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삼로공파27세)님 감사합니다
'임진왜란과 시골 선비의 슬픔'을 읽고
26대손 김용진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어릴적부터 봉화 큰집에 있던 물암문집을 만난 것은 큰 영광이 었을 것입니다
함문의 훌륭한 후예_들의 삶의 아름다운 모습에 박수를 보냅니다
삼로공파 26세손인 김용진님이 2021년도에 쓰신
'임진왜란과 시골 선비의 슬픔'이란 도서 내용을
한시 원문을 올려 주세요
저는 어사공파 비안파평리공 29대 원필입니다
우리 할배(어사공파)
덕원군-御使公派 2대監察御使 균-3대 祿文-4대 仁-5대 鏡高-6대 鏋-7대中正-8대龜
御使公派 8대 龜- 9대 榮州派 郞將公派(重瑞) 三路公派 10대 이음 16대 물암
順興派 錄事公派(重寶)-通政公派(14세 종정)
比安派 評理公派(重器)
어사공파(2대監察御使 균)는 8대 龜할배는 자제분을 3분 두었다
重瑞 할배는 郞將公은 관직이 郞將
重寶 할배는 錄事公은 관직이 錄事
重器 할배는 評理公은 벼슬 判典工寺事, 관직이 評理
9대 榮州派 郞將公(重瑞) 三路公派 영주 이산 실내 (重瑞 할배는 郞將公
10대 삼로공(三路公) 김이음(金爾音)은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조선 태조 때 호조참판·강원도 관찰사
16대 물암공 김융 불천위 (영주파), 안동국학원 파보가 있음
9대 順興派 錄事公派(重寶) 영주, 단산, 바우 (重寶 할배는 錄事公
13대 유정(柳亭)공 계문(季文)문집(영주 동양대 소장)
通政大夫(14대 宗貞통정대부 종정),
14대 西峴 金九鼎(원종1등공신(西峴公 原從1等功臣). 대구부사(경부대에 불망비가 있음)
마을은 임천(林泉)에 정자를 세워 반학당(伴鶴堂)에 지내며, 소수서원장
우리할배
9대 比安派(비안파) 判典工寺事판전공사사評理公평리공(비안파) 重器중기 (重器 할배는 判典工寺事 評理公)
9 評理公 중기-10대 天降-11대 歸齊公 觚 -12대 世老-13 守智-14대 世潘- 15대 德隣-
比安宗家16 유인 17 기업 18명진 19 호석 20시언 21상현 22익장 23원복-24基洛
25鎭華 26汝用 27炳相 28道榮(德榮, 晩榮, 東榮) 29龍遠 30錫一 31弘洙 32(
(大里宗中) 15以廉-16세 俊昌-17세 燦碩-18세 周興-19세 有湖公,
20 軍資正 訓 -21工曹參議 世寬 -22 參奉 孝先. 漢城府尹 孝運-
(23龍國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23士烈-24基泳-25鎭植-26汝彬. 嘉善大夫 汝諧-
27通政大夫 珷相-28鎬榮-29泳遠-30錫東-31南龍
우리할배 (錦泉宗中)19遠湖 20時重 21致寬 22孝哲(효귀) 23守烈 嘉善大夫 24基能(기벽)
25진길(입향조) 26여도 27태상 28인영 29정원 장학관, 교장 30석현 31 현수
어사공파 郞將公榮州派 (重瑞) 16세 물암공 김융 불천위 (영주파)
(10세 삼로공 곤손(昆孫) 16세 물암공 김융이 함창김씨 문중 불천위)
나는 함창 김가로
<함 창 김 씨 가 훈>(김 융 (金 隆) 1549년(명종4년)~1594년(선조27년)자는 도성(道盛).
호는 물암(勿巖).[16세손]
父兮天生,母也地育(부혜천,모야지육),孝順祗承,欲報罔極(효순지승,욕보망극),
分形連氣,兄及弟矣(분형연기,형급제의), 親如手足,親愛而已(친여수족,친애이이),
하늘인 아버지는 태어나게 하셨고, 대지인 어머니는 러 주셨다.
효도하고 순종하며 공경하고 받들어서 은혜를 갚으려 해도 끝이 없다.
형체를 나누고 기운을 연이어 형과 아우가 되었다.
보기를 자기의 손과 발과 같이 하여 가까이 하고 사랑해야만 한다.
三路公 爾音의 中始祖는 德原君 文貞公 宗悌이고,
2세 御使公 金鈞으로 감찰어사를 지냈으며.
고려 말 선비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벼슬을 버린
낭장공(郞將公) 重瑞(함창 9세)의 아들 삼로공(三路公) 이음(爾音 함창 10세)은
강원관찰사를 지냈고,
친상을 당했을 때 묘 아래 움을 짓고 살며 하루에 세 번씩 묘를 돌아보았는데,
좌·우로 지팡이 자국이 길을 이루었으므로
세상에서 이를 기리어 사람들이 삼로(三路)선생이라고 불렀다.
조선 태종조(太宗祖)에 정려(旌閭) 되었으니 정려각(旌閭閣)이 있었다.
지금은 봉화읍 문단리 요산(腰山 허리뫼)에 있다. (大同普대동보)
당대의 효자(孝子)로서 태조조(太祖朝)에 정려(旌閭)를 받은
삼로공(三路公) 이음(爾音)의 후예는 효와 학문을 면면이 이어
시(詩), 문(文), 서(書)에 으뜸이라는 물암공(勿巖公) 융(隆)을 거유(巨儒)로서
추앙(推仰)받는 인물을 배출하였으니,
이 어찌 함창김씨(咸昌金氏)의 영광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충과 효와 학문을 사랑한 함창 가문은 선비의 지조를 전통으로 면면이 이어왔다.
삼로공의 子 부정공(副正公) 속(續)은 용궁, 진보, 의성, 영산 등지 현령을 지냈으며
명환록(名宦錄)에 등재되었다.
부정공(副正公)의 아들 정곡(正谷) 한진(漢珍)은
통정대부(通政大夫) 고성현령 동래부사 진해부사를 역임했으며
문종(文宗) 원년(元年) 거제성(巨濟城)을 축조하였다.
삼로공의 6세손 勿巖 隆(1549∼1594 함창 16세)은 전성서 주부를 지낸
諟敬(시경)이 증조이고, 전주교수 龜息(구식)이 조부이며,
사재감 참봉 應麟(응린)이 부이다.
勿巖公 隆의 자는 도성(道盛), 호는 물암(勿巖)으로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중용(中庸)ㆍ대학(大學)을 연구하고
산법(算法)과 천문학에도 능통하여 스승의 격찬을 받았다.
선조 25년(1592년) 집현전 참봉(集賢殿參奉)을 역임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상주(喪主)의 몸으로 창의(倡義)하는 격문(檄文)을 지어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에게 토적휼민(討賊恤民)하는
방책(方策)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효종(孝宗) 2년(1651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물암(勿巖) 김융(金隆)이 후진 양성을 위해 1569년에 세운 경북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
두릉서당(杜稜書堂). 현판은 이황의 친필이다.
김융은 14세에 지방의 선배인 嘯皐 박승임에게 학문을 배웠다.
김융은 놓지 않았고, 행동거지와 말씨가 매양 조용하고 단정하였으므로 보는 사람마다
“어른의 풍모를 갖추었다고 탄복하였다”
박승임은 김융을 중하게 여기며 매양
“이 아이는 끝내 큰 사람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때 퇴계 이황이 동남쪽에 도학을 크게 일으켜 따르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김융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고자 퇴계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 때 김융의 나이가 18세였다.
박승임은 김융을 보내며 시 한 수를 주었다.
열다섯 남아의 뜻
3천 제자와 나아가는 길이네
이 길을 지남으로 삼아 똑바로 달려가
자신을 책찍질 해 방황이 없기를
김융은 퇴계의 문하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날로 공부가 성취하였다.
문하를 떠나서 집으로 돌아올 때 퇴계 이황은 시를 주어 물암의 공부를 독려 하였다.
그대의 몸은 모습을 바꾸려는 물고기와 같으나
나의 가르침을 아직 그대 속에서 완성 되지 않았네
세월이 흘러가 이제 그대를 보내니 가서 공부에 힘쓰라
궁벽지고 한적한 곳에서도 뜻은 크게 자라나니
퇴계 이황은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어 학문에 힘쓰도록 격려하였다.
“그대는 책을 볼 때 글 하나까지 세밀하게 살피는데 이 점에서 무리 중에서 그대와 겨눌 사람이 없다. 전에 잘못 보았던 것을 그대로 인하여 새로 보게 된 부분도 많았다”
이황은 특히 김융과 함께 산법을 窮究하지 못하게 된 점을 안타까워하였다.
김융의 공부방법과 그 장점을 알게 하는 부분이다.
김융은 잠시도 나태하지 않고, 공부에 힘썼으며,
산 속에 작은 亭舍를 짓고 杜稜亭舍 라고 편액을 걸었다.
특히, 중용과 대학을 김융이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던 책이다.
그는 언제나 “요순의 도리는 효제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스승 이황이 타계하자 김융은 心喪을 3년 하였는데 매월 삭일마다
제물을 갖고가서 제향을 올렸다.
친상을 당했을 때에는 예문이 정한 대로 빈틈없이 행하여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었다.
임진왜란에 왜적이 침범하자 격문을 여러 지역에 보내 충의를 부추겼으며,
布衣 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다.
이 때 왜적의 문제 뿐 만아니라 기아의 문제가 심각해서
어떤 지주가 구휼미를 내어 김융에게 구휼의 책임을 맡기려 하였다.
그러나 상중이었으므로 사양하고, 뒤에서 돕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상이 끝나자. 천거되어 집경전 참봉이 되었으나 사은하고 돌아왔다.
1594년 타계하니, 향년이 45세였다. 두릉서당 뒷산에 장례 하였다.
인조 때 사림에서 그의 篤行을 추천하여 司瞻奉事(사첨봉사)에 추중 되었고,
효종 때는 동정대부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차관에 추중 되었다.
물암공 륭의 對松亭(대송정) 板上詩(판상시)에
對松亭(대송정) 晩眺(만조)
高巖松檜翠相交(고암송회취상교) 早暮登臨瞰遠郊(조모등임감원교)
沙水迢迢蘆帶冷(사수소소노대냉) 滿汀鴻雁自相呼(만정홍안자상호)
대송정의 만경을 조망하며
높은 바위 소나무 회나무 푸르름 엉켜 있어
아침저녁 오르며 먼 들녘 내려다 본다.
沙川(사천)의 물은 멀고 갈대에 찬 기운 서리니
갯가 가득 크고 작은 기러기 서로 부르네.
물암공은 시와 서에 능하였다.
김융은 14세에 지방의 선배인 소고(嘯皐) 박승임에게 배웠다.
종일토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행동거지와 말씨가 매양 조용하고 단정하였으므로
보는 사람마다 어른의 풍모를 갖추었다고 하였다.
박승임은 김융을 중하게 여기며 매양
“이 아이는 끝내 큰사람이 될 것이다.”라 하였다.
이 때 퇴계 이황이 동남쪽에서 도학을 크게 일으켜 따르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김융도 이황의 문하에 들었다.
김융이 세운 두릉서당(杜稜書堂)
소재지 경북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경북도 문화재 자료 253호>
三峯書院
영주, 이산면 신암리 실내 마을 삼봉골에 斗岩山(두암산)이 있고 三峯(삼봉)이 있으니 三峯(삼봉)을 面對(대면)하여 三峯書院(삼봉서원)을 士林(사림)에서 세웠다. 四先生(사선생)을 奉安(봉안)하였으니 位次(위차)는 三路(삼로) 金先生(김선생 爾音), 溫溪(온계) 李先生(이선생 瀣 퇴계의 형), 晩翠堂(만취당) 金先生(김선생 蓋國), 勿巖(물암) 金先生(김선생 隆)이고 享祀日時(향사일시)는 春秋(춘추)로 仲月(중월) 下旬(하순) 丁日(정일)이었다고 勿巖公(물암공)의 玄孫(현손) 鐵南公(철남공)(始鏵(시화) 進士(진사 1662-1731)의 三峯誌(삼봉지)는 伝(전)하고 있다.
주소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첫댓글 답글이 늦어 죄송합니다.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에서 물암집을 검색하시면 한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항상 건승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