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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 희망은 곧 죽음 ※
[해어화[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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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죽은 듯이 병원 병실에 누워있던 이쁘장하게 생긴 가녀린 여자가
들릴듯 말듯한 옅은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뜬다.
"...하....... 내가..... 내가.... 하아...."
고작해야 18살, 19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을 토해내듯 입술을 열며 지그시 눈을 한 번 감았다 떳다.
의식을 잃었던 동안 까마득했던 기억들이 다시 살아나 여자의 머릿속을 휘젓는다.
여자의 몸이 이내 부르르 떨려오고, 어느새 여자의 두 눈엔 눈물이 가득히 맺혀버린다.
"어떻게....... 내가..... 사람을......... 하.......... 죽... 였어...
죽........... 여.... 버렸어......."
미성년자인 고등학생 신분이지만 어릴적부터 부모, 형제 없이 혼자 자라온
여자는 담배, 술은 기본이고 클럽까지 드나드는 학교의 크고 작은 폭력사건에서도
언제나 빠지지 않는 소위 말하는 문제아 였다.
선생들이 포기 한 문제아. 사람들이 등진 날라리. 세상이 말하는 쓰레기.
"....흐....윽..... 아아악!!!!!!!!!!!... 내가... 어떻게... 하아..... 내가... 사람을... 흑......"
여자는 사람을 죽였다.
그날은, 여자가 사람을 죽인 그 날은.
이제는 자신을 무시하다 못해 경멸하는 학교 선생님의 쓴 말들을 들은 날 이였다.
어김 없이 그날 역시 학교 선생님과 마찰이 있었는데, '천애 고아의 쓰레기 같은 년'이라는
학교 선생님의 발언으로 인해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친 그녀는 평소 자신이 즐겨 타던
오토바이를 몰고 그대로 학교를 뛰쳐나와 시내 거리를 무섭게 질주했다.
파앙 -
오토바이에 브레이크를 걸었을 땐 이미 늦은 후 였다.
사고가 난 지점에서 가까운 여자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이아름이라는 이름 세글자가 박힌
초록색 명찰을 달고 있던 여자의 몸은 자신을 태우던 오토바이에 부딪쳐 붕 뜬 뒤,
시멘트 바닥 길거리에 힘없이 나뒹굴었고,
이아름이라는 그녀는 많은 피를 흘리며 병원으로 이송되기도 전에... 사망했다.
".....흑.... 그럴려던게 아냐....흐읍.... 나..... 어떻게....... 어떻게 해야되..... 아아아악!!!!!!"
자신 역시 의식을 잃어버렸었다.
지금 그녀는 깨어났지만 아주 강하게 자신을 억눌러오는 공포에,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병원 침대 시트를 붙잡고 덜덜 떨며 오열하고 있었다.
사고 당시 생긴 몸에 상처들이 욱씬거리고 따끔거려 왔지만
그런건 마음의 고통의 몇프로 만큼도 따라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있는 병실의 문에서 똑똑- 하는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가 조심스레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흐읍........."
"........."
"뭐야..... 흑...... 당신 뭐예요. 누구에요... 나 잡아가러... 온거에요?...... 흡......"
"죽고싶지?"
남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는 정말 냉랭했다.
입을 연 남자의 눈이 무섭도록 차갑고 시리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내 남자는 따스한 눈빛을 해보이며 얼굴에 슬픈 미소를 띄었다.
"하지만."
"..........."
"살고 싶게 해줄께. 희망을 보여줄께."
"....당신... 뭐야.."
"진심이야."
"....."
"내가. 태한결이. 정나은 너한테 희망을 줄께."
*
"한결아, 많이 기다렸어? 미안해. 좀 늦었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늦는 나를 기다리며 안절부절 하는 한결이의 모습이
멀리서부터 눈에 들어와 급하게 한결이 곁으로 뛰어갔다.
벌써 일년이 훌쩍 넘어간다.
내게 희망을 주겠다던 한결이를 만나고, 한결이가 내게 희망을 주기 시작한게.
"핸드폰은 왜 꺼놨어. 내가 항상 핸드폰 켜놓으라고 했지."
"미안해. 충전을 안시켜논 바람에 핸드폰 베터리가 나갔어..."
"너 연락 안되면 나 미치는거 알아 몰라.
약속시간에 제때 안나오면서 연락마저 안되면 나 걱정되 죽는거 알아 몰라!!!"
내가 한결이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고, 한결이의 옆에 서있기 시작한게.
그리고... 한결이의 지독하고 숨막히는 집착을 견뎌야 하는 나날들이 시작된게.
"...미안해. 내가 깜빡했어. 한결아. 다음부턴 정말 이런일 없을꺼야."
하지만 나 정나은은 항상 그랬듯 이렇게 한결이의 착하고 순종적인 이쁜 여자친구가 되어야되.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내게 손을 내밀어준 남자니까.
태한결이라는 내 남자친구는 아무것도 없는 살인자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사랑해준 남자니까.
"후.. 어디갈까. 뭐라도 먹을래?"
이제 난 고작 19살이다. 내 곁을 지켜주는 내 남자친구 한결이 역시 나랑 같은 나이.
작년에 내가... 끔찍히도 떠올리기 싫은 사고를 낸지 일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가끔씩 악몽에 시달리고는 한다.
내가 죽여버렸던 그 이아름이라는 여자애가 피를 흘리며 내 꿈속에 나와 슬피 우는 꿈.
알아주는 기업을 운영하는 한결이 집안이 손을 써준 덕분에
나는 내 죄에 대한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이렇게 평생 한결이의 집착과 소유욕을 견뎌내는 인형이 되어야 한다.
한결이를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했다.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한결이 옆에서 평범한 다른 여자애들 처럼 착실하게 살아가기로.
"음... 한결이 너 먹고 싶은거 먹자."
"스파게티 먹을래?"
"스파게티? 좋지."
"가자."
전부터 날 짝사랑 하면서 뒤에서 지켜봤다던 한결이에게,
이런 나를 감싸준 한결이에게 내가 보답하는 길은 그뿐이니까.
"한결아. 있잖아. 나 학교에서 가정 실습을 했는데,
볶음밥 만드는거 배웠거든? 내가 나중에 집에가서-"
"어? 너 정나은 아니냐? 이야, 더 이뻐졌네."
한결이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일부러 더욱 환하고 밝게 이야기를
조잘거리다가 내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척 하는 한 남자애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같은 중학교를 나왔던 남자애가 보인다.
중학교땐 친하게 지냈었지만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연락이 끊겼었는데..
"아. 오랫만이네. 반가워. 그럼 잘가. 나중에 연락하자."
하지만 나는 이렇게 다른 남자애들과 말을 섞는 자리는 피해버려야 한다.
안그러면, 내가 다른 남자애들과 친하게 이야기 하고 웃는 모습을 보면
한결이가 어떻게 돌변할지는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야~ 서운하게 그냥 그렇게 가는게 어딨냐? 옆에는 남자친구? 야! 정나은!"
"손 놔."
"왜 그래, 오랫만에 만났는데. 정나은 너 좀 변했-!"
퍼억-
하지만 일부러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으며,
발걸음을 떼 걸음을 빨리하는 내 속마음을 모르는 중학교때 친구는
내 팔목을 잡아 돌려세우고, 결국 화난듯 아무말도 없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한결이가 오른쪽 주먹을 날려 중학교 때 친구의 왼쪽 얼굴을 쎄게 날려버린다.
시작됬다. 한결이의 누구도 말리기 힘든 분노가.
퍼억-
퍽-
"한결아!!! 그만 해!! 그냥 중학교 때 알던 애야!!!! 태한결!!!!"
한결이의 무자비한 주먹질은 멈출 줄을 모르고,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한결이가 그대로 굳어버릴 만한 말을 내뱉는다.
"태한결! 너 계속 그러면 나 너 안본다! 다신 안봐! 나.. 죽어버릴꺼야!!!"
"정나은. 정나은!!!!!!"
내 말이 입술을 비집고 나오자 마자 친구를 패는 걸 멈춘 한결이가
나를 크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나는 급히 눈앞에 보이는
아무 건물 안으로 들어와 발길이 닿는데로 급히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하아..."
결국 숨이 턱까지 차오른 내 발길이 멈춘곳은 그 건물 옥상.
조금 숨을 돌린다음 녹슨 옥상 철문을 천천히 열어제끼면
땅 위에서 받았던 햇살보다 더욱 따스하고 시원한 바람이 내 볼을 스친다.
옥산 난간에 조심스레 다가가 멈춰 서 아래를 바라보면 한결이에게
맞아 쓰러져 있는 친구와 그 주위를 둘러 싸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고,
한결이는 나를 따라 건물 옥상으로 올라오는 중인지 보이지 않는다.
"...시원하다."
시원해. 마음이 시원하게 뻥 뚫린 것만 같아.
눈을 감고 바람을 느껴보면 너무나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지금 이렇게 쉴 새 없이, 멈출 수 없게 눈물이 쏟아지는 만큼.. 너무나 편안해.
쾅-
"정나은!!!"
얼마있지 않아 옥상 문이 굉음을 울리며 열리고
급하게 뛰어왔는지 머리가 있는대로 헝클어진 한결이의 모습이 보인다.
더불어 눈물로 범벅이 된 내 눈에 비치는, 한결이의 흔들리는 눈동자도 보여...
"정나은. 이리와."
하지만 나는, 오히려 난간 위로 위태롭게 올라서 버린다.
"정나은! 당장 내려와. 이리와."
"....한결아.."
"내려와."
"한결아....."
"빨리 내려와!!! 나 진짜 도는거 보고싶어서 환장했어?!!"
"...시원하다. 바람 너무 시원하고 좋다. 그치 한결아. "
"........"
너무 시원해. 너무 편안하고.
나 발만 잘못 디디면 떨어져 버릴 이 난간에 올라서 있는게
하나도 무섭지 않을 만큼. 지금 너무나... 행복해.
..자유..... 그래, 마치 자유를 얻은 것 처럼.
예전에 학교다닐 때 엇나가고 비뚤어지며 행동했던 그때도 느끼지 못했던 그 자유처럼...
"너무나... 편안해."
"......정나은. 제발 내려와. 내려오라고.."
"너무나 시원하고 편안하고 좋아서.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을만큼 행복해서,
그래서............ 한결이 너한테................ 너무나... 미안해."
"........"
날고 싶어. 이대로 편안해지고 싶어.
이 바람에 영원히 내 몸을 맡겨보고싶어. 한결아.
그래서. 미안해.......
그동안 무서워서 죽는다는거 생각도 못했었는데, 무서운게 아닌거 같아.
어쩌면... 나를 더 힘들고 무섭게 하는건 죽음이 아니라 너 였나봐.
한결이 너의... 지독하리만큼 심한 집착.
처음엔 내가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는 사실때문에 죽고싶을만큼 힘들었지만,
이젠.......... 니 옆에서 살아가는게... 너무나 힘들어졌어.
너한텐 정말 미안하지만....... 이제 그만..........
"날... 놔줘."
"...정나은. 사랑해.. 너 없으면 나 죽어! 너도 알잖아!!"
"..미안해. 한결아... 니가 줬던 희망들 때문에 다시 살아갈 수 있었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어... 하지만...... 니가 줬던 희망들이, 그 사랑들이...
나한테 너무 과분해서........ 그래서 나 이렇게 바보같은 생각 하나봐....."
"씨발, 정나은!!!!!"
"그래도... 고마웠어. 잘지내."
너무 크고 많았어. 니가 내게 줬던 희망들........
그 사랑들이 너무나 과분해서... 오히려 독이 됬어.
하지만...... 그래도 널 원망하지 않아. 그래도 니 덕분에 이만큼 살아올 수 있었잖아.
미안하고, 고마워. 한결아.
..
눈을 감고 허공에 한발을 내딪고, 그대로 나는 날 따뜻하게
품어줄 것만 같은 따뜻한 바람에게 몸을 맡겼다.
"정나은!!!!!!!!!!! 안돼!!!!!!!!!! 정나은!!!!!!!!"
하늘을 가르는듯한 울부짖음에 가까운 한결이의 외침이 들리는듯 했지만
...이제 더 이상 나는 저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으로.
안녕....... 안녕. 한결아.
.....
나은이 떨어지고 난 뒤 옥상에는 낮고 차가운 기운만이 맴돌았다.
강하게 흔들리고 떨려오던 한결이의 목소리와 눈동자는
언제 그랬냐는듯,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금새 다시 차분해졌다.
"픽- 당연하지. 내가 너한테 준건 진실되지 못한 거짓 희망이였으니까."
...
"진실이 아닌 거짓 희망은 곧, 죽음이니까."
한결은 작은 실소를 터뜨렸다. 슬픈 미소도, 자조적인 미소도 아니였다.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울 정도로 시린 웃음.
그리고... 애틋할 정도로 허탈한, 슬픈 웃음.
통쾌하다는 듯한 표정을 머금은 한결은 윗옷 깊숙한 주머니에서
한 여자의 사진을 꺼내 한참을 바라본다.
"아름아... 이제야.... 나 니 복수 했어.
많이 기다렸지. 내가 할 일은 끝났으니까 이제 나도 갈께.
니 곁으로."
어느새 한결의 눈가에 촉촉한 물기가 어려오고, 일말 미련도 없다는듯 한결은
나은의 뒤를. 아니, 아름의 뒤를 따른다.
첫댓글 남자가 조금 무섭기도 하면서 너무 한거 같아요... 사람을 죽인 여주도 죄지만.. 용서가 제일 큰 복수가 아닐까요???
무서워요 눈물도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