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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들의 묵상훈련 (The Puritan Practice of Meditation
- Joel Beeke / 김준범 옮김
“묵상은 적용하며, 묵상은 치유하며, 묵상은 교훈한다.” - 에제키엘 컬버웰
영적 성장은 신자의 생활의 일부가 되어야한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3:18)고 권면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도 참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며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 참여한다고 가르친바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해 새 생명으로 일으키심을 받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받는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은 “위엣 것을 찾는다”(골 3:1).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심겨진 자들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신자들에게는 영적성장이 기대 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 가운데 하나는 영적 지식을 고양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와 성경읽기에 충분히 시간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으며, 묵상하는 것도 포기했다. 한 때는 기독교의 영적훈련에 있어서 아주 핵심적인 훈련으로 여겨졌고, “기도를 위한 준비와 기도와의 연결점 역할“을 감당했던 ‘묵상(meditation)'이 이제는 비성경적인 ”뉴에이지“의 영성과 관련된 단어로 쓰여지고 있다는 것은 크나큰 비극이다. 초월명상이나 다른 심신수련법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 잘못되었는지 비판하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들은 불교나 힌두교 같은 거짓종교와 연관되어 있고, 성경과는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명상들은 마음을 비우고 세상과 분리하여 소위 우주적 마음이라 불리는 것을 침잠해 들어가는 것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 분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그들에게서 조용한 자기성찰과 긴 묵상의 중요성에 대해 배울 수 있다.
과거 기독교회에는 죄로부터 떠나고 하나님과 이웃에게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포함하는 성경적 묵상을 열심히 시행했던 때가 있었다. 청교도 시대에 수많은 목사들은 묵상의 방법에 대해 설교도 하고 글도 많이 썼다. 이 장에서 우리는 묵상의 본질, 의무, 방법, 주제, 유익, 장애물들, 자기성찰 등에 대해 생각하면서 묵상에 대한 청교도들의 견해를 살펴볼 것이다. 우리가 청교도들을 맨토로 삼을 때, 우리는 우리시대에 묵상에 대한 성경적 실천을 회복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묵상의 정의와 본질과 종류
‘묵상하다’ 또는 '명상하다(muse)'라는 단어는 “곰곰히 생각하다(think upon)" 또는 ”반추하다 (reflect)“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윗은 ”내 속에서 뜨거워 묵상할 때에“(시39:3)라고 말하였다. 묵상은 “중얼거리거나 나지막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그것은 곧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묵상에는 자신이 암송하고자 하는 성경구적을 낮은 목소리로 낭독하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성경은 묵상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약대들이 오더라“(창24:63).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감독해야 하는 큰 임무를 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여서 율법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할 것을 명령하셨다(수 1:8). 그러나 묵상이라는 단어는 다른 성경에 기록된 것을 다 합친 것보다 시편에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시편 1편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시편 63편 6절에서 다윗은 그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고 밤중에 주를 묵상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시편 119편 148절은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생각하는 것, 반추하는 것, 또는 명상하는 것은 묵상할 어떤 주제를 전제로 하고 있다. 정식으로 묵상하는 것은 비중 있는 주제들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철학자들은 물질이나 우주와 같은 개념들에 대해 묵상하는 반면, 신학자들은 하나님, 영원한 작정, 인간의 의지 같은 주제들에 대해 생각한다. 청교도들은 성경적 묵상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임을 말하는 데에 있어서 전혀 피곤해하지 않았다. 청교도들은 살아계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묵상의 뿌리를 둠으로써, 행동을 희생하면서 명상을 (contemplation) 강조하거나 성경의 내용을 희생하면서 상상력의 비행을 강조하는 사이비 영성 또는 신비주의 같은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묵상은 생각과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었다. 묵상을 하는 자들은 그의 정서뿐만 아니라 지성을 사용해야 한다. 토마스 왓슨은 묵상을 정의하기를, “하나님의 진리를 기억하고 그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마음의 거룩한 행동“이라고 하였다. 에드먼드 칼라미는, “참된 묵상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할 때에 그의 마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으로 불붙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묵상할 때에는 그 진리들로 변화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며, 죄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그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는 계속 말하기를,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묵상은 세 가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세 가지 문은, 이해의 문, 마음과 정서의 문, 그리고 실천적인 생활의 문이다.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묵상할 때에 그를 얻고자 하며 그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 해야 할 것이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묵상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한 다른 모든 의무들을 강화시켜 주는 매일의 의무였다. 기름이 엔진을 부드럽게 하듯이, 묵상은 은혜의 방편들(성경읽기, 설교듣기, 기도, 그리스도의 다른 규례들)을 부지런히 사용하는 것을 쉽게 해주고 촉진해 주며, 은혜의 표지들(회개, 믿음, 겸손)을 깊게 해주며, 모든 관계(하나님에 대한 사랑, 지체된 그리스도들에 대한 사랑, 모든 이웃들에 대한 사랑)를 강화시켜 준다. 청교도들은 두 가지 종류의 묵상에 대해서 기록하였다: 불규칙한 묵상과 규칙적인(의도적인)묵상이 바로 그것이다. “천상의 것들에 대한 갑작스럽고도 짧고 불규칙한 묵상이 있으며; 엄숙하고도 준비되고 의도적인 묵상이 있다.“고 칼라미는 적고 있다. 불규칙한 묵상은 ”그의 생각을 천상의 묵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지각을 가지고 관찰하는 자가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신자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을 “천국으로 올라가는 사닥다리로”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시편 8편에서 다윗이 달과 별들을 보면서 한 것이며, 잠언 6장에서 솔로몬이 개미들을 보면서 한 것이며, 요한복음 4장에서 우물물을 보면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다. 토마스 맨톤은 설명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모형들과 예식들을 가지고 구약 교회를 훈련하셔서 그들이 평범한 것들을 통해서 영적인 생각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하셨고, 신약 시대에는 우리 주님께서 사람들 사이에 있는 평범한 기능들과 직책들을 가지고 비유와 유비로 사용하셔서 우리가 모든 직업과 소명 속에서 세속적인 일들을 감당할 때에도 천상의 마음을 가지고 일할 수 있게 하셨다. 그곳이 상점이든 방이든 들판이든 우리가 여전히 그리스도와 천국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게 하시려고 말이다.
불규칙한 또는 즉석의 묵상은 상대적으로 쉽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 때, 어느 장소,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든지 실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연적인 것들을 영적으로 만드는 법을 빨리 배울 수 있는 반면, 세속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영적인 것이라도 육적으로 만들 것이다. 맨톤은 이렇게 말하였다. “은혜로운 마음은 증류장치와 같아서, 만나는 모든 것에서 유익한 묵상을 뽑아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을 보는 동시에, 모든 것에 하나님을 본다.“ 묵상에 관한 거의 모든 청교도 책들은 불규칙한 묵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윌리엄 스펄스토우, 토마스 테일러, 에드워즈 베리, 그리고 헨리루킨 같은 청교도들은 불규칙한 묵상에 대한 책들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불규칙적인 묵상에는 위험이 따른다. 조셉 홀 주교는 경고하기를, 그런 식으로 상상력이 통제받지 않고 남겨졌을 때에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영성의 경우가 그런 것처럼, 묵상이 말씀에서 떠나 방황하며 미신적이 되기 쉽다고 하였다. 사람의 상상력은 반드시 거룩한 말씀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청교도들 사이에는 이런 식의(불규칙한) 묵상을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견이 서로 엇갈렸다. [천로역정과 청교도 묵상의 전통]을 쓴 카우프만은 말하기를, 청교도 묵상에는 두 가지 다른 전통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교회 정치를 제외하고서는 신학적으로 중도적인 청교도였던 조셉 홀의 책[거룩한 묵상의 기술]이 청교도들 가운데 묵상에 관한 문학을 발전시키는 물꼬를 텄다고 하였다. 홀은 상상력을 말씀의 내용에 제한시킴으로써 묵상에서의 상상력의 역할을 잘 통제하였다. 그것은1650년대에 글을 쓴 아이작 암브로즈나 토마스 후커, 한 세대 이후에 쓴 존 오웬이나 에드문드 칼라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카우프만은 단언하기를,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로마 카톨릭의 자자들과 달리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묵상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의 구체적인 명제나 교리에 대해 묵상하였다.“고 말하였다.
카우프만에 따르면 리차드 십스와 리차드박스터는 성례와 천국에 관한 묵상을 권하는 이 전통에서 탈출했다. 특별히 십스는 비록 우리 영혼은 통제받지 않는 상상력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을 수 있기는하지만, 또한 “거기(상상력)에서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단언하였다. 천상의 것들을 땅의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마치 천국을 잔치로 표현하거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결혼으로 표현하는 것처럼,“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상상력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며... 이로 인해 엄청난 영적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십스는 기록하였다. 카우프만은 백스터가 신앙의 대상을 감각의 대상에 비유하여 상상력을 강조한 것은 십스의 책[영혼의 갈등]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뒤이어 존 번연도 [천로역정]을 쓰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거기에서 그는 그의 상상력을 신자의 영적순례와 관계된 다양하고 폭넓은 주제에 적용시켰다.
카우프만의 평가에도 일면 옳은 점은 있겠지만, 그는 상상력이 성경을 넘어가서 자유롭게 되는 것을 청교도들이 얼마나 두려워했는지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하다. 안셀름이나 로욜라의 이그나시우스나 그 밖의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이 복음서의 이야기들을 시각화하는 것에 대해 청교도들이 우려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 특별히 오감을 통하여 상상력을 열고자 복음서의 이야기들 -그리스도께서 붙잡히신것과 시험받으신 것,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부활하신 것등- 을 시각화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였다.
더욱이, 홀이나 암브로즈에 대한 카우프만의 부정적인 평가는 이 두 저자들이 상상력과 감각을 얼마나 성경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는지를 고려하지 못하였다
홀의 [명상]과 암브로즈의 [예수를 바라보기]는 성경의 경계선을 넘어가지 않으면서도 자유롭게 묵상하고 있다. 그러한 균형은 청교도 전통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며, 청교도들은 우리가 거룩한 상상력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좋은 멘토가 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종류의 묵상은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가지는, 규칙적인 묵상이다. 칼라미는 말하기를 규칙적인 묵상은 “일정한 시간을 구별하고, 골방에 들어가거나 개인적인 산책을 하면서, 그리고 거기에서 천상의 것들을 진지하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묵상할 때에”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러한 의도성은 “꿀벌이 모든 단맛을 빨아먹을 때까지 꽃과 함께 그 속에서 거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진리와 함께 한다. 그것은 “영혼의 성찰하는 행위이며, 그것을 통하여 영혼은 자아에게로 돌아오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그 “원인과 열매와 특징들”을 포함하는 주제들에 관하여 생각하게 된다.“
토마스 화이트는 말하기를 규칙적인 묵상의 근원은 다음의 네 가지라고 했다. 성경, 기독교의 실천적 진리, 섭리적 경우들(경험), 그리고 설교, 특별히 설교는 묵상을 위한 비옥한 토양이다. 화이트는 말하기를 “두 편의 설교를 듣고 묵상하지 않는 것보다는 단 한편의 설교만을 듣고 그것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하였다.
어떤 청교도들은 규칙적인 묵상을 두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였다: 묵상하는 대상에 초점을 맞춘 직접적인 묵상, 그리고 묵상하고 있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 반성적인(또는 재귀적인) 묵상, 직접적인 묵상은 “이해의 명상적 부분의 행동”인 반면 반성적인 묵상은 “양심의 행동”이다. 직접적인 묵상은 지식으로 마음을 밝혀주는 반면, 반성적인 묵상은 선으로 마음을 채워준다.
규칙적인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 대상으로 삼을 때에는 교리적이 될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을 그 대상으로 삼을 때에는 실천적이 될 수 있다. 토마스 구지는 그의 글에서 규칙적인 묵상의 여러 국면들을 종합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정해진 의도적인 묵상은 마음을 어떤 영적인 또는 천상의 주제에 진지하게 적용하는 것이며, 거기에서 당신 자신과 대화하게 되며, 그럼으로써 당신의 마음이 따뜻하게 되고, 당신의 정서가 되살아나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자 하는 결단을 내리고, 죄를 미워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리차드 백스터는 말하기를 시간을 정해 놓고 드리는 기도와 일하는 도중 무의식적으로 뱉는 기도가 다른 것처럼, “정해진 진지한” 묵상은 "불규칙한 마구잡이식의“ 묵상과 많이 다르다고 하였다. 두 종류의 묵상은 모두 경건함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그 둘은 머리와 마음의 필요 둘 다를 섬긴다. 마음에 적용하는 것이 없다면, 묵상은 공부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토마스 왓슨이 기록한 대로, ”공부는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지만, 묵상은 진리를 영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금맥을 찾으며, 다른 이는 금맥을 찾으며, 다른 이는 금을 캐낸다. 공부란 따뜻함이나 영향력이 적은 겨울 해와 같지만, 묵상은... 마음이 얼어있을 때 그것을 녹여주며 사랑의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묵상의 의무와 필요성
청교도들은 묵상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그들은 첫째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말씀에 대해 묵상할 것을 명령하셨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 들은 수많은 성경 본문들(원문참조) 실례들(멜기세댁, 이삭, 모세, 여호수아, 다윗, 마리아, 바울, 디모데)을 인용한다. 우리가 묵상에 실패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시 1:2)
둘째, 우리는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록하신 편지로서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급하게 읽어 내려가서는 안 되고, 그것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묵상해야 하며 또한 그것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그의 사랑에 대해 묵상해야 한다.”고 왓슨은 기록했다. 그러한 묵상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정서와 사랑을 불붙일 것이다. 여기 다윗의 고백이 있다. “또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시119:48)
셋째, 우리는 묵상하지 않고는 견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다윗이 시편 119편 92절에서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믿음은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배불리지 못하면 굶주리게 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라고 토마스 맨톤은 말하였다. 왓슨이 말한 것처럼, "묵상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무기가 없는 군인과 같고 연장이 없는 일꾼과도 같다. 묵상이 없다면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와 함께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며, 마음은 강퍅해지고, 기억은 불분명해질 것이다. 묵상이 없는 것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넷째, 묵상이 없으면 설교 말씀도 우리를 유익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묵상이 없이 성경을 읽기만 하는 것은 “날 것을 먹고 소화시키지 못할 음식”을 삼키는 것과 같다고 스쿠터가 쓴 바 있다.
리차드 백스터는 덧붙이기를, “사람은 과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잘 소화시킬 수는 없다”고 했다.
“햇불의 빛과 태양의 빛이 서로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에 대해 묵상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정원에 어떤 등이나 횃불을 밝혀본들(예를 들면, 정원의 식물들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지만, 묵상은 태양의 빛나는 것과 같으며, 그것은 우리의 정서에 역사하며,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더욱 거룩하게 만들어 준다. 묵상은 진리 안에서 삶을 소생시킨다.”고 왓슨은 기록하였다.
다섯째, 묵상이 없이는 우리의 기도도 덜 효과적이 될 것이다. “묵상은 말씀과 기도 사이에 일종의 중간적 의무이며, 말씀과 기도를 둘 다를 중요시한다. 말씀은 묵상을 먹이며, 묵상은 기도를 먹인다. 우리가 잘못되지 않기 위해서는 들어야만 하며, 열매 없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묵상해야 한다. 이러한 의무들은 언제나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묵상은 들음 뒤에 따라와야 하며 기도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라고 맨톤은 말하였다.
여섯째, 묵상에 실패한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보수할 수 없다. 그들은 뼈대가 없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거의 알지 못한다. 맨톤은 기록한 대로, “묵상에 이방인이 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도 이방인 이다.” 왓슨은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은 바로 묵상이다.”라고 까지 말하였다. 그러므로 당신은 묵상의 필요성을 볼 수 있어야 하며, 우리가 만일 천국에 가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우리는 이 의무에 대하여 결단해야 한다.“고 대주교 제임스 어셔는 기록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묵상은 설교 준비에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점이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묵상이 없다면 설교는 이해의 깊이나 감정의 풍부함, 그리고 적용의 분명성에 부족함을 드러낼 것이다. 벵겔이 헬라어 신약성경 학생들에게 주었던 교훈은 그러한 묵상의 본질을 잘 요약하고 있다 “네 자신 전체를 그 본문에 적용하라. 본문 전체의 내용을 네 자신에게 적용하라).”
묵상의 방법
청교도 저자들에게는 묵상에 필수적인 규칙들과 요건들이 있었다. 그들이 묵상의 횟수와 시간, 묵상의 준비, 그리고 묵상을 위한 지침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횟수와 시간
첫째, 거룩한 묵상은 자주 해야 한다. 시간과 의무가 허락된다면 하루에 두 번 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쁜 사령관이었던 여호수아에게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할 것을 명령하셨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즐거워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진리에 관하여 더 자주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를 더욱 친밀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묵상하는 것이 역시 더 수월해질 것이다.
묵상을 뜸하게 하면 열매를 잘 맺지 못할 것이다. 윌리엄 베이츠가 기록한 대로, “만일 새가 그 둥지를 오랫동안 떠나있게 되면 알들이 차갑게 되어 거기에서는 새끼들이 부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쉬지 않고 (알들을)품게 되면 그들은 부화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랫동안 종교적인 의무에서 떠나 있게 되면 우리의 정서는 식어버려 점점 차갑게 될 것이며, 거룩함을 부화하기에 적합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우리 영혼도 위로를 얻지 못할 것이다.”
둘째, 청교도들은 묵상을 위한 시간을 정하고 그 시간을 엄수하라고 충고한다. 그렇게 할 때 “(묵상을) 생략하고자 하는 많은 유혹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고 묵상을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박스터는 말하였다. 그 시간이 당신에게 가장 “좋은 시간” 곧 당신이 가장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으면서도 다른 의무들에 의해 압박을 받지 않는 시간이 되게 하라. 새벽 시간은 묵상하기에 더 없이 좋은 시간이다. 그렇게 하면 당신의 묵상은 그 날의 나머지의 분위기를 결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저녁시간이 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바쁜 하루가 다 끝났기 때문에 그들은 “달콤한 묵상으로 하나님의 품 안에” 깃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시 16:7)
주일에는 묵상시간을 넉넉하게 가지라. 웨스트민스터 총대들은 [공예배모범]에서, “주일 공예배를 전후해서 남게 되는 시간을 사용해서 성경읽기, 묵상, 그리고 설교의 새김질”을 하라고 충고하였다. 토마스 구지는 이렇게 권면하였다. "거룩한 묵상이라고 하는 이 의무의 달콤함을 조금이라도 맛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무익하고 쓸데없이 이야기를 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특별히 주일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박스터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가신 이 날, 그리고 사망과 지옥권세를 완전히 이기시고 우리를 위하여 천국을 예비하신 이 날보다 우리가 천국을 향하여 올라가기에 더 적합한 날이 어떤 날이란 말인가?“
또한 특별한 경우들을 만났을 때 그 시간을 묵상하는 시간으로 사용하라. 청교도들에 따르면 거기(특별한 시간)에는 다음과 같은 경우들이 포함된다:
1.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혼을 특별하게 소생시키시고 힘을 주실 때.
2. 당신이 고통이나 두려움이나 걱정이나 유혹 같은 것들로 인해 마음이 극심한 고통에 빠졌을 때.
3. 하나님의 사자가 우리를 죽음으로 부르실 때 -그 때는 우리의 백발의 때이거나 질병으로 쇠약해진 몸이거나, 다른 죽음의 전조들로 인해 조만간 우리에게 변화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줄 때를 가리킨다.
4. 설교나 성례 시에 또는 어떤 심판이나 자비, 하나님의 섭리의 행동 같은 것을 관찰할 때에 마음은 감화를 받는 것을 생각하라. 철을 두드리기에 가장 좋은 때는 철이 뜨거울 때이다.
5. 어떤 엄숙한 의무들을 수행하기 전에, 예를 들면 성만찬을 시행하기 전이라든지 깊은 회개의 때
또는 안식일 전과 같은 때에 사용해야 한다.
셋째, “당신의 영혼이 지각할 만한 유익을 발견할 때까지 통상적으로(꾸준히)” 묵상하라. 베이츠는 말하기를, 묵상하는 것은 마치 젖은 나무에 불을 붙이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인내하는 자만이 불을 지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묵상하기 시작할 때, 처음에는 약간의 연기만이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는 두세 번의 불꽃이 잠시 튀는 것을 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거룩한 정서의 불꽃이 피어나서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가게 될 것이다.” “불이 위로 올라갈 때까지” 인내하라고 베이츠는 말한다. 불이 위로 올라가지 않는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에는 그냥 무작정 계속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게으름에 양보하지도 말고 영적인 피곤함이 일어나게도 하지 말라: 마귀는 그 둘 다에서 소득을 얻는다. 당신이 당신의 영을 혹사시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라고 맨톤은 말하였다.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얼마만큼의 시간을 묵상에 사용해야 할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충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임스 어셔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시간은 사용해야 한다고 충고하였으며, 토마스 화이트는 “묵상에는 묵상준비, 생각, 정서, 결단 등 여러 부분이 있으며 그 어느 것 하나도 가볍게 지나칠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할 때, 묵상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라면 적어도[매일]30분을, 그리고 이 의무에 익숙한 사람들은 1시간 정도는 소요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준비
청교도 저자들은 효과적인 묵상을 준비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들을 제시하였는데, 그 모든 것들은 “당신의 마음의 불꽃에 많이” 달려있다:
1.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당신의 마음을 정결케 하라. 세상의 사업과 즐거움뿐만 아니라 내적인 고민과 동요들까지 말이다. 칼라미는 “외적인 친구들에게서 벗어날 뿐 아니라 내적 친구들에게서도 벗어날 수 있도록, 다시 말하자면 헛되고 세속적이며 마음을 산란케 하는 생각들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하였다.
2. 당신의 마음에서 죄의 오염과 죄책을 지우고, 영적인 것들에 대하여 뜨거운 사랑을 일으키라. 성경구절과 영적 진리들을 쌓아놓으라. 시편 119편 11절에 있는 다윗의 고백처럼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은총을 간구하자: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3. 극도의 진지함을 가지고 묵상에 임할 수 있도록 하라. 묵상의 중차대함과 탁월함, 그리고 잠재력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묵상에 성공하면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 바로 그 가운데로 들어가게 될 것이며, 이 땅 위에 영원한 기쁨의 시작을 다시 한 번 맛보게 될 것이다. 어셔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것은 당신의 마음의 생각이 되어야 하며, 나는 지금 하나님을 상대하고 있으며, 그 분 앞에서는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므로, 나는 이 지혜로우신 하나님 앞에 어리석게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내 생각이 방황하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람은 이 땅의 가장 위대한 왕과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 대화하는 동안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눈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에, 당신은 당신의 마음의 방향타가 일정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가장 크게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임재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4. 방해받지 않고 고요하고 자유롭게 묵상할 수 있는 장소를 찾으라. “은밀하고 조용하고 편안하며, 무엇보다 친구들을 제외하고, 둘째로는 소음을 제거하며, 셋째로는 움직임을 제거해야 한다”고 조셉 홀은 말하였다. 적절한 장소를 찾았다면 그 장소를 고수하라. 어떤 청교도들은 방 안을 어둡게 유지하거나 눈을 감아서 보이는 것들의 방해를 받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어떤 이들은 자연 속에서 앉아있거나 걸으면서 묵상할 것을 권면하기도 하였다. 묵상하는 사람이 각자에게 맞도록 택하면 된다.
5. 묵상을 할 때의 몸의 자세는 앉아 있든지 서 있든지, 엎드려 부복하든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경외감과 존중함을 유지해야 한다. 묵상하는 동안 몸은 영혼의 종이 되어야 하며, 그 정서를 따라가야 한다. 목표는 영혼과 마음과 육체가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에 두고자 하는 것에 있다.
지침들
청교도들은 묵상의 절차를 위한 지침들을 주고 있다. 그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함으로써 묵상을 시작하라고 하였다. 당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그리고 신앙의 눈이 이 일(묵상)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칼라미가 이야기한 대로,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여러분의 이해력을 밝혀주시고 여러분의 헌신을 일깨우시고, 여러분의 정서를 따뜻하게 하셔서 그 시간을 축복해 주시도록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은 거룩한 것들을 묵상함으로써 보다 더 거룩하게 되고 탐욕들을 죽일 수 있으며 당신에게 은혜가 더욱 충만케 되며 세상과 세상의 헛된 것들에 대해서는 점점 죽고 하늘과 하늘에 있는 것들로 올라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청교도들은 성경을 읽으라고 했는데, 성경을 읽은 뒤에는 묵상하기 원하는 한 구절이나 어떤 교리를 선택하라고 하였다. 처음 할 때에는 묵상하기에 비교적 쉬운 주제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들은 충고한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교리보다는 하나님의 속성을 묵상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한 번에 한 가지 주제에 관해서만 생각하도록 하라.
아울러, 당신의 현재 상황에 가장 적용하기 좋은 주제를 택하라. 그것이 당신의 영혼에 가장 유익할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신이 영적으로 낙심한 가운데 있다면, 흉악한 죄인들을 받아주시고 그에게로 오는 자는 누구든지 기꺼이 용서하여 주시는 그리스도의 용납하심에 대해 묵상하라. 만일 당신의 양심이 당신을 괴롭히고 있다면 회개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묵상하라. 만일 당신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 있다면,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대해 묵상하라.
그 다음에는 묵상을 자극하고 믿음을 강화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도구로서 섬길 수 있기 위해, 선택한 구절을 암송하든지 그 주제의 어떤 면에 대해 생각하라.
그 다음, 당신의 생각을 그 성경구절이나 성경적 주제에 고정시키되 하나님께 계시해 주신 것 이상을 알려고 기웃거리지는 말라. 그 성구가 당신의 묵상 주제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는 모든 것에 당신의 기억력을 집중시켜라.(그 주제와 관련된) 과거의 설교나 다른 교훈적인 책들의 내용들도 생각해 보라.
당신이 정한 주제의 다양한 면에 대해 생각할 때에 “양심의 책, 성경의 책, 그리고 자연의 책”을 사용하여 그 주제의 이름, 원인, 특징, 열매, 그리고 결과들에 대해 생각하라.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이모든 것들을 마음에 두고 깊이 생각하라. 당신의 이해를 박히고 정서를 불붙이기 위하여 마음 속에 예화나 비유 혹은 정반대되는 경우들도 생각해 보라. 그리고 당신이 묵상하는 것의 가치를 판단하여 평가하게 하라.
여기 칼라미의 모범이 있다. 만일 당신이 죄라는 주제에 대해서 묵상하고 있다며, “죄의 설명으로부터 시작하여, 죄가 어디까지 퍼졌는지, 죄의 근원과 원인, 죄의 저주받은 열매와 결과, 일반적인 혹은 개인적인 죄의 부산물과 특성들, 죄의 반대인 은혜, 죄의 비유들, 죄에 붙여진 이름들, 그리고 성경이 죄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하라.”
여기에는 두 가지 경고가 필요하다.
첫째, 맨톤이 말한 대로, “방법의 규칙들을 가지고 영혼의 자유를 구속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은 종교이지 논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규칙과 세부사항들에 스스로를 구속시킬 때, 그것은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이며, 그런 것들에서 오는 생각은 마치 증류장치로부터 나오는 물이지 샘에서 나오는 물은 아닌 것이다.”
둘째, 만일 당신의 마음이 방황하고 있다면, 그것을 통재하고, 용서해 주시기를 위하여 짧게 기도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적절한 성경구절들을 다시 읽고 난 후 묵상을 계속하라. 성경읽기와 묵상과 기도는 언제나 함께 가는 것임을 기억하라. 그중 하나라도 약해지면, 다른 것도 차례로 약해진다. 인내하라. 당신의 할 일을 포기함으로써 사탄에게 항복하지 말라.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사랑, 욕구, 소망, 용기, 감사, 열정, 기쁨 등과 같은 정서들을 일으키라. 당신의 영혼을 향해 독백의 말을 토하라. 당신의 무능함과 부족함에 대한 불평들도 포함시키고, 당신의 영적 갈망들도 하나님 앞에 쏟아놓으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우실 것을 믿으라.
폴 베인즈는 묵상을 가리켜 “사적인 은혜의 방도”라고 말하면서, 묵상을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시력에 비교하였다. 또한 묵상을 잉태와 출산의 과정에 비교하였다: “이제 잉태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거기에서부터 적절한 때에 출산하게 되는 과정이 있는 것처럼; 영혼도 생각에 의해서 잉태가 되면 정서들이 자극을 받고 고무된다. 왜냐하면, 마치 불쏘시개가 그러하듯이 감정에 불꽃이 일어나면 그것들은 생각에 불을 지피기 때문이다. 정서는 감동을 받고, 의지는 일으킴을 받고 그곳으로 향하게 된다.”
이렇게 기억과 판단과 정서를 일으킨 후에, 당신의 영혼이 묵상의 의무를 행할 수 있도록 일으킴을 받고, 위로를 받으며, 죄에서 떠나게 하기 위하여 당신의 묵상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라. 윌리엄 펜너가 기록한 것처럼, “당신 자신의 영혼 속으로 들어가서, 당신의 마음을 예측하고 마음보다 앞서 가라.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경고들과 자비와 심판과 계명들을 늘 따라다니게 하라. 묵상이 당신의 마음을 추적하게 하라.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라.”
당신이 은혜 안에서 자라가고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하라. 과거를 회상하면서 “나는 무엇을 해 왔는가?” 하고 물으라. 미래를 내다보면서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을 하기로 결심해야 하는가?”를 물으라. 이런 질문을 던질 때에는 의무적이거나 율법적으로 하지 말고 거룩한 흥분감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은혜 가운데 자라갈 기회로 알고(간절함으로)물으라. “율법의 일이 되면 그것은 사람의 일에 불과하지만, 묵상의 일은 달콤한 일이다.”라는 말을 기억하라.
칼라미의 충고를 따르라; “만일 당신이 묵상하는 것에 익숙하게 되었다면, 각론으로 내려와야 한다. 그래서 당신이 그리스도에 대해 묵상하였다면 묵상한 그대로 그리스도를 당신의 영혼에 적용시켜야 한다. 천국에 대해 묵상하였다면 천국을 당신의 영혼에 적용시켜야 한다. 묵상한 대로 행동하라. 묵상과 실천이 마치 두 자매처럼 나란히 가게 하라. 실천이 없는 묵상은 당신에게 비난과 정죄만을 더해줄 뿐이다.
그 다음, 적용에서 결단으로 옮겨갈 수 있게 하라. “당신의 결단을 굳고 강하게 하라. 그저 단순한 소원이 아니라 확고한 목적 내지는 결단이 되어야 한다.”고 화이트는 말하였다. 당신의 결단은 죄로 기울어지게 하는 유혹들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데 헌신해야 한다. 당신의 결심들을 적어 보라. 무엇보다 당신의 삶이 “거룩한 천상의 것들에 관하여 이제까지 묵상해온 것처럼” 당신의 삶이 사용되기를 결심하라. 당신 자신과 가정과 당신의 모든 소유를 “달콤한 포기”로써 하나님의 손에 맡기라.
기도와 감사, 그리고 시편찬송으로 묵상을 마무리하라. “묵상은 기도의 가장 좋은 시작이며, 기도는 묵상의 가장 좋은 끝맺음”이라고 조지 스윈녹은 말한바 있다. 왓슨은 말하기를 “당신이 묵상한 것을 두고 기도하라. 기도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기도가 없다면 그것들은 거룩함을 받지 못한 묵상이 될 것이다. 기도는 묵상을 영혼에 단단히 고정시킬 것이며, 기도는 묵상의 끝자락에 있는 묶어주는 매듭과도 같아서 묵상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묶어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거룩한 묵상들을 당신의 마음속에 지속시켜 주시기를 기도하라.:”
묵상을 도와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라. 그렇지 않으면 리차드 그린햄이 경고한 대로 “우리는 우리의 다음 번 묵상에서 고전하게 될 것이다.”
찬송을 위해 운율로 맞춰진 시편은 묵상에 큰 도움이 된다. 그들은 운율로 되어 있어서 암송에 큰 도움이 된다. 운율로 된 시편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묵상의 적합한 주제들이다. “영혼의 완벽한 해부도”(칼빈)인 시편은 묵상에 엄청난 도움이 준다. 시편은 기도와 감사로서 묵상에 적합한 도구가 되며 묵상을 마무리하는 데에도 적합한 방법이다. 조셉 홀은 “다윗의 시편을 한두 편 부르면서 마음과 목소리를 하나님께” 올려드림으로써 그의 묵상을 끝맺을 때 큰 위로를 받게 된다고 하였다.
“시편은 우리의 생각과 묵상한 내용에 대한 답을 주기 때문에, 시편찬송으로 묵상을 맺을 때 우리 마음은 보다 큰 달콤함과 만족함으로 묵상을 끝맺게 된다.” 존라이트후트는 덧붙이기를, “하나님의 찬송을 하는 것은 우리가 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묵상의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우리가 부르는 가사를 향하게 해준다. 기도하는 것과 (설교를)듣는 것은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빨리 지나가버리지만, 이것(시편찬송)은 부르는 가사에 오래 동안 머무르게 해준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묵상에서 너무 빨리 세상의 일들로 돌아가지 말라. 그렇게 되면 토마스 구지가 충고한 것처럼, “당신이 묵상하면서 마음 속에서 불붙었던 영적 마음들을 갑자기 소멸해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방법대로 한 시간 동안 묵상하였다면 그것은 “천 번의 설교보다도 더 고귀한 것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말씀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라고 어셔는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