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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3 / 밤길 가지 맙시다 (요13:21-30)
개구리 한 마리가 논바닥을 뛰어다니다가 다리가 아파 잠시 쉬려고 누웠는데 하늘을 보니 독수리 한 마리가 큰 날개를 펴고 유유히 날고 있는 것이 보이기에 독수리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독수리 선생 어떻게 하면 나도 하늘을 날 수 있겠소?”
그러자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높은 데서 뛰어내리면 된다.”고 하자 개구리가 닭털 두 개를 주워 옆구리에 달고는 15층 빌딩 꼭대기로 올라가서는 닭털을 허우적거리며 뛰어내렸습니다.
이후 이 개구리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보기엔 명품 가방일지라도 비 오는 날 비 맞을세라 가슴에 품고 뛰면 명품이고 비 막는다고 머리에 이고 뛰면 짝퉁이라는 말도 있듯이 아무리 그럴싸해 보여도 짝퉁이 진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종교의 날개를 가지고도 안될 일이고, 지식이나 금전의 날개를 가졌다 해도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흉내만 내는 신자, 껍데기뿐인 신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도 흉내만 냈던 제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가롯 유다입니다.
원래 유다라는 이름은 ‘찬양’이라는 뜻으로, 유다 가문은 이스라엘 열두지파 가운데 장자를 계승한 유다 지파의 혈통이었으며 신구약 중간시대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민족의 지도자로 활동한 유다 마카비우스의 가문이었습니다.
가룟인 유다는 그런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삼 년 동안이나 같이 살며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가롯 유다의 평판은 어떻습니까?
좋은 혈통이나 가문, 조건 따위는 하등 내세울 게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갖췄다고 해서 구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열두제자 가운데서도 가롯 유다가 있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을 그럽니다. 세입자만 사는 집은 쉬 망가진다고. 이유는 사는 사람이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랍니다.
인생도 마찬가집니다. 주일이면 교회 나와 그럴듯하게 예배드립니다. 직분도 있습니다. 때론 믿음 좋다는 칭찬도 듣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이 아닌 자기만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인생은 주인 없는 집과 같아 아무나 들어와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무나 중에 가장 못 된 것이 사탄입니다.
오늘도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망가뜨려 가고 있습니다. 실패감을 불어 넣어 인생을 패배자로 살게 합니다. 두려움을 주어 기죽고 쪼그라든 인생을 살게 합니다. 사람들 속에 서로를 향한 미움과 원망과 갈등만 심어줍니다.
그렇다면 ‘사탄의 궤계를 피하면 될 것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나 사람의 모든 행동의 출발점은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생각이 마음을 지배하고 마음이 행동을 결정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성도라면 이런 생각과 마음과 행동의 연결 고리 속에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생각과 마음 사이든, 마음과 행동 사이든 예수님이 계셔서 예수님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행동이 밖으로 드러나기 전에 한번은 걸러 주시게 해야 합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나약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에 담기지 말게 해야 합니다. 또한 살면서 뭔가 하고자 맘먹은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악하고 비난받을 일이라고 한다면 행동하기 전에 절제하는 장치가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 안에서 이런 일을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고 성령님이십니다.
이제까지 여러분은 생각을 어떻게 관리하며 사셨습니까?
생각 관리에 실패할 때 우린 누구나 가롯 유다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 모인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시는 중에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고 했습니다.
물론 스스로는 떳떳해서 그랬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남에게 손가락질하기 전에 한 번쯤은 “혹시 내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소위 제자라는 사람 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에도 했던 얘기지만 어느 시어머니가 뒤늦게 예수님을 믿어 세례까지 받게 되자 며느리가 도와드린다고 “어머니 목사님이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돌아가셨느냐고 물으시면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대답하세요.”라고 했더니 문답장에서 목사님이 시어머니에게 “예수님께서 누구 때문에 돌아가셨습니까?”라고 묻자 시어머니가 “우리 며느리 때문에요.”라고 했다잖습니까.
물론 그 시어머니야 몰라서 그랬겠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 정도라면 성경에서든 설교에서든 보고 듣는 모든 말씀을 다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혹여라도 말씀을 들으며 이 설교 우리 사장이 들었으면 좋겠다. 내지는 이 책망을 우리 남편 혹은 내 아내가 들었으면 좋겠다가 아닙니다.
가롯 유다의 배신의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말씀으로 받질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입맛대로 골라 믿는 것이 다름 아닌 이단입니다. 설교나 성경 공부에서 나한테 한 말이다 싶으면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자존심 상해하고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기 쉽습니다.
제자들을 보세요. 그들은 예수님의 직계 제자이기에 그간 얼마나 많은 설교와 가르침을 받았겠습니까마는 그 누구도 말씀을 나와 연결시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경고하시면 ‘아! 그거 누구 얘기구나.’라고 한다거나 책망하시면 ‘그런 말 들을 사람이 하나 있긴 있지!’라고 여겨 버립니다.
늘 이런 식입니다. 지금이라고 그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앞에 말씀이 있는 한 우린 언제든 은혜받을 기회가 있고 다시 잘 믿어 복 받을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잘 못 하고 안 하는 게 우리 믿음의 연약함입니다.
돌이켜 보면 가롯 유다에게도 돌이켜 다시 잘 믿을 수 있는 기회는 여러 번 있었습니다. 우선은 예수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실 때만 해도 ‘아이쿠! 예수님이 이미 다 아시는구나!’ 하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뉘우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고 하시며 떡 한 조각을 가룟 유다에게 주셨을 때만 해도 얼른 엎드려 용서를 빌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셨을 때 만해도 ‘아니라고, 다시 잘 믿겠다.’며 예수님 곁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선 분명하게 자기를 지목해서 말씀하셨는데도 가룟 유다는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내게 하시는 말씀으로 새겨듣질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이미 사탄이 심어 놓은 자기 생각에 꽉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이런 식으로도 말합니다. 가룟 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고.
그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독립군에 해당하는 열심당원이었는지라 예수님이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 십자가형을 받게 되면 그땐 예수님이 로마를 혼쭐내고 이스라엘을 독립시키실 것이라는 판단에서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판 거라는 식으로 얘길 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면 그런 말을 왜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애국심에 호소하면 변명이 좀 될까 해서 그런 걸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래서 가룟 유다가 잘못이 있는 겁니다. 십자가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뜻보다 자기 생각이 우선했기에 그는 믿음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가룟 유다의 애국심을 자극해서 불신으로 나아가게 한 사탄의 계략에 놀아난 것뿐입니다.
이게 가롯 유다였고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 중 누구라도, 언제든 가롯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내게 예수님이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 생각에 예수님이 없기에 그렇게 됩니다.
예수님이 안 계신 내 생각은 사탄이 이용합니다. 그렇기에 내 생각을 합리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생각에만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나는 안 되거라 생각하려 하십니까? 왜 나는 복 받지 못하고 재기하지 못할 거라고 믿으려 하십니까?
매 순간 내 생각과 믿음 사이의 간극을 체크해 보아야 합니다. 내 생각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가를 늘 확인해야 합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교회 오면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오고 믿음이 막 생기다가도 가정이든 학교나 직장 등의 현장에만 가면 예수님을 깜빡하고 사는 게 믿음에서의 우리네 문제입니다.
깜박한다는 게 뭡니까? 생각이 안 난다는 겁니다. 왜요? 내 생각의 우선순위가 예수님이 아니니까요. 생각 속에 아예 예수님이 없으니까요.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 시국 강연회라는 것이 있었는데 유명한 목사님이 강연을 하시고는 기도하는데 기도 마무리를 ‘민주화를 위해 산화하신 고 전태일 열사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더라고요. 이후로 저는 그런 데는 다신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면 기도의 마무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 강사는 왜 예수님의 이름을 아예 빼버린 것도 모자라 예수님의 이름이 들어갈 자리에 사람의 이름을 넣은 걸까요?
그의 생각 속에 예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각 속에 온통 독재 타도라는 일념만이 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강사의 신념이 잘못됐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려 했다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는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 기도는 필수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간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렇기에 기도가 응답받으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찌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요한복음 14:14에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하셨고, 요한복음 16:23에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결국 기도의 마무리는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해야 하는 데 우리 생각 속에 예수님이 안 계시니 정작 기도가 필요함에도 기도하지 못하는 일이 있게 되는 겁니다.
이제까지 여러분의 생각 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있으셨습니까?
혹여 약간이라도 ‘예수님이 내 마음에 안 계실지도 몰라.’라고 생각되는 분이 계십니까?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복을 과연 나도 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불안해하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가 현실에서 복 받고 승리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늘 예수님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고, 그래야 예수의 이름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나오는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씀을 인용하여 이 시간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권면을 드립니다.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라. 쉬지 말고 예수님을 생각하라. 범사에 예수님을 생각하라.’
이제부터라도 세상에서 얻으려는 모든 것과 의지하던 모든 것을 잠시 비우고 예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 모든 고집과 결심과 망설임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향해 두 손 들어 항복하는 심정으로 “예수님 믿습니다.”를 고백하세요.
그런데 이때도 이런 고백을 속으로만 중얼거리지 마세요. ‘주여!’나 ‘믿습니다!’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게 믿음의 시작이라면 행동하는 게 믿음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도 강조하기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 되듯이 고백도 행함으로 고백되어지지 않는 고백은 고백이 아닙니다.
가끔 티비에서 좋은 노래가 나오면 속으로 따라 불러봅니다. 곧잘 불러지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소리 내서 불러보면 음정 박자가 다 제멋대롭니다. 고음은 하나도 안 올라가고요.
노래 하나 하는 것도 속으로는 잘되는데 실제로는 엉망입니다. 그런데 이게 비단 노래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닙니다. 신앙고백이나 기도도 마음으로는 잘 되는 데 입 밖으로는 잘 안 나옵니다. 입 밖으로 잘 못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기도원에 가서 통성기도를 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아무도 없는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향해 하나님께 외쳐본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리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까지 속으로만 ‘예수님 도와주세요.’라고 하셨거나 마음으로만 ‘주여, 믿습니다.’라고 하셨다면 이제부턴 그런 생각들을 소리 내어 말해 보세요.
생각 속에 예수님이 없으면 실제로도 내 인생에 예수님은 없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멀어지는 순간부터 절망은 시작됩니다.
본문 30절을 보세요.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고 했습니다.
유다가 나갔다고 하는 건 알겠는데 굳이 ‘밤이러라’고 한 이유는 뭘까요?
‘밤’이란 말에 상징성이 있습니다. 유다의 앞날을 암시하는 말인 것입니다. 인생을 자기 생각에 따라 사는 삶의 결국은 밤을 맞게 된다는 말입니다. 눈앞이 캄캄할 것이고, 앞길이 깜깜할 뿐입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는데 예수님 없는 길로 나아가니 어둠뿐일밖에요.
밤의 길은 멸망의 길, 배신의 길, 실패 길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믿노라 했으면서도 밤의 길로 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이라면 꼭 그 길로 가야만 할까요? 예수님과 함께 기다렸다가 밤을 보내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환한 인생길을 가야 하지 않겠는지요?
물론 예수님과 함께라면 그 길에 십자가도 있을 것이고 고난이라 생각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 길은 예수님이 계셔 주시는 인생이기에 푸른 초장을 향해, 쉴만한 물가를 향해 가는 길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지난날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고 현재는 물론 앞날에 부족함이 없고 잔이 넘치는 자리를 향해 가는 믿음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의 이 마지막 30절을 어떻게 기록하느냐에 따라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질 것입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인생이 절대로 예수님 없이 혼자 밤의 길로 나가는 인생이 되게 하지 마시고 늘 생각 속에 예수님이 계시게 해서 예수님과 함께 각자가 당면한 현재의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길, 승리의 길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첫댓글 매주 좋은 말씀 감사드리며 카페에 말씀 올려놓으시니 다시 보니 더 좋으네요~^
한주내내 말씀 준비하시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