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사안이 지난 일이지만 한나라당 전 당대표의 테러 사건의 전모를 밝혀봅니다. 초점이 음모설이니 자작설이니 일파만파로 커지고 한나라당의 특검 주장이나 말들이 많았던것도 사실이고, 감정적으로 한나당의 우세에 감정적인 영향을 줬던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테러의 배후는 한나라당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시절의 수많은 사건과 테러들. 가령 김대중 납치사건, 칼기폭파. 김구 암살, 여운형과 장준하의 의문사. 수만은 민주인사의 의문사와. 동백련 사건과 같은 형법살인. 5.16, 4.3 과 같은 국가살인 의 배후에는 늘 한나라당과 한나라당의 전신격인 정권이 존재했었습니다. 단순히 헤프닝에 불과한 이번 사건을 테러나 배후니 운운하며 정치적으로 이슈화 하는 거대 야당과 거대 언론. 한나라당의 호들갑에는 씁슬히 웃어주었습니다. 사실 이번 사건은 단순히 테러라기 보다는 보안이나 경비의 허술함이 더 부각되어야 하는거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자동반사적으로 무슨 사건에 배후나 음모부터 찾도록 길들여진 우리 역사와 정치의 모순과 정치현실을 개탄하여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렇게 길들인 주체와 당사자가 과연 누구일지 사람들이 더 잘알고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호들갑이라고 말하겟습니다.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는 시츄에이션은 사실 너무 비일비재 하니까요. 장애자이면서 무단횡단자라든가. 일본군 전쟁피해자이면서 종군위안부에게는 가해자일수도 있고, 월남전고엽자피해자이면서 베트남양민학살가담자라든가 뭐 오대수씨도 그렇고. 금자씨도 그렇고. 인생은 그래서 슬픈가 . 쯥.
고위 공무원 부인과의 불륜으로 인생 꼬였던 지아무개씨의 드라마틱 인생… 지출내역 등 의문은 싱겁게 풀렸지만 여전히 38인 수사단에 포위돼 조사중
5월20일 ‘박근혜 피습사건’은 2006년 한국 정치의 우연하고도 결정적인 분기점이었다. 바닥을 기던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아예 곤두박질을 쳤고, 대표가 습격당한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예상치 못한 상승곡선을 탔다.
박근혜 습격, 지방선거의 분수령으로
역사를 움직인 한 명, 과연 그는 누구인가. 서울 신촌 현대백화점 앞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유세장에서 문구용 칼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얼굴을 그은 지아무개(50)씨. 그는 왜 그런 범행을 저질렀을까? 그의 뒤에는 정치 테러를 사주한 배후가 있는가? 그는 자신의 행위가 5·31 지방선거의 분수령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나?
범행 동기를 알기 위해선 먼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했다.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수십 명의 기자들이 이씨의 고향인 인천 학익동 성매매 밀집지역을 뒤지기 시작했다. 수소문 끝에 지씨의 어린 시절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씨의 일생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의 인생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친구들은 그의 친부모가 갓난아기인 지씨를 1956년 인천 학익동의 한 주택 앞에 버렸고, 지씨 부부가 포대기에 싸인 그를 거두어 길렀다고 말했다.
25살이 된 1981년, 그는 처음으로 범죄를 저질렀다. 방화미수죄였다. 그는 징역 2년6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정확한 기록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친구들은 지씨가 돈 문제 등으로 부모와 다툰 뒤 집에 불을 지르려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인생이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한 것은 1982년 가을이었다. 26살이던 지씨는 카바레에서 ‘첫사랑’을 만났다. 하지만 상대는 공무원 남편을 둔 유부녀였다. 여인은 지씨를 잠시 불장난의 대상으로 삼았겠지만, 지씨에게는 불같은 사랑이었던 것 같다. 불륜이 늘 그렇듯 곧 여인의 남편에게 들통났고, 여인은 지씨를 피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꺼리는 첫사랑을 지씨는 때리고, 면도칼로 얼굴을 긋고, 돈을 뜯어내며 쫓아다녔다. 결국 지씨는 1985년 ‘첫사랑’한테 고소당했다. 4년 동안 감옥에 갇혔고, 1989년 풀려났다. 하지만 지씨의 나쁜 버릇은 계속됐다. 다시 첫사랑의 남편 직장으로 협박전화를 걸고, 협박전화에 시달려 병원에 입원한 남편을 쫓아가 돈을 뜯어냈다. 나중에 그에게 징역 7년과 보호감호 7년을 선고한 법원 판결문은 이렇게 적었다. “실형을 복역한 데 대해 복수할 마음을 품었다”고.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사랑한 여인을 못 잊어 찾아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