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찾아서 / 김석수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을 모시는 곳이다. 다른 서원과 달리 경내에 서당이 있다. 퇴계 선생은 말년에 이곳에 서당을 세우고 10년 동안 제자를 가르치며 학문을 연구했다. ‘선비문화수련원’의 초청을 받아서 1박 2일로 다녀왔다. 안동에서 승용차로 40여 분 걸린다. 주차장에서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에 울긋불긋한 단풍이 한창이다. 매표소를 지나면 오른쪽에 향나무가 가지런하게 줄지어 서 있다.
천천히 걷다 보면 안동호를 배경으로 한 화강암 비석이 눈에 띈다. 1980년 공자 77대 종손이 이곳에 와서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써 준 것이다. 공자(노나라)나 맹자(추나라)와 같은 훌륭한 성현이 태어난 고장이란 뜻으로 퇴계 선생을 칭찬한 말이다. 그 비석 바로 뒤에 있는 언덕에서 바라보면 풍경이 장관이다. 멀리서 강물이 가물거리며 사라진다. 높고 푸른 하늘 아래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이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천 원권 지폐에서 볼 수 있는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 가운데 ‘서취병산’도 보인다.
‘유정문(幽貞門)’이라고 불리는 사립문을 열고 서당으로 들어간다. 선생은 이 문을 여닫으며 수많은 손님과 제자를 맞이하고 배웅했다. 늘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배려했다. 마당은 좁고 건물은 의외로 작고 아담하다. 마당 건너편에는 선생이 좋아한 매화나무가 가득하다. 가운데 기둥에 도산서당(陶山書堂) 현판이 있다. 선생의 친필이다. ‘산(山)’자와 ‘서(書)’자는 정자체가 아니고 새 모양의 획을 넣은 뒤 형상화해서 썼다. 그곳을 찾는 사람이나 제자에게 친근하고 편안하게 대하려는 의도다.
‘완락재(玩樂齋)’는 서당의 중간 방으로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쳤던 방이다. 방안은 서쪽과 북쪽 벽이 서가다. 서쪽에 골방 같은 공간이 있고 남쪽에 작은 창이 있다. 서가를 방 아래쪽에 두지 않는 것은 책을 등지고 싶지 않아서다. ‘암서헌(巖栖軒)’은 서당의 마루로 여가를 즐기거나 토론하는 곳이다. 오랫동안 학문에 능하지 못해서 바위에 기대어 작은 효과를 바란다는 의미다. 나중에 마루가 좁아서 ‘살평상’을 덧붙였다.
정우당(淨友塘)은 마당 동쪽에 정사각형의 작은 연못이다. 가을이라 연꽃을 볼 수 없다. 세상이 혼탁하더라도 청렴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건너편 동쪽 기슭에 ‘절우사(節友社)’라는 동산이 있다. 매화와 소나무, 국화, 대나무 정원이다. 매화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맑은 향기와 함께 봄을 제일 먼저 알린다. 소나무는 어려운 조건에도 항상 꿋꿋하다. 국화는 늦가을 추위와 서리를 이겨내고 깊은 산속이나 아늑한 정원 어느 곳에서도 꽃을 피워 향기를 낸다. 대나무는 뿌리가 단단하고 마디가 곧다. 절개를 지키며 검소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선비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농운정사(隴雲精舍)는 기숙사다. ‘언덕 위에 구름’이라는 낭만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산중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만 하던 사람의 고사에서 따온 이름이다. ‘시습재(時習齋)’와 관란헌(觀灡軒)으로 나뉘어 있다. 시습재는 배우고 익혀서 진리를 찾으라는 가르침이다. 관란헌은 물결이 주는 교훈을 깨우쳐서 끊임없이 학문에 정진하라는 뜻이다. 진도문(進道門)에서 보면 도산서원(陶山書院)이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한석봉이 쓴 사액서원 현판이다.
전교당(典敎堂)은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유생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향사(享事)나 중요한 행사를 치르는 곳이다. 벽과 천정에는 공부하는 유생이 알아야 할 원규(院規)와 존현의식에 필요한 헌관집사분정판(獻官執事分定板)이 있다. 기일(忌日)과 전교(典敎), 치제문(致際文)도 걸려 있다. 이곳에서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거나, 뛰거나, 떠들거나, 드러눕거나, 벽에 기대어 앉아서도 안 된다. 상덕사(尙德祠)는 퇴계 선생과 제자 월천 공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알묘례(謁廟禮)를 한다. 선비의 유복을 입고 선생의 훌륭한 덕행을 본받겠다고 다짐했다.
마지막으로 유물 전시관인 옥진각(玉振閣)으로 갔다. 내 눈길을 끈 것은 조그마한 책상이다. 작은 밥상 모양이다. 선생은 늘 왼손을 올려놓은 채 책을 읽어서 왼쪽이 닳아진 흔적이 보인다. 청려장은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다. 산 너머 계상서당에서 도산서당으로 오가면서 사용했다.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선생은 학문과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힘든 길을 지팡이에 의지하며 이곳저곳을 다녔다.
디음날 퇴계 생가인 ‘노송정(老松亭)’ 종택을 방문했다. 종손 어른은 퇴계 선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덟 남매 중 막내다. 형이 여섯, 누나가 하나다. 생후 일곱 달 만에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홀어머니의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며 배려하는 마음이 크다. 네 살 때 넷째 형(온계)이 풀을 베다 손을 다쳐서 피가 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밥을 먹지 않은 적이 있다. 열두 살에 《논어》를 읽고 요약해서 설명했다. 500년 종가의 문화를 보존하며 계승하고 있는 종손과 종부가 자랑스러웠다.
첫댓글 어제 그리고 오늘 경북 안동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 글을 접할 때는 도산서원을 지나온 후였습니다. 도산서원에서 선생님과 제가 같은 곳을 보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글을 읽고 다시 한 번 가야하나 생각을 했습니다.
도산서원을 완벽히 꿰뚫을 수 있는 글이네요. 안동에 한 번도 못 가봤는데, 기회가 얼른 오면 좋겠습니다.
저도 가봤지만 선생님 글 읽으면서 떠올리니 아무 기억이 안 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도산서원에 가 본적 없지만 선생님 글 읽고 다른 데 가서 아는 척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하하. 글이 정말 섬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