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소우이도(東小牛耳島)
전라남도 신안군 도초면(都草面) 우이군도에 딸린 우이도리에 속하는 섬.
우이도(牛耳島)의 동쪽 해상에 위치하며 서쪽에 서소우이도(西小牛耳島)가 있다. 동소우이도는 우이도 동쪽에 있는 조그만 섬이라는 뜻으로 동소우이도라고 하였다. 우이도 동쪽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섬 중 동쪽에 있어서 동소우이도라 부르게 되었다. 면적은 0.45㎢이며, 해안선 길이 16㎞, 최고점 87m이다. 약 7~8가구가 살고있다.
서북쪽에서 남동쪽으로 길고 가늘게 뻗은 형태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해안선이 복잡하고 곳곳에 만(灣)이 형성되었다. 군도(群島)의 내해가 천연의 양항을 이루어 어업기지로 이용된다. 주민들은 어업을 주로하며 보리·콩·고구마 등을 소량 생산한다. 근해에서는 꽃게·고등어·전갱이·조기 등이 잡힌다. 교통은 선편으로 우이도와 목포로 통하며, 부근 해역의 섬들과 함께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된다.
섬의 동쪽으로는 신안군 하의도가 이웃하고 있다. 최고 고도는 87m이며, 서북쪽에서 남동쪽으로 길고 가늘게 뻗은 형태를 이룬다.
동소우이도는 조선시대 광해군때(1628)에 본관을 알 수 없는 안씨가 최초로 입주하였다고 전해져오지만, 그 내력은 알 수가 없다. 구전에 의하면 1801년 창원 김씨가 처음으로 입도하여 살았고 그 후 조선 인조때(1680)에 동복 오씨 형제가 해남에서 임진왜란을 피하려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전라남도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에 딸린 섬으로 동경 125°53′, 북위 34°36′에 위치하며 연평균 기온 14.1℃, 강수량 1,172mm, 면적 0.45km2, 해안선 길이 16km이다. 인구는 16가구, 17명(2013년 기준)이다.
동소우이도는 목포에서 서남쪽으로 약 67.5km 떨어져 있는 작은 섬이다. 목포에서 12시에 출발하는 섬사랑 6호는 하루에 한 번 다니는데, 이 배를 타고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우이도와의 거리는 0.6km이며, 서소우이도와는 0.3km, 면소재지인 도초도까지는 8km 떨어져 있다.
우이도에는 4개의 부속섬을 거느리고 있다. 동소우이도, 서소우이도, 죽도, 경치도이다. 죽도는 2003년도에 4가구가 신안군에서 이주비를 지원 받아 마지막 주민이었던 김민균(78세) 씨는 동소우이도로 이주하고, 다른 세 가구는 경치도에 살다가 무인도가 되었다.
외해에 속한 죽도와 경치도는 아주 조그마한 섬이다. 김이나 가두리 양식을 할 수 없는 곳일 뿐 아니라 선착장도 없어 배를 댈 수 없는 곳이라 사람들이 전혀 살 수 없는 곳이다. 지금은 무인도이지만 당시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은 너무 가난하여 해초인 미역과 톳, 돌김 그리고 자연산 전복 채취권 때문에 발을 붙이고 살았던 것이다.
동서우이도에는 1628년에 본관을 알 수 없는 안씨가 최초로 입주하였다고 하나, 그 내력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60년대에는 흑산면에 속했던 동소우이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 교통이 대단히 불편한 섬이다. 동소우이도가 전성기를 누렸을 때는 이곳 섬사람들이 170여 명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16가구 17여 명의 노인들만이 산다. 노인들만 있어서 민박하는 집도 거의 없다. 남자 혼자 이 섬에 여행 온다면 여러 걱정 때문에 노인들이 더욱 민박 내주기를 꺼린다.
서리는 동리와 달리 배들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선착장 시설이 완벽하게 되어 있고, 사시사철 바다에서 고기 잡는 10t급 배들이 5척이나 있다. 배에 달린 선원들만 해도 네다섯 명씩 된다. 필자가 방문할 당시를 떠올려도 새우젓이 많이 생산되어 옹기에 담기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서리에 사는 많은 주민들 대부분이 목포에 집을 가지고 있어서 겨울에는 목포로 가서 배수리와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봄부터 가을까지 어업에 종사한다. 주민의 편리를 위한 가게도 있고 분교에서 1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년에 한 명이 더 들어온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앞섬인 동리는 사정이 다르다. 동리는 매우 가난해서 섬이 노령화되어가고 있다. 배를 안전하게 정박시킬 선착장 시설이 안 되어 있어서 무동력선 2대가 육지로 올라와 있고 선외기 한 척이 있다. 이름은 에녹호로 우리와 매우 친숙한 이름이다.
미역 한철에는 노인들만이 노를 저으며 미역과 톳을 채취한다. 그러나 값이 없어 이마저도 고생일 뿐이다. 가게는 물론 경운기 한 대 없고 유일한 운반수단은 손수레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겨울에는 기름을 배로 실어와 손수레로 옮겨 실은 후, 집 밑에서 모터로 각 가정에 올리고 있다. 그래서 겨울마다 기름값 때문에 큰 걱정이다. 마을회관도 없고, 그렇다고 육지에 있는 자녀들에게도 갈 수도 없다고 큰 걱정을 하며 해마다 겨울을 보내는 마을이다.
또한 이 섬은 마음대로 아프지도 못하는 섬이다. 환자가 생겨도 겨울에 파도가 높으면 육지로 가지 못한다. 피서철에는 그나마 낚시꾼이나 관광객이 더러 찾아오기도 하지만, 파도가 무섭게 치는 겨울에는 찾는 이가 거의 없다. 외로운 노인들만 춥고 긴 겨울을 이겨내야 한다.
섬의 크기가 작고, 게다가 육지와도 멀리 떨어진 동소우이도 노인들은 이렇게 점점 소외되어가는 것만 같다. 경로당도 찾을 수 없고 의료봉사나 자원봉사자도 없을 뿐더러 교통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불만 없이 모든 일을 천명처럼 알고 감수하는 순박한 어르신들을 보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하다.
이곳은 겨우 집이 대여섯 채 정도에 불과하다. 대부분 여자들이 살고 있으며 밭은 아예 묵혀버렸고 염소 키우기와 산나물 캐기, 해초채취를 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섬마을이다. 밭 하나에 파도 심고 배추도 심는 등 자급할 정도만 밭작물을 경작하고 있다.
각 집마다 별도로 재래식 화장실이 있다. 집 안에는 현대식 화장실이 있지만 재래식도 장식용이 아니라 아직도 사용한다. 집 안에 있는 것은 주로 외지에서 온 손자들이 사용한다고 한다.
동소우이도 둘러보기
동소우이도와 서소우이도를 이곳에는 흔히 동리와 서리로 부른다. 40년 전에 20가구 160명이 살았던 동리는 이제 16가구, 17명이 살고 있다. 섬주민의 평균연령이 75세이므로 앞으로 무인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
동리는 서리보다 크기도 클 뿐 아니라 해안도 단순하지가 않다. 서북쪽에서 남동쪽으로 길고 가늘게 뻗은 형태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해안선이 복잡하고 곳곳에 만이 형성되었다. 마을은 그리 많은 가구는 아니지만 두 곳으로 분산되어 있다.
동리와 서리는 200m도 안되는 거리로 배를 타면 5분도 안 걸린다. 서로 코앞에 보이는 두 섬은 행정구역으로도 같은 마을에 속하고 한 사람의 이장이 담당하는 곳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들은 모두 친척관계다. 늙은 부모는 동리에 살고 자식은 서리에 사는 가족도 있다.
동리와 서리는 사이좋게 이웃해 있다. 그래서 천연방파제 역할을 하여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만약에 한 섬이라도 없었다면 두 개의 섬은 사람이 살기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외해에 속한 섬이기 때문에 바람과 파도가 이 섬을 그냥 놓아두지 않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서소우이도가 북풍을 막고, 여름에는 동소우이도가 남풍을 막아주기 때문에 서로 사이좋게 벗하고 있다. 그러나 좀더 상세히 들여다보면 주민들의 생활여건은 두 섬이 확연히 다르다. 섬마을 가운데 살고 있는 위치가 어디냐에 따라서 그렇다.
배에서 내리면 암반 오른쪽에 붉은 벽돌로 된 건물이 한 채 있는데 대합실이다.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왼쪽으로 길이 나 있다. 두 섬 사이 바다에 약간의 전복 양식장이 있다. 시멘트 포장길은 완전히 노출된 채 마을로 이어진다. 왼쪽에 있는 소나무들이 크기가 작기 때문이다.
마을 안의 집들은 모두 10여 채도 채 안 될 것 같다. 마을 안으로 거의 사각형 형태의 모래해안이 있다. 이곳은 먼 바다로 수심이 깊어 갯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섬이다. 동리에는 이곳 외에도 동쪽 해안에 이보다 큰 모래해변이 있긴 하다. 시멘트 포장길은 이곳을 거쳐 서쪽 마을까지 이어진다.
이곳은 해안부터 바로 마을이다. 서리가 막아줘서 그런지 모든 집들이 돌담 하나 없이 완전히 노출된 상태다. 이곳은 집들이 한 곳에 오순도순 모여 있다. 아래쪽에 위치한 집들은 사람들이 사는 집이고 이곳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 곳에 있는 집들은 거의 폐가들이다. 그 끝에 교회가 있다. 섬주민의 90%가 기독교 신자라고 한다.
2분 정도 걸어가면 선착장이 보인다. 이곳이 객선이 닿는 선착장. 선착장 앞에는 통나무로 된 정자쉼터가 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집 한 채가 있고 그 뒤로 밭으로 가는 길이 있다. 밭 뒤로 난 산길로 건너가면 해안이 나온다.
이곳에도 예전에는 학교가 있었다. 우이초등학교 동리분교장. 이 절해고도에 섬사랑 학교가 있다. 이 폐교를 개인이 매입해 섬사랑 학교를 세운 것이다.
1986년에 만들어진 이 섬사랑 학교는 아주 잘 꾸며놓았다. 잔디로 깔린 마당 바로 앞은 바닷가로 작은 백사장이 안마당인 꿈같은 곳이다. 파도소리는 꿈결처럼 멀고도 가깝다. 마당에는 고기를 굽기 위해 불을 지폈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마치 별장에 온 것 같은 여유자적함이 느껴진다.
학교 설립자는 오제신 장로와 지정희 권사 부부인데, 남다른 사연을 가지고 이곳 섬에 들어와서 제2의 인생을 엮어가고 있었다. 1999년부터 광주에서 월드비전 복지관장으로 근무하던 오 장로는 섬에 대한 꿈을 가지고, 신안교육청으로부터 폐교된 도초서초등학교의 동소우이도 분교를 매입했다. 그것이 벌써 11년 전인 2001년 8월의 일이다. 2년 후, 이들 부부는 도시생활을 완전히 접고 섬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5km 떨어진 죽도와 황폐화된 동리의 생태계 복원 및 보전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이 폐교를 사용하기로 하고 학교건물을 섬사랑 학교라 이름 지었다.
오 장로는 섬사랑학교 교장이 되었고, 아내인 지 권사는 자동으로 교감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학생이 없다. 그들이 갖고 있는 꿈과 관심을 이곳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섬사랑 학교의 학생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섬사랑 학교 교장과 함께 동리 반장 일까지 맡고 있다고 한다. 학교와 집을 짓고 수리하는 과정에서 터득한 기술로 집도 수리해주고, 동네의 계량기 검침, 우편물과 고지서 확인, 전기, 냉장고,TV 등 수리와 각 가정의 농협과 보건지소, 면사무소 간에 연락도 해준다.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동력선인 에녹호라는 선외기를 가지고 있어 필요할 때 주민들이 요긴하게 쓰기도 한다.
그동안 이 분이 출판된 책과 인터넷에 연재 글을 보고 필자가 전화와 편지로 관심을 가지게 되어 이번 만남이 두 번째이다. 앞으로 이곳 섬사랑 학교 교실에 묵으며 자연현장 학습을 할 수 있는 이 학교 학생이 되고 싶다. 지금도 섬사랑 학교는 자연체험과 생태계 복원에 관심 있는 분들이 올 수 있도록 언제나 대문을 열어두고 있다. 동리가 가슴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기억되는 것은 이처럼 아름다운 꿈과 이상을 갖고 있는 두 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섬사람들은 이 외딴 섬에 두 분이 들어와 살게 되어 섬이 풍성해지고 손님들이 종종 드나들어 좋다고 한다. 육지와 가까운 섬은 종종 외지인이 들어와 사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작은 섬에서는 아주 특이한 일에 해당한다. 이런 일들이 전국적으로 많이 일어났으면 하는 염원으로 다음 행선지로 배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