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상처란 무엇인가? 먼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내면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관심을 내면으로 돌리고 나면, 그 다음에 풀어야 할 이야기는 바로 그 내면을 건강하지 못하게 망가뜨리고 뒤틀리게 한 ‘상처’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이다. ‘알아야 치유를 하든지 할 것 아닌가?’라는 아주 상투적인 이유에서라도…
첫째, 상처란 상처 난 감정이다 ‘상처’라는 말을 정확히 제대로 말하면, 그것은 ‘상처 난 감정’이라는 말이다. 사람의 내면을 지,정,의 세 부분으로 본다면, 그 가운데서 상처를 받는 부분은 ‘감정’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정,의 가운데 가장 쉽게 다칠 수 있고, 또 가장 예민한 부분이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살아가면서 감정에 상처를 안 받으며 살 수 있는 인생이 어디 있는가? 대부분의 인생이라는 것이 상처를 다 주고 받으며 살되, 그것을 지성과 의지를 사용해서 적절하게 해소하고 아물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적절하게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문제이다. 여기서 적절하게 해결이 안 되는 (혹은 안된) 상처란 그 상처를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받아서 그것을 부적절하게 처리한 것이든지, 아니면 상처 위에 세워진 가치관이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받아서 내면이 그렇게 상처 가운데 자리를 잡은 경우, 그리고 현실적으로 아직도 피가 흐르는 상처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기에 처리가 안되고 있는 경우 이 세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것은 주로 어릴 때 받은 상처를 말하는 것이다. 나 자신처럼 태아 때에 받은 상처까지 포함해서… 어떤 버림받은 사건이나 관계, 환경, 언어를 통하여 상처를 받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기에 주로 망각이나 부정, 투사 등의 방어기제로 부적절하게 덮게 되고 그것이 나중에 부적절한 상황에서 부적절하게 느껴지는 것, 그래서 고통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상처의 가장 일반적인 전형이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특별하게 불우한 환경이나 부당한 상황에 있지 않았는데도 내면이 심히 허약한 사람들을 많이 보는 데, 그 이유는 그들의 경우 대부분 어떤 사건이나 환경을 통해서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니라 상처가 많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그의 영향력으로 상처가 자리잡은 경우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을 줄 때 정말 순도 100%의 사랑만을 줄 수 없다. 거기에는 그의 상한 감정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전달되는 것이고, 그것을 자녀는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받아 먹게 되기에 상한 감정이라는 내면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잉보호에 의한 상처 이야기가 이것의 가장 두드러진 예이고, 유전적인 분노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지나치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하고, 심한 두려움을 가진 내면도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과거가 지금 현실에 부적절한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또 한가지, 현실적으로 상처를 너무 심하게 받고 있기에 처리가 안 되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엄청난 배신을 경험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는 누구든지 처리되지 않은 상처 가운데서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물론 지난 날의 부적절하게 처리된 상한 감정 위에 이것이 더해지면 그 고통은 더 엄청나겠지만…
둘째, 상처란 내면의 평강을 빼앗는다 상처는 감정에 받는 것이기에 상처받은 사람의 경우 내면에 평강이 없다. 상처는 감정의 문 가운데 음부의 문(The Gates ofHades, 마 16:18)을 열어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면은 순식간에 지옥이 된다. 이사야 11장 6절부터 9절까지에 보면 소위 낙원의 회복(Paradise Regaining)이라고 하는 회복된 낙원의 모습이 나오는데, 거기에 나오는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라는 대단히 황당하고 이상한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그 마지막에 이 현상을 정확히 설명하기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평강’(Shalom)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일어난다면, 어느 사회, 국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마음에서 일어날 것이다(천국은 원래 한 개인의 삶의 변화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사회 제도나 조직의 변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니까…).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주의 말씀이 덮이면서, 그 미움과 적대감, 자기 스스로를 죽이는 생각들, 느낌들, 바르지 않은 자기 평가, 이런 모든 것이 주의 말씀으로 바로잡아지면서,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그런 모습이 내면에 일어나게 되고 바로 그것이 상처가 치유된 모습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처가 우리에게 있음으로 우리 가운데 주는 가장 큰 고통, 피해는 바로 우리의 내면에서 이 평강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여기서 ‘평강’ 이라는 말을 ‘아무 느낌이 없음’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곤란하다. 오히려 상처가 많은 경우 망각이나 억압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해서 감정적으로 무감각해져서 고통이나 아픔을 느낄 수 없는 내면이 되는 경우가 있는 데, 이것을 평강이라고 착각하면 안된다.
셋째, 상처는 관계의 장애를 가져온다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있는 가장 심각한 현실적 문제는 관계의 장애이다. 어떤 여자 집사님이 와서 하는 말이 자기는 결혼하기 전에는 자기에게 상처가 전혀 없었는데, 결혼하고는 상처가 많아 졌다고 말하면서 이 모든 책임을 결혼과 남편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사실은 상한 감정이 잠복되어 있었던 것인데, 결혼 전에는 그렇게까지 깊은 관계가 맺어진 일이 없었기 때문에 몰랐다가 도망갈 수도 없고 적당히 거리를 둘 수도 없는 본격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그 상처가 위력을 발휘한 것이 된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두드러진 특징은 ‘이기적’인 것과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겉으로는 아닌 것 같아도…. 그러므로 상처가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상처를 가지고 계속 살게 되면 결국은 ‘생명력’(Vitality)을 잃게 된다. ‘생명력’은 우리의 삶의 질을 재는 척도인데, 상처는 바로 이 생명력을 감소시킨다. 생명력은 다른 말로 하면 건강한 삶의 의욕이고, 이것은 적절한 자존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때 내면에 느끼는 느낌이 평강(Shalom)인데 나는 이것을 ‘감동 있는 평강’이라고 표현하기를 즐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조심스러운 정의이지만, 바로 영적 능력이란 이런 상태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닌가 한다. <생명력 = 건강한 삶의 의욕 = 적절한 자존감 = 감동 있는 평강(행복감) = 영적 능력>
상처는 바로 이런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질병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복음에 의한 치유가 일어날 부분은 바로 이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며, 목회의 중점은 바로 이 부분에 모아져야한다고 믿는다.
II. 상처란 무엇인가? 먼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내면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관심을 내면으로 돌리고 나면, 그 다음에 풀어야 할 이야기는 바로 그 내면을 건강하지 못하게 망가뜨리고 뒤틀리게 한 ‘상처’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이다. ‘알아야 치유를 하든지 할 것 아닌가?’라는 아주 상투적인 이유에서라도…
첫째, 상처란 상처 난 감정이다 ‘상처’라는 말을 정확히 제대로 말하면, 그것은 ‘상처 난 감정’이라는 말이다. 사람의 내면을 지,정,의 세 부분으로 본다면, 그 가운데서 상처를 받는 부분은 ‘감정’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정,의 가운데 가장 쉽게 다칠 수 있고, 또 가장 예민한 부분이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살아가면서 감정에 상처를 안 받으며 살 수 있는 인생이 어디 있는가? 대부분의 인생이라는 것이 상처를 다 주고 받으며 살되, 그것을 지성과 의지를 사용해서 적절하게 해소하고 아물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적절하게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문제이다. 여기서 적절하게 해결이 안 되는 (혹은 안된) 상처란 그 상처를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받아서 그것을 부적절하게 처리한 것이든지, 아니면 상처 위에 세워진 가치관이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받아서 내면이 그렇게 상처 가운데 자리를 잡은 경우, 그리고 현실적으로 아직도 피가 흐르는 상처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기에 처리가 안되고 있는 경우 이 세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것은 주로 어릴 때 받은 상처를 말하는 것이다. 나 자신처럼 태아 때에 받은 상처까지 포함해서… 어떤 버림받은 사건이나 관계, 환경, 언어를 통하여 상처를 받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기에 주로 망각이나 부정, 투사 등의 방어기제로 부적절하게 덮게 되고 그것이 나중에 부적절한 상황에서 부적절하게 느껴지는 것, 그래서 고통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상처의 가장 일반적인 전형이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특별하게 불우한 환경이나 부당한 상황에 있지 않았는데도 내면이 심히 허약한 사람들을 많이 보는 데, 그 이유는 그들의 경우 대부분 어떤 사건이나 환경을 통해서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니라 상처가 많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그의 영향력으로 상처가 자리잡은 경우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을 줄 때 정말 순도 100%의 사랑만을 줄 수 없다. 거기에는 그의 상한 감정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전달되는 것이고, 그것을 자녀는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받아 먹게 되기에 상한 감정이라는 내면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잉보호에 의한 상처 이야기가 이것의 가장 두드러진 예이고, 유전적인 분노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지나치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하고, 심한 두려움을 가진 내면도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과거가 지금 현실에 부적절한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또 한가지, 현실적으로 상처를 너무 심하게 받고 있기에 처리가 안 되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엄청난 배신을 경험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는 누구든지 처리되지 않은 상처 가운데서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물론 지난 날의 부적절하게 처리된 상한 감정 위에 이것이 더해지면 그 고통은 더 엄청나겠지만…
둘째, 상처란 내면의 평강을 빼앗는다 상처는 감정에 받는 것이기에 상처받은 사람의 경우 내면에 평강이 없다. 상처는 감정의 문 가운데 음부의 문(The Gates ofHades, 마 16:18)을 열어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면은 순식간에 지옥이 된다. 이사야 11장 6절부터 9절까지에 보면 소위 낙원의 회복(Paradise Regaining)이라고 하는 회복된 낙원의 모습이 나오는데, 거기에 나오는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라는 대단히 황당하고 이상한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그 마지막에 이 현상을 정확히 설명하기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평강’(Shalom)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일어난다면, 어느 사회, 국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마음에서 일어날 것이다(천국은 원래 한 개인의 삶의 변화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사회 제도나 조직의 변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니까…).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주의 말씀이 덮이면서, 그 미움과 적대감, 자기 스스로를 죽이는 생각들, 느낌들, 바르지 않은 자기 평가, 이런 모든 것이 주의 말씀으로 바로잡아지면서,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그런 모습이 내면에 일어나게 되고 바로 그것이 상처가 치유된 모습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처가 우리에게 있음으로 우리 가운데 주는 가장 큰 고통, 피해는 바로 우리의 내면에서 이 평강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여기서 ‘평강’ 이라는 말을 ‘아무 느낌이 없음’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곤란하다. 오히려 상처가 많은 경우 망각이나 억압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해서 감정적으로 무감각해져서 고통이나 아픔을 느낄 수 없는 내면이 되는 경우가 있는 데, 이것을 평강이라고 착각하면 안된다.
셋째, 상처는 관계의 장애를 가져온다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있는 가장 심각한 현실적 문제는 관계의 장애이다. 어떤 여자 집사님이 와서 하는 말이 자기는 결혼하기 전에는 자기에게 상처가 전혀 없었는데, 결혼하고는 상처가 많아 졌다고 말하면서 이 모든 책임을 결혼과 남편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사실은 상한 감정이 잠복되어 있었던 것인데, 결혼 전에는 그렇게까지 깊은 관계가 맺어진 일이 없었기 때문에 몰랐다가 도망갈 수도 없고 적당히 거리를 둘 수도 없는 본격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그 상처가 위력을 발휘한 것이 된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두드러진 특징은 ‘이기적’인 것과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겉으로는 아닌 것 같아도…. 그러므로 상처가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상처를 가지고 계속 살게 되면 결국은 ‘생명력’(Vitality)을 잃게 된다. ‘생명력’은 우리의 삶의 질을 재는 척도인데, 상처는 바로 이 생명력을 감소시킨다. 생명력은 다른 말로 하면 건강한 삶의 의욕이고, 이것은 적절한 자존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때 내면에 느끼는 느낌이 평강(Shalom)인데 나는 이것을 ‘감동 있는 평강’이라고 표현하기를 즐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조심스러운 정의이지만, 바로 영적 능력이란 이런 상태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닌가 한다. <생명력 = 건강한 삶의 의욕 = 적절한 자존감 = 감동 있는 평강(행복감) = 영적 능력>
상처는 바로 이런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질병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복음에 의한 치유가 일어날 부분은 바로 이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며, 목회의 중점은 바로 이 부분에 모아져야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