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타가 된 할머니
설레임이 동반하는 시간은 행복하다. 건강한 상상력이 비누방울처럼 나르다가 터지기를 반복한다.
나는 선물 포장 하나하나마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새로운 국면과
마주치지 않으면 숨어버린 기억을 소환할 수 없어서 관념어로 글을 쓰게 된다.
좋아서 간직한다는 이름으로 방치된 물건을 찾아내어 의미를 담아 포장하는 동안 내 안이 온통
선물로 가득했다. 내가 담은 선물은 조촐해도 나쁜 것은 없다. 상징과 의미화를 하기 위해 적합한
것들이 골라지고 내 의도가 제대로 읽혀질 지, 더 확대해석될 지 궁굼했다.
어느 것은 포장 용기가 선물이고 포장 용기와 내용물이 상상하는 것과 너무나 다른 것도 있다.
어쨌든 자기발견을 위한 퍼포먼스이다.
진눈이 내리는 저녁시간에 선물을 잔뜩 들고 한 손에는 가방을 걸치고 우산까지 들었다. 두
발로 걷는 싼타 할머니다. 수업방의 창가에 선물받을 주인공들이 오기 전에 진열을 해두었다.
이미지를 통해 다양한 생각과 느낌을 끌어내는 수업형식이다. 우측에는 쇼핑백이 반듯하고
정갈한 것을 진열하였고 좌측에는 조금 구겨지거나 색이 흐린 쇼핑백과 종이로 밀착 포장한 것,
비닐망에 담은 것을 나열하였으니 좌측과 우측이 색이나 분위기에서 구분지어졌다.
그러하니 은연 중에 눈독이 들만 한 것도 있고 먼저 고르고 싶은 분도 있을 것이다. 내가 노린
내용이다. 모든 것은 자신이 선택하여 정해지므로 '사다리 타기'로 순서를 정했다. 사다리타기
에는 젊은 날의 다양한 추억이 서려 있을 것이므로 그 추억도 끼어들도록 돕는다.
# 예뻐서
78세의 시니어 작가분이다. 올해 등단하면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였다. 그녀는 40년 전에
태국 여행길에 건져온 실크민속주머니를 집어들었다. 코끼리 장식이 달려있는데 난 여행중에 그
주머니를 들고다니며 실용적으로 사용하여서 다시 가면 그러한 것을 더 사오고 싶을 만큼 만족
했다.
"왜 그것을 골랐나요?"
"예뻐서요. 가볍고 작아 보이지만 많이 들어갈 것같아서요. 평생 고르는 행운이 내게 오지
않았는데 웬일로 1번이 걸렸는지 모르겠어요 "
"내용물도 꺼내서 펼쳐 보세요."
매듭줄로 만든 파랑색 끈묵주다. 그녀는 파랑색에 더 먼저 반응하였다.
"묵주도 좋지만 이 색이라서 더 좋아요."
내 의도는 기도하는 도구를 받는 것도 좋지만 그 것에는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의 조합
이란 메시지가 담겨 있다. 보이는 것은 포장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본질임을 내용으로 담아
두었다. 거기까지는 가지 않은 듯 하나, 뜻을 새길 생각보다 단순하게 선물에 대응하는 것을
보았다. 이미지의 힘이다. 수시로 이 행사를 통해 공유한 내용이라 수업하기가 좋을 것같다.
# 그냥 자기 것
다른 사람이 고르는 패턴과 다른 선택이었다. 보기 좋고 선호할 만한 것을 고르지 않고 약간 손 때
묻은 듯한 봉투를 택했다.
"왜 그것을 골랐나요?"
"그냥 내 것이니까요."
"모두가 선택으로 설정되었는데 자기 것이 어디 있어요."
"내 번호가 6번인데 그 봉투의 번호도 6번이라 내 것 같아서 골랐어요."
실은 선입관의 장애를 받았을 것이다. 다시 물었다.
"그것을 선택한 이유가 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녀가 소환된 기억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부부 모임에서 누군가가 여행을 다녀와서 선물을 나누게 되었는데 자신은 네모가 반듯하게
포장된 선물을 골랐다.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그 포장을 풀었더니 야릇한 물건이 나왔다.
왜 우리는 그 물건을 말하기도 쑥스러워 하고 보기를 민망해 하는지는 모르지만 말하는 사람은
이미 과거 속으로 들어가 고개를 숙이고 말을 멈칫거리며 하고 있었다.
그 물건이라는게 비뇨기과 의사가 사온 물건인데 자신이 필요해서 사온 것을 선물 속에 넣고
한바탕 웃었던 거였다. 듣는 사람도 웃고 말하는 사람도 웃으며 수업은 유쾌한 시간이 만들어졌다.
그 민망함이 연상되어 그녀는 반듯한 포장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러사람들 앞에서 풀기에
약간 망측한 물건이라 눈치채지 못하게 더 정갈하게 포장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직감하였다.
나도 의도를 감춘 것을 더 정갈하게 포장했으니까. 이 대목에서 그녀는 해방할 거리를 건졌다.
'반듯하게 포장된 것은 모두 그것이다'가 성립되지 않으므로 인식을 새롭게 하기를 권했다.
'반듯한 포장'이라 표현하고나니 오래 전에 특수사목을 하는 신부님에게 사기를 친 부부가
생각났다. 늘 정장차림에 금테안경을 쓰고 고상한 몸짓으로 신부님 주변을 얼씬거리며
후원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원금 몇억원을 3일만 유용하고 넣겠다고 허가를
받아 빼 가지고 종적을 감추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그 부부는 흐트러짐 없이 겉을 포장하고
신뢰를 얻은 다음, 날 잡아 행동을 하였다. 신부님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회원들이 기천만원씩
빌려주고 못받았지만 그들 부부가 나에게는 말도 하지 않았다. 속을 들여다본다고 생각했다.
대체로 헛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한결같이 포장한 태도로 사는 사람들은 신뢰하기 어려워서
나는 그녀를 멀리 하였다. 급하면 급한대로 민낯도 보이고 때와 장소가 달라지면 경우에 맞추어
차릴 줄도 아는 사람에게 신뢰도가 높다.
내가 똑 떨어지게 정갈한 포장을 멀리 하듯 6번 자매도 그날이 떠올라서 멀리 했다는 이야기다.
그녀에게는 록시땅 핸드크림이 들었다. 손을 보호하지 않는 편이라서 손도 사랑하라고 자신에게
온 것같다고 하여 의미화를 마쳤다. 그 물건의 포장과 내용물 사이에서 어떤 것을 건지는가가
관건인데 기억이 크게 작용하여 수업의 본질을 놓쳐버린 셈이다. 그녀의 감정도 일차적으로
'그냥'이라는 말에 붙어 버렸다. 그래서 풀어야 했다. 하나의 기억에서 한 가지를 건졌다.
집중하여 주제에 접근하는 몰입을 놓쳤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니까.
한번 건드려진 기억의 자리에서 이야기의 봇물이 터졌다. 그동안 가두어 두었던 야릇한 이야기를
한마당 떠 쏟아냈다.
제주도의 조천면에서 민박을 하다가 들은 실화다. 해양사고로 그 동네 남자들이 상당수 바다로
가고 과부들이 많은 동네가 되었다. 한 여인이 시동생 여럿을 데리고 살아가다가 시동생이 일본에
가게 되었을 때, 그녀에게 무엇을 사다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형수는 전기밥솥을 사오라고
적어주었다.
며칠이 지나 일본에서 소포가 날아들었는데 밥솥이 아니라 조그만 상자였다. 이를 이상히 여긴
형수는 풀어나보자 싶어서 포장을 열어보니 전기코드를 꽂게는 생겼는데 밥솥하고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물건이었다. 그렇지만 코드를 꽂아보았다.
아뿔사. 그것은 전기밥솥이 아니라 성인물 '전기 거시기'였다.
그녀는 무안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지만 묘한 재미에 빠져 밤마다 다니던 마실을 끊고
빙긋빙긋 웃는 여자가 되었다. 이상히 여긴 동네 아짐들이 문구멍을 뚫고 관찰할 결과, 무엇인가
반짝반짝 하는데 싫지 않은 표정인게다. 그들은 앞다투어 밀치고 달치다가 문을 열고 들어서게
되었고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번갈아 가며 희희낙락이 되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동네 사람들이 파출서에 신고를 하기에 이르고 수사를 하러 나와본 즉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도 나무랄 수가 없어서 일본의 시동생에게 편지를 하게 되었고 증빙 자료를
얻기 위해 그 쪽지를 부쳐달라고 하여 왔다. 자신도 이해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는데 부끄러워서
종이에 써주었는가 싶어서 선물을 미리 부쳤노라고 했다는 거다. 입증자료로 쪽지가 도착했고
그 쪽지에는 '전기밥좃'이라 되어있었다. 시옷을 멋스럽게 쓰느라고 첫 획을 힘주어 구부리다가
보면 그렇게 읽힐 수도 있다지만 그 익살스런 사건은 무마되었으나 일파만파로 확산되어
제주신문에 기사화가 되었으니 기막힐 노릇이다.
하느님이 '번성하라'는 축복의 말에 성희를 누릴 권리와 생산의 의무를 얹어 주었으므로 결코
웃을 일은 아닌데도 그 밤 우리는 오랜만에 엄청 웃어서 상당히 건강지수가 높아졌을 것이다.
고통이나 기쁨이 실제로 보고 듣는 것보다 상상할 때 더 강렬하다고 했던가.
웃음을 준 그녀가 되레 싼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