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0일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루카 6,12-19
미래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만 현재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뽑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몸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낫는 능력을 지니고 계셨지만, 제자들을 뽑으실 때는 매우 신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지만,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범이 되셔야만 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뽑을 때는 자기 생각으로 뽑지 말고 기도하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이를 선택하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기도는 겸손한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교만합니다.
대부분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합니다.
모든 죄는 다 이 교만에서 비롯되고 모든 고통도 그것 때문에 생겨납니다.
겸손하여지려면 결정이나 계획을 내가 하지 말고 미래를 아시는 분께 물어보는 시간을 꼭 가져야만 합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할 줄 알지만, 어른이 되면 신이 되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미래가 현재이신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마지노’ 방어선은 1930년대에 프랑스가 독일과의 동쪽 국경을 따라 건설한 거대한 요새
시스템이었습니다.
이 방어선은 당시 프랑스 국방 책임자였던 앙드레 마지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이 방어선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프랑스가 겪은 파괴, 특히 독일의 침략에 대한 대응책이었으며, 앞으로 이와 유사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노 방어선 건설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거의 10년에 걸쳐 진행된
기념비적인 작업이었습니다.
이 방어선은 콘크리트 벙커, 중포병 진지, 전차 장애물, 지하 막사, 다양한 요새를 연결하는 터널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당시 가장 정교한 군사 방어 시스템 중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그이 프로젝트는 국가 방위 예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마지노 방어선은 강력한 방어선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마지노 방어선은 제1차 세계 대전과 같은 정적이고 방어적인 전쟁을 위해 설계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빠르고 기동적인 전쟁 형태인 전격전이 부상했습니다.
독일군은 벨기에와 아르덴 숲을 통해 프랑스를 침공하여 방어선을 우회했습니다.
이 숲은 대규모 군대가 통과할 수 없는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 당신의 전차는 그 숲을 통과할 수 없었을지 몰라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전차는 그만큼 강력해졌던 것입니다. 마지노선은 그렇게 힘도 써보지 못하고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의 교만함은 이렇듯 자신들의 생각만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그렇게 지금까지도 수많은 실패와 아픔을 겪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둘 다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나는 내가 실제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보다는 적어도 바리 이 점에서 조금은 더 지혜로운 것 같다.”
영국이 19세기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가장 강력한 하나는 항해술의
발달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지능을 믿다가 큰 낭패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1707년 클라우즈리 쇼벨 제독이 영국 해안에서 실리 제도 근처의 함대 위치를 잘못 판단하여
4척의 배와 거의 2,000명의 병력을 잃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위도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는 있었지만, 경도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는 없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 의회는 1714년 경도법을 통과시켜 바다에서 경도를 반도의 정확도로 측정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사람에게 최대 20,000파운드의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1714년 £20,000의 추정 가치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4~£5백만이 되고 원화로 환산하면
현재 환율 기준으로 약 70~80억 원이 됩니다.
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독학으로 시계를 만든 영국의 존 해리슨이었습니다.
해리슨은 경도를 결정하는 열쇠가 바다에 있는 동안 알려진 기준점(예: 그리니치)에서 시간을 유지할 수 있는 정확한 시계를 갖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원들이 자신의 위치와 그리니치 사이의 시차를 알고 있다면 경도를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크로노미터를 사용해 영국은 장거리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다른 나라들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나아가 무역과 군사, 식민지 확장에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는 이와 같습니다.
나의 2만 파운드를 미래를 아는 지식을 위해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겸손의 지혜에서 비롯됩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끝까지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로 주님께서 알려주신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면 영원한 생명은 물론 이 지상에서도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10일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루카 6,12-19
우리는 기도 바칠 때, 온 삶과 정신,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는지요?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파격적인 모습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었습니다.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에 크게 환호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그분의 적극적인 추종자로 따라나섰는데, 당시 12 사도단뿐만 아니라 72제자단도 존재했습니다.
아마도 더 많은 숫자의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예수님만을 따랐습니다.
산으로 올라가셔서 밤새워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불러 모으신 다음, 그들 가운에 12사도를 뽑으셨습니다.
초대 교회 때 이루어진 일종의 주교 서품식이 막 끝난 것입니다.
영광스럽게 간택된 열두 사도, 그리고 수많은 제자들을 앞세운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는 장면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평지로 내려서시니 수많은 인파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구름처럼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신 예수님께서 이윽고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이어서 은혜로운 치유의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불치병에 시달리던 사람들, 영혼의 질병, 마음의 질병, 정신적 병고를 앓던 이들이 예수님을 통해 그 자리에서 즉각적인 치유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사람들은 잠시나마 하느님 나라의 실체를 목격했습니다.
이 모든 배경에는 밤을 꼬박 샌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너무나 간절하고 절박해서 밤새워 기도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금 너무 힘든 분들, 꼭 한번 시도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은총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밤샘 기도 앞에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최선책이 아니더라도 차선책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도 아니라면 지금 처한 힘겨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적어도 고통과 십자가를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너그러움과 이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잔잔한 마음의 평화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기도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그냥 기도하지 않으시고 밤샘 기도까지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어느 정도 열정과 마음이 담겨있는지요?
우리는 기도 바칠 때, 온 삶과 정신,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는지요?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강론>
(2024. 9. 10. 화)(루카 6,12-19)
<생명의 책>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루카 6,12-19).”
1) 사도들의 명단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복음서에 사도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뒤의 8장에 여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과 의미가 같은데, 하느님 나라의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음을 상징합니다.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묵시록에서는 ‘생명의 책’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다른 책 하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고, 죽음과 저승도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저승이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 못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묵시 20,12-15).”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묵시 21,27).”
심판 때에 펼쳐지는 책은 두 권입니다.
첫 번째 책은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실이 기록되어 있는 책이고, 두 번째 책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
2)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도 생명의 책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나는 에우오디아에게 권고하고 신티케에게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뜻을 같이하십시오.
그렇습니다.
나의 진실한 동지여, 이 여자들을 도와주도록 그대에게도 당부합니다.
이들은 클레멘스를 비롯하여 나의 다른 협력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려고 나와 함께 싸운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이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적혀 있습니다(필리 4,2-3).”
구약성경 시편에도 생명의 책이 나옵니다.
“그들이 생명의 책에서 지워지고,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않게 하소서(시편 69,29).”
‘생명의 책’ 자체가 ‘구원’을 상징하는데, 그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구원받을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고, 이름이 없다는 것은 그 자격을 얻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책은, 주님께서 이름을 미리 기록해 놓은 책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이름이 기록되기도 하고, 기록된 이름이 지워지기도 하는 책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책에 내 이름을 기록하거나 지우는 것은 사실상 ‘나 자신’이 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사도들의 명단이 ‘생명의 책’을 상징한다면,
왜 배반자 유다의 이름이 들어 있는가?
배반자 유다의 이름은 ‘생명의 책’에서 지워진 이름이지만, 처음에는 이름이 있었다가 나중에 지워지면서, 지워졌다는 사실이 기록에 남아 있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름을 지운다고 해서 흔적도 없이 지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의 이름이 기록되어서 영원히 보존되는 ‘세례대장’의 경우에, 중간에 다른 종교로 개종한다고 해도,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냉담자가 된다고 해도, 이름 자체를 지워 없애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위대한 사도이며 순교자로 영원히 그 이름이 남아 있겠지만, 배반자 유다는 배반자로 영원히 그 이름이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유다 자신이 자기 이름을 배반자로 적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 자신이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4) 복음서 저자는 열두 사도 명단 다음에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든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치셨을까?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확성기나 앰프 같은 것도 없이 예수님의 설교를 어떻게 들을 수 있었을까?
당시에는, 그런 상황에서는 군중 사이에 전달자들이 있어서,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다음 전달자가 그것을 듣고 뒤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다시 전달하는 방식을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아마도 사도들이 그 전달자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시면, 그것을 들은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역할.
<그것은 교회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은총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사람들의 간청을 모아서 주님께 전해 드리는 일......
그 일은 성직자들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이 함께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