사였지만 ‘세한도’에서는 그때 보았던 거친 붓선이 생동하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아마도 세월이 흐르면서 당시에는 몰랐던 갈라지고 거친 갈필의 맛을 드디어 추사가 알게 된 것이리라. 문헌에 남겨져 있는 바는 없지만, 창암과의 만남이 추사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추사와 창암의 만남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추사가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창암을 찾았을 때 이미 작고한 뒤였으므로, 추사는 그의 묘비에 명필창암이공삼만지묘(名筆蒼巖李公三晩之墓)라는 비문을 남겨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유배시절 절대 고독과 맞대면해 하루하루를 보내던 김정희에게 마음을 전해 준 사람은 누구일까? 거센 바람과 무서운 파도가 돛단배를 집어삼킬 듯한 험난한 뱃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주도를 찾아와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소치(小癡) 허유(許維, 1808∼1893)와 역관(譯官) 이상적이었다. 세한도를 낳게 한 이상적은 김정희의 문인으로 만학(晩學)과 대운(大雲)이란 책을 중국에서 구해 제주도로 보내 주었다. 그 당시의 김정희는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한 채 언제 사약을 받고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런 김정희에게 귀한 책을 보내 준다는 것은 여간한 각오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적은 자신의 안위는 생각지 않고, 오로지 스승에 대한 의리만을 생각하여 두 번이나 책을 보내 주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냉랭한 세태에서 선비다운 지조와 의리를 훌륭히 지켜내었다. 김정희는 제자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도 고마웠다. 그래서 세한도를 그려 인편을 통해 보내 주었다. 제주도에 유배된 지 5년째 되던 해였다. 이 그림은 이상적의 인품을 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는 송백(松栢)에 비유해 칭찬하고, 이어서 마음을 담은 발문(跋文)을 특유의 추사체(秋史體)로 써 그림 끝에 붙였다. “ 지난해에는 만학과 대운 두 책을 보내주더니, 금년에 또 우경(藕耕)과 문편(文編)을 보내 주었다. 이 책은 세상에 흔한 것이 아닌데 천만 리 먼 곳에서 여러 해를 거쳐 사서 나에게 얻어 보게 했으니 한때의 일이 아니다. 세상인심은 도도(滔滔)하여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좇는데, 마음과 힘을 허비하면서 권세와 이익에 마음을 두지 않고 이내 바다를 건너 초췌하고 여읜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다. 세상에서 권세와 이익을 좇는 것을 일컬어 태사공[司馬遷]은 말하기를 ‘권세와 이익을 함께 갖은 사람이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교제가 소원해진다’하였다. 그대도 역시 도도한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인데, 스스로 초연히 도도한 권세와 이익 밖으로 빠져나와 권세와 이익으로 나를 보지 않으니,(그렇다면) 태사공의 말이 틀린 것인가.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송백만이 홀로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송백이 사계절이 없이 시들지 않고 날씨가 차가워지기 전에도 송백이요, 차가워 진 후에도 송백이기 때문이다. 성인은 특히 날씨가 차가워진 후를 칭송하였다. 그대가 나와 함께 있을 적에 그대를 위해 잘해 준 것도 없고, 뒤(유배시)에도 덜 생각해 준 것도 없다. 그런 연유로 전(권세가 있을 때)에 그대를 칭찬한 적이 없는데, 그대는 훗날 성인의 칭찬을 받으려 한 것인가. 성인이 특히 칭송하기를 시들지 않는 정조와 굳은 절개뿐만 아니라 날씨가 추워진 때가 되어야 송백의 정조와 절개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오호라, 한나라 서경[洛陽]에 순박하고 후덕한 인심이 있었을 적엔 급암과 정당시같은 어진 사람도 그 빈객과 더불어 성하고 쇠하였으며, 하비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방문(榜文)을 붙인 일은 세상인심이 때에 따라 박절하게 변함을 탓한 것이다. 슬프도다. 완당노인 씀” 김정희는 헌종 말년(1848)에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1851년 친구인 권인돈의 일에 연루되어 66세 노인으로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되어 갖은 고초를 겪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 후로는 안동 김씨의 계속된 세도 때문에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였다. 김정희는 부친의 묘가 있던 과천의 한 절에 은둔하며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더욱 몰두하더니 71세의 일기로 여생을 마쳤다. 현재 그의 묘는 추사 고택 왼쪽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림을 받은 이상적은 그 후 북경으로 가 그곳의 학자들에게 두루 이 그림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장악진·조진조등 16명의 명사들은 앞을 다투어 그림을 칭찬하는 시를 지어 그림 끝에 붙였고, 그 후 김정희의 문하생이던 김석준의 찬(贊)과 오세창·이시영의 배관기 등이 덧붙여져 현재와 같은 두루마리 형태로 완성되었다. 이상적이 소장해 나라 안팎의 명사들이 두루 감상했던 세한도가 어떻게 그 후 일 백여 년의 세월 동안 이 땅에 전해져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이 그림이 고졸한 문향을 뽐내며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45년 이전의 일이다. 경성제국대학의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일본인 후지즈카 지카시(1879∼1948)의 손에 세한도가 들어 간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후지즈카는 북경의 한 골동상에서 우연히 세한도를 만났는데, 그림을 본 순간 전율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운 좋게 그림을 입수하고는 틈만 나면 세한도를 들여다보고 살았다. 그리고는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을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문학 박사 학위를 청구하면서 발표한 논문은 「淸朝文化東傳의 硏究(청조문화동전의 연구)」(원제:李朝에 있어서 淸朝文化의 移入과 金阮堂)이었다. 그가 얼마나 김정희의 작품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나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의 불길이 거세지고, 일본이 수세에 몰리자 후지즈카는 세한도를 가슴에 품은 채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다.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기 어려운 지경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한 사람의 끊질 긴 노력에 의해 다시 고국의 품에 안겼다. 소전(素筌) 손재형(1903∼1981)이 그 사람이다. 세한도가 후지즈카의 수중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손재형은 삼고초려가 아니라 신발이 헤어 지고 무릎이 헐 정도로 찾아가 그림을 양보해 달라고 매달렸다. 손재형은 일제 때부터 고서화의 대수장가요, 대감식가로 고서화에 관해서는 골동사에 굵은 필적을 남긴 인물이다. 전남 진도에서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양정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는 조선 미전에서 특선으로 입상할 정도로 그림과 서예에서 천재적인 자질을 발휘했다. 효자동에 소재한 멋들어진 한옥 집에서 살았고, 사랑방과 대청 벽에는 뛰어난 고서화를 걸어 놓고 감상하던 풍류객이었다. 재기가 발랄하고 성격이 활발했던 손재형은 김정희의 작품을 무척이나 좋아해 서화뿐만 아니라 전각과 유품까지 열성적으로 수집하였다. 일제 때, 고려청자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거금에 거래되었으나 고서화만은 눈여겨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겸재(謙齋)의 화첩까지 양가 댁의 불쏘시개로 쓰이기 예사였고, 선비의 기품이 느껴지는 대가의 그림도 벽지로 둔갑한 채 파리똥이 덕지덕지 묻어 버렸다. 어두웠던 시절, 조상의 예술 혼과 기상이 신광을 찌르는 고서화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우리의 자긍심을 부추기는 데는 그 시대, 몇 안 되는 선각자의 애정과 빼어난 감식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세한도를 되찾아 온 손재형의 집념은 민족문화재수호의 귀감이기도 하다. 손재형은 세한도를 찾아 동경으로 달려갔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어 동경은 연합군의 공습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위험천만한 사지였다. 손재형은 물어물어 후지즈카의 집을 찾아내고는, 근처 여관에 짐을 풀었다. 세한도에 대한 후지즈카의 애정이 이만 저만이 아님을 잘 아는 손재형인지라 장기전을 벌이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는 배짱 하나로 병석에 누워 있는 후지즈카의 집을 매일같이 찾아가 병문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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