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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쑥스러움을 무릅쓴 까닭
내가 남편을 처음 만난 건 대학교1학년 때인 1972년때였다. 당시 서울대와 이화여대 사회학과는 함께 학술모임을 했는데 그 모임에서 남편을 처음 보았다. 꼽아 보니 내가 남편을 알고 지낸 게 벌써 35년이 넘는다.
남편이 아내 자랑을 하는 게 예로부터 팔불출의 하나로 꼽혔듯이, 아내가 남편 이야기를 하는 것도 사실 남는 게 없는 장사일 것이다. 자랑을 하면 ‘팔이 안으로 굽는’ 것에 불과하고 흉을 보면 ‘제가(齊家)’에 실패한 증거밖에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남편이 정치인이고, 설상가상으로 선거를 앞두고 책을 내는 시점에 남편 자랑을 한다면 그 이야기를 누가 곧이곧대로 믿을까. 그 모든 불리한 여건을 잘 알고 있음에도 나는 이 글을 쓴다.
우선은, 이야기하는 것은 나의 몫이고 판단하는 것은 이 글을 읽는 분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남편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정치하는 사람은 필요하면 ‘자기 자랑’도 낯 붉히지 않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인의 아내로 곁에서나마 정치를 경험한 바에 따르면, 그것을 꼭 ‘정치인들은 원래 낯이 두꺼워서’라고 나쁘게 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정치적 노선을 국민에게 전달하고 설득하기 위해선 때로 자기 자랑을 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그런데 남편은 그 점에 매우 서툰 편이다.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일은 정말 못한다. 그래서 나라도 대신 해 주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허풍이나 허장성세, 실속 없는 미사여구를 싫어한다. 물론 거짓말도 싫어한다. 그러한 사람의 아내로 살았기에 나도 과장이나 가식, 거짓말을 하지 않을 정도의 양식은 갖추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참 ‘열심’인 사람
남편에 대해 내가 처음으로 받은 느낌은 ‘참 열심인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사회학과 학술모임에서 남편은 모임을 주도했다. 앞장서 세미나 주제를 잡고, 참고가 될 만한 이런저런 책을 구해 오고, 가장 확실하게 공부할 내용을 정리해 오곤 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남편과 개인적인 만남을 시작하게 된 것도 그런 열심 덕분이었다.
다함께 모이는 거리에서만 보았던 남편이 어느 날 내게 따로 부탁을 하나 했다. 참고할 만한 서적 중에 매우 중요한 어떤 책이 일제시대 때 발간된 것인데, 서울대 도서관에는 없고 이대 도서관에 있다고 하니 그걸 좀 찾아봐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우리는 ‘모임의 일원’에서 조금은 특별한 관계로 접어들었다. 모든 일에 굉장히 열심이라는 점 외에 남편이 마음에 들었던 또 하나는 뭐든지 조곤조곤 설명을 잘 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의 ‘이상적인 남성상’이 지닌 핵심적인 미덕이 바로 그런 미덕이었다. 민주적이고 친절한 남성! 남편은 여성을 대등한 상대로 존중하는 민주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보수적인 경상도 집안에서 자랐지만, 남녀가 대등한 민주적인 결혼생활을 꿈꾸었다. 친정 부모님의 결혼생활이 민주적이지 못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당신들 세대의 기준으로 보면 사실 특별히 비민주적일 것도 없는 평범한 부부였지만, 20대 초반의 나에게는 그렇지가 못했다. 나는 부모님과는 다른 결혼생활을 하고 싶었고,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다.
남편이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나는 이른바 ‘옥바라지’라는 것을 했다. 그땐 가족 이외에는 일체 면회도 편지도 허락되지 않을 때여서 ‘옥바라지’라고 해야 필요한 책을 구해서 가족 편에 넣어 주는 정도이긴 했지만, 사귀긴 했어도 그리 깊이 사귄 것도 아닌데 내가 그 역할을 해 주어서 남편은 놀랐다고 했다.
나중에 생각하니 내가 그때 남편을 도왔던 것은 ‘낭만적 환상’ 덕분이었던 것 같다. 남편의 좋은 점에 끌린 나머지 세상의 좋은 점이란 점은 남편이 다 가진 것처럼 혼자 생각했다. 남편이 11개월 복역하고 형집행정지 조치로 1975년 봄에 석방되면서 나의 이 소녀 같은 환상은 시험에 들게 되었다.
지금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1970년대는 1980년대처럼 운동권이 잘 조직되어 있던 때가 아니었다. 또 입만 뻥긋해도 잡혀 가던 때라 일단 대학에서 제적되고 나면 운동이든 일이든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출소 뒤 남편은 상대 학생회장 출신으로 함께 복역했던 친구가 주선해 와이셔츠를 수출하던 무역회사에 취직을 했지만, 1년을 못 채우고 그만두었다.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이 재미도 없었거니와 정치적 상황이 갈수록 나빠지니까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무언가 해야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 뒤로 그는 동아일보 해직 기자들과 교류하면서 그분들이 생계도 해결할 겸 좋은 책도 소개할 겸 차린 이른바 ‘종각 번역실’에서 번역 일을 했다.
그즈음 나는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집에서는 결혼하라는 압력이 들어오고, 결혼을 생각하다 보니 남편이 가진 현실적인 약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렇게 데모만 하고 다니는데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을까? 장차 십 년 후, 이십 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 유신체제가 너무도 강고해 보였기에 나는 박정희 정권이 멀지 않은 시간 안에 무너지리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집에서 늘 “여자는 시집 잘 가서 남편 내조 잘 하고, 아이 잘 키우는 게 최고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터라 남편과 함께 운동을 한다든지 하는 과감한 생각은 내 깜냥 밖이었다.
그렇게 불안불안한 마음인데, 남편은 갈수록 더 비장한 분위기를 풍기고 다녔다. 나는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혼자서 지사연(志士然)하는 그 태도가 너무 거슬렸다. 정직하게 말하면, 남편은 그대로인데 내 마음이 변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차츰 남편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눈에 띄게 거리를 두자 남편은 술을 먹고 내가 살던 집 근처에서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아먹고 모른 척했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이런저런 남자들을 견주어 봐도 남편만큼 성실하고 열심인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 자신의 소시민적인 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듯했고, 나한테는 그게 2퍼센트 부족한 삶처럼 느껴졌다. ‘해찬 씨만한 남자가 없구나’ 싶어서 자주 남편 생각을 하곤 했는데, 연분이어서 그랬는지 어느 날 아현동에서 우연히 남편과 딱 마주치게 되었다.
우리는 근처 다방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시작해 보기로 했다. “새로 시작해 보자”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그날 남편과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남편과의 결혼은 당연히 집안의 반대에 부딪쳤다. 부모님도 그랬고 큰오빠는 특히 “집안에 가둬서라도 못 만나게 하라”고 펄펄 뛰었다. 나는 2남2녀 중 막내였는데 몸집은 작았지만 나 또한 집에선 알아주는 쇠고집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남편을 한 번 만나 보더니 의외로 후한 점수를 주시면서 일이 풀렸다. “성실하고, 사람이 양반이다”는 것이 아버지의 평가였다.
아버지와는 스타일이 다른 사람이라 걱정했는데 남자들끼리만 통하는 뭐가 있는가 싶었다. 아버지께서 “결혼한 다음에는 데모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하시자 남편은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할 수 없다”며 한마디로 딱 잘랐다고 한다. 어쩌면 그런 강직함이 오히려 아버지 마음을 움직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공적 영역에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적 영역에서 친정아버지의 평가는 틀리지 않았다. 남편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확실했다. 옛날에 독립운동 하던 분들이나 1970년대의 지사를 떠올리면, 우리는 대개 가족까지 희생하며 대의에 헌신하는 이미지를 연상한다. 공적인 목표를 위해서라면 사적인 관계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생활태도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그렇지 않았다.
남편은 일단 기질적으로 자기 생활비를 남에게 의탁하는 생활은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더욱이 그는 운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적어도 생계비는 자기가 벌 수 있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과의 싸움이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을 게 분명한 이상, 생계를 해결할 방도를 마련해 놓지 않으면 결국 운동을 포기하거나 변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1975년 출소한 뒤 결혼하기까지의 기간을 보더라도 그렇다. 무역회사를 나와 번역 일을 하던 그는 지인의 추천으로 앰네스티 한국지부에 상근자로 취직했다. 그런데 앰네스티 사무실 맞은편에 범우사라는 출판사가 있었다. 책에 관심이 많았던 남편은 거기에 취직해 편집뿐만 아니라 인쇄부터 제본까지 책 제작 과정 전체를 익혔다고 한다. 실제로 그때의 경험이 밑천이 되어 나중에 출판사를 차리기도 했다.
1978년 우리가 결혼할 때 친정아버지가 신림동의 작은 주택을 한 채 사 주셨다. 남편은 그 집을 담보로 은행 융자를 받아 서울대 근처에 서점(상호가 ‘광장서적’이었다)을 냈다. 물론 생계비를 버는 것만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좋은 책을 소개하고(판매 금지된 책을 몰래 팔기도 했다), 급할 땐 나한테 서점을 맡기고 활동할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계산도 했음직하다. 어쨌든 어떤 경우에도 그는 먹고 살 방도를 반드시 마련했다.
내가 볼 때 남편의 이런 ‘현실성’은 시어머님한테서 온 것으로 보인다. 언젠가 한 잡지에 남편이 시아버지에 대해 쓴 글을 보았는데, 읽고 나서 왠지 나는 시어머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남편이 그 글에 쓴 것처럼 우리 아버님은 정말 점잖고 우아하신 분이다. 그러나 우리 어머님이 안 계셨더라면 자식들이 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다.
어머님은 충주에서 약재상과 포목상을 하는 부잣집 딸이었다고 한다. 언니와 함께 서울의 진명여학교에 시험을 봤는데 언니는 떨어지고 당신만 합격하는 바람에 “같이는 몰라도 혼자서는 절대로 못 보낸다”는 당신 아버님의 엄명 때문에 하고 싶었던 공부를 맘껏 못한 것을 늘 아쉬워하셨다.
어머님은 당차고 부지런하신 분이다. 아버님은 어머님과 결혼한 뒤에 아내를 부모님 밑에 남겨 둔 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셨다. 어머님은 남들처럼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그냥 기다리지 않고, 남편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주소 한 장 달랑 들고 일본으로 남편을 찾아가셨다. 당시 아버님은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꽤 이름 있던 출판사인 산세이도(三省堂) 출판사에 취직해 계셨다.
일본으로 건너가실 때 어머님은 비상금 삼아 친정에서 질 좋은 비단을 몇 필 가져가셨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이 일 나간 사이 기모노 만드는 방법을 익혀서 그 옷감으로 기모노 몇 벌을 만들어 팔아 목돈을 마련했고, 그 돈을 종자돈 삼아 헌책방을 여셨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사람들이 책을 버리다시피 싼값에 내다팔았고, 아버님과 함께 좋은 책을 골라 책방을 꾸린 덕분에 상당히 큰돈을 모았다고 한다.
시할머님의 엄명으로 아버님과 함께 귀국한 뒤에도 어머님은 가족의 생계를 상당 부분 책임지셨다. 사실 아버님의 월급으로는 밥은 먹고 살지언정 5남2녀를 제대로 공부시키기는 불가능했다. 양계도 하시고 신문사 지국도 운영하시고, 나중엔 넷째 아들과 소소한 전기공사도 하고 전자제품도 수리하는 전기상회를 하셨다. 그래서 남편은 용산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집에 갈 때면 늘 세운상가에 들러 집에서 부탁한 이런저런 부품들을 사가곤 했다고 한다. 점잖고 우아해서 ‘경우’를 무엇보다 중시한 아버님 뒤에는 부지런하고 당차서 ‘현실’의 문제를 감당한 어머님이 계셨던 셈이다.
먹고 사는 문제를 아내에게 떠넘기지 않았다는 점도 그렇지만, 남편은 정서적인 면에서도 가장의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시절에도, 의원 활동을 하면서도, 공직자 시절에도, 남편은 아무리 바빠도 나와 딸 현주를 위해 최소한의 시간은 확보해서 짧으나마 여행도 함께 다니고 처갓집에도 다녀오곤 했다.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를 비롯해 고생스럽던 시절도 있었으나, 그런 점에서 나는 행복한 아내였다. 요즘도 나는 현주에게 가끔 이런 말을 한다. “네가 결혼해서 아빠랑 엄마의 결혼생활 반만큼만 되게 살아도 성공한 결혼이야.”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가 들으면 섭섭해 하시겠지만, 나는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싶던 내 꿈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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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인상만 보고 남편이 까다로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공적업무에서는 몰라도 사생활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남편은 ‘있는 옷’을 입고 ‘주는 대로’ 먹는다. 소식이긴 해도 음식을 놓고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법이 없다. 신혼 때 내가 애써 만들어 반찬에 대해 한번쯤 ‘맛있다’는 칭찬을 듣길 기대했는데 쓰다 달다 말도 없이 묵묵히 먹기만 해서 좀 서운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중에 시댁에 가서 시어머님이 만들어 준 반찬을 먹어 보고는 칭찬을 기대한 내가 과욕을 부렸음을 깨달았다.
시어머님은 반찬을 참 맛있게 하시는데, 음식 솜씨 없기로 소문난 경상도 여자, 그것도 별로 반찬을 만들어 본 적 없는 초보 주부가 만든 음식을 ‘맛없다’하지 않고 묵묵히 먹어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었다. (감옥에 가 있는 동안 시어머님한테 배워서 지금은 내 솜씨도 많이 늘었다.)
남편은 문화예술 쪽에 관심이 아주 많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관심이 가는 공연이나 전시회가 있으면 나더러 함께 가자고 한다. 하지만 노래는 정말 못한다.
이해찬식 애정표현
1992년 재선된 뒤 우리는 신림동에 ‘서울곰탕’이라는 식당을 차렸다. 세비만으로는 도저히 의원활동을 감당할 수 없어 짜낸 방안이었다. 30평 정도 넓이에 테이블이 17개 정도 되는 규모였다. 아는분들도 자주 찾아오고 좋은 재료를 써서 맛도 좋았기 때문에 장사는 잘됐다. 그런데 오래가지 못했다. 100퍼센트 있는 그대로 매출을 신고했더니 가게 임대료 내기도 힘들었던 까닭이다.
일반적으로 자영업의 경우 개업한 첫해에는 매출이 얼마나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과세특례자가 된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고 매출을 그대로 신고했더니, 이듬해에 세무서에서 일반과세자로 전환을 하라고 했다. 세법상 연간 매출액이 3,600만원을 넘으면 일반과세자로 전환해야 한다기에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했다.
부가가치세를 정산할 시기가 닥쳐서야 우리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있는 그대로 신고해서는 도무지 채산이 맞지를 않았다. 알고 보니, 세법은 그렇게 되어 있지만 인근의 다른 점포들은 일반과세자로 전환하지 않고 여전히 과세특례자로 남아 있었다. ‘법대로 하면 망한다’는 속설을 입증하는 사례였다. 그렇다고 해서 국회의원이 법을 어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식당일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울곰탕집을 정리한 뒤였다. 남편도 안정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서 난생 처음 카드를 만들려고 어느 백화점을 찾았다. 그런데 담당자가 카드를 발급해 줄 수 없다고 했다. 사회활동이 없고 고정적인 수입이 없다는게 이유였다. 나는 백화점 직원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껏 나는 서점도 하고, 출판사도 하고, 식당도 하며 정말 열심히 부지런히 살아왔다. 그것은 사회활동이 아니라는 말인가,’ 돌이켜 보니 ‘여자는 남편 내조 잘 하고, 아이 잘 키우면 된다’는 친정 부모님의 보수적인 가르침에 나도 모르게 젖어서인지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걸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껏 내 삶은 그러면 무엇이었단 말인가’하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나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가치를 송두리째 부정당한 느낌이었다. 서럽고 허탈했다. 나는 집에 돌아와 한참을 울었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내가 울고 있는 걸 보더니 이유를 물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그야말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뒤얽힌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쩔쩔 맸다. 그러더니 자신이 뭘 도와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아무 대답이 없자 대학원엘 가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면 어떻겠느냐는 구체적인 방안도 제안했다. 한참 이런저런 방안을 내놓던 남편의 마지막 결론은 이랬다.
“우리 사회는 여성들에게 너무 불리한 사회야. 제도를 고쳐야지.” 남편이 국회에서 가족법 개정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남편이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러고 보니 1988년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던 날도 생각이 난다. 당원, 지지자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진 뒤 밤늦게 돌아와 나란히 누웠는데 남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이 뭐든 하려면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하는데... 정말 고마워.” 사위 때문에 안기부 지하실에 끌려가고 세무조사를 당하면서도 필요할 때면 언제나 도움을 아끼지 않은 장인에 대한 고마움도 덧붙였다.
남편은 ‘사랑해’라는 말은 한 적 없지만, ‘고마워’라는 말은 한다. 나는 ‘고마워’라는 말을 ‘사랑해’라고 해석하고 산다. 얼마 전에는 누군가에게 옛날 응암동 시절에 남편이 한밤중에 쥐를 때려잡은 이야기를 하며 “정말 대단하지 않아?”하고 칭찬을 했더니 그분 대답이 이랬다. “쥐 잡은 이야기가 대단한 게 아니라 쥐잡은 남편을 대단하게 여기는 사모님이 정말 대단해요.” 누가 대단하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이해찬과 함께 사는 동안 참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
첫댓글 나는 이해찬 의원을 재일 좋아한다,
저사람 부정이 개입되엇으면 저렇게 살지을 못합니다,
선거도 딱 부러지게하고 총리도 딱부러지게 했다,
이해찬이 안물러 셨드라면 이번도 당선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