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얼굴에 쓴 온정의 가면부터 벗고 시작하자: 김지혜 『가족각본』/ 이주혜
지난 8월 30일, 국내 최초로 동성부부의 임신 사실을 알렸던 김규진씨와 김세연씨가 ‘오출완(오늘 출산 완료)’이라는 글과 함께 ‘엄지 척’ 사진을 SNS에 올리며 딸 ‘라니’의 출산 소식을 알렸다. 출산 당사자는 김규진씨, 병원 서류 관계란에 ‘배우자’로 기록되고 직접 아기의 탯줄은 자른 사람은 김세연씨였다. 부부는 2019년 미국 뉴욕에서 혼인신고를 했고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지난해 12월 벨기에의 한 난임병원에서 정자기증 인공수정을 통해 임신했다. 대한산부인과학회 윤리지침상 “정자 공여 시술은 법률상 혼인 관계에 있는 부부만을 대상으로 시행한다”라고 되어 있어 한국에서의 시술은 불가능했다. 부부의 임신 사실이 언론을 통해 처음 알려졌을 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기사 댓글창을 무대로 응원과 비난이 격한 설전을 벌이기도 했는데, 비난의 말 중 가장 눈에 많이 띄었던 것이 ‘아빠 없이 자랄 아이가 불쌍하다’ 혹은 ‘아이가 훗날 감당해야 할 사회적 시선은 고려하지 않느냐’는 말들이었다. 얼핏 아이를 향한 온정이나 아이의 미래에 관한 걱정으로도 보이는 이 이상한 비난의 말들은 자연스럽게 『가족각본』(창비 2023)을 떠올리게 한다.
전작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 2019)로 일상 속의 차별과 혐오를 날카롭게 파헤쳤던 김지혜 교수는 4년 만의 저서 『가족각본』에서 우리가 숨 쉬듯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가족제도에 숨은 다양한 차별과 불평등을 추적한다. 2007년 텔레비전 드라마에 동성커플이 등장하자 일각에서는 일간지 1면에 드라마 상영 반대 광고를 게재했는데, 그 구호가 ‘며느리가 남자라니!’였다. 저자는 동성애 가시화에 반대하기 위해 굳이 며느리라는 단어를 끌어온 이 ‘사건’을 한국사회 특유의 ‘현상’으로 보고 그 이면에 숨은 의미를 파헤치면서 책을 시작한다. 견고한 각본과도 같은 우리 가족제도에서 도대체 며느리가 차지하는 역할이 무엇이고 그 역할이 왜 여성에게만 주어져야 하는지 묻는 1장에서 독자는 가족을 의미하는 영어 패밀리(family)의 어원인 라틴어 파밀리아(familia)가 ‘가장에게 속한 소유물’을 뜻했으며, 중세의 파밀리아에는 아내와 자식과 노예가 포함되었고 가장 자신은 파밀리아에 속하지도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즉, 가부장제의 전근대적 기원과 한국의 가족제도 안에서 여성으로서 며느리가 차지하는 이상한 기대역할과 지위는 일맥상통한다.
2장에서는 동성결혼이 출생률 저하로 이어진다는 한 정치인의 발언을 중심으로 결혼과 출산의 절대공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저출산과 인구절벽의 위기로 소리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급격히 절멸로 향해 간다는 한국사회가 결혼하고도 자녀를 출산하지 않는 딩크족은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면서 결혼제도 바깥의 출산에 대해서는 몹시 배제적인 불편한 시선을 보내는 모순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어지는 3장과 4장은 장애인, 한센인, 혼혈아 등 국가가 이른바 가족각본에 맞지 않는 이들의 출산과 출생을 노골적으로 방해하고 배제해온 잔혹한 역사를 들여다보며 국가와 가족이 ‘집 가(家)’라는 교집합을 중심으로 얼마나 공고하게 결탁해 차별의 단위로 기능해왔는가를 들여다본다. 이른바 정상가족에 대한 집착은 아이에겐 엄마와 아빠가 다 있어야 하고 동성커플이 키우는 아이는 불행할 것이라는 염려를 가장한 뿌리 깊은 성별분업 관념을 내포한다. 이러한 관념의 렌즈를 통해 보는 ‘정상적인’ 엄마와 아빠는 반드시 이성애자여야 하고, 비장애인이어야 하며, 순혈 한국인에(그런 게 존재하는지 의문이지만) 어느정도 경제력을 갖춰야 한다. 이렇게 바늘구멍처럼 좁은 기준을 통과한 부모만이 아이의 행복을 담보하는 가족을 이끌 수 있다. 가난하면 아이를 낳지 말라거나, 장애나 질병이 있으면 아이를 키울 수 없다거나 하는 가혹한 말들이 기대는 게 바로 이러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저자의 말을 빌리면 공고한 가족각본이다. 이 가족각본은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부양의무와 상속, 세금 제도 등을 통해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아 사회적 불평등과 계급구조를 심화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이루기도 한다. 이렇듯 사회와 국가, 공교육이 똘똘 뭉쳐 굳건히 떠받치는 가족각본은 흔히 온정 어린 얼굴을 하고 가족 안에서도 특히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듯 보이지만, 정해진 각본에서 한치만 벗어나도 입장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 가장 강력한 차별과 혐오의 시선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대목이야말로 이 책이 안겨주는 오싹한 깨달음의 순간이다.
김규진씨와 김세연씨의 출산 소식을 전하는 어느 언론사의 기사 제목이 “국내 1호 ‘모모커플’ 딸아이 출산”이었다. 한국어 부모 혹은 어버이를 뜻하는 영어 parent는 아버지나 어머니 한 사람을 가리키는 단수형 단어이고 어느 한쪽 성별을 특정하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우리에겐 이렇게 성별을 특정하지 않고 자식이 있는 상태나 지위를 가리키는 단어가 없다. 그런 면에서 한국어 ‘부모’와 ‘어버이’는 ‘모모커플’이나 ‘부부커플’, ‘한부모’를 배제하는 협소한 단어다. 가족은 무조건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이성애자 부부를 기본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자녀를 낳아야 ‘정상’이라고 주장하는 완고한 벽이 느껴진다. 언어는 시대를 반영하므로 언어에 대해 던지는 의문은 곧 시대를 향한 질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지혜의 『가족각본』은 가족이라는 단어에 묵직한 질문을 던지며 가족각본에서 벗어난 존재들을 ‘염려’하는 차별과 혐오의 시선을 향해 우선 온정의 가면부터 벗고 거침없이 몰려오는 새 시대를 함께 고민해보자고 촉구한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정해져 있어서 각본이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얼마든지 새로 쓸 수 있어서 각본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고정된 하나의 가족각본에 사람을 끼워 맞추고 거기서 벗어나는 이를 배제할 게 아니라 다양한 역할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포괄적인 각본을 새로 쓰는 것이야말로 답답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등한 가족으로 가는 꿈의 시작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주장을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이주혜 / 소설가, 번역가
2023.9.12.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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