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도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한 후 작업복을 입고 농사일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정토대전 편찬 회의를 하기 위해 문경 수련원과 장수 죽림정사에서도 법사님들이 어젯밤에 도착해 아침 울력을 함께 했습니다.
산윗밭에는 도라지가 어느새 허리보다 높이 자랐습니다. 꽃봉오리도 곧 터질듯했습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은 윗단으로 올라가 한지형 마늘을 다 캤습니다.
씨방이 붉게 물든 고수는 말려서 씨앗을 받기 위해 뽑았습니다.
마늘을 예상보다 빨리 캤습니다. 스님은 농사 담당 행자에게 무슨 일이 더 필요한 지 물어보았습니다.
“양파는 밭에 두고 좀 말리려고 합니다. 이 밭은 한번 올라오기 어려우니 먼저 모란밭에 김매고, 마늘을 묶어두면 좋겠습니다.”
“그렇시다. 그럼 반은 김매고, 반은 마늘을 묶읍시다.”
한 달 사이에 모란 주위로 또 풀이 가득 자라 있었습니다. 스님이 행자들에게 당부했습니다.
“풀 뽑다가 모란도 다 뽑으세요.”
“네.”
“네라고 하면 어떡해요?”(모두 웃음)
한바탕 웃고 풀 뽑기를 시작했습니다. 뿌리를 깊게 내린 풀은 한 포기 뽑는데도 꽤 힘이 들었습니다.
스님과 행자들의 손길로 풀밭이 모란밭으로 변했습니다.
마늘도 오십 개씩 묶어서 차곡차곡 눕혀두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일을 마쳐서 아랫단으로 내려가 양파를 묶었습니다. 양파를 스무 개씩 헤아려서 짚으로 묶었습니다.
스님은 짚을 쓰지 않고 양파줄기로 바로 새끼를 꼬았습니다.
땋은 머리처럼 가지런히 묶인 양파를 보고 행자들도 따라 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시간 오래 걸리니까 그냥 짚으로 하세요.”
아주 작아서 묶기도 어려운 양파는 장아찌를 담그기 위해 따로 포대에 담았습니다.
“스님은 작은 양파가 좋으세요?”
행자의 엉뚱한 질문에 모두 웃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생선살을 먹이려고 머리만 먹으니까 나중에 우리 부모님은 생선 머리만 좋아한다고 했다는 이야기랑 같은 상황이네요. 이렇게 작은 양파는 먹기 어려우니까 장아찌라도 담그려는 거지요.”
9시가 다 되어 농사일을 마치고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두북 공동체 대중과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오전에 밭에서 뜯어온 싱싱한 채소로 공양을 한 후 공동체 대중이 스님에게 한 말씀을 청했습니다.
스님이 이번 주 일요일 일정에 대해 제안을 해주었습니다.
“이번 주 일요일에는 공식적인 일정을 잡지 않기로 약속한 가정의 날입니다. 공동체는 그날 탑곡 수련원에 감자를 다 같이 수확합시다. 오전에 발우공양을 하지 말고 밭에서 작업복 입은 채로 밥을 먹죠 뭐. 가정의 날이니까 우리는 우리끼리 먹고 놀고 일하고 그럽시다.” (웃음)
“네.”
정토대전 회의
발우공양을 마치고 각자 구역을 나누어서 청소를 한 후 10시 30분부터 정토대전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불교사상팀에서 준비해 온 자료를 읽었습니다.
“오늘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에 대해 다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저희가 공부한 내용을 먼저 이야기한 후 스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여광 법사님과 향광명 법사님이 오온과 십이처에 대해 정리해 온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발표 후 법사님들끼리 오온과 십이처를 어떤 관점에서 해석해야 하는지 토론이 있었습니다. 쉽게 결론이 나지 않고 아직도 애매하게 다가오는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법사님들의 토론 내용을 경청한 후 마지막으로 스님이 불교 교리를 어떤 관점에서 봐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십이처설(十二處設)의 핵심은 객관적으로 옳고 그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결국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머리로 생각하는 여기서 세계가 형성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모르면 세계가 없는 것이고, 내가 알면 세계가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섯 가지 감각기관만 잘 다스리면 일체의 번뇌와 괴로울 일이 없다는 것이 십이처설의 핵심 내용이에요. 부처님 말씀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이렇습니다.
‘결국은 네가 보았기에 생기는 문제 아니냐? 결국은 네가 들었기에 생기는 문제 아니냐? 결국은 네가 냄새 맡았기에 생기는 문제 아니냐? 인간의 모든 괴로움은 감각기관인 육근(六根)과 그 인식 대상인 육경(六境)으로부터 발생했다. 우주가 영원하냐 영원하지 않으냐, 신이 있느냐 없느냐를 논해봐야 인간의 번뇌가 없어지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결국은 모든 번뇌가 감각기관과 그 인식대상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본적인 내용이라고 이해하시면 돼요. 부처님께서는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을 주로 얘기했어요.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한 데서 생긴 번뇌라고 설명했습니다. 나중에 여섯 가지인 눈, 귀, 코, 혀, 감촉, 사유까지 하나하나 살펴서 설명하신 내용을 보면 굉장히 과학적으로 분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우리의 인식 작용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일한 것을 보고도 서로 다르게 느끼는 이유
그런데 동일한 것을 보고 동일한 것을 들었는데 서로 느낌이 다르고 이해가 다르고 인식이 다른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다른 걸 봤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면 이해가 되지만, 같은 것을 봤는데 서로 다르다면, 여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논리적 설명이 필요합니다. 왜 똑같은 걸 봤는데 느낌이나 이해나 인식이 다르냐는 거죠. 그래서 더 깊이 살펴봤더니 결국은 그 전의 경험이 여기에 작용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이것을 ‘식(識)’이라고 해요.
설령 같은 것을 보더라도 결국은 그 전의 경험이 작용하기 때문에 각자가 이해하고 인식하고 느끼는 것이 달라집니다. 식(識)이라는 개념을 덧붙여서 설명한 게 십팔계(十八界)입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그 인식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이라는 육식(六識)이 덧붙여진 거예요.
같은 것을 보아도 사람에 따라 인식을 달리 한다는 것은 어쨌든 인식의 문제입니다. 그럴 때 감정적으로 기분이 좋거나 나쁜 것은 인식과는 또 별개의 문제예요. 12처설은 인간이 외부의 사물을 인식할 때 어떻게 인식 작용이 일어나느냐 하는 정보의 유입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라면, 그것이 인간의 뇌에 저장이 되어 작용하는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 오온입니다.
외부를 인식하는 작용인 색(色)이 있고, 그때 일어나는 느낌인 수(受)가 있고, 그걸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사유인 상(想)이 있고, 거기에 대해서 내 필요에 의해 뭔가 행하려고 하는 의지나 욕구인 행(行)이 있고, 그것에 대해서 개념을 만들어 식별하는 식(識)이 있고, 이렇게 다섯 가지 작용을 설명한 것이 오온입니다.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결국 이 다섯 가지인 오온(五蘊)이 지금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항상 ‘나’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느끼기도 하고 이런저런 것을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게 과연 뭐냐는 겁니다. 이처럼 작용은 있지만, 그 작용의 주체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조금 더 쉽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자동차 문을 잠가 놨는데 무심코 열쇠 없이 문을 열거나 손을 대면 자동차에서 ‘삐삐삐’ 소리가 나잖아요.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자동차 경보음이 자동으로 울리는구나’라고 알지만, 만약에 자동차가 뭔지도 모르는 원시인이 지나가다가 자동차를 건드렸는데 막 ‘삐삐삐’ 소리가 나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자동차 안에 어떤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겠죠. 자동차에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하거나, 움직이거나, 소리가 나거나 할 때도 모두 그런 반응을 하게 만드는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자동차에는 그걸 하도록 만드는 소위 주체라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작용이 있을 뿐입니다. 움직이는 작용, 소리 내는 작용, 불을 켜고 끄는 작용이 있을 뿐이에요. 그런 프로그램을 깔면 그런 작용을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내가 없다’, ‘내가 있다’ 이런 논쟁을 하는데, 그런 논쟁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런 작용이 있는 거예요. 움직이는 작용이 있듯이 보는 작용도 있고, 기분 나빠하거나 기분 좋아하는 작용도 있고, 어떤 사물을 사유하는 작용도 있고, 자기 의도적 행위를 하는 작용도 있고, 식별하는 작용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용의 주체라고 할 만한 어떤 실체, 즉 죽어도 안 없어지는 불멸의 영혼이라는 것이 과연 있느냐 하는 겁니다.
경전에는 부처님이 죽은 육신을 관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썩어문드러질 때까지 관찰해봤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몸의 각 부위를 해부해서 설명한 것도 다 같은 이유입니다. 결국 다 분해해 보니 그 속에는 지수화풍 네 가지 요소 외에 다른 무엇이 더 있느냐는 거죠. 머리카락, 눈알, 장기, 이렇게 32가지 몸의 부위를 관찰하는 내용이 나오잖아요. 마치 자동차 부속을 모두 분해해 보면 그 속에는 별도의 실체가 따로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걸 모두 조립하면 자동차가 움직인다는 겁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내용인가
부처님의 문제의식은 항상 ‘우리의 번뇌, 두려움, 괴로움이 왜 생기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이런 마음 작용의 원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어서 없는 걸 있다고 하고, 있는 걸 없다고 하고, 원인도 모르고, 결과도 모르고, 이런 데서 이 모든 괴로움이 발생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내가 이 행동을 하면 나중에 얼마나 큰 과보가 되돌아올 것인지 미리 알면 지금처럼 행동하지 못할 거예요. 모든 부모에게 자신이 아이한테 한 행동이 나중에 어떤 과보가 돼서 돌아오는지를 미리 영상으로 찍어 보여준다면 어떨까요? 아이한테 야단을 치면 어떤 과보가 돌아오고, 아이가 울 때 안 돌봐주면 어떤 과보가 돌아오고, 기저귀에 오줌이 차서 애가 우는데 그걸 빨리 안 갈아주면 어떤 과보가 돌아오는지, 20년 후에 나타나는 결과를 전부 분석해서 비디오로 보여준다면 과연 부모들이 지금처럼 행동할까요?
그런데도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가 받을 심리적인 상처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그저 우리 아들이 공부 잘하는지, 돈을 잘 버는지, 이런 것만 생각합니다. 그 결과 나중에 아이가 반발하고 저항하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일이 벌어지나’ 하고 한탄만 합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미리 안다면 아무도 지금처럼 아이를 대하지 않을 거예요.
오온에서 다섯 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게 핵심이 아닙니다. ‘사람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고민이 해결되느냐’ 이게 중요한 거예요. 지식을 아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 기술과 지식을 익혔다고 자기 고민이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역사를 공부해서 신라시대에 있었던 어떤 일을 알게 됐다고 해서 지금 내가 화나던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은 그 내용을 알면 화가 줄어들든 두려움이 줄어들든 번뇌가 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방금 설명한 불교 교리를 사람들이 이해하면 과연 번뇌가 사라지느냐는 겁니다. 설령 이해를 했다고 해도 ‘아, 내가 전에는 혼자 있으면 두려웠는데 이걸 알고 나니까 두려울 게 없구나. 혼자 있어도 두렵지 않구나!’ 이렇게 되느냐는 거예요.
불교의 목표는 늘 해탈과 열반입니다. 천국에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왕이 되는 것도 아니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건강해지는 것도 아니에요. 해탈과 열반에 가는 데 도움이 되느냐를 늘 살펴야 합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 vs 삶이 바뀌는 것
즉문즉설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즉문즉설 한 편을 제대로 듣고 본인이 받아들이면 괴로움이 적어집니다. 그런데 즉문즉설 천 편을 읽고 분석해서 정리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괴로움이 없어지겠어요? 법문을 주제별로 분류하고 다이제스트 식으로 요약해서 정리한다고 해서 마음이 가벼워질까요?
가슴으로 받아들여서 삶이 바뀌는 것과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고 정리하는 것은 성격이 다릅니다. 교리라는 것은 법문 천 편을 분석하고 분류해서 그 내용을 요약정리한 것과 같습니다.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내용이 도움이 될 수 있어요. 그러나 이것 자체는 담마가 아닙니다. 담마는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이런 관점을 갖지 않고 용어 해석만 해놓은 교리는 단순한 지식이 되고 맙니다.
연기(緣起), 중도(中道),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까지는 주로 실질적이고 실천적인 행위를 유발하는 관점에 서 있다면, 십이연기(十二緣起)와 오온, 십이처, 십팔계는 주로 그 뒤에 숨겨진 원리 혹은 이면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일종의 분석적, 철학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실천적인 관점이 잡힌 것 같아요.”
이어서 사회사상팀에서 준비해 온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오늘은 환경오염과 기후 위기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해 상반된 두 가지 견해에 대해 함께 토론해 보기로 했습니다. 환경 문제의 원인과 다양한 실천 활동 사례를 발표한 후 이어서 환경 지상주의가 갖는 허점을 지적한 보고서를 분석해서 발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의 생각을 듣고 회의를 마쳤습니다.
“극단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의 맹점을 지적한 것은 좋은데, 그것이 개발론자들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쪽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이 점은 또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시 30분에 정토대전 회의를 마치고 곧바로 4시부터 통일특별위원회 운영위원들과 온라인 화상회의를 했습니다.
통일특별위원회 상반기 활동 현황을 보고한 후 중요하게 처리할 안건에 대해 결정을 하고 회의를 마쳤습니다.
수행법회
원고 교정과 여러 업무들을 처리한 후 해가 지고 저녁 7시 30분부터 생방송 온라인 수행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날씨와 농사 이야기를 하며 대중들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6월 들어 날씨가 무더웠는데 어제부터는 굉장히 시원해져서 허공 전체에 에어컨을 틀어놓은 것 같은 기분이에요. 제가 있는 이곳은 오늘 낮 최고기온이 22도였고 아주 서늘했습니다. 6월부터 날이 더워져서 아침과 저녁에만 일하고 낮에는 일을 못했는데, 어제는 낮에도 감자 캐는 일을 계속할 수가 있었어요. 아무튼 날씨가 서늘해서 일하기가 아주 좋습니다.
요즘은 하지 감자를 캐는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번 주 일요일은 가정의 날인데 저희 공동체는 가정의 날에 감자를 캐기로 했어요. 그날은 공식적인 행사를 하지 않으니까 탑곡 수련원에 있는 큰 감자밭에 가서 감자를 캐기로 했습니다. 지금 시기는 작년 가을이나 올봄에 심은 작물들을 수확하는 철입니다. 수확을 하고 나면 또 가을에 수확할 것을 새로 심는 철이기도 합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사람 다섯 명, 현장에서 즉석 질문을 한 사람 두 명, 총 일곱 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제사상 차리는 것이 부담이라며 제사 때 밥 한 그릇만 더 올려서 지내도 되는지 질문했습니다.
제사 때 밥 한 그릇만 올려도 되나요?
“어제가 시아버지 기일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장을 보고 음식을 혼자 하는 저에게 미안하셨는지 시어머니께서는 매번 ‘나 죽고 나면 제사를 따로 지내지 말고 아버님 제사 때 밥 한 그릇 더 올려서 지내면 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되는 건지 여쭙고 싶어서 질문 올렸습니다.”
“네, 그래도 됩니다.” (웃음)
“그렇습니까?”
“네. 자기 좋을 대로 하면 돼요. ‘그래도 시어머님 기일에 맞춰서 따로 지내드려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따로 제사를 지내면 되고, 또 시어머니께서 유언을 하셨으니까 시아버지 기일 때 같이 그냥 지내도 됩니다. 귀신은 다 자기 알아서 찾아오니까요. 아무도 안 가르쳐줘도 다 알면 ‘귀신같이 안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 말은 귀신은 모르는 게 없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장소를 바꿔도 알아서 찾아오고, 날짜를 바꿔도 알아서 찾아옵니다. 그러니 너무 신경 안 써도 됩니다.
특히 시어머니께서 제사를 따로 지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시어머니의 뜻이 그러니까 따르면 돼요. 다만 질문자의 마음이 어떤가가 중요하죠. 질문자가 따로 차리기 힘드니까 시어머니 말씀대로 해야겠다고 하면 그렇게 해도 되고, ‘그래도 따로 제사를 차려야지’ 하면 따로 차려도 됩니다.
핵심은 정성입니다. 귀신이 실제로 밥을 먹고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추석이나 설은 그분들이 돌아가신 날과 아무 관계가 없는데도 차례상을 차리지 않습니까. 중요한 건 나의 정성입니다. 아버님 돌아가신 기일에 정성을 기울여서 그분을 추모하는 것이 제사입니다. 불교 신자들이 부처님 열반하신 날에 추모하는 것과 같아요. 또 부처님 태어나신 날, 부처님 깨달으신 날도 기념하잖아요.
‘돌아가신 부모님 생신까지는 못 챙기더라도 돌아가신 기일은 챙기고 싶다. 그날 가족끼리 모여서 밥도 같이 먹고, 부모님 은혜도 생각하면서 대화를 나누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따로 제사를 차려도 돼요. 그게 힘들면 제사를 하나로 합쳐서 지내고, 지낼 때 시아버지만 생각할 게 아니라 시어머니도 같이 생각하면 되죠.
그런데 가족들이 모여서 파티처럼 음식을 약간 근사하게 차려서 먹을 때가 일 년에 몇 번 있겠어요? 원래 제삿날이라는 게 조상 핑계를 잡고 요즘 말로 하면 파티를 하는 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 돌아가신 날이라는 핑계로 집에서 음식을 좀 마련해서 부모님께 드리는 시늉 좀 하고는 가족끼리 둘러앉아서 파티를 하는 날이 제삿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파티할 때는 좀 힘이 들어도 힘들다는 소리를 안 하면서 제사만 왜 그리 힘들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웃음)
파티는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드니까 힘이 덜 들고, 제사는 전통적으로 음식 종류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힘든 건가요? 그러면 앞으로 차리는 음식의 종류를 좀 바꾸세요. 잘 먹지도 않는 옛날 음식은 차리지 말고, 우리 가족들도 좋아하는 음식 중에 옛날 격식에도 벗어나지 않는 음식 위주로 차려 보세요. 너무 상다리 부러지게 많이 차리지 말고 적절하게 차려서 가족들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도록 하고요. 옛날에는 대가족이니까 음식을 많이 차려서 제사가 끝나면 온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었거든요. 요즘은 제사 지냈다고 동네 사람들에게까지 나눠 주지는 않잖아요. 그러니 우리 가족이 먹을 양만 만들어서 부모님을 추모한 후 식사를 하면 돼요.
너무 허례허식으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사 음식을 3일 동안이나 만들 필요는 없어요. 만약 내일 제사 지낸다고 하면 시장은 오늘 봐 두고 당일 아침부터 좀 준비해서 지내면 되죠. 그렇게 좀 가볍게 생각하세요. 자식을 고생시키고 싶은 부모가 누가 있겠어요? 그건 부모님도 원치 않는 일이에요.”
“네. 저도 사실 제사 음식 준비하는 일이 스트레스이긴 하지만, 제가 만든 음식을 가족들이 모여서 맛있게 먹어주는 게 정말 뿌듯하고 기분이 좋긴 합니다.”
“뿌듯하고 좋은데 왜 스트레스를 받아요?”
“제사 음식 준비가 하루 가지고는 안 됩니다. 메뉴에 혹시 빠진 게 있는지 계속 검토도 해야 하고, 해물 장이며 나물 장 등을 따로따로 봐야 해서 정말 챙길 게 많습니다.”
“음식의 종류를 좀 축소해 보세요. 양도 조금 적게 사고요. 형식을 지키기 위해 스트레스받으면서 힘들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가? 음식을 조금 적게 차리더라도 ‘오늘이 어머님 돌아가신 날이지. 어머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참 많이 베푸셨어’ 이렇게 정성을 기울이는 게 더 중요한가요?”
“네, 정성을 기울이는 게 더 중요하죠.”
“음식보다는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야 해요.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제삿날이나 생일날에 고기를 너무 많이 차리는 건 좋지 않습니다. 자기 아이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고 축하한다면서 남의 생명을 죽여가지고 생일잔치하는 게 뭐 그리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자기 어머니 돌아가셨다고 울면서 남의 생명을 죽여가지고 제사 지내는 게 뭐 그리 이치에 맞겠어요? 그러니 간소하게 차리되 정성을 기울이는 게 훨씬 더 중요합니다.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시고 ‘돌아가신 부모님 핑계로 우리 가족이 파티를 한다’ 이렇게 좀 가볍게 생각해 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청년들이 매일 5시 온라인으로 천일결사 기도를 함께 하는데 3번 지각하거나 결석하면 탈락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 집중하기보다 탈락되기 싫어서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것 같아요. 좀 더 마음을 내어 정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실천 장소에 갈 때 개인차량으로 도반들과 함께 갑니다. 함께 가면 재미있지만 교통사고가 걱정됩니다. 사고가 생겼을 때 도반들은 괜찮더라도, 그 가족들이 괜찮을지 우려가 됩니다. 저희 남편도 혼자 다니는 건 괜찮은데 사람은 태우고 다니지 말라고 신신당부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 30대 야당 당대표가 정치판에 미칠 영향, 꼰대 정치담론의 문제점과 향후 정치 전망이 궁금합니다.
오늘은 사전에 신청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다 하고 나서도 시간이 좀 남았습니다. 그래서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방청객 중에서 즉석에서 현장 질문을 받았습니다.
- 남편이 저보고 수행을 거꾸로 하고 있다고 해요. 남편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 새벽기도를 할 때 마음이 잔잔한 호수 같았습니다. 제가 어떤 수행의 경지에 이른 걸까요?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한 후 마지막으로 스님이 질문자들에게 한 줄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제사상 차리는 것에 대한 부담을 이야기한 질문자도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늘 불교방송을 듣고 있는데, 거기에도 이에 대한 여러 스님들의 법문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수행을 중시하는 법륜 스님은 어떻게 얘기를 해주실지 궁금해서 질문했던 건데 이제 답을 얻었습니다. 과하게 살생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정말 마음에 와닿았어요. 앞으로도 제사 음식을 할 때 스트레스받기보다는 기념일이라고 생각하고 정성껏 준비해서 가족들과 화목하게 좋은 시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닫는 말씀을 했습니다. 제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백중 기도에 대해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제사라는 건 문화입니다. 수행이라기보다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조상을 기리는 하나의 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조상과 죽은 자를 기리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백중이에요. 정토회에서도 이런 문화를 존중해서 백중기도를 49일 동안 하니까 백중기도에 뜻이 있거나 조상을 기리는 뜻을 가진 분은 참여해 보셔도 좋습니다. 그런 종교적인 의식에는 별 관심 없다고 하면 참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넘었습니다.
내일은 새벽 3시 30분에 두북 수련원을 출발해 서울로 올라갈 예정입니다. 오전에 정토사회문화회관 관리 자문단과 미팅을 한 후 오후에는 평화재단 심포지엄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요즘 2030 청년들의 고민은 뭘까요?
법륜스님과 함께하는 청춘톡톡 Live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눠봐요 :)➡️ 오늘(6월 26일) 오후 2시-4시
⬇️ 아래 주소에서 생방송을 보실 수 있습니다.
[클릭] https://youtu.be/JDLYShi7GqE
- 유튜브 시청은 전 연령대 누구나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