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
야경으로 만나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팔달구
참으로 아름다운 우리네 유산입니다.
세게문화유산등재와 더불어
우리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산 역사이지요.
이번에는 장안문을 중심으로
밤에 찾아 봤습니다.
역시, 밤도 아름다운 화성입니다.

장안문
조선 정조20년(1796년) 9월,
화성행궁에서는 풍악이 울렸고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축성 공사 2년 9개월만에 환공된 화성축성을 축하하는 자리였습니다.
완공된 화성의 모습은,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를 중심으로 좌우 산기슭을 따라 성벽이 이어졌습니다. 성벽의 중간중간에는 각종 시설물들이 자리하였으며, 사방으로 웅장한 성문들이 지키고 서며 그 주위로는 망루구가 우뚝 서 있습니다. 수원천이 흐르는 북수문(화홍문)과 그 위의 언덕에는 방화수류정(동북각루)이 앉아 있습니다. 성의 안쪽에서 보면 높은 망루이지만 바깥에서 보자면 용연이 자리하는 형국이지요. 또한, 성벽을 따라서는 이어지는 치성과 포루들이 가득하고 공심돈이 버티고 섭니다. 이것이 바로 완공된 화성의 모습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읍성처럼 보이지만 산성을 대신하여 방어력을 극대화시킨 군사시설이라는 점이 화성의 특징이 되겠는데요, 화성의 축성, 그 뒤에는 몰락해가는 왕권의 강화를 위한 수도부 이전이라는 대의가 있었으며,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화성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있습니다.
1997년 12월 4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는 대한민국의 창덕궁, 불국사와 석굴암, 종묘, 팔만대장경과 함께 수원화성이 등재 되는 쾌거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수원화성은 자칫 문화유산 등재에서 배제될수도 있었지요. 유네스코에 등재가 되기위한 몇가지의 조건중 '복원 및 복구'에 대한, 그러니까 '원래의 상태에 새로이 더하거나 빼어내면 안된다'라는 조항이 있던 것이지요. 그러나 수원화성은 일제강점기에 행궁이 파괴가 되었던 적이 있었으며, 성곽을 무너뜨리고 훼손을 시켰었습니다. 또한 한국전쟁으로 동문과 북문이 부서져내려 화성은 사실상 쑥대밭이었던 것을 1964년부터 부분 수리를 하였으며, 1974년에 들어서야 정부의 예산을 지원 받아 '국방문화유산 정비'계획의 일환으로 5년여에 걸쳐 대대적인 수리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복원공사를 하였음에도 어찌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될수 있었을까요? 그 결정적인 역할은 바로 화성축성공사에 대한 모든것이 담겨있는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있습니다.
화성성역의궤는 필사본이 아닌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간행하였는데요, 화성 축성의 일정과 감독관과 인부들의 인적사항은 물론이고 건물의 설명과 함께 사용되었던 기계들을 그림과 함께 설명하였으며, 축성에 사용된 돌과 나무의 종류, 무게, 심지여 사용된 못의 모양및 수량까지도 세밀하게 기록이 되어 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화성의 복구 공사는 당시의 축성방식 그대로 복원이 가능하였으며 한치의 오차도 없이 옛 그대로 복원한 수원화성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토록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이자 세계의 문화유산 수원화성,
어느 겨울, 문득 만나고픈 화성의 야경을 만나고자 생각없이 길을 나섰습니다. 아쉽게도 너무늦은 시간에 도착하여 전체를 돌아보기에는 벅찼고, 팔달문은 한창 복원공사중으로 만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화성 야경의 꽃이라 하는 장안문을 시작으로 화홍문과 화서문, 방화수류정을 거쳐 창룡문에 이르는데, 시간이 밤 10시가 넘어 서니 창룡문에 도착할 즈음에 경관용 조명이 꺼져 버리더군요.
급한마음과 엉성한 내공이 만나 졸작으로 만난 수원화성의 야경입니다. 다음 기회에는 조금은 더 여유를 두고 천천히 느릿한 마음으로 화성의 밤을 만나고 싶습니다.

화서문(華西門)
화성의 서문에 해당한다. 석축으로 된 홍예문 위에 단층 문루가가 세워져 있으며, 팔달문이나 장안문과는 다르게 반달형의 옹성을 두고 별도의 문을 달지 않았다.
팔작지붕으로 아담하지만 전체적으로 우아하다. 옹성 안쪽의 좌측 석벽에는 화서문 축성당시 공사를 맡은 사람들과 책임자들을 기록한 공사실명판이 석벽에 새겨져 있다.


장안문(長安門)
화성의 북문으로 사실상 화성의 정문에 해당한다. 장안(長安)이란, 수도임을 뜻함과 동시에 국가의 안녕을 상징하는 문자로 쓰였는데 장안의 영화를 화성에서 재현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장안문은 기초다지기에 있어 주목할 만한 점이 있는데, 남모래와 진흙을 물에 섞어 다지면서 시루떡을 앉히듯이 켜켜히 쌓아 올린것이다. 이로인한 튼튼함은 화강석의 기단과 문루의 무게를 든든히 버티고 있음은 물론이고 장안문의 곁을 지나는 수많은 자동차의 통행에도 미동조차 없이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화성야경의 꽃'이라 불리는 곳으로 한국전쟁 당시 문루가 불에 타 소실 되었던 것을 1975년에 복원 하였다.




북수문(北水門)
다른 이름으로 현판의 화홍문(華虹門)이라 서져 있어 그리 부르기도 한다.
광교산에서 흐르는 수원천이 화성을 관통하면서 지나는데, 이를 지나게 하는 수문으로 남과 북으로 두개의 수문을 두고 있었으나, 벽돌로 조성이 되었던 남수문은 1922년 홍수로 유실 되었으며 화강암으로 쌓은 북수문만 남았다.
중아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7개의 홍예문을 두어 홍수기에도 물살의 흐름을 유도하여 흐르도록 하였으며,
수문으로 들어 오는 적을 대비하여 쇠로 만들어진 전문(箭門)을 설치 했다.



동북각루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북수문의 동편언덕에 자리한 동북각루가 품은 모습은 화성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자연의 경관과 가장 잘 어울리면서 외성의 용연과 어울린 경관은 화성의 백미로 많은 사진작가들의 포인트가 되는 곳이다. 가장 아름다운 곳인 만큼 공사비용도 가장 많이 들었는데, 다른 각루에 비해 10배의 공사비가 들자 공사의 책임자가 정조에게 불려가 문책을 당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총4곳의 각루중 단연 가장 멋진 풍경을 자랑하는 곳으로 1797년 정조가 화성행차때는 이곳에서 활쏘기를 하였으며, 신하들에게 술과 고기를 내어주며 화성축성의 노고를 치하하던 자리도 바로 방화수류정이다.


띠를 두르는 듯한 성곽의 모습

창룡문(蒼龍門)
화성의 동문으로 규모는 화서문과 같으며 홍에문위에 단층 문루가 서있다. 사방이 여장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문의 전면은 반월형의 옹성을 벽돌로 쌓아 성문을 보호하고 있다. 옹성은 화서문과 마찬가지로 한쪽으로 치우쳐 두면서 문을 달지 않았다.

by 박수동

www.gilson.asia
첫댓글 아름다운 수원화성의 야경 넘 좋아요 감사합니다 우리문화재 우리가 사랑하고 지켜야 하지요 감사합니다
우리의 것, 우리의 문화재이지요.
소중하게 지켜져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수원화성 야경 아름답습니다
낮에만 잠깐 보고 왔어요
추워서 오랫동안 걷기가 힘들었어요
아이들 데리고 가서 감기 들까봐요
한바퀴 휘~ 돌려면 제법 먼거리입니다.
4월에서 5월정도가 가장 좋을듯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