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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4월 18일,
레바논 주재 미국 대사관, 이슬람 과격파에 의해 폭발
폭탄 공격을 받은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주재 미국 대사관.
1983년 4월 18일 오후 1시경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이란의 지원을 받은 이슬람 성전단체가 트럭에 폭탄을 싣고 돌진, 대사관이 폭발했다.
이 사고로 7층 건물의 대사관 북쪽면이 붕괴돼 90명이 사망-행방불명되었고 100여명이 부상했다.
사망자 가운데는 17명의 미국인이 포함돼 있었다.
사건의 배경에는 1982년 6월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해
PLO 세력을 현지에서 몰아낸데 따른 저항으로 분석됐다.
사건발생직후 미국의 조지 슐츠 국무장관이 현지로 날아가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협정중재에 나서 5월 이스라엘이 주장하는 안전보장지대를 레바논 남부에 설치하고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결정하는 협정이 양국간에 체결됐다.
그러나 PLO와 4만명의 군대를 레바논에 주둔하고 있는 시리아는 이를 거부해 중동에서의 혼란은 계속 이어졌다.
▶ 2008년 ‘영등포 슈바이처’ 선우경식 원장 별세
▶2005년 자이툰 부대 교체병력 환송식
▶2004년 세계최초 무인 로봇비행기 1만m 상공서 폭격에 성공
▶2004년 애국지사 임창원 선생 별세
▶2003년 러시아 송유관 ‘중국라인
(러시아 이르쿠츠크~중국 다칭)’으로 확정
중국과 일본의 뜨거운 유치 경쟁으로 관심을 모았던 러시아의 송유관 최종 목적지가 중국으로 결정됐다.
알렉산드르 로슈코프(Losyukov) 러시아 외무차관은 18일 이와 관련, “이르쿠츠크 앙가르스크~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다칭(大慶)을 잇는 송유관(중국라인)을 건설키로 했다”고 말했다.
로슈코프 차관은 “송유관 건설은 상업성에 근거한 결정이었다”며 “일본이 지난 몇년 동안 러시아측 요구에 응답하지 않았다”고 언급, 그동안 보여온 일본측의 자세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그간 중국이 꾸준히 관심을 보여온 데 반해, 일본은 최근 들어 갑작스럽게 관심을 표명했었다. 일본은 지난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러·일 정상회담 이후 송유관 건설에 강한 애착을 보여왔다. 최근 앙가르스크~바이칼호 북쪽 연안~나홋카(일본라인)로 이어지는 3800km의 송유관 건설에 적극성을 보이면서, 건설비 50억달러 전액을 투자하겠다는 의사를 제시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최근 투자금 상환을 러시아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라는 조건을 제시하며 마찰을 빚어왔었다.
로슈코프 차관은 그러나 “중국 라인 경유지를 일부 변경했다”면서 “당초 바이칼호 남쪽 연안으로 통과시키려 한 것을 추후 나홋카 노선 건설 가능성을 감안, 바이칼호 북쪽 연안을 지나도록 했다”고 일본라인에 미련을 남겨두었다.
그동안 중국과 일본은 석유 공급선 다변화 정책 차원에서 시베리아·극동 송유관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으며, 러시아 정계를 대상으로 총체적인 로비를 벌여왔다.
중국라인 결정은 러시아가 추진해 온 원안에 가까운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1999년 양국 총리회담에서 송유관 건설을 합의·추진해 왔다. 중국라인은 2400km로 공사비도 29억달러 정도가 소요될 예정으로 일본라인에 비해 경제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중국라인은 오는 2005년 완공예정으로 하루 40만~50만배럴의 석유를 공급할 것으로 알려졌다.
▶1996년 이집트 카이로 호텔에
회교무장단체 침입, 기관총 난사로 18명 사망
▶1995년 아르트로 프론디지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86) 심장질환으로 사망
▶1994년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 경부고속철도 차량형식을
프랑스 알스톰사의 TGV로 최종확정
▶1994년 제43차 아시아태평양관광협회(PATA) 총회 개막(서울)
▶1992년 만경교서 빗길과속으로 버스 추락 - 15명 사망
▶1983년 대구 디스코홀 화재, 25명 사망
▶ 1983년 레바논 주재 미국 대사관, 이슬람 과격파에 의해 폭발
1983년 4월 18일 오후 1시경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이란의 지원을 받은 이슬람 성전단체가 트럭에 폭탄을 싣고 돌진, 대사관이 폭발했다. 이 사고로 대사관 북쪽면이 붕괴돼 미국인 사망자 17명을 포함, 90명이 사망-행방불명되었고 100여명이 부상했다. 사건의 배경은 1982년 6월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해 PLO 세력을 현지에서 몰아낸 데 따른 저항으로 분석됐다. 사건발생 직후 미국이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협정중재에 나서 5월 이스라엘이 주장하는 안전보장지대를 레바논 남부에 설치하고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결정하는 협정이 양국간에 체결됐다.
▶1982년 소련, 대미 정상회담 제의
▶1980년 로디지아,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짐바브웨공화국으로 발족
▶1979년 정효주양 유괴사건에 박정희 대통령 담화문 발표
▶1979년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 준공
▶1977년 소설가 남석(南石) 안수길 사망
▶1977년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여수권 지정
▶1976년 로버트 멀둔 뉴질랜드 수상 내한
▶1975년 김일성 14년 만에 중국 방문, 모택동과 회담
▶1974년 한국-카타르, 국교 수립
▶1972년 대일 청구권 최종집계,14만건 39억원
▶1971년 美 육상선수 라이언 재기(再起)
▶1971년 그리스, 부활절 행사
▶1969년 한국-필리핀 항공협정 조인
▶1968년 한국-보츠와나 국교 수립
▶1968년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 회담 (호눌룰루. 북괴 침략시 즉각 지원 등 공동성명)
▶1967년 남미 이민, 부산 출항
▶1963년 이탈리아 총선, 반공파 승리
▶1961년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협약` 채택
외교사절에 관한 각국의 관습법상의 제도를 통일하고 법전화하기 위해 유엔 국제법위원회가 오랫동안 노력한 결과 1961년 4월 18일 비엔나에서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협약`이 채택됐다. 이 협약은 외교사절의 특권-면제-파견과 접수 등을 포함해 외교관계 전반에 걸친 현행 국제법 법규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외교사절에 대한 정의와 유형에 합의해 협약 체결 전까지의 개념상의 혼란으로 갈등을 빚었던 외교관계에 대한 공식적인 기준을 설정함으로써 분쟁의 소지를 없앴다. 1964년 4월24일에 공식 발효됐으며 한국은 1970년 12월28일 국회 동의에 이어 1971년 1월27일 발효됐다. 1999년 8월 당시 전세계 179개국이 조인했다.
▶1960년 정치깡패들, 3·15부정선거 규탄 고대생 습격
3·15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위해 3000여명의 고려대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벌인 연좌농성이 끝나고 질서정연하게 귀교하는 학생들의 뒤를 7대의 버스와 2대의 트럭에 나눠 탄 경찰들이 따랐다. 앞서가던 경찰차가 방향을 종로로 바꾸자 시위대도 무심결에 그 방향을 따라 방향을 틀었다. 종로4가 천일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무렵 갑자기 60여명의 깡패들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 쇠갈고리와 쇠망치·쇠사슬 등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1명이 숨지고 학생 40여명과 기자 6명이 피를 흘리며 현장에 쓰러졌다. 4.19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한 사건이다.
▶1958년 프랑스 데모대, 알제리 정부청사 점거. 공공치안위원회 설립
▶1956년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왕 레이니3세와 결혼
1956년 4월 18일 미국의 헐리우드 배우 그레이스 켈리가 모나코궁전에서 레이니3세와 결혼하여 드디어 모나코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26살의 어린 나이로 인기절정의 은막을 은퇴하고 세인의 주목 속에 세기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레이스 켈리는 1929년 11월 12일 필라델피아에서 부유한 실업가인 아버지 잭 켈리와 잡지 모델인 어머니 마가렛 마제 켈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레이스 켈리는 칸 영화제에 참가하기 위해 프랑스에 갔다가 프랑스 주간지 `파리마치` 편집장의 소개로 모나코 왕자 레이니3세를 만나게 되어 결혼식까지 이르게 되었다.
▶195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사망
Since I do not foresee that atomic energy is to be a great boon
for a long time, I have to say that for the present it is a menace."
"원자 에너지는 잠시동안 큰 축복이 되리라고 예상할 수 없는 이상 현재로서는 위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1955년 4월 18일 미국 프린스턴병원에서 잠을 자다 사망했다. 76세의 나이였다.
1879년 독일의 울름에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난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1921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유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히틀러 정권에 쫓겨, 1933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천재적인 과학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그였지만 냉전의 조짐이 확연하던 시대에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히는가 하면, 1950년대 미국 매카시즘의 광풍에 맞서 불복종운동을 전개했던 진보적 지식인이었으며, 전쟁의 영원한 종식을 꿈꾸었던 반전평화주의자였다.
▶1955년 반둥회의(아시아-아프리카 회의) 개막
▶1951년 파리 조약이 맺어짐으로써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가 창설되다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石炭鐵鋼共同體,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ECSC)는 유럽 국가의 석탄과 철강 자원의 공동 관리를 위해 설립된 국제 기구이다. 1951년 4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6개국이 석탄과 철강 자원의 공동 관리에 관한 파리 조약에 서명했다. 1952년 7월 23일을 기해 발효되었다. 이 공동체는 나중에 유럽 경제 공동체와 유럽 공동체를 거쳐 유럽 연합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2002년 7월 23일을 기해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1949년 아일랜드 공화국 독립
아일랜드 자유국 26州가 800년 가까운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 마침내 英연방으로부터 독립했다. 더블린에서 일어난 1916년의 이스터(Easter) 봉기로부터 33년이 된 1949년 4월 18일, 아일랜드공화국이 정식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1920년에 이뤄진 국토분할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 기독교가 다수를 차지하는 북아일랜드 6주는 英연방내에 남았다. 자치선언으로부터 완전독립에 이르기까지 아일랜드 자유국은 영국의 해석으로는 변함없는 英연방의 구성국이었지만 아일랜드인은 자신들을 `에이레`란 이름의 주권국가로 간주했다.
▶1946년 국제연맹 마지막 총회 폐회. 해산 결정.
▶1946년 국제사법재판소(ICJ) 발족
▶ 1945년 영국의 전기공학자 플레밍 사망
플레밍[ Sir John Ambrose Fleming ]
1849. 11. 29 잉글랜드 랭커셔 랭커스터~1945. 4. 18 데번 시드머스.
영국의 공학자.
전자학, 측광학, 전기 측정, 무선전신 분야에 많은 공헌을 했다. 2극 라디오 정류기의 발명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플레밍이 열이온 밸브라고 불렀던 이 기구는 2극 진공관, 케노트론, 열이온관, 플레밍 밸브 등으로 알려져 있다. 1904년 특허를 낸 이 기구는 최초의 전파 전자 정류기로, 교류 전파 신호를 수화기가 검출할 수 있는 약한 직류로 변환시키는 것이었다. 플레밍의 발명은 1906년 미국의 리 드 포리스트가 증폭기 그리드를 발명함으로써 확장되어 3극관과 다른 다극 진공관의 선조가 되었다.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공부하고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J. C. 맥스웰 밑에서 배운 뒤 런던의 에디슨전등회사의 런던 자문위원, 마르코니무선전신회사의 고문이 되었다. 또한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인기 있는 교사였는데(1885~1926), 이곳에서 초기에는 측광학과 고압 교류를 연구했으며 몇몇 선박용 초거등전을 설계했다. 영향력이 컸던 〈전파 전신의 원리들 The Principles of Electric Wave Telegraphy〉(1906)·〈전화와 전신 전도체 내에서 전류의 전파 The Propagation of Electric Currents in Telephone and Telegraph Conductors〉(1911)를 비롯해 100편이 넘는 과학 논문과 책을 썼다. 1929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플레밍의 법칙[ ─ 法則, Fleming's rule ]
자기장 속에서 전류가 받는 힘의 방향을 나타내는 플레밍의 왼손법칙과, 자기장 속에서 도선(導線)을 움직일 때 유도기전력(誘導起電力)에 유도되는 전류의 방향을 나타내는 플레밍의 오른손법칙을 함께 가리키는 법칙
전류와 자기장의 관계
1. 플레밍의 왼손법칙
2. 플레밍의 오른손법칙
▶ 1942년 제2차 세계 대전, 둘리틀 폭격대의 도쿄 공습
둘리틀 공습(Doolittle Raid)은 제임스 해롤드 둘리틀(James Harold Doolittle) 중령이 지휘하는 경폭격기 편대가 항공모함 USS CV-8 호넷을 출발하여 일본을 폭격한 사건이다. 지미 둘리틀 중령의 지휘하에 도쿄, 요코하마, 오사카 등 일본 각지를 폭격기 16대로 폭격하였다.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불침의 하늘이라 호언장담하던 일본의 군부, 특히 일본 해군 상부에 준 충격은 엄청났고, 진주만 공습으로 상처 입은 미국인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이 둘리틀 공습을 토대로 그해 6월 초에 미일 양국의 운명을 뒤바꾼 미드웨이 해전이 벌어지게 된다.
▶1942년 미국 B25기, 일본 본토에 최초의 공습
▶1927년 장개석, 남경에 반공정부 수립
국민당 [ 國民黨 ] KMT,국민정부,중국국민당
1928~49년 중국 본토의 대부분을 통치했던 정당.
1949년 이후에는 장제스[蔣介石]와 그 후계자들의 지도로 타이완[臺灣]을 통치했다. 원래 중국 제정(帝政)을 무너뜨리기 위해 활동하던 혁명연맹으로 중화민국 첫해(1912)에 창당되어 첫 중국의회에 참여했으나, 의회는 군사 쿠데타(1913)에 의해 곧 해산되었다. 이렇게 되자 당 지도자 쑨원[孫文]은 처음에는(1914) 중국 비밀결사를 거울삼아서, 그후에는(1923~24) 제정러시아 볼셰비키당의 지도를 받아 당을 더욱 결속시켰다. 국민당은 소련의 도움과 충고, 그리고 중국공산당(1924~27)과의 긴밀한 협조 덕분에 초기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1925년 쑨원이 죽자 당의 통치권이 점차 장제스에게 넘어갔으며, 그는 지역 군벌들의 자치권을 없애거나 제한하여 중국 전체를 국민당의 지배하에 두었다(1926~28). 장제스의 통치원칙이 바로 국민당의 통치원칙이 되어 점차 독재적으로 되긴 했으나 전체주의적이지는 않았으며, 당 정책은 쑨원의 ' 삼민주의'(三民主義:민족·민주·민생주의)에 기초를 두었다. 민족주의는 중국이 다른 국가들과 대등한 위치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한 것으로, 일본의 침략(1931~45)을 물리치고 서방과 중국이 맺은 불평등조약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이를 실현할 수 있었다. 대조적으로 민주주의는 연이은 헌법개정(1936, 1946)으로 그 실현을 보고자 했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부패를 뿌리뽑으려는 노력인 민생주의 또한 별 성과가 없었다. 그 이유는 지도력이 약한데다 밖으로는 일본과의 전쟁, 안으로는 공산주의와의 대결에 몰두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는 더욱 심한 내전이 일어났다. 1949~50년 중국 본토에서 공산당이 승리를 거두자 국민당의 군대, 정부관료들, 200만 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이 장제스를 따라 타이완으로 도피했다. 이 섬은 중국 근해의 많은 섬들과 떨어져 있어서 국민정부의 좋은 영토가 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국민당은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장악한 실질적인 독재정당으로 군림했다.
▶1923년 미국 양키 스타디움 개장
▶1911년 미국의 물리학자 골드하버 출생
- 중수소의 원자핵이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된 사실 발견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 지진. 7백여명 사망
ㆍ화재로 도시 98%가 잿더미로
1906년 4월18일 새벽 미국 샌프란시스코. 갑자기 말들이 마구간 벽을 말굽으로 긁고 큰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온 시내에는 개 짖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운명의 5시12분, 리히터 규모 8.3의 대지진이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도시 샌프란시스코를 급습했다.
최근 일본이 대지진 이후 방사성물질에 위협받고 있다면,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지진으로 인한 화재가 도시를 집어삼켰다. 온 도시가 불바다가 됐고, 전 도시의 98%가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화재로 잿더미로 변했다. 지진으로 중앙경보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아 소방서의 경보장치가 울리지 않았고, 지하의 수도 파이프가 망가졌다. 소방관들은 물이 없어 건물이 타는 것을 보면서도 속수무책으로 있어야 했다. 불은 74시간 동안 탔고 2만8000채의 건물이 파괴됐다.
혼란과 무질서를 틈타 약탈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해 도시는 아비규환으로 변해갔다. 약탈과 화염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군대가 전 도시에 배치됐고 약탈자 500여명이 사살당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제대로 된 지진계조차 없었다. 일본 전역에는 1880년대에 지진계가 설치됐지만 샌프란시스코 기상청은 1904년 일본 지진학자 오오모리 박사에게 지진계의 가격을 묻는 편지를 썼다. 당시 지진계는 약 2000달러에 구입할 수 있었지만 샌프란시스코 시 당국은 지진계를 사지 않았다. 지진이 샌프란시스코를 강타하기 23분 전 도쿄의 지진계에 진동이 포착됐지만 거주자들에게 재난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리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사람들은 새벽녘 잠자리에서 지진을 맞이해야 했다. 자연재해에 인재(人災)가 더해져 피해가 더욱 커졌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은 이후 내진설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바람하중과 더불어 지진하중을 건물 설계 시 반드시 고려하게 됐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은 한국에도 외국 지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폭발시킨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미국 서부의 경제·문화 중심지로 성장한 샌프란시스코에는 ‘아메리칸 드림’을 품은 아시아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 미국 최대의 차이나타운이 형성됐고, 재미교포들도 도산 안창호 선생을 중심으로 해외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지진 소식은 국내에도 빠르게 전해졌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 지진 소식을 속속 전하면서 샌프란시스코 거주 동포 지원을 호소하며 대대적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01년 한국 기독교 선각자 김교신 출생
▶1885년 일본-청나라 천진(텐진)조약 체결
톈진 조약(天津條約)은 갑신정변 실패의 결과로 1885년(고종 22년) 4월 18일(음력 3월 4일) 청나라 전권 대신 이홍장(리훙장)과 일본 제국 전권 대신 이토 히로부미가 동북아시아 세력 균형을 위해 맺은 조약이다. 한반도 내 양국 주둔군 철수를 주 내용으로 한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우위가 없어 합의에 이르지 못한 사항들이 후일 청일 전쟁의 원인이 됐다.
▶1868년 남연군분묘 도굴 사건
조선 고종 때인 19세기 후반 독일인 오페르트가 조선과의 통상을 위해 접근해 왔지만 1866년 두 번이나 통상 협상에 실패했다. 그러자 오페르트는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뒤 이를 통상 요구에 이용하고자 남원군 묘로 가서 도굴을 시도했다가 성공하지 못한 채 철수했다. 이 소식을 들은 흥선 대원군은 크게 분노했고 이후 조선은 서양과의 교류에 더욱 배타적인 입장을 갖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은 서양 세력의 통상 요구를 단호히 거절함과 동시에 천주교에 대해서도 강력한 탄압 정책을 펼쳐 천주교 박해가 강화되었다.
▶1480년 `교황을 타락케 한 마녀`로 불리는 교황 알렉산드르 6세의 딸 루 보르자 출생
중세시대 `마녀의 화신`으로 불리운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아버지 로드리고는 그가 열두살이었을 때인 1492년 교황 알렉산드르 6세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6세는 다른 교황과 달리 자녀들의 존재를 사생아 위치에 버려두지 않고 공공연히 인정해, 권력의 중심에 끌여들였다. 루크레치아의 오빠 체사레 보르자도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한때는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을 통치했다.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결혼전 아버지를 대신해 냉엄한 정치적 영역인 교황청의 정사를 과감히 구현해 낸 데서 비롯됐다. 서양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를 `교황을 타락케 한 마녀`라며 비난하거나 `금발의 야수로 남자들을 차례차례 홀린 다음 독살하는 바티칸의 요부`로 그리고 있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솦트리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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