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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4월과 씨알의교육
함석헌
씨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해마다 와도 처음 만나는 것 같은 사월입니다.
봄은 우리 좁은 들에도 듬뿍 들어 찼습니다.
동인춘색불수다(動人春色不須多)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봄빛 반드시 많아서가 아니라고, 벌써 누군가가 잘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뜰이라야 목련 한 나무, 산당화 한 그루, 수선화 한두 포기지만, 그것이면 족합니다. 하루아침에 부토 같은 것을 여덟 개씩 목을 흘킨다 해도, 율산(栗山) 같은 것을 백 개씩 무너뜨린다 해도, 홍성의 지진 같은 변이 반도 삼천리강산을 뒤흔든다 해도, 오는 봄을 못 오게 할 수는 없고, 피는 꽃잎술을 다물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 있으며 내 자유하는 혼이 어찌 장자로 더불어 손목을 잡고 우주 밖에 소요유(逍遙遊)를 하지 않겠습니까?
활짝 핀 목련의 깊숙한 횜의 속을 들여다보노라면 이 소돔 고모라가 어디론지 사라져버리고, 가운데서 그는 검붉은 심이 하나님의 보좌같이 보이고, 무수한 꽃술은 둘러서는 천사 같고, 금빛 술머리는 억만 태양의 빛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다가도 내일 아침 비가 오면 미련도 없이 거뜬히 떨어질 것입니다.
두 주일도 더 전부터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면서 이제 와서야 겨우 방싯이 열리려는 산당화의 백인지 천인지 이루 헬 수 없는 망울들을 바라보노라면, 저 건너의 성벽이 예언자를 모조리 죽이던 예루살렘같이 보이고, 그 불타는 눈망울들의 “호산나!” 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천지를 흔드는 듯합니다.
구청의 시퍼런 명령에 하는 수 없이 지난겨울 축대를 헐어 고치고 온실을 무너뜨리느라 바쁜 동안 일꾼들의 사정없이 파 던지는 흙에 묻히어 다 죽은 줄 알았던 수선이 흙을 제쳐주고 봄비를 몇 차례 맞고 나더니 새파랗게 살아나는 것이 너무도 고마워, 날마다, 17년 전 퀘이커의 고적 보러 영국 갔을 때 워즈워드의「수선화」란 시 생각나서 그것 보러 일부러 찾아갔던 영국 서북지방 늪지대에 천천 만만으로 피었던, 하늘의 별들이 일시에 땅을 찾아온 듯했던, 그 광경을 생각하며 물 주었더니, 올라오기 시작을 하더니 쑥쑥 솟아, 오늘은 그 첫송이들이 피었습니다. 바람에 흐느적이는 그 모양 보며 부활절이 다가오는 생각을 하니, 사방으로 뻗은 그 푸른 잎 마치 골고다 새벽하늘에 “랍오니!” 하며 꿇어앉는 막달라 마리아의 치마폭 같고, 그 왕관 모양의 황금 송이 굽어보는 그 속에서 “어서 내 형제들 찾아가 전하라!” 하는 음성 들려오는 듯합니다.
영원의 미완성
씨알 여러분, 그러나 정말 봄은 우리 속에 있습니다. 함박꽃의 피 흐르는 연한 손이 들치는 땅을 그래 우리 손이 갈아 뒤엎지 못한단 말입니까? 한겨울을 어둠 속에서 소리 없는 기도로 지낸 번데기가 하루아침 빛 바다 한복판에서 추는 평화의 춤을 우리 혼이 그래 못 추고 만단 말입니까?
거리를 지나노라면 골목의 천사들이, 내 허연 터럭 때문이겠지만, “야, 저기 하나님 간다!” 하는 소리를 종종 듣는 일이 있습니다. 귀여운 생각에 만져보고 지나가기는 하면서도 웃지 못할 일이다 하고, 교육의 중대성을 다시금 느끼곤 합니다. 죄는 텔테비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그런 늙어빠진 것으로 아는 데 세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결코 그런 이만이 아닙니다. 그보다도 차라리 영원의 젊은이로, 영원의 미완성으로 그려야 옳지 않을까? 이제 며칠이 지나면 우리 소리의 아홉번째 생일이 됩니다. 그 소리를 시작할 때에 나는 인생의 동그라미를 가져다 그려 맞추기 위해서라는 말을 했습니다만, 결코 조그만 성공에 만족하려고 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지난달 26일 나는 대구에 가서 강연을 한 일이 있습니다. 강연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 “제발 문제의 발언은 하지 말아 달라”는 명령은 아닌 요청을 들었기에, “나는 ‘문제의 발언’이라니 필시 무엇 철폐하라, 누구는 물러가라, 하는 그런 것일 터인데, 나는 공동으로 하는 성명에서는 그런 말에 같이 서명을 한 일이 있어도, 나 개인으로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일이 없다, 내가 아무리 보잘것없는 인물이라도 그런 소리나 하러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니다” 하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작고 시시한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의 그리시는 동그라미는 무한대의 동그라미입니다. 그 원의 어느 부분을 보아도 결코 구부러진 활딕으로 보이는 일이 없습니다. 언제나 직선입니다. 동그라미는 언제 가서야 이루어질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정의요 완전이신 것은 틀림없습니다. 정의의 법칙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지만,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단 말입니다. 얼른 이루어지면, 개구장이가 길바닥에 그린 동그라미 같아, 동그랗기는 한데 못쓸 동그라미입니다. 속이 좁아서는 역사를 메지 못합니다. 욕심이 있으면 급해지고, 급하면 작아지고, 작아지면 사람 죽입니다. 씨알 살리잔 것이지 죽이잔 것이 아닙니다.
씨알 여러분, 공자의 말씀 못 들었습니까? 군자는 그릇되지 않는다 했습니다. 노자는 뭐했는지 아십니까? “큰 그릇은 늦되고, 큰 소리는 안 들리고, 큰 그림은 꼴 없다” 했습니다. 또 장자는 뭐라 했습니까? “큰 길 이름 없고, 큰 말 말 없고, 큰 사랑 사랑 아니고, 큰 깨끗 모 안 난다”고 했습니다.
씨알은 믿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 곧 이를 영원히 믿어 하나님의 무한대의 원을 그리는 것이 씨알입니다.
씨알의 교육
이번에는 교육문제를 다루기로 했습니다. 교육을 말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나는 일제 때부터 교육과 종교와 농촌을 하나로 붙여서 생각해 오는 사람입니다마는 지금 그 셋이 다 말이 아닙니다. 또 우리만이 아닙니다. 인류전체가 당한 문제입니다. 생각을 좀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큰 전환기라는 것을 말합니다마는 그 전환은 우리의 걱정 이상으로 크고 심각한 것일 것입니다. 이것은 홑으로 사상이나 제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실로 생명 전체의 진화의 문제입니다. 그렇게 일을 크게 만든 것은 생각하는 인간의 잘못입니다.
인류역사를 큰 눈으로 내려다보면 대체로 두 시기로 갈리어 있습니다. 처음은 자연의 시기요 후는 인위의 시기입니다. 사람은 물론 처음부터 생각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일은 생각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초기에는, 지각이 들기 시작하는 어린이 모양으로, 압도적인 자연의 힘 속에서 그 뒤에 숨어 있는 것으로 어렴풋이 느껴진 절대 의지에 대해 순종하는 것이 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실지로는 몇 십만 년인지, 몇 백만 년인지 느린 걸음으로 지나온 시기 였습니다. 그때의 인간의 살림을 지도해 온 원리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순천자존역천자망(順天者存逆天者亡), 자연대로 순종하는 놈은 살고 거기 거슬리는 놈은 망한다” 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소위 근세라는 최근 4,5백 년에 와서 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급속도로 달라졌습니다. 처음으로 자전거를 타면서 신이 나서 언덕길을 마구 내리닫는 소년 모양으로 이 과학주의 역사를 추진해온 서구문명은 이날까지 쾌재만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인위가 아무리 발달해도 끝내 자연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제2차 대전이 일 때까지만 해도 불안감이 그리 심하지는 않았는데, 핵 과학 발달 이후 급속도로 비관적인 소리가 늘어갔습니다. 정직한 과학자는 도리어 진지하게 반성하기 시작했는데, 답답한 것은 정치인들입니다. 그들은 시험관 안에서 되어가는 것은 알지도 못하고 다만 거기서 나는 열매를 따먹는 재미만 알기 때문에 정직한 마음들의 경고를 들으면서도 “설마” 하고 목전의 권력의 맛에 만취합니다. 여기에 정말 걱정이 있습니다.
문명의 이기라 하지만 이기가 결코 이기가 아니고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가고 있는데, 이 소위 후진국이라는 나라들이 문제입니다. 후진이란 남의 문명을 이해는 못하고 그 결과만을 모방합니다. 그러므로 후진국치고 망하지 않은 사회 없고, 설혹 망하기는 면한다 해도 실로 무서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아마 서양문명을 재빨리 수입, 모방하여 성공한 나라에 일본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인데, 그 일본으로서 어떤 값을 치르고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 있는 우리 사람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지금은 생각 없는 사람, 이사야의 말을 빈다면, 어린아이가 세상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심판입니 다.
그러므로 오늘날 민족의 장래를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교육에 있어 근본적 대개혁을 단행해야 할 것이고, 그런 새 교육을 하려면 이때까지 죽은 줄로 멸시했던 자연에 대해 눈을 고쳐 뜨지 않으면 안됩니다. 죽은 것 같은 것은 너무 엄청나게, 크게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었던지, 얼마나 병이 들었던지, 대학에서 철학 강좌를 없애버린 데가 있다 하지 않습니까? 이만하면 앞날의 운명은 가히 점칠 수 있습니다.
정치만능의 주문을 어서 벗겨버려야 합니다. 사람은 결코 행복만을 추구하는 존재도 아니고, 또 물량주의의 진창 속에 떠돌아가는 것이 결코 행복이 아닌 것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하는 것이 참 삶임을 모르고 그저 지배하는 데만 쾌감을 가지고, 피지배 속에 의무를 잊어버리는 안일만을 탐하는 사람은 이대로 있으려 하지만, 씨은 단연 자기와 남을 다 살리기 위해 거기 반항하여야 합니다. 사람은 의미에 삽니다. 살아도 의미, 죽어도 의미입니다. 의미가 무엇입니까. 살아 있는 우주 전체입니다.
절대의 권위
교육은 혁신되어야 합니다. 교육은 절대로 정치가 하는 것 아닙니다. 어진 이는 반드시 정치 생각 아니 합니다. 타락되어서 나온 것이 정치주의입니다.
그런데서 교육을 혁신하려면, 방법 찾다가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의지 있는 곳에 길 있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육자는 스스로의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믿음 있어야 긍지는 생깁니다. 지위는 사람이 쓰는 임명장에서 나오는 것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내 귀에 불어넣고 일러주심을 듣는 데서 생깁니다. 맹자는 벌써 3천 년 전에 말했습니다. “광토중민(廣土衆民)을 군자욕지(君子欲之)나 소락(所樂)은 부존언 (不存焉)이라, 중천하이입 (中天下而立)하야 정사해지민(定四海之民)을 군자언지(君子焉之)나 소성(所性)은 부존락(不存樂)”이라고, 또는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에 왕천하불여존언(王天下不與存焉)”이라고, 그런데, 학문을 하고 도를 배웠다는 사람이 어찌 스스로의 하늘이 준 자리를 버리고 칼 든 사람의 다리 밑으로 기어 들어갑니까? 그러고는 한 몸도 건지지 못할 것인데 어찌 세상을 건지는 교육을 할 수 있습니까?
일찍이, 세상이 이렇게까지는 타락되기 전에, 세상에 신성(神聖)이란 것이 셋이 있었습니다. 가정의 신성, 노동의 신성, 그리고 교육의 신성입니다. 그 셋 다 신성의 근원 곧 하나님에게서 직접 나온 것입니다. 이제 이 셋이 다 진창에 떨어졌습니다. 권력주의의 발에 밟혀서입니다. 셋은 하나이기 때문에 땔 수 없고, 어디서도 시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런 때에는 가장 바른 길이 우선 교육에서부터 시작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배워서만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육 없으면 산업, 정치가 다 있어도 짐승이고, 교육 있어서 도리 알면 굶고 갇혀 있어도 사람입니다. 교육을 해, 사람의 길을 알면 공장에 삯일을 해도 사람일 수 있지만, 공장을 크게 경영해도 교육이 잘못되면 일조에 제세산업 되고 율산 회사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날 수 있는 생명의 요점은 깨달은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업은 못하고 정치는 못해도 교육은 해야 합니다. 교육자는 스스로 세계통일보다 더 중대한 사명을 하나님에게서 받았다는 확신과 의무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씨알 여러분 누가 참 교육자입니까? 참 스승이 어디 있습니까? 씨알 내놓고 다른 데 있을 수 없습니다. 참 스승은 어디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사람의 혼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육은 절대 낙관입니다. 제 속에 있으니 찾아서 못 찾을 리 없습니다. 씨알은 맨사람입니다. 하늘에서 받은, 또 민족을 통해 받은 내 근본, 나를 가리울만한 어떤 겉의 것도 가진 것 없는 것이 씨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좋은 교육자 찾으려거든 씨알에게로 가야 합니다. 도가 가깝다는 것은 이 뜻입니다. 제 속에 두었다 그 말입니다. 씨알의 이 신성한 사명을 어떤 정치도 뺏을 권리는 없습니다. 우주 생명의 진화를 위해 씨알은 누구에게도 굴복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역사의 나가는 옳은 방향의 제시는 어떤 정치도 할 능력이 없고, 다만 하나님만이 하시는 것인데, 그 하나님의 계시의 내리는 안테나는 자유로이 생각하는 씨알의 혼뿐입니다. 그것을 망케 하는 어떤 지식도 권력도 우주 생명의 죄인입니다. 두려워 겁내는 것은 죄악입니다. 우리는 절대의 권위를 가졌습니다.
씨알 여러분 우리 조상의 어진 마음은 남겨준 말이 있습니다.
“농사꾼은 죽어도 씨앗은 베고 죽는다.” 이 씨앗은 우리 민족의 조상이래 전해오는 착함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님이 넣어주신 알갱이입니다. 죽으면서도 그것은 남겨놓지, 내 살기 위해 그것까지 먹어버리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보다 더 귀한 종자가 어디 있습니까.
씨알의 소리 1979. 4,5월 83호
저작집; 9- 269
전집; 8- 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