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1992년 엄마와 나와 함께 서울을 떠나 해남으로 귀농을 했고, 황칠사업을 크게 시도했고, 사업투자와 관련된 여러 송사에 시달렸고, 터전을 잃고 떠돌이 생활을 했고, 노경에 오빠와 내가 간신히 서울에 다시 자리를 잡으니 다발골수종에 걸렸다.
아빠의 황칠사업이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돌파구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는데, 대학생이었던 나는 운전을 못하는 아빠를 모시고 참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 어느 날은 너무도 괴로운 심사가 일어서 아무 목적도 없이 해남에서 여수 향일함까지 그냥 왔다 갔다 왕복을 하기도 했다. 가만히 있으면 미칠 것 같아서.
해남 아침재를 비롯 그간 쌓아 올린 모든 걸 잃어 갈 즈음에는, 엄마 아빠를 차 뒤에 모시고 내가 운전을 하여 해남 아침재로 향하는 길에 있는 큰 저수지로 차를 몰아버릴까 하는 충동에도 심하게 시달렸다. 죽으면 끝인데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하는 마음이 나를 잠식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해남 아침재를 잃고 영암의 월남과 해남의 후미진 정미소 뒷집, 장성 기차길 옆 오막살이를 하면서, 나는 이런 삶에, 그러니까 ‘망한 삶’에 점차 익숙해졌고, 작은 학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엄마아빠와 함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결국 장성 우시암에 정착하여 생활하게 되었고, 서울에 직장을 잡아 근무한 것이 거의 10년 세월이다. 아빠가 갑자기 다발골수종이라는 큰 병을 얻었지만, 그간 고생하여 모아놓은 돈으로 아빠의 병구완 정도는 큰 문제없이 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와 함께, 이십여 년 전에, 엄마아빠와 같이 죽어버릴까 했던 시절이 다시금 떠오른다. 엄마아빠와 나는 참 길고도 독하게 어떤 시절을 같이 살아낸 ‘팀’인데, 팀의 리더인 아빠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팀 해체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살만큼 살았고, 당할만큼 다 당했으니, 같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되는 것이다.
삶이 참 피곤하다는 것. 앞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더 큰 숙제들을 마주하게 되고, 매 순간,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보지만, 늘 역부족의 상태에서 새로운 평형점을 찾아내는 것으로 미봉 혹은 일단락을 한 채 온몸으로 기어나가듯 앞으로 조금씩 버텨나가는 일에 ‘삶’이라는 이름을 부쳐야 한다는 기막힌 사실. 이런 피곤을 끝장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정작 큰 병을 얻은 아빠도 힘을 내어 치료를 받고 있고, 퇴행성 관절염으로 제대로 걷질 못하는 엄마 역시 그런 아빠 곁에서 최선을 다해 간병을 하고 있는데, 사지육신 멀쩡하고 제일 젊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죄스런 마음이지만, 사실은 사실이니 어쩔 수 없다. 이 정도면 이번 생에서 부모자식의 인연법 안에서 할만큼 했으니 그냥 다 내려놓고 싶다는 이 마음은 부인한다고 해서 어디로 갈 것도 아니니, 이 마음을 지켜보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할 뿐이다.
‘좋은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근근히 살아왔던 것 같은데, ‘좋은 삶’의 가능성이 부정될 때, 아니, ‘삶’ 자체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무너져 내릴 때, 무엇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가. 바늘 하나 꽂아볼 땅이 없는 게 아니라, 꽂을 바늘조차 사라져 버린 삶도 삶이라고 칭할 수 있는가. 천년만년 살겠다는 생사심이 기름막 걷어지듯 걷어진 이 상황에서, 나는 ‘무’라는 새로운 생사심을 마주하게 된다.
삶이 통으로 의미 없음을 목도하면서도 절망하지 않은 채 찬찬히 걸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숙제를 마주한다. 이 숙제가 해결되지 않는데도 상관이 없다. 풀리지 않는 숙제야 말로 진짜 숙제임을 알겠다.
진짜 숙제를 이렇게 대면한다. 답 없음이 답인, 그런 숙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