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하르트 콜브 지음 | 김희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03월 26일 출간
독일통일의 새 시대를 열다!
평화 외교, 강한 국가, 국민 복지
이념을 넘어 ‘국가 리더’의 표준이 된 비스마르크
《지금, 비스마르크》는 19세기 독일 통일을 이룩하고 복지국가의 기틀을 다진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일대기다. 이 책은 방황하는 청년기를 거쳐 영주에서 정치가, 탁월한 외교가이자 통일 제국의 창설자로 비스마르크가 변모해가는 과정을 다룬다. 분열된 독일을 프로이센 중심으로 통합한 비스마르크가 없었다면 오늘날 독일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독일 역사의 중요한 정치가 중 한 명인 비스마르크가 독일에 남긴 정치적 유산을 살펴보며 우리는 성공한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눈부신 외교력으로 독일을 통일하고
유럽의 균형과 평화를 추구하다
19세기 유럽은 역동적인 변화의 시절이었다. 정치를 비롯한 경제와 기술 발달이 숨가쁜 시기였다. 당시 독일은 두 개의 강대국(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제후국으로 분열돼 있었다. 이러한 변화와 혼란의 시기 한가운데,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귀족 가문의 넷째로 1815년 4월 1일 태어났다. 방황하는 젊은 시기를 거친 비스마르크는, 36세의 나이로 외교관이 되자 마침내 그 정치적 재능을 꽃피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 등 유럽의 주요 도시를 거치며 국제정세를 읽는 안목을 길렀다.
프랑크푸르트와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에서 프로이센의 사절로 보낸 11년은 비스마르크가 외교관으로서 인맥을 넓히고 정치 분야 전반에 걸쳐 많은 경험을 쌓은 수련 시절이다. 이때 그는 무엇보다 강대국과 중소 국가의 이해관계를 정확히 읽어내는 안목을 키웠고, 독일과 국제정치 무대에서 중요한 정치가들을 만나며 그들의 성품과 정치적 목표, 야망을 두루 꿰뚫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가 1862년 9월 프로이센 정부의 수반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독일과 유럽을 가장 잘 아는 정치가였다.
- 〈3장 프랑크푸르트,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의 외교관〉 중에서
비스마르크는 흔히 외교의 거장이라 불린다. 47세의 나이로 프로이센의 수상이 된 시기, 프로이센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강대국의 틈바구니속에서 프로이센의 외교관으로서 끊임없이 국익을 추구했고 현상의 변화를 끌어냈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목표는 ‘하나된 독일’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강대국들은 독일의 통일을 바라지 않았다. 이러한 녹록지 않은 상황 속에서, 그는 ‘통일독일’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설정하고 방법의 유연성을 추구하며 혼란에 빠진 국내외 정치 현실을 극복해냈다. 무엇보다 방법의 유연성에 주목할 만하다. 그는 오스트리아까지 포함한 대大독일 통일을 추구하지 않았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이는 실현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대신 그는 북부 독일만이라도 하나로 통합하는 최소한의 목표, 즉 소小독일 통일을 지향했다. ‘철혈재상’이라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비스마르크는 전쟁이라는 수단을 최선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결 노선을 지양했다. 그가 추구한 독일 정책에서 오스트리아와의 무력 대결을 통해 소독일 민족국가를 세우는 일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에 불과했다. 오히려 비스마르크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독일 내 권력을 오스트리아와 나누어 가지고, 상호 균형을 추구하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다.
여러 제후국으로 분열돼 있던 독일을 하나로 통합한 비스마르크는, 이후 평화주의자로서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쟁보다는 외교적 방법을 선호했고, 세력균형을 추구하며 전쟁을 억제하는 ‘평화의 중재자’로서 면모도 보여준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 후에도 최소 20년 동안 유럽의 평화를 지켰다. 이러한 유럽의 외교 구도를 ‘비스마르크 체제’라고까지 부른다는 점에서, 그가 유럽의 평화에 기여한 바는 적지 않다. 무엇보다 그는 ‘예방전쟁’이라는 수단을 마지막까지 지양하는 원칙을 준수했다.
1871년 이후 평화 수호는 비스마르크 외교정책의 최고 목표였다. 그래서 그는 ‘예방전쟁’, 곧 적의 공격이 예상된다고 해서 가하는 선제공격을 1870년 이전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거부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견해를 피력했으며, 특히 1887년 1월 11일의 제국의회 연설에서 힘주어 강조했다. “나중에 불가피해지지 않을까 해서 치르는 전쟁, 나중에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해서 치르는 전쟁은 나와는 거리가 먼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언제나 철저히 거부해왔다.…나는 ‘전쟁을 치러야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전쟁을 하자는 충고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 〈5장 제국의 안정화와 평화수호〉 중에서
다만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던 비스마르크는 평화가 손쉽게 올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평화 정책의 전제 조건은, 바로 부국강병이었다. 독일제국이 충분히 강한 힘을 갖추고서 국제사회에서 행동할 때 비로소 평화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이 쉬워 보일 때 커지며, 전쟁이 어려워 보인다면 사라진다. 우리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만큼 더 전쟁은 일어나기 어렵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생각을 이런 표현에도 담아냈다. “언제라도 전쟁할 각오를 보일 때 우리는 평화를 지킨다. 칼을 뽑을 수 있게 칼집을 풀어둔 사람에게 공격은 쉽지 않다. 벽에 확실하게 걸어둔 연습용 칼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없다.”
- 〈5장 제국의 안정화와 평화 수호〉 중에서
제국창설자 비스마르크,
독일제국의 초석을 놓다
비스마르크가 독일제국에 남긴 유산은 외교 분야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통일된 제국을 안정화하는 데에도 힘썼다. 구체적 계획을 통해 독일제국의 근대화를 추구했으며, 연방 정부 차원의 행정국가를 수립했다. 이 중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는 비스마르크의 주요 업적은 무엇보다 독일이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데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비스마르크가 설계하고 도입한 사회복지 법안이 국내 정치에서 이룩한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고 평가한다. 비스마르크는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회복지 정치를 추진했다. 그는 산업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폐해의 심각성을 간파하고, 노동자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위치를 정부 대책으로 개선해줄 필요성을 인식했다. 보편적 국익에 부합하는 한에서 노동자 계층에 희망을 주고자 한 것이다.
비스마르크 정부가 1880년대에 국내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던 것은 입법 과정이다. 특히 사회복지 법안은 오래 걸렸으며, 숱한 난제를 극복해야만 했다. 질병, 사고, 상해, 노년 등에 따른 생활고를 덜어주고자 전국 차원에서 도입하기로 한 첫 번째 사회보장제도는 독일제국을 “전 세계에서 사회보장의 최신 체계를 발전시킨 선구 국가”로 만들어주었다고 게르하르트 리터Gerhard Ritter(1929~2015)는 평가한다.
- 〈5장 제국의 안정화와 평화 수호〉 중에서
다만 비스마르크가 국내 정치에 남긴 유산은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그가 시도한 모든 것이 성과를 낸 것은 아니며,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때 그의 선택이 독일에 남긴 부정적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자신의 정치적 적대자인 사회민주주의자와 가톨릭 세력을 때로는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비스마르크의 국내 정치가 남긴 유산을 어떻게 볼 것인지 하는 문제는 더 어렵다. 제국의 수상은 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민주주의자라고 주장한 적도 없다. 독일 민주주의는 비스마르크를 그 조상이나 후원자로 섬길 수 없다. 그가 보여준 국내 정치 행보는 문화투쟁, 보호관세 관철, 사회민주주의의 무자비한 탄압 등 거칠기만 한 저주로 점철됐다. 비록 그때마다 의회의 지지를 끌어냈다 할지라도 이런 일을 주도한 결정적 책임은 분명 그의 몫이다.
- 〈에필로그. 논쟁의 대상 비스마르크〉 중에서
저자는 ‘철혈재상’이라 불린 비스마르크의 인간적인 면모에도 주목한다. 그는 수상으로 재임하면서 잦은 질병과 고독에 시달렸고, 권력에 지나치게 집착해 20년 가까이 몸담은 수상직에서 깔끔하게 물러나지도 못했다. 그는 인생의 말년에 새로운 카이저인 빌헬름 2세와의 관계 설정에 실패했고, 국내 정치의 세력 구도를 판단하는 능력까지 상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카이저와의 불화로 퇴임한 후에도 언론을 통해 지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심지어 의원직에까지 출마해 후배 정치인들을 당황케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21세기의 한국사회,
비스마르크를 소환하다.
《지금, 비스마르크》는 전환의 시대를 살며 유럽의 체제는 물론 독일 사회 전반의 깊숙한 뿌리까지 영향을 미친 인물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재조명한다. 무엇보다 이 책을 오늘날 소환한 이유는 당시의 유럽 정세가 오늘날 한국의 정세와 유사한 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은 중·러·일이라는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는 물론, 분단국가라는 특성 탓에 국제적으로 쉽게 풀기 어려운 고차방정식과 마주하는 일이 잦다. 따라서 한국의 지도자는 시시각각 변하는 냉엄한 국제 질서 속 국가이익을 추구할 탁월한 외교 역량과, 이를 힘있게 추동할 통합된 국가 여론을 끌어낼 리더십이 요구된다.
비스마르크는 두 개의 축(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으로 분열돼 있던 독일을 하나로 통합해 근대국가의 초석을 마련한 국가지도자다. 그 과정에서 주변 정세를 냉철하게 판단하고, 탁월한 외교 리더십을 발휘해 끊임없이 국익을 추구했다. 냉엄한 국제 질서 속 실력을 키우는 나라만이 국익을 얻는다는 비스마르크의 철칙은, 무엇보다 평화를 절실하게 추구해야 할 한국의 정치 리더에게 필수불가결한 지침을 제공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