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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入(六處)란 慾界 세상에 태어난(生) (과거 누겁의) 舊業의 과보이다. 이하 [육처 상윳따]에서 나타나는 교설들은 대부분 욕계 중생들 不具가 아닌 즉 6根(門)을 모두 구족한 특히 인간들에 대한 교설이다. 이렇게 태어난 有情들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법들이 이른바 66법이다. 본 상윳따에서 정형적으로 나타나는 六六法은 根-境-識-觸-受(樂-苦-非苦非樂) <6 X 5 = 30법>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욕계 중생들의 一切이다. 혹자는 아래 경문을 인용하여 <삼계 모든 중생들의 一切>가 12處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만 <무색계> 혹은 <색계> 중생들의 一切가 12處가 아니라 <삼계> 모든 유정들의 一切를 분류하면 그것이 12處라고 한다면 그것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즉 무색계 중생의 일체는 意-法 = 2處이고 색계 중생의 일체는 眼(色)-耳(聲)-意(法) = 6處이고[身(触)이 만약? 포함된다면 8處] 욕계 중생들의 일체는 다음 경문에 나타나듯이 이른바 12處가 一切라는 의미에서 <삼계 중생들의 一切>는 12處라고 한다면 그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 싶다. 혹자는 이러한 설명에 다음 경문을 근거로 헛된 망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一切 經(S35:23)을 조심스럽게 읽어 본다. [cakkhuñceva rūpā ca, sotañca saddā ca, ghānañca gandhā ca, jivhā ca rasā ca, kāyo ca phoṭṭhabbā ca, mano ca dhammā ca — idaṃ vuccati, bhikkhave, sabbaṃ.] 먼저 일체란 眼-色들(rūpā), 내지 意-法들(dhammā) 12개의 법수들이 소개되어 있다. 여기서는 境은 복수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복수형은 욕계 중생들의 경계이지 싶다. 또한 有見有對인 色들(rūpā) 내지 無見有對인 聲香味触들이 무색계 중생의 경계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香味들이 색계 중생의 경계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색계 혹은 무색계 중생의 일체가 12처일 수가 없다. 다음으로 [yo, bhikkhave, evaṃ vadeyya — ‘ahametaṃ sabbaṃ paccakkhāya aññaṃ sabbaṃ paññāpessāmī’ti, tassa vācāvatthukamevassa ; puṭṭho ca na sampāyeyya, uttariñca vighātaṃ āpajjeyya. taṃ kissa hetu? yathā taṃ, bhikkhave, avisayasmin”ti.] '나는 이런 일체를 버리고 다른 일체를 천명할 것이다.'라는 것은 I. '다른 일체를 천명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냐 아니면 II. 단지 '그들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인지의 문제가 있다. [Taṃ kissa hetu? Yathā taṃ, bhikkhave, avisayasmiṃ] 용례가 나오는 경문 [Evaṃ puṭṭhā, bhikkhave,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na ceva sampāyissanti, uttari ca vighātaṃ āpajjissanti. Taṃ kissa hetu? Yathā taṃ, bhikkhave, avisayasmiṃ.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면 외도 유행승들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들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A10:27) [‘‘Evaṃvādino, bhikkhave,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massu vacanīyā – ‘atthi panāvuso, pariyāyo, yaṃ pariyāyaṃ āgamma pañca nīvaraṇā dasa honti, satta bojjhaṅgā catuddasā’ti. Evaṃ puṭṭhā, bhikkhave,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na ceva sampāyissanti, uttariñca vighātaṃ āpajjissanti. Taṃ kissa hetu? Yathā taṃ, bhikkhave, avisayasmiṃ. “비구들이여, 이교도들이 그처럼 말하면 ‘그런데 벗들이여, 그 어떤 이치가 있어서 오개(五蓋)는 열이 되고 칠각지(七覺支)는 열넷이 되는가?’라고 이처럼 반문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질문을 받으면 이교도들은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이 경계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S46:52) 등 즉 어떤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것은 헛된 망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대답하는 자의 <경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예 불가능하냐 아니면 지금 현재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말뿐인 것인지 혹은 대답도 할 수도 없는 것인지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와 유사한 예는 識-名色 互緣에서 이 두 법은 아예 이별이 불가능하냐 아니면 지금 현재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해결이 되지 않았는가의 문제와도 같다. [paccudāvattati]용례가 나오는 경문 [Paritassanā upādānaṃ uppajjati; paccudāvattati mānasaṃ – ‘atha ko carahi me attā’ti?](S22:90) [seyyathāpi vā pana, nandiya, sukkhe tiṇadāye aggi mutto ḍahaññeva gacchati, no daḍḍhaṃ paccudāvattati; evamevaṃ kho, nandiya, imehi ekādasahi dhammehi samannāgato ariyasāvako pajahateva pāpake akusale dhamme, na upādiyatī’’ti.](A11:14) [paccudāvattati kho idaṃ viññāṇaṃ nāmarūpamhā na paraṃ gacchati.](12:65) 등 名色은 識과 set이지만 識은 항상 名色과 互緣인 것은 아닙니다. |
♦ saḷāyatanavaggo ♦ 1. saḷāyatanasaṃyuttaṃ (SN 35.1)
♦ 3. sabbavaggo ♦ 1. sabbasuttaṃ (SN 35.23)
제3장 일체 품 Sabba-vagga 일체 경(S35:23) Sabba-sutta
♦ 23. sāvatthinidānaṃ .
“sabbaṃ vo, bhikkhave, desessāmi. taṃ suṇātha.
3.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일체[諸, sabba]22)를 설하리라. 이제 그것을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22) “'일체(sabba)'에는 4가지가 있다. 일체로서의 일체(sabba-sabba), 감각장소[處]로서의 일체(āyatana-sabba), 자기 존재[有身]로서의 일체(sakkāya-sabba), 부분으로서의 일체(padesa-sabba)이다.
① 일체로서의 일체는 알 수 있는 모든 것인데, [부처님의] 일체지지(一切知智, sabbaññuta-ññāṇa)의 영역에 들어온 모든 것이다. ② 감각장소[處]로서의 일체는 네 가지 세계에 속하는 모든 법들(catubhūmaka-dhammā)이다. ③ 자기 존재[有身]로서의 일체는 삼계에 속하는 모든 법들(tebhūmaka-dhammā, 즉 모든 유위법)이다. ④ 부분으로서의 일체는 물질로 된 다섯 가지 감각대상들만(pañc-ārammaṇa-matta)이다. [①부터 ④까지] 뒤로 올수록 그 범위가 앞의 것보다 더 좁아진다. 여기 [본경]에서는 감각장소[處]로서의 일체를 뜻한다.”(SA.ii.357)
네 가지 세계[四界]는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에다 [9가지] 출세간(4가지도와 4가지 과와 열반)을 포함한 것이다.
kiñca, bhikkhave, sabbaṃ?
cakkhuñceva rūpā ca, sotañca saddā ca, ghānañca gandhā ca,
jivhā ca rasā ca, kāyo ca phoṭṭhabbā ca, mano ca dhammā ca —
idaṃ vuccati, bhikkhave, sabbaṃ.
4.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일체인가?
눈과 형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노[意]와 [마노의 대상인] 법 -
이를 일러 일체라 한다.”
yo, bhikkhave, evaṃ vadeyya —
‘ahametaṃ sabbaṃ paccakkhāya aññaṃ sabbaṃ paññāpessāmī’ti,
tassa vācāvatthukamevassa ;
puṭṭho ca na sampāyeyya, uttariñca vighātaṃ āpajjeyya.
taṃ kissa hetu? yathā taṃ, bhikkhave, avisayasmin”ti.
5.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이런 일체를 버리고 다른 일체를 천명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말로만 떠벌리는 것일 뿐이다.23)
만일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24)
23) “'단지 말로만 떠벌리는 것일 뿐이다(vācā-vatthur ev' assa).'라는 것은 말로만 말하게 되는 토대가 될 뿐이라는 말이다. 이 12가지 감각장소들을 떠나서 또 다른 고유성질을 가진 법(sabhāva-dhamma)이 있다고 설 할 수 없다는 뜻이다.” (SA.ii.358)
24) “'그것은 그들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yathā taṃ avisayasmiṃ).'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영역이 아닌 것(avisaya)에 대해서는 곤혹스럽게 된다. 그것은 마치 집채만 한 돌을 머리에 이고 깊은 물을 건너려는 것과 같고, 달과 태양을 끌어당겨서 떨어뜨리려는 것과 같아서, 자신의 영역이 아닌 것에 대해서 애를 쓰는 것(vāyamanta)은 곤혹스러움(vighāta)만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SA.ii.358)
paṭhamaṃ.
♦ 2. pahānasuttaṃ (SN 35.24) 버림 경1(S35:24) Pahāna-sutta
♦ 24. “sabbappahānāya vo, bhikkhave, dhammaṃ desessāmi. taṃ suṇātha.
3.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일체를 버림에 대한 법을 설하리라. … <S35:23 §3> …
katamo ca, bhikkhave, sabbappahānāya dhammo?
4.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일체를 버림에 대한 법인가?
cakkhuṃ, bhikkhave, pahātabbaṃ,
rūpā pahātabbā,
cakkhuviññāṇaṃ pahātabbaṃ,
cakkhusamphasso pahātabbo,
yampidaṃ cakkhusam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tampi pahātabbaṃ
눈을 버려야 한다. 형색을 버려야 한다. 눈의 알음알이를 버려야한다. 눈의 감각접촉을 버려야 한다.
[16]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25)을 버려야 한다.
25)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느낌(cakkhu-sam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이란, 눈의 감각접촉을 근본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받아들이는 마음과 조사하는 마음과 결정하는 마음과 속행의 마음에 있는 느낌(sampaṭicchana-santīrana-voṭṭhabbana-javana-vedanā)을 말한다. 눈의 알음알이의 단계와 함께한 [느낌](cakkhu-viññāṇa-sampayuttā)에 대해서는 따로 설해야 할 것이 없다. 귀의 문 등에서 일어나는 느낌에도 이 방법이 적용된다.” (SA.ii.258)
받아들이는 마음 등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3장 §8의 해설을 참조할 것.
... pe ...
yampidaṃ sotasam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tampi pahātabbaṃ...
yampidaṃ ghānasam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tampi pahātabbaṃ.
jivhā pahātabbā, rasā pahātabbā, jivhāviññāṇaṃ pahātabbaṃ, jivhāsamphasso pahātabbo,
yampidaṃ jivhāsam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tampi pahātabbaṃ.
kāyo pahātabbo...
mano pahātabbo, dhammā pahātabbā, manoviññāṇaṃ pahātabbaṃ, manosamphasso pahātabbo,
yampidaṃ manosam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tampi pahātabbaṃ.
귀를 … 소리를 … 귀의 알음알이를 … 귀의 감각접촉을 … 느낌을 …
코를 … 냄새를 … 코의 알음알이를 … 코의 감각접촉을 … 느낌을 …
혀를 … 맛을 … 혀의 알음알이를 … 혀의 감각접촉을 … 느낌을 …
몸을 … 감촉을 … 몸의 알음알이를 … 몸의 감각접촉을 … 느낌을 …
마노[意]를 버려야 한다. [마노의 대상인] 법26)을 버려야 한다.
마노의 알음알이[意識]를 버려야 한다. 마노의 감각접촉을 버려야 한다.
마노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버려야 한다.”27)
ayaṃ kho, bhikkhave, sabbappahānāya dhammo”ti.
5.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일체를 버림에 대한 법이라 한다.”28)
26) 본서 「밖의 무상 경」(S35:4) §3의 주해에서도 밝혔듯이 여기서 '[마노의 대상인] 법'은 dhamma를 옮긴 것이다. 해당 주석서에서도 이것을 대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dhammāti ārammaṇaṃ - SA.ii.258)
27) “여기서 '마노[意, mano]'는 바왕가의 마음(bhavaṅga-citta)이다. '[마노의 대상인] 법[法, dhamma]'은 대상이다. '마노의 알음알이[意識]'는 전향을 포함한 속행(sah-āvajjanaka-javana)을 말한다. '마노[意]의 감각접촉'이란 바왕가와 함께 생긴 감각접촉을 말한다. '느낌(vedayita)'이란 전향의 느낌을 포함한 속행의 느낌을 말한다. 바왕가와 함께하는 [느낌]에 대해서는 따로 설해야 할 것이 없다. 전향을 바왕가로부터 분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노[意, mano]는 전향을 포함한 바왕가를 뜻한다고 알아야 한다.”(SA.ii.258)
바왕가와 속행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3장 §8의 해설을 참조할 것.
28) 본서 「일체 경」(S35:23) 등 위의 여러 경들에서 세존께서는 일체란 안 · 이 · 비 · 설 · 신 · 의와 색 · 성 · 향 · 미 · 촉 · 법의 안과 밖의 감각장소들(12처)뿐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바로 본경과 다음의 여러 경들에서는 이러한 12처에서 나열되지 않은 알음알이와 감각접촉과 느낌이라는 구성요소들을 들고 계신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버려야 하는 일체로 12처보다 더 많은 법수들을 나열하여 앞의「일체 경」 (S35:23)의 말씀들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계시는 듯이 보인다.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본경에 나타나는 6가지 알음알이는 모두 마노의 감각장소[意處, mano-āyatana]에 포함된다. 이렇게 되면 마노[意, mano]는 마노의 알음알이를 일어나게 하는 의지하는 조건(nissaya-paccaya)이 되어 마노[意]의 감각장소(mano-āyatana)보다 더 좁은 영역이 된다. 위에서 인용한 주석서에서 보았듯이 아비담마에서는 바왕가의 마음을 마노[意]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감각접촉과 느낌과 다른 심소법들은 [마노의 대상인] 법의 감각장소[法處]에 속한다. 주석서의 설명에서 보았듯이 마노의 알음알이[意識]는 의문전향의 마음(manodhvār-āvajjana-citta)과 속행(javana)들이 포함된다. 그래서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7장 §36의 해설에서는 “마노[意]의 감각강소는 마노의 문(dvāra)보다는 더 큰 범위를 나타낸다. 이것은 89가지 형태의 마음 모두를 포함하는 알음알이의 무더기 전체와 일치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전문술어들은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3장 §§3~8과 그 [설명]들을 참조할 것.
dutiyaṃ.
♦ 5. dutiyāparijānanasuttaṃ (SN 35.27) 철저하게 앎 경2(535:27) Parijānana-sutta
♦ 27. “sabbaṃ, bhikkhave,
anabhijānaṃ aparijānaṃ avirājayaṃ appajahaṃ abhabbo dukkhakkhayāya.
kiñca, bhikkhave, sabbaṃ
anabhijānaṃ aparijānaṃ avirājayaṃ appajahaṃ abhabbo dukkhakkhayāya?
3. “비구들이여, 일체를 최상의 지혜로 알지 못하고 철저하게 알지 못하고
탐욕이 빛바래지 못하고 버리지 못하면 괴로움을 멸진할 수 없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떠한 일체를 최상의 지혜로 알지 못하고 철저하게 알지 못하고
탐욕이 빛바래지 못하고 버리지 못하면 괴로움을 멸진할 수 없는가?
yañca, bhikkhave, cakkhu, ye ca rūpā, yañca cakkhuviññāṇaṃ,
ye ca cakkhuviññāṇaviññātabbā dhammā ... pe ...
눈과 형색과 눈의 알음알이와 눈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31)을
최상의 지혜로 알지 못하고 철저하게 알지 못하고 탐욕이 빛바래지 못하고
버리지 못하면 괴로움을 멸진할 수 없다.
31) '눈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은 cakkhu-viññāṇa-viññātabba dhammā를 옮긴 것이다. 그러면 이 법들과 눈의 대상인 형색[色, rūpa]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앞에서 말한 형색(rūpa)들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눈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이다. [둘째] 형색은 직접적으로 [눈의 알음알이의] 영역에 들어온 것(āpātha-gata)만을 취해서 설하신 것이고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영역에 들어오지 않은 것(anāpātha-gata)까지 포함한 것이다. 즉 여기서는 눈의 알음알이와 함께하는 세 가지 무더기(tayo khandlhā =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의 무더기)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른 경우들에도 같은 방법이 적용된다.”(SA.ii.359)
yā ca jivhā, ye ca rasā, yañca jivhāviññāṇaṃ, ye ca jivhāviññāṇaviññātabbā dhammā;
yo ca kāyo, ye ca phoṭṭhabbā, yañca kāyaviññāṇaṃ, ye ca kāyaviññāṇaviññātabbā dhammā;
yo ca mano, ye ca dhammā, yañca manoviññāṇaṃ, ye ca manoviññāṇaviññātabbā dhammā —
idaṃ kho, bhikkhave, sabbaṃ
anabhijānaṃ aparijānaṃ avirājayaṃ appajahaṃ abhabbo dukkhakkhayāya.
귀와 소리와 귀의 알음알이와 귀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을 …
코와 냄새와 코의 알음알이와 코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을 …
혀와 [19] 맛과 혀의 알음알이와 혀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을 …
몸과 감촉과 몸의 알음알이와 몸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을 …
마노[意]와 [마노의 대상인] 법과 마노의 알음알이[意識]와 마노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을
최상의 지혜로 알지 못하고 철저하게 알지 못하고 탐욕이 빛바래지 못하고 버리지 못하면
괴로움을 멸진할 수 없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일체를 최상의 지혜로 알지 못하고 철저하게 알지 못하고
탐욕이 빛바래지 못하고 버리지 못하면 괴로움을 멸진할 수 없다.”
♦ “sabbaṃ, bhikkhave, abhijānaṃ parijānaṃ virājayaṃ pajahaṃ bhabbo dukkhakkhayāya.
kiñca, bhikkhave, sabbaṃ abhijānaṃ parijānaṃ virājayaṃ pajahaṃ bhabbo dukkhakkhayāya?
yañca, bhikkhave, cakkhu, ye ca rūpā, yañca cakkhuviññāṇaṃ,
ye ca cakkhuviññāṇaviññātabbā dhammā ... pe ...
yā ca jivhā, ye ca rasā, yañca jivhāviññāṇaṃ, ye ca jivhāviññāṇaviññātabbā dhammā;
yo ca kāyo, ye ca phoṭṭhabbā, yañca kāyaviññāṇaṃ, ye ca kāyaviññāṇaviññātabbā dhammā;
yo ca mano, ye ca dhammā, yañca manoviññāṇaṃ, ye ca manoviññāṇaviññātabbā dhammā —
idaṃ kho, bhikkhave, sabbaṃ abhijānaṃ parijānaṃ virājayaṃ pajahaṃ bhabbo dukkhakkhayāyā”ti.
4. “비구들이여, 일체를 최상의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고 탐욕이 빛바래고 버리면
괴로움을 멸진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떠한 일체를 최상의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고 탐욕이 빛바래고 버리면
괴로움을 멸진할 수 있는가?
눈과 형색과 눈의 알음알이와 눈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고 탐욕이 빛바래고 버리면 괴로움을 멸진할 수 있다.
귀와 소리와 귀의 알음알이와 귀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을…
코와 냄새와 코의 알음알이와 코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을 …
혀와 [20] 맛과 혀의 알음알이와 혀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을 …
몸과 감촉과 몸의 알음알이와 몸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을 …
마노[意]와 마노의 대상인] 법과 마노의 알음알이[意識]와 마노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고탐욕이 빛바래고 버리면 괴로움을 멸진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일체를 최상의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고 탐욕이 빛바래고 버리면
괴로움을 멸진할 수 있다.”
pañcamaṃ.
♦ 6. ādittasuttaṃ (SN 35.28) 불타오름 경(S35:28) Āditta-sutta
♦ 28. ekaṃ samayaṃ bhagavā gayāyaṃ viharati gayāsīse saddhiṃ bhikkhusahassen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비구 승가와 함께 가야에서 가야시사에 머무셨다.32)
32) 가야(Gayā)는 부처님 성도지인 보드가야(Bodhgayā) 가까이에 있는 고도(古都)이며, 힌두교의 7대 성지 가운데 하나다.
가야시사(Gayāsīsa)는 가야 근처에 있는 언덕이다. 이곳은 데와닷따가 승단을 분열시켜 그를 추종하는 비구들을 데리고 승단을 떠나서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분열 경」(S17:31) §3의 데와닷따(Devadatta)에 대한 주해를 참조할 것.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
2.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sabbaṃ, bhikkhave, ādittaṃ. kiñca, bhikkhave, sabbaṃ ādittaṃ?
3. “비구들이여, 일체는 불타오르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일체가 불타오르고 있는가?33)
33) 본경은 부처님께서 행하신 세 번째 설법이라고 『율장』의 「대품』 (Vini.34~35)은 기록하고 있다. 『대품』에 의하면 본경은 엉킨 머리 수행자(jāṭila)들 이있던 가섭 삼형제의 제자들이었다가 가섭 삼형제와 함께 부처님 제자가 된 1000명의 비구들에게 설하신 가르침이다. 이들은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불에 제사를 지내던 자들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일체가 불타오르고 있다는 세존의 말씀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그들에 얽힌 자세한 이야기는 『율장』 『대품」(Vin.i.24~34)에 나타난다. 가섭 삼형제에 대해서는 『앙굿따라 니까야』「하나의 모음」 (A1:14:4-6)의 주해를 참조할 것.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세존께서는 1000명의 사문들을 데리고 가야시사에 가셔서 그들에 둘러싸여 앉으셔서 '이들에게 어떤 설법이 적절(sappāyā)할까?'라고 생각하신 뒤, '이들은 아침저녁으로 불(aggi)을 섬기던 자들이었다. 그러니 이들에게 12처(dvādas-āyatanāni)가 불붙고 불타오르고 있음을 설해야겠다. 그러면 그들은 아라한됨을 증득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결정하셨다. 본경에서는 괴로움의 특상(dukkha-lakkhaṇa)을 설하셨다.”(SA.ii.363)
cakkhu , bhikkhave, ādittaṃ, rūpā ādittā, cakkhuviññāṇaṃ ādittaṃ, cakkhusamphasso āditto.
yampidaṃ cakkhusam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tampi ādittaṃ.
눈은 불타오르고 있다. 형색은 불타오르고 있다.
눈의 알음알이는 불타오르고 있다. 눈의 감각접촉은 불타오르고 있다.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불타오르고 있다.
kena ādittaṃ?
‘rāgagginā, dosagginā, mohagginā ādittaṃ,
jātiyā jarāya maraṇena sokehi paridevehi dukkhehi domanassehi upāyāsehi ādittan’ti vadāmi
그러면 무엇에 의해서 불타오르고 있는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태어남과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으로
불타오르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 pe ...
jivhā ādittā, rasā ādittā, jivhāviññāṇaṃ ādittaṃ, jivhāsamphasso āditto .
yampidaṃ jivhāsam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tampi ādittaṃ.
kena ādittaṃ? ‘rāgagginā, dosagginā, mohagginā ādittaṃ,
jātiyā jarāya maraṇena sokehi paridevehi dukkhehi domanassehi upāyāsehi ādittan’ti vadāmi
... pe ...
mano āditto, dhammā ādittā, manoviññāṇaṃ ādittaṃ, manosamphasso āditto.
yampidaṃ manosam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tampi ādittaṃ.
kena ādittaṃ? ‘rāgagginā, dosagginā, mohagginā ādittaṃ,
jātiyā jarāya maraṇena sokehi paridevehi dukkhehi domanassehi upāyāsehi ādittan’ti vadāmi.
귀는 … 소리는 … 귀의 알음알이는 … 귀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코는 … 냄새는 … 코의 알음알이는 … 코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혀는 … 맛은 … 혀의 알음알이는 … 혀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몸은 … 감촉은 … 몸의 알음알이는 … 몸의 감각접촉은 … 느낌은 …
마노[意]는 불타오르고 있다. [마노의 대상인] 법은 불타오르고 있다.
마노의 알음알이는 불타오르고 있다. 마노의 감각접촉은 불타오르고 있다.
마노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불타오르고 있다.
그러면 무엇에 의해서 불타오르고 있는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태어남과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으로
불타오르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evaṃ passaṃ,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cakkhusmimpi nibbindati, rūpesupi nibbindati, cakkhuviññāṇepi nibbindati,
cakkhusamphassepi nibbindati, yampidaṃ cakkhusam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tasmimpi nibbindati ... pe ...
yampidaṃ manosam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tasmimpi nibbindati.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4.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형색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눈의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눈의 감각접촉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귀에 대해서도 … 소리에 대해서도 … 귀의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
귀의 감각접촉에 대해서도 … 느낌에 대해서도 …
코에 대해서도 … 냄새에 대해서도 … 코의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
코의 감각접촉에 대해서도 … 느낌에 대해서도 …
혀에 대해서도 … 맛에 대해서도 … 혀의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
혀의 감각접촉에 대해서도 … 느낌에 대해서도 …
몸에 대해서도 … 감촉에 대해서도 … 몸의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
몸의 감각접촉에 대해서도 … 느낌에 대해서도 …
마노[意]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마노의 대상인] 법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마노의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마노의 감각접촉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마노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5.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te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ṃ.
imasmiñca pana veyyākaraṇasmiṃ bhaññamāne
tassa bhikkhusahassassa anupādāya āsavehi cittāni vimucciṃsūti.
6.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비구들은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7. 이 상세한 설명[授記]34)이 설해졌을 때
그 비구 승가는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다.
34) '상세한 설명'으로 옮긴 veyyākaraṇa(웨야까라나)에 대해서는 본서 제3권「무아의 특징 경」(S22:59) §7의 주해를 참조할 것.
chaṭṭhaṃ.
첫댓글 사두~~
제3장 일체 품 Sabba-vagga 일체 경(S35:23) Sabba-sutta
...
kiñca, bhikkhave, sabbaṃ?
cakkhuñceva rūpā ca, sotañca saddā ca, ghānañca gandhā ca,
jivhā ca rasā ca, kāyo ca phoṭṭhabbā ca, mano ca dhammā ca —
idaṃ vuccati, bhikkhave, sabbaṃ.
4.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일체인가?
눈과 형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노[意]와 [마노의 대상인] 법 -
이를 일러 일체라 한다.”
yo, bhikkhave, evaṃ vadeyya —
‘ahametaṃ sabbaṃ paccakkhāya aññaṃ sabbaṃ paññāpessāmī’ti,
tassa vācāvatthukamevassa ;
puṭṭho ca na sampāyeyya, uttariñca vighātaṃ āpajjeyya.
taṃ kissa hetu? yathā taṃ, bhikkhave, avisayasmin”ti.
5.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이런 일체를 버리고 다른 일체를 천명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말로만 떠벌리는 것일 뿐이다.23)
만일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에서의 영역은 (육내외입처에서) 인식하는 대상[ārammaṇa]의 특성을 말하는 거랍니다. 즉, 일어나 머물다 사라지는 형성들의 특성을 '일체의 영역'에 설하신거라고 봅니다.
<빠띠삼비다막가 역주> p84
일체(一切)
眼 -- 色 -- 眼識 -- 眼觸 -- (緣) -- (三)受
耳 -- 성 -- 이식 -- 이촉 -- (연) -- (삼)수
鼻 -- 비 -- 비식 -- 비촉 -- (연) -- (삼)수
舌 -- 미 -- 설식 -- 설촉 -- (연) -- (삼)수
身 -- 촉 -- 신식 -- 신촉 -- (연) -- (삼)수
意 -- 법 -- 의식 -- 의촉 -- (연) -- (삼)수
녜.
위의 6X5(=30) 법들이 6처 상윳따에서 반복적으로 나열되어 나오는 법수들입니다.
이것이 욕계 중생들의 일체입니다.
만약 색을 완전히 혹은 일시적으로 벗어나서 무색계에 태어난 유정(불환자~범부)이
입으로 맛을 보고, 코로 냄새를 맛고.... 등등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경증을 하시든지 실참 경험을 들려 주시면 됩니다.
봄봄은 실참 경험이 없으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증은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여러 번 소개해 드렸습니다.
내외입처를 일체의 결박(상요자나)에 수관하면...
근.경.식 감각접촉에 반연한 고통과 쾌락이 있고, 고통과 쾌락은 일체법이 되겠지요.
즉,
이들 고통과 쾌락을 서로 다른 범주에 분별하고는 갈애하고 취작하는 조건으로부터 각각은 원증회고와 구부득고 등의 괴로움이 일어나게 하므로 집성제 이고요,
이 집성제를 곧 일체법에 말하겠지요...
아위자님이 늘 말하시든 일체법과 같는지를..
본문
[그 어떤 이치가 있어서 오개(五蓋)는 열이 되고 칠각지(七覺支)는 열넷이 되는가?’라고 이처럼 반문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질문을 받으면 이교도들은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이 경계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질문의 요점은
5개의 덥개를 2배인 10가지로 세분할 수 있고 7개의 각지를 2배인 14가지로 세분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면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왜 그런가? 그렿게 분류하는 것은 그들의 <경계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집멸에 대한 설명입니까?
그런 경지를 직접 경험하지 못하고
설명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 못하면
대답도 할 수 없다는 내용아닙니까?
경증을 해도 무조건 아니랍니다.
아니면 납득될 만한 근거나 논리가 있어야지
무조건 그것이 아니고 이것이다. 끝?
무색계에 태어난 중생도 짜장면을 먹고 응가를 한다고요?
.................................... 이하 생략.
각주 31) '눈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cakkhu-viññāṇa-viññātabba dhammā)에서 ...
眼識으로 알아야 할 <법들>이 ...
눈으로 들어오는 형색뿐만 아니라 ...
눈으로 들어오지 않은 ...
눈의 알음알이와 함께하는...
세 가지 무더기(tayo khandlhā =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의 무더기)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
그렇군요...
안식이 일어나는 순간의 정신과 물질현상 모두 ...
즉 <색, + 受 想, 의도(행), 촉, 작의 >까지 모두가 안식이 <알아야할 법들>이네요...
이처럼 모두가 ... 우리의 일상인 육촉입처에서
반드시 식이 있는 그대로 <알아야할 (연기된) 법들> 이네요...^^
그래야 육촉입처에서 촉집이 아닌 ... 촉멸이 일어납니다.
봄봄님 ...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_()_
[ '눈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cakkhu-viññāṇa-viññātabba dhammā)]을
봄봄이 이해하기로는
본 육처 상윳따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66법
안(~의), 안식(~안식), cakkhu-viññāṇa-viññātabba dhammā
즉 안촉(~의촉) 그리고 연하여 생겨나는 수(, 상, 사=행)이 cakkhu-viññāṇa-viññātabba dhammā(복수형)
그러므로 cakkhu-viññāṇa-viññātabba dhammā는 육촉입처의 안촉입처가 아님.
왜냐하면 안촉입처(~의촉입처) 각각이 복수형으로 나타날 수 없으므로.
다만 어떤 경문의 주석에 따라
cakkhu-viññāṇa-viññātabba dhammā가 색처(~의처: 복수형)으로 설명하는 논서도 있읍니다.
즉 境(복수형)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봄봄 했던 말 반복이지만
육촉입처-----라고 나타나면 일단
욕계 중생들에 대한 설명이다라고 읽으시면 대과가 없지 싶습니다.
그것은 욕계천에서 인간 등(지옥까지)
철저하게 앎 경2(535:27)을 찬찬히 살펴보니
<일체>에 대한 가르침이 들어있습니다.
<눈과 형색과 눈의 알음알이와 눈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을
귀와 소리와 귀의 알음알이와 귀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을 …
코와 냄새와 코의 알음알이와 코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을 …
혀와 [19] 맛과 혀의 알음알이와 혀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을 …
몸과 감촉과 몸의 알음알이와 몸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을 …
마노[意]와 [마노의 대상인] 법과 마노의 알음알이[意識]와 마노의 알음알이로 알아야 하는 법들을 >
이런 것을 일체라고 설하십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일체를
최상의 지혜로 알지 못하고 철저하게 알지 못하고
탐욕이 빛바래지 못하고 버리지 못하면 괴로움을 멸진할 수 없다.”
그러면 붓다가 설하신 <일체는 ....>
일체 경(S35:23) 에서 말씀하신 단순한 12처와
그 12처에서 연기된 법들도 모두 일체에 포함된다고 봅니다.
이러한 일체는 모두 아빈냐로서, 빠린냐로서 알고
그 일체에 대하여 이탐하고 버려야 할 법이라고 하십니다.
12처(육근, 육경)에 연기된 법은 '괴로움의 일어남[고집=일체법]'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