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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미국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삼대에 걸친 두 집안의 내력을 파헤친 작품으로,
방대한 분량 속에서
원죄의식,
선과 악의 대립,
자유의지의 가치 등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를 변주한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존 스타인벡은
퓰리처 상 및 노벨문학상(1962년)을 수상한
(헤밍웨이와 포크너에 이어 미국 작가로는 3번째 수상)
세계적인 대작가이다.
그럼에도 헤밍웨이나 포크너를 향한 전 세계의 열광과 찬사에 비해
스타인벡은 주로 사회의식을 치열하게 담아낸
20세 전반기의 사실주의 작가라는 단편적인 명성에 만족해야 했다.
아마도 이런 배경에는
성공한 작가에 따라붙는 인기, 평판, 명성, 물질적 풍요 등을
스타인벡 스스로 엄격하게 경계해온 때문이기도 하고,
또 언론이나 문학계, 독서 대중들과 쉽게 타협하지 않았던 스타인벡 특유의 강단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터이다.
무엇보다 그가 발표하는 작품마다
당시로서는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이 때문에 작품성에 대한 찬반과 호불호가 뚜렷하게 갈리는 문제작이 된 탓도 있다.
스타인벡의 대표작으로는
『분노의 포도』(The Grape of Wrath, 1939)가 단연 첫 번째로 꼽힌다.
『분노의 포도』는
대공황 시절의 오클라호마와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소작인, 지주, 이주 노동자, 자본가, 행정당국의 실상을 낱낱이 담아내고 있다.
특히 건조하면서도 힘 있는 문장으로
날카롭게 파헤친 떠돌이 소작농들의 비참한 현실은
당시 미국 사회를 크게 흔들어 놓으면서
엄청난 사회적 이슈가 되었고
스타인벡은 베스트셀러 문제작가의 입지를 확고히 굳히게 된다.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 이전 1936년에도
미국의 공산주의 운동을 다룬 『의심스러운 싸움』(In Dubious Battle, 1936)을 발표해서
이미 대중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때 역시 작품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착취당하는 과수원 노동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파업투쟁을 다룬 소설의 내용은
당시 상당한 이념논쟁을 불러왔고,
이 때문에 작가 스타인벡 역시 사상검증의 압박에 휘몰리기도 했다.
1952년에 발표된 『에덴의 동쪽』은
캘리포니아 주 살리나스(Salinas)를 배경으로
전체 4부 55장으로 구성된 방대한 ‘캘리포니아 서사시’이다.
작품의 배경인 살리나스 계곡은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고,
작중 인물 새뮤얼 해밀턴(Samuel Hamilton)은
작가의 외조부가 모델이라고 알려져 있다.
실제 작품 속에는
스타인벡의 어머니와 외가 친척들,
또 존 스타인벡이라는 어린이가 잠시 등장하기까지 한다.
스타인벡은 『에덴의 동쪽』을 처음 구상할 당시
살리나스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외가 해밀턴 가문을 중심에 두고
트래스크 집안과의 선악 대립 구도를 기획했지만,
결국 작품은 트래스크 집안의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쪽으로 완성된다.
작품의 표제 ‘에덴의 동쪽’은
구약 성경 창세기에서
카인(Cain)이 동생 아벨(Abel)을 죽이고
에덴의 동쪽으로 도망쳤다는 내용을 따서 붙여졌다.
제목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에덴의 동쪽』은 구약성경의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가져와
트래스크 집안의 3대에 걸친 선과 악,
사랑과 증오, 복수와 화해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스타인벡은
살리나스 계곡에 관한 이 작품이
작가 자신의 뿌리와 미국의 뿌리를 찾는 작업이고,
아마도 “지금까지 쓴 나의 작품들 중 최고작"이 될 것이라 자신했다.
그러나 작가의 야심 찬 포부에 비해 출판 후 평단이나 독자들의 첫 반응은 사실 미약했다.
이는 3대를 이어온 웅대한 서사를 지탱하기에
에피소드와 인물 사이의 유기적인 짜임이 다소 느슨한 데다,
‘선과 악의 구도’가 단순하게 적용되고 있어
이야기 전개가 자주 지루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1955년 엘리야 카잔이 감독하고
제임스 딘과 줄리 해리스(에이브라 역)가 주연을 맡아
영화로 제작되었다.
어둡고 고독한 반항아 칼 역할을 소화해 낸 제임스 딘은
2차 대전 이후 미국 청년층의 심리적인 방황을
낭만적으로 이미지화함으로써 시대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한다.
애덤 트래스크(Adam Trask) : 쌍둥이 형제 아론과 칼의 아버지다.
심성이 착하고 너그러운 만큼 주위의 평판도 좋고 집안을 그런대로 유지해온
트래스크 가의 현 가부장이다.
반면 매몰차지 못한 성격 탓에
일생 여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못 받아 온 속으로는 외로운 남성이다.
찰스 트래스크(Charles Trask) : 애덤의 이복동생으로
아버지의 신임을 받는 형을 질투하는 삐뚤어진 인물.
캐시 에임스(Cathy Ames) : 애덤의 아내이자 쌍둥이 형제의 어머니.
가정을 등지고 창녀로 살아간다.
작품 속에서 악녀의 전형으로 등장하는데,
조신한 딸이나, 현모양처의 틀에 전혀 맞출 수 없는
복잡한 심리의 ‘괴물’같은 여성으로 구현되고 있다.
아론(Aron) : 쌍둥이 중 형으로
아버지인 애덤처럼 착하고 주변의 신뢰를 받는 인물.
어머니의 비밀을 알고 충격에 휩싸여 입대한다.
칼(Cal) : 아론의 쌍둥이 동생으로 본명은 캘럽(Caleb)이지만 모두 ‘칼’로 부른다.
쌍둥이 형과는 외모나 성격이 판이하고,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노력하지만
둘의 부자관계는 늘 순조롭지 못하고 어긋난다.
어머니 캐시의 존재를 알게 된다.
리(Lee) : 애덤 집안의 가정사를 전담하는 중국인 하인.
남성이지만 엄마를 대신해서 쌍둥이 아론과 칼 형제를 직접 양육한다.
샘 해밀턴(Sam Hamilton) : 살리나스에서 트래스크 집안의 이웃인 해밀턴 집안의 가부장이다.
대가족 해밀턴 일가를 건실하게 이끌어 왔다.
인품이 바르고 인간적인 매력 또한 넘치는 인물로 작품 속에서 ‘선의 축’에 있다.
에이브라 베이컨(Abra Bacon) : 아론의 여자 친구.
처음엔 칼을 경계하지만 아론의 입대 이후 칼과 가까워진다.
캘리포니아 주 살리나스 계곡 중에서도
가장 척박한 땅을
끈질기게 일구며 정착한 해밀턴 일가(the Hamilton)가 있다.
이들은 원래 아일랜드에서 이주해왔지만
살리나스 계곡에 터를 닦은 이후
대가족 모두 주위의 좋은 평판과 부러움을 얻으면서
이곳의 토착민으로 정착한다.
동부에서 살리나스로 온 이주해 온 애덤과 찰스 트래스크 형제는
아버지 사이러스(Cyrus Trask)의 유산을 가지고
살리나스의 알짜배기 땅에 집을 짓고 자리 잡는다.
한편 캐시 에임스라는 여성은
천사 같은 외모와 달리
어려서부터 온갖 악행을 일삼더니
결국 집에 불을 놓아 부모를 죽음으로 내몬다.
그녀는 곧장 가출해서 매춘부로 살지만
포주와 사기꾼의 농간에 시달리다 끝에 탈출을 시도한다.
부상으로 온전치 못한 캐시는
트래스크 형제의 보호를 받게 된다.
캐시를 간호하면서 순진한 애덤은
캐시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유약한 애덤이 탐탁하지 않지만
성치 않은 몸 상태에 거처도 없는 캐시는 애덤과 결혼한다.
그러나 캐시는 애덤의 눈을 피해
찰스와도 잠자리를 갖는다.
결국 캐시는 누구의 아이인지 확실하지 않은 쌍둥이,
말하자면 형은 애덤을 닮고 동생은 찰스를 닮은
전혀 딴판의 쌍둥이 형제를 출산한다.
출산 후 몸을 회복 한 캐시는
갓 난 아이들마저 내팽개치고 집을 나가려하고,
자신을 막아서는 애덤을 총으로 쏜 후 트래스크 집안을 떠난다.
어깨에 총상을 입은 애덤은
캐시가 남긴 몸과 마음의 상처를 곱씹으며 괴로워한다.
캐시가 떠난 후
애덤은 쌍둥이 갓 난 형제들을 건사하기는커녕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은 채 무기력에 빠져 보내는데,
이를 보다 못한 중국인 하인 리와 이웃 샘 해밀턴은
구약성경의 카인과 아벨 형제의 이름을 따서
쌍둥이들에게 각각 아론과 캘렙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트래스크 가를 떠난 캐시가
매춘을 통해 이악스럽게 돈을 거둬들이는 동안,
그녀가 내동댕이친 쌍둥이 형제는 어느덧 청년으로 성장한다.
이름과 외모에 걸맞게
아버지 애덤을 닮은 형 아론은
성격도 밝고 착한 모범생 타입으로 성장해 가면서
아버지의 사랑과 기대를 독차지하지만,
왠지 우울하고 삐딱한 성격의 동생 칼은
본의 아니게 자주 애덤의 눈 밖에 난다.
어려서부터 사랑에 굶주린 칼은
점점 아버지를 향해, 형을 향해, 또 형과 사귀는 에이브라를 향해,
사랑하면서도 증오하고
가까이 가고 싶지만 또 영영 보고 싶지 않은,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이중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
칼은 자신들을 버린 생모 캐시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그의 내면은 더욱 어둡고 복잡해진다.
한편 칼은 자신이 끝내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분노와 자패감에 휩싸여 홧김에 형 아론에게 캐시에 대해 알리고 급기야 캐시가 있는 곳까지 데려가 눈으로 확인시킨다. 아론은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돌연 입대함으로써 새롭게 인지한 끔찍한 현실로부터 회피한다. 칼은 자신의 이기적이고 위악적인 행위가 부른 결과에 대해 괴로워하고, 아론과 결혼까지 생각했던 에이브라는 고통과 절망에 빠진 칼의 곁을 지키며 그를 위로한다. 둘은 자신들이 겪는 아픔을 인정하고 위로하면서 서로를 지탱시켜주면서 서서히 사랑과 연민의 감정을 쌓게 된다.
한편 ‘악’의 화신으로 평생 주변 사람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캐시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애덤은 전쟁터에서 날아온 아론의 전사 소식을 듣고 쓰러진다.
생의 마지막 순간,
애덤은 칼을 용서하면서
선과 악이 뒤얽힌 3대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조용히 숨을 거둔다.
애덤이 남긴 용서와 화해의 말을 통해
칼은 자유의지에 대한 확신을 얻었고
이제 어머니 캐시로부터 자신에게 이어졌다고 생각한 죄악의 대물림을 끊고
추방과 도주의 땅 ‘에덴의 동쪽’을
새로운 생명의 땅으로 재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괴물 같은 겉모습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있다면,
괴물 같은 심성을 타고 난 사람도 가능하지 않을까?
완벽한 얼굴과 몸을 지녔으되,
뒤틀린 유전자나 기형적인 난자 때문에
어쩌면 영혼이 뒤틀린 채 태어난 경우가 가능하지 않을까?
캐시 에임즈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화자는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인물에 대한 독자의 흥미를 유도하고 있다.
『에덴의 동쪽』에서
캐시는 그야말로 인간 ‘괴물’이라는 직설적인 말 외에
달리 표현하기 어렵도록 제시되어 있다.
작품 속 누구보다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캐시이지만,
그녀는 어떤 예측이나, 변명, 공감마저도 비웃어버리는
악덕 그 자체로 드러난다.
그러나 한편으로 캐시와 같이,
악한 혹은 악녀를 통해 구현되는 ‘죄악’은
어쩌면 인간의 선한 의지나 이성으로 파악되지 않는,
말하자면 삶을 지배하는 불가해한 요소 중 하나가 아닐까.
그렇다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삶 속에 항상 버티고 있는 이 불가해한 악덕에 직면해서
어떻게 삶을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에덴의 동쪽』은
이와 같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세속적으로 탐구한 버전이 된다.
애덤이 물었다, “형은 어딨는 거냐?”
“모르겠는데요.” 칼이 말했다.
“이틀 밤이나 집에 오지 않다니. 어디 간 게야?”
“저더러 어쩌라고요?” 칼이 대꾸했다,“제가 뭐 형의 경호원이라도 되는 겁니까?”
아론은 엄마 캐시의 전모를 알게 된 후 고뇌로 방황하고,
평소 같지 않은 아론의 행적을 걱정하며 애덤은 칼을 추궁한다.
이 장면은
『에덴의 동쪽』이 기대고 있는
구약성경의 카인과 아벨의 사건을 세속적으로 그대로 옮겨 놓은 상황이다.
창세기에서 카인은
질투심에 불타 아벨을 살해하는데,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하느님은
짐짓 카인에게 아벨의 행방을 물으면서 그의 속을 가늠하려 한다.
물론 구약성경 속 하느님과 다르게
아버지 애덤은 두 형제 사이에 벌어진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카인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형을 살해하지만,
작품 속의 칼은 직접 형 아론을 죽이지 않았고 그럴 의도도 전혀 없었다.
“애덤, 어서 이 애를 편안히 해줘요.
한 번만 기회를 줘요.
어서 자유를 주도록 해요.
인간이 짐승보다 나은 건 자유가 있어서예요.
어서 그를 자유롭게 해 주고 축복해 주세요.”
…
“팀쉘!”
애덤의 눈은 바로 감겼고 ... 그는 영원히 잠이 들었다.
애덤이 운명하는 순간이자 책의 마지막 부분이다.
칼과 에이브라, 리가 지켜보는 임종의 자리에서
리는 애덤에게 용서와 화해의 뜻을 밝히라고 호소하고,
애덤은 ‘너의 뜻대로 악을 물리치게 되리라’는 의미의
‘팀쉘’(timshel)이라는 말을 남긴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팀쉘’은
카인에게 스스로 악에 맞설 힘이 있음을 확신시켜 준 하느님의 말이다.
이로써 아버지 애덤은
생의 마지막 순간
형 아론을 사지로 몰아넣고 괴로워하는
칼을 용서한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 정희성 역, 에덴의 동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