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크, KGB가 MI6에 심어” “자발적으로 스파이 된 것 아냐”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조선일보DB
라종일(80) 가천대 석좌교수는 28일 “영국 정보국 MI6 요원 신분으로 소련을 위해 활동한 조지 블레이크는 MI6에 들어갈 때부터 소련 정보기관 KGB 요원이었던 ‘고첩(고정 간첩)’이었다”고 말했다. 블레이크가 미국의 폭격에 분노하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뒤늦게 읽은 뒤 전향했다는 것은 소련의 일방적 주장이라는 것이다.
라 교수는 이날 전화 인터뷰에서 “MI6 측으로부터 듣고 확인한 바로는, 블레이크는 10대 시절 이미 KGB에 포섭돼 길러졌다”면서 “KGB가 계획적으로 그를 MI6에 심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옥스퍼드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MI6 요원으로서 주한 영국 대사관에 파견된 그가 뒤늦게 자본론에 감동해 자발적으로 소련 스파이가 됐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했다.
영국과 구소련의 이중간첩이었던 조지 블레이크가 2001년 6월 28일 모스크바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러시아 대외정보국(SVR)은 블레이크가 26일(현지 시각) 98세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로이터 연합뉴스
라 교수는 “소련은 중·고교생을 ‘고첩’으로 길러 영·미 정보부에 ‘몰(mole·잠입 스파이)’로 심는 수법을 써왔다”면서 “북한은 지금도 이런다. 우리 국정원에도 북한판 ‘블레이크’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라 교수는 김대중 정부에서 안기부 1·2차장, 국정원 1차장, 주영 대사를 지내고, 노무현 정부에선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 주일 대사 등을 역임한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외교안보 책사로 꼽힌다. 국정원은 과거 진보 정권 당시 ‘몰’ 색출 노력을 했던 적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내곡동 국정원 본관과 그 앞의 원훈석(院訓石). '소리 없는 헌신(獻身) 오직 대한민국 수호(守護)와 영광(靈光)을 위하여'. /국정원 조선일보 DB
라 교수는 여권이 강행 처리한 대북 전단금지법도 비판했다. 그는 “북한은 DJ·노무현 정부 때도 ‘교류하고 싶지 않으냐’ ‘정상회담해야 하지 않느냐’며 휴전선의 대북 전광판 철거를 집요하게 요구했다”면서 “정보·지적 결핍에 빠진 북한 주민을 위해서라도 전광판 같은 최소한의 정보 유입 도구는 유지해야 한다고 대통령께 직언했지만 결국 청와대에 대거 입성한 386 세력이 전광판 철거를 밀어붙여 성사시켰다”고 말했다.
라 교수는 “우리 정부가 북한과 잘 지내려는 것에 나도 찬성이다”면서 “하지만 잘 지내더라도 인권 등 지킬 건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엉터리 민족주의자, 진보주의자들은 역사가 어떻게 바뀌는지 모른다”면서 “남북 정상이 백두산에 올라가서 악수하고 정상회담하고 그러면 세상이 바뀌고 역사가 만들어 지는 줄로 안다”고 했다.
그는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그런 식으로 오지 않는다”면서 “프랑스 혁명, 한국의 민주화 혁명, 이런 게 지식이나 영웅 같은 인물 하나가 툭 튀어나와 이뤄진 것이 아니라 변화를 갈망하는 대중이 있었고 이들이 움직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조선중앙TV가 10일 오전 0시부터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을 녹화 중계방송하고 있다. (사진= 조선중앙TV 캡처) /뉴시스
그는 “진정 남북 관계의 변화를 바라고 통일을 바란다면 북한 인민이 세상을 바로 보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미약하게나마 전광판이든 뭐든 이들에게 세상의 뉴스를 전해줘야 하지 않겠느냐”며 “북한에 쌀이나 백신을 주겠다고만 하지 말고 정신적·지적 박탈을 당하는 인민의 처지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