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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마추어`불자라` 원문보기 글쓴이: 인어뷰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신 후 원효대사와 헤어지는 의상대사
중국 등주에서의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만남
신이한 꿈을 꾼 지엄대사의 문하에 들어가는 의상대사
용이된 선묘낭자의 호위로 무사히 신라로 귀국하는 의상대사
용으로부터 여의보주를 받는 의상대사
낙산사를 창건하는 의상대사
선묘낭자의 도움을 받아 부석사를 창건하는 의상대사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사랑
임진왜란 때 원정군으로 참전한 이여송이 우리 나라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인재가 태어날 곳에는 지맥을 많이 끊었다고 하며 그 무렵 이 절의 석룡의 허리가 짤렸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신라시대 원효와 요석공주의 이야기처럼 의상과 선묘낭자의 사랑은 애틋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우리 가슴에 남아있다.
의상대사
"나의 어저께 꿈은 그대가 나를 찾아올 징조였다" 그리고 나서 의상의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 『삼국유사』권2 「의상전교」조
『삼국유사』권4 「의상전교」조
625년
(신라 眞平王 35,37) 신라 계림부(鷄林府) 에서 김한신(金韓信)의 아들로 탄생.
643년
(19세 善德女王 12, 20) 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出家).
650년
(26세 眞德女王 4)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 유학을 꾀하였으나 도중 고구려(高句麗)의 순라군(巡邏軍)에게 잡혀 갇혀 있다가 돌아옴.
652년
(27세 眞德女王 5) 천축산(天竺山) 불영사(佛影寺)창건(創建).
661년
(37세 文武王 元年) 당(唐)나라 사신(使臣)의 배편으로 당(唐)의 양주(楊州)에 도착,유지인(劉至仁)의 관아(官衙)에 머뭄.
662년
(38세 文武王 2)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도착, 당시 중국 최고의 화엄학자로 존숭되고 있는 지엄(智儼)의 제자(弟子)가 되어 화엄(華儼)을 수학(受學)하기 시작.
668년
(44세 文武王 8) 7월에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지음.
7월 27일에 스승 지엄(智儼) 입적(入寂).
670년
(47세 文武王 10) 종남산을 출발, 양주를 거쳐 귀국길에 오름.
672년
(48세 文武王 12년) 귀국. 낙산사 관음굴에서 이주간 기도.
이 때 <백화도장발원문>을 지었고 용과 천신으로부터 여의보주와 수정염주를 전해 받음. 또 이 해에 낙산사 창건.
674년
(50세 文武王 14) 황복사에서 표훈, 진정 지통 등 십대제자에게 (화엄일승법계도)를 가르침.
676년
(52세 文武王 16) 왕의 뜻을 받아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함.
702년
(78세 성덕왕 원년) 입적.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라 시호를 내림.
출처:http://cafe.daum.net/doan1
다음카페 아마추어'불자라'
"종교란 살아가는 가치관과 삶을 풍족하게 만들어 주는 보석"
첫댓글 라이벌 원효대사에 밀려 역사적으로 저평가된 의상대사를 재조명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화엄 카페에서 해동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의 짝을 소개한 것은 적절한 조치라고 평가한다
원효는 지상의 요석공주를 만나 사랑을 나누었지만
의상은 천상의 선묘공주를 만나 사랑을 나누었으니 원효 부럽지 않다.
원효는 요석공주를 만나 이사무애와 사사무애를 설시했고
의상은 선묘낭자가 만나 불교 패러다임을 너머서는 이리무애를 설시했으나 후대에 크게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의상은 원효가 만져보지 못한 비밀의 문고리를 살포시 잡아봤다.
다만, 문고리를 당겨 그 안을 보지 못해 글로 남기지는 못했다.
문고리라도 한 번 잡아보게 만든 것은 선묘낭자의 대자대비다.
그러나 문을 열어보지 못하게 한 것도 선묘낭자의 대자대비다.
각설하고,
1500년전 불자가 불교의 패러다임을 살작 넘어 봤다는 것은 짜릿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