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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한계를 깨달은 자의 기도
참고말씀: 창3:19; 5:25-27; 민9:15-17; 14:21-23,32,33-35; 왕상3:13; 시48:14; 105:39; 131:1; 사61:1; 마5:3; 6:33; 막8:19-21; 롬3:12-15; 12:3; 고전10:1; 고후9:8; 엡1:4; 살전4:6; 약4:13-16
읽을말씀: 시90:1-17
주제말씀: 시90:15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 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첫째, 광야 같은 생활 중에도 안식처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1,2절).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90:1,2)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광야생활 40년의 어느 날, 광야 한 복판에서 문득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영원한 거처가 되셨다는 점입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1절)
어째서입니까? 광야 한 복판에서도, 하나님만이 참된 안식처시며, 영원히 의지할 대상이심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모세는 광야생활 40년 내내 백성들과는 달리 불평이나 원망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똑같이 광야 길을 걸었고 똑같이 그곳에서 40년을 지냈는데도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날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안식처를 찾았으며, 늘 하나님 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안식은 내면적이기만 했습니까? 아닙니다. 실제로도 광야 생활 40년 내내 하나님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 아래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광야생활 내내 한 번도 그를 떠나지 않고 계속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민9:15-17) /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으며.”(시105:39) /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고전10:1 상)
혹 우리도 현실 문제 한 복판에서 우리의 안식할 거처를 발견했습니까? 우리의 지치고 피곤한 일상에서 이 한 몸 의탁할 참된 안식처를 찾았습니까? 원컨대 모세처럼, 오직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안식처를 찾기 원하고, 또한 우리의 피곤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의탁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한편, 하나님은 ‘언제부터’ 우리의 거처가 되어주셨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입니까? 아닙니다. 그보다도 훨씬 오래전부터입니다. 얼마나 오래전 말입니까? 창세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조성하시기 전부터 우리의 안식처가 되어주셨습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2절 상)
어떻게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택하심으로써, 즉 창세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그때부터 우리의 안식처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언제까지 말입니까? 영원까지입니다.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2절 하)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망설임이나 주저함 없이 그분을 누구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영원히 우리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48:14)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우리의 안식처이셨으며, 지금도 우리의 안식처가 되어주시며, 앞으로도 영원토록 우리의 안식처가 되어주실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까? 또한 어떻습니까? 우리가 평안하고 고요할 때뿐만 아니라, 광야 같은 생활을 할 때나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여전히 우리의 안식처임을 깨닫고 날마다 그분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둘째,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깨달아야 합니다(3-6절)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시90:3,4)
하나님의 이 같은 영원하심은,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2절 하) 무엇과 대비될 수밖에 없습니까? 인간의 유한성(有限性)입니다.
어째서입니까? 하나님은 영원하신 데 비해 인간은 예외없이 모두 죽을 수밖에 없고,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3절)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하)
하나님은 영원히 계신 데 반해서 우리는 이 땅에 잠깐 머물다가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4-6절)
참고로, 여기서 왜 굳이 ‘천년’을 언급한 것입니까? 역사적으로 최고로 장수했던 사람이 ‘천 년’에 가까웠기 때문일 것입니다(므두셀라, 969세).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5:25-27)
그러나 이 ‘천 년’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영원하심 앞에서는 무엇에 지나지 않습니까? 지나간 언제, 밤의 한 순간, 잠깐 자는 것, 아침에 돋았다가 저녁에 시드는 풀 등입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4절) /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5,6절)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우리의 명확한 한계(限界)입니다. 어떤 한계입니까?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 ‘잠깐’ 살다가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한계 말입니다.
왜 이 같은 한계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까?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믿음의 분수를 넘어서 크고 감당하지 못할 일에 함부로 나서지 않기 때문이요,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131:1)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 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 과욕을 부리거나 남의 것도 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살전4:6)
한편,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무엇에도 한계가 있음을 깨닫습니까? 자신이 만난 고난이나 역경입니다. 즉 자신이 만난 고난이나 역경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기에, ‘인생의 광야를 만나도’ 크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광야 같은 생활도 언젠가는 끝이 나되, 아주 잠깐 동안만 내게 머문다는 점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또한 우리가 만난 고난의 한계도 명확히 알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한계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만난 고난이나 역경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마음가짐으로 잘 이겨내고 있습니까?
셋째, 짧은 인생을 죄악으로 소진하지 말아야 합니다(7-9절)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시90:7-9)
사람은 이렇게 짧은 인생을 살면서도 끊임없이 무엇으로 치닫습니까? 죄악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인간의 사악한 본성 때문입니다.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롬3:12-15)
모세는 광야생활 내내 무엇을 보면서 이를 절실하게 깨달았습니까? 하나님을 끊임없이 거역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즉 그들을 설득하다가 지쳐 버린 모세는 끝없이 죄악으로 치닫는 사악한 인간의 본성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내가 살아 있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민14:21-23)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무엇을 받아 모두 엎드러지고 말았습니까? 하나님의 분노와 징계입니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7,8절)
모세는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갔음입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9절 상) 사실 광야생활 40년은 무엇과도 같았습니까? 길고도 긴 장례 행렬입니다. 즉 어떤 사람은 염병으로 죽고, 어떤 사람은 불뱀에 물려서 죽었으며, 어떤 사람은 전쟁으로 죽고, 어떤 사람은 당을 지어 반역하다가 죽었으며, 어떤 사람은 수명이 다하여 각각 죽었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민14:32,33) /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민14:35) / “
또한 무엇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그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 하였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9절 하) 즉 인생이 신속히 가되 마치 날아가는 것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절 하)
왜 모세는 그의 일생이 순식간에 다한 것처럼 느껴졌습니까? 세월이 유수(流水, 흐르는 물)와 같고 쏜살(쏜 화살, a shot arrow)같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기껏해야 70이나 80밖에 못 사는데,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10절 상) 걸어가기에도 벅찬 우리가 어떻게 날아가는 세월을 막을 수 있으며,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절 하) 수고와 슬픔 범벅인 우리네 인생을 무슨 수로 붙잡아둘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10절 중)
그러니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순식간에 다 하는 인생을 주의 분노 중에 살지 말며,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9절) 신속히 날아가는 인생을 죄악으로 소진하지 말며,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절 하) /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7절) 수고와 슬픔뿐인 인생을 헛된 일 이루는데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10절 중)
넷째, 지혜로운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11-14절).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1,12)
주의 노여움의 능력과 진노의 두려움을 깨달은 모세는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11절)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12절 상)
어째서입니까? 사람은 그 한계를 깨달을 때 비로소 그 심령이 가난해지며, 하나님은 이같이 가난해진 심령에 지혜로운 마음을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12절 하)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사61:1 상)
참고로, 여기서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쳐달라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12절 상) 실제로 자신의 남은 날을 셀 수 있게 해달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자신의 남은 수한(壽限)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 절은 무슨 뜻입니까?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리 말할 수 있습니까? 그는 분명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며, 우리의 연수가 신속히 다하였나이다”(9절),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절 하)라고 앞서 말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지혜로운 마음’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킵니까? 하나님의 임재(또는 동행)를 요구하는 마음이자,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13절 상)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마음이며,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13절 하)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구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14절)
어째서입니까?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 없이 도무지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임재와 긍휼과 그 인자하심을 갈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서는 안 됩니다. 언제까지 나를 멀리하실 작정입니까? 지금 나에게로 속히 돌아오셔서 불쌍히 여겨주소서.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부어주셔서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연약한 인생인 줄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도 갈망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세상의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한 채로 살아갑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살아간다거나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세월을 붙잡아둔 것 인양 생각하면서 살아가며 하나님 없는 내일을 마음껏 꿈꾸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악한 것이라.”(약4:13-16)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한계를 모른 채 하나님 없이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께 지혜로운 마음을 구하고 그것에 따라서 인생을 경영하고 있습니까?
다섯째, 하나님의 연산법칙에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15-17절).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 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시90:15,16)
모세는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백성들의 범죄 때문에 그들과 더불어서 몇 년이나 광야에서 방황해야만 했습니까? 40년입니다. 어째서입니까?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탐꾼들의 정탐 기간인 40일을 하루에 일 년으로 계산하여 (그들이 다 죽기까지) 무려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민14:34,35)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은 아무렇게나 일하시지 않고 철저한 하나님의 셈법대로 일하시며, 세상의 셈법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연산 법칙에 따라서 일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무엇으로 헤아리려고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까? 세상의 셈법입니다. 세상의 셈법이 아니라면 무엇을 부지런히 배워서 신앙생활에 적용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셈법입니다.
이를테면 어떻게 말입니까? 보리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면 모두가 다 배부르게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고,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면 모두가 다 배부르게 먹고도 일곱 광주리가 남는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막8:19-21)
모세도 이 같은 하나님의 셈법을 배워서 기도생활에 어떻게 적용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괴롭게 하신 날들만큼이나 기쁘게 해주시며, 화를 당한 연수만큼 기쁨의 날들로 바꾸어 주실 것을 기도했습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 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15절)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발상(發想)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세상의 셈법으로는 어림도 없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셈법을 배우면 어떻습니까? 얼마든지 이런 기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원컨대 우리도 이런 기도를 해볼 수 있기를 원합니까?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시며,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즐겁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 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15절)
만일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해 주실 것입니까? 꼭 그 날수대로만 바꿔주시지 않고, 거기에다가 플러스알파를 더해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즉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든지 그것 이상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내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3:13) /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또 모세는 무엇을 구했습니까? 주께서 행하신 일과 그 영광을 주의 종들과 그 후손들에게 나타내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16절)
어째서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비춰주시는 범위 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타내주시는 일들 가운데서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행하는 일들도 엄밀히 말하면 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주신 일과 그 영광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이 같은 인식은 오직 누구만 가질 수 있습니까? 자기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께 지혜로운 마음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12절)
한편, 모세는 이 같은 인식을 기반하여 마지막으로 무엇을 구했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내려주셔서 우리의 손이 행하는 일을 견고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17절)
어떤 사람은 이런 기도를 절대로 하지 못합니까? 자기 한계를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타내주시는 일들 가운데서만 우리가 행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총이 내려질 때만 우리 일이 견고해질 수 있음을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이 견고해지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십시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17절 상)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타내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행한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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