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지진(草芝鎭)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58 번지
초지진은 길상면 초지리에 있는 성(城)이다. 바다로 침입해 오는 적을 막기 위해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하고 조선 숙종 때인 1679년에 축성된 요새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와 『강화부지(江華府志)』에 따르면 1716년에 설치되었으며, 1726년(영조 2)에 진장(鎭將)으로 종4품 무관인 병마만호(兵馬萬戶)가 배치되었다. 1763년에는 진장을 종3품 무관인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다.
1866년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극동 함대와 1871년 4월 무역을 강요하며 침략한 신미양요 때 미 군함 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 등의 포격, 미국 해병 450명의 상륙공격으로 초지진이 미군에 점령되면서 군기고(軍器庫), 화약고, 진사(鎭舍) 등이 모두 파괴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 지휘관이었던 한 미군 대령이 "조선군은 근대적 무기도 한 자루 보유하고 있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로 근대적 화기로 무장한 미군을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 모두 전사했지만,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민족을 그리고 국가를 위해 그토록 처절하고 강력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1875년 8월에 침공한 일본 군함 운요호의 포격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또다시 초지진은 큰 피해를 보았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외세에 문호가 개방되면서 초지진의 할 일이 없어지면서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은 전투의 현장은 허물어진 상태로 그대로 방치하게 되었다. 1973년 강화 전적지 보수 정비사업 때 초지돈만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초지진은 원래 경기의 안산에 설치되었던 진이었으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이후 국왕의 피난처로 정해졌던 강화의 방어체제 강화를 위해 1656년(효종 7) 강화유수 홍중보(洪重普)의 건의로 강화의 동남쪽 해안인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설치했다.초지진에는 군관 11인, 사병 98인, 돈군(墩軍) 18인, 목자(牧子) 210명 등이 배속되어 강화해협을 수비했다. 최초에는 초지진의 방어 책임자로 감목관(監牧官) 1인이 겸임해 임명되었으나 방어체제의 강화를 위해 1665년(현종 6) 서필원(徐必遠)의 건의로 진장(鎭將)으로서 종4품의 무관인 만호(萬戶)가 임명되었다.
또한 초지돈대, 장자평돈대, 섬암돈대 등 세 곳의 돈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 돈대와 본진 간의 협공체제를 통해 수비력을 극대화했다. 초지진에는 군선(軍船) 3척이 배속되어 있었고, 부속된 3곳의 돈대에는 각각 3개의 포좌(砲座)를 마련하고 화포를 설치하여 강화 해협을 수비했다.
그러나 현재 초지진 주변은 음식점 등 각종 건축물 등이 들어서 축조 당시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1973년 복원된 초지돈대가 초지진을 대표하고 있다. 높이 4m 정도에 장축 114m의 모서리가지지 않는 삼각형 형태의 돈대로, 내부에는 3곳에 포좌와 여장을 설치했으며, 여장마다 1~3개의 총안이 총 100여 개 있다. 내부에는 전면 3칸, 측면 1칸의 보호각에 당시 사용되었던 대포 1문이 전시되어 있다.
숙종 초 돈대를 최초 건설할 당시 책임을 맡았던 김석주(金錫冑)의 기록에 따르면, 초지진에 속한 섬암돈대 등 세 돈대는 모두 방형으로서 둘레는 90보 전후였고 치첩(雉堞)의 수효는 40개 이내였다고 한다. 외부의 성돌은 다듬은 네모난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는데, 기단석 위에 7~8단을 쌓고 그 위 성벽에 비해 약간 앞으로 나오게 네모난 돌로 미석을 놓았다. 미석 위에는 벽돌을 이용하여 11단을 쌓아 여장을 만들고 위에 지붕돌을 얹었다. 출입문은 평거식으로 기단석 위에 3단의 기석을 놓고 그 위에 가로로 장대석을 올려 문을 만들었다. 돈대 내에는 성상로를 두고 내탁으로 흙을 채워 경사지게 하고 오를 수 있게 계단을 두었다.
돈대 밖 남쪽에는 수령이 약 400년 된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포탄을 맞은 상흔이 남아 있는데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를 상상할 수 있다.
[초지진 입장요금 : 700원]
초지진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