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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
요일 3:1-10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일 3:1-10 / 보십시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지극합니까?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 까닭이 없습니다. 2)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되어 있으리라는 시선만은 확신합니다. 그때 그분의 모습을 실제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이 사실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모두 자기 몸을 그분처럼 순결하게 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리스도는 순결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4) 그러나 계속해서 죄를 저지르는 자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입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5)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받게 하시려고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또한 아무 죄도 없는 그분은 언제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의 뜻 그대로 실천하셨습니다. 6)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가까이 살며 그분에게 복종한다면 죄를 저지르는 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언제나 죄 가운데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7) 오,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그러니 아무에게도 미혹을 당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언제나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사람이 됩니다. 8) 그러나 죄를 저지르는 짓을 그치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사단에게 속해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단은 처음부터 계속 죄를 저질러 왔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악마의 소행을 파멸시키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입니다. 9) 하나님의 가족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자리잡고 있기에 죄를 자라게 할 어떤 요소도 없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그의 안에 탄생되고 또 그를 지배하기 때문에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입니다. 10) 이제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누가 사단에 속한 자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죄에 빠져 살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스스로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장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별하고,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1-3) 우리가 어떤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 받은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로마 시대에 “양자로 삼았다”라는 것은 친자식과 똑같은 권리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를 누리고 살아도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을 누릴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주어집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닮습니다. 외모만 닮는 것이 아니라 성격과 성품도 아버지를 닮아갑니다. 재림의 날에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될지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와 같은 줄 아는 것은”(2)이라고 말하면서 장래에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자녀인 우리가 많이 닮아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절을 재림의 날에 아버지를 닮아가기는 소망을 가진 자들은 “그의 깨끗하심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라고 말합니다(3).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죄를 떠나 거룩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4-10) 요한은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비판합니다. 하나님 자녀의 특징은 죄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6절은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죄도 짓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습관적인 범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죄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속해서 죄를 즐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변명과 핑계를 대며 삶 속에 존재하는 미혹들을 당연하게 여기며 적당히 타협하여 넘어가려고 합니다. 마치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적당한 오염도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 자다”라고 강력히 말합니다. 마귀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살다가 영원한 지옥에서 멸망하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으로 마귀의 사역을 파괴하셨습니다(8).
적용: 하나님의 자녀임을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삶에서 죄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까?
원래 첼로 연주자인 토스카니니는 심한 근시로 인해 연주 때마다 연주할 악보를 모두 외워서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주회를 앞두고 그 악단의 지휘자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토스카니니가 선발되어서 임시 지휘를 하게 된 인연으로 세계적인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어려울 때 힘 되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해서 불평하지 말자. 좋은 환경만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아담은 에덴동산과 같은 좋은 환경에서도 타락하지 않았는가? 눈물에 대해서도 감사드리자. 눈물 있는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더 똑똑히 바라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힘이 되어주신다.”
< 설 교 >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
요일 3:1-10
1.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1-2)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는 옛 언약 아래에서는 감히 자기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던 우리에게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써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요 1:12-13)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도 모르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죄와 죽음이 들어오고 우리 모두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와 같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썩을 육체가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거룩하고 영원할 모습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를 참모습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3-10)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깨끗하신 것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사람마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그러면 죄란 무엇입니까?
“죄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 (요 16:9)
주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자기를 믿지 않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왜 죄인가?
성경을 통해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따라 죄에 대해 정의하자면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간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단절되고 그것이 파괴되는 것인데, 첫 사람 아담의 죄 또한 바로 이것이 본질이며, 옛 언약 아래에서 지어진 범죄 또한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러한 세상의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완전하게 해결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죄가 없으신가? 인간의 혈통을 따라 나지 않으셔서 그러한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주님은 하늘에서, 즉, 하나님에게서 나신 분으로서 하나님과 단 한 번도 관계가 끊어진 적이 없으신 분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것은 너희의 조상이 먹고서도 죽은 그런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 6:56-58)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마다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그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알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에게도 미혹을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과 같이 의롭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악마에게 속해 있습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짓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또한 그것을 싫어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악마의 일 곧, 끊임없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틀어버리려고 하는 그 일을 멸하시려는 것입니다.
옛 언약아래에서는 그 일이 한계가 있고 또한 그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용인하시고 계셨지만, 이제는 악마가 멸망한 것 같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도 멸망을 받을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씨 곧, 진리의 말씀이신 주님이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가 여기에서 환히 드러납니다. 곧 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과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 아닙니다. (요 3:1-21)
한 뜻,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갑시다.
요한일서 3:1~12
요한일서 3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3:1)
우리는 어떠한 사랑을 받았는지, 그리고 받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우리를 계획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죄를 짓는 그 순간부터 구원의 계획을 알리시고 그 계획과 약속대로 하나 뿐인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의인으로 칭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으로 우리를 의인으로 칭하여 주시고 자녀 삼아 주신 것입니다.(롬5:1~10) 현재의 우리는 육신의 몸을 입고 살아가는 터라,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이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박국 선지자의 말처럼 믿지 않는 자들이 더 잘 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하1:1~3)
하지만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실 때에는 이러할 것이라고 요한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
이 땅에서는 우리가 잡고 사는 그 참소망이 드러나지 않고 눈으로 볼 수 없어서 마귀는 바로 그 점을 붙들고 계속 우리를 미혹하고 속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고 만질 수 없지만, 이미 육신의 삶을 통해서도 충분히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여도 그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할 수 있고 달려가고 나아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을 지키고 신앙을 지키고 나아가려는 우리를 유혹해서 넘어뜨리려고 하는 존재가 바로 마귀입니다.
요한은 마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 요일 3:7~10)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나도 모르게 죄 가운데 있고 죄를 짓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발견하고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우리에게 죄책감과 절망감을 더욱 더 강하게 하면서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우리를 나락에 빠지게 합니다. 그런데, 이 순간 죄가 무엇인지 다시 정립하는 것이 필요합닌다. 죄는 하마르티아, 궁수가 과녁을 쏘았을 때 화살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그 단어에서 비롯하여 사용된 말이 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의 방향에서 완전히 어긋나 있나요? 만일 하나님의 방향이 아닌 곳으로 나가고 있다면 다시 돌아오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향에서 빗겨 나가지만, 다시 그것을 발견하고 다시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오고 결국 하나님의 길로 계속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과 우리의 차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아합니다. 아무 생각이 없이 그저 자신이 원하는대로 자신의 마음이 기뻐하는대로 자신의 욕심과 욕망과 끝없는 자신의 지식의 교만을 향해서 달려가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마귀의 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게 하고, 성령님을 부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날마다 기쁨을 잃고 소망을 갖지 못한채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그 어느 부분도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완전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기억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항상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전적인 하나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깨닫는 것, 하나님의 길과 어긋나게 가고 있다고 깨닫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깨닫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다시 돌이키며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 번 우리 안에 새기며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려야할 감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뜻으로 향하며 하나님의 빛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마치 지그재그로 가는 것 같지만, 결국 그 방향은 하나님의 뜻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녁의 목표에서 완전히 빗나가고 벗어난 것, 그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 않아하고 두기 싫어하는 것, 그것이 죄인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에 가인과 같이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신의 의와 자신의 생각대로 드린 제사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고 가인은 분노하였습니다. 가인의 마음과 헹위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의 행동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예배는 나를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 감정을 일으키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내게 축복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시간 입니다. 그런데 이 예배의 시간조차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나를 위한 예배를 드린다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찌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죄의 심판자의 대상자들이 바로 이러한 자들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어찌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주인 삼은 우리들이 어떻게 불의와 짝이어 불의 가운데 계속해서 나아가며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에, 때로 빗나가고 때로 깨어질 지라도 그것을 깨닫는 순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보다 직선의 방향으로 어떤 사람은 지그재그로 어떤 사람은 약간 어슷하게, 모두의 시간은, 그리고 모양은 제각각 다르지만 결국 믿는 자들의 방향은 한 방향이 될 수 밖에 없으며 이들의 여정 가운데 이렇게 한 방향으로 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길은 어떤 이들에게는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방법의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자신을 내려놓고 구원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루어졌으며 이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 믿는 자들에게는 가장 축복되고 감사하고 쉬운 방법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 자기 자신이 주인된 자들에게는 가장 어렵고 힘든 방법인 것입니다.
오늘 저희의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뜻이 있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우리의 몸이, 우리의 삶이 모두 그것을 알고 그 뜻을 향해 가고 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 때로는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이 바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삶의 모습이며 은혜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방향으로 이끄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가장 선한 방향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믿고 우리 삶에서 놓아야 할 부분은 과감히 놓고 결단하여 달려나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아직 하나님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 자들에게 우리가 중보자로서 그 뜻을 전하며 거룩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
요일 3:1-12 / 김성덕 목사
최근에 생긴 용어 가운데 비트 가정이란 말이 있는데 혹 들어 보셨습니까? 비트란 바로 컴퓨터를 말하는데 비트 가족이란 가상 가족, 또는 사이버 가족이란 말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비트가족은 세상이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지 지금 급속도로 변해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한 단면입니다.
비트가족이란? 현실적으로 결혼을 하려고 하니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사람도 없고 그래서 사이버 안에 들어가 구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혼 상대자가 나타나 사이버 안에서 결혼도 하고 사이버 머니로 집도 마련하고 승용차고 사고 세간도 들르고 저녁에 퇴근하여 여보 나 왔소, 하면 여보 반가워요 하며 반응을 합니다. 그래서 최근에 드라마 가운데 불량가족이란 드라마가 인기가 있었던 것 같애요.
문제는 N-세대들이 삶을 사이버 공간에서 살다보니 가상 현상을 현실로 착각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비트 가정에 물론 갖출 건 다 갖추었습니다만 문제는 그기에 가정 구성에 가장 본질인 친권적인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가정의 행복이 깃들 수 있겠습니까? 비트가족 - 사실은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닙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 안에도 시뮬레이션 예수란 말이 생겨났듯이 신앙의 세계는 영적인 세계입니다. Spiritural space입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리스도인은 현실에서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아버지도 있고 하나님의 자녀도 있는데 그 속에 생명이 없는 신앙생활은 마치 비트 가족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교인들마저도 생명이 없는 신앙생활 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며 또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사도요한이 지금 우리에게 빛 가운데 거하라, 주 안에 거하라 고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오는 기쁨이 넘치는 삶 성도의 진정한 웰빙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요한1서의 전체 주제는 “빛 가운데 거하라” 즉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방해하기 위해서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유혹합니다.
이 미혹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2>
우리의 신앙이 어린아이에서 아비로, 청년의 신앙으로 성숙해야 하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특히 적그리스도의 미혹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주 안에 거하는 삶, 즉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녀답게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1.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그리고 사도 요한이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1절)
1절 [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랑을 어떠한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 세상에서는 이런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감탄을 하면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 합니다.이 말은 얼핏 보기에 매우 단순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어를 살펴보면 절대 단순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어떠한 사랑이란 말의 ‘어떠한’ 은 성경에 「포타포스(potapos)」라고 되어 있습니다.이 말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놀라움과 경탄을 표현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그 좋은 예로 마8:27에 예수님이 풍랑을 꾸짖어 잠잠하게 할 때 제자들이 [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 이것은 인간의 차원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일입니다.
말로다 표현할 수 없는 포타포스의 사랑 오늘 우리가 이 사랑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요3:16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사랑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이겠습니까?뿐만 아니라 그리고 ‘주사’ 라는 말도 그렇습니다.이 말도 역시 단순히 주는 것이 아니라 부어 준다 즉 영어에 샤워(shower)라는 말이 더 적절한 표현입니다. 여름에 폭우같이 쏟아 부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는 우산이나 비옷이 그리 도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베푸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이 왜 하나님의 포타포스의 사랑을 강조할까요? <3>
왜 청소년들이 가출을 하고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비행 내지 불량 청소년들이 되어 사회에 문제를 일으킵니까? 지금 미국이 앉고 있는 문제는 이라크 전쟁이 아니라 커가는 청소년 비행문제입니다.
왜 미국이 이런 청소년 문제가 일어나는가 하면 가정이 붕괴되니깐 그렇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맛보지 못하고 자라다 보니 결손 가정의 자녀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요한은 지금 교회 안에 이단의 세력이 들어와 유혹하고 미혹하여 교인들의 신앙을 흔들어 놓으려고 하고 있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 포타포스의 사랑을 바로 깨닫고 맛보면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폭우 같이 쏟아 부어시는 하나님의 포타포스의 사랑 이 사랑에 감동 받고 감격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현실적으로 달라진 것이 뭐가 있느냐? 는 것입니다.
1절 하반절 [ [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
이 말은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그 진가를 다 몰라준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예수 믿고 난 후 세상의 잣대로 재어보면 별반 달라진 것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가가 나타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하나님의 포타포스의 사랑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예수 안에 누릴 놀라운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모르는 사람들이 어찌 구원을 알고 영생을 알고 하늘나라 유업을 알겠습니까?
그럼 하나님의 자녀가 그 진가가 나타날 때가 언제입니까?
2. 하나님의 자녀의 진가는 언제 나타납니까?(2절)
2절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
이 기이한 사랑으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4>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유업을 얻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너무나도 놀라게 하며 우리에게 베푸시고 나타내실 그 기이한 사랑 앞에 어떻게 무엇이라 감사하며 그 이름을 찬양해야 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인가? 하면 바로 주님 앞에 설 때인 것입니다.우리들이 누리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비밀로서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세상은 그리스도를 모릅니다.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영광도 모릅니다. 구원도 영생도 친국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부요한 사람들이요 가장 명예로운 사람들인데도 세상에서 무시를 당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우리는 낙심하거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의 진가가 나타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심이 되면 그대로 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 나온다고 누구에게나 다 이 영광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이 소망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는 삶이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3.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3-6절)
3절 [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주를 향한 소망을 가진 성도는 - 깨끗한 삶,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깨끗한 삶 -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삶의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 그의 깨끗하심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그 비결은 바로 예수님과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 Godliness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느 정원사가 정원의 흙을 보고 "너는 어떻게 그처럼 좋은 향기를 풍기느냐?"고 물었더니 흙은 "주인이 나를 장미꽃 옆에 두었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지금 이 말을 하는 사도 요한을 보세요.
본래의 별명이 무엇입니까? 형 야보고와 함께 ‘우레의 아들’입니다. 성질이 얼마나 불같던지 붙여진 별명입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보듯이 항상 주님의 곁에서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가 되니 성급한 청년 요한은 성인이 되어 온유한 성격으로 변한 것입니다.
요한이 얼마나 변했으면 약 일 세기 전에 일부 신학자들은 <5> "요한 서신을 쓴 사람이 과연 사도 요한이냐"하는 의를 제기할 만큼 예수님을 가까이 하다 보니 요한이 이처럼 변한 것입니다.
깨끗하게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4절 [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
불법이라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을 말하는데 사도 요한이 서신에서 율법을 언급하고 있지 않는 점으로 보아 여기에 불법은 하나님을 뜻을 어기는 것을 말합니다. 죄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기 전에 하나님의 뜻에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다른 영적지식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당시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깨끗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5절에 [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
성도의 의로운 삶의 동기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이 우리 죄를 없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없이 하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 없이 사셨고 그렇게 행하셨습니다. 그의 삶으로 우리를 따라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거하는 자마다 죄짓지 않아야 합니다. 때로 연약함이 이를 때가 있어도 주 앞에 죄를 자백하며 회개함으로 죄에서 벗어납니다. 결코 의도적으로나 제 멋대로 죄를 범하고 무감각하게 살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6절에 [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치 아니한다 ] 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안에 거하는 삶 주님과 가까이 하고 주님과 친밀한 삶을 살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전혀 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을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란, 그리스도를 믿어 거룩하게 된 자들일 뿐 아니라
그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적극적으로 거룩을 추구하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때로는 죄에 빠지기도 하지만 <6> 계속해서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거룩을 추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6절 하반절 [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 고 합니다.
거리낌 없이 범죄하고도 아무런 회개나 변화가 없는 사람은 사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주님과의 사귐이 없는 사람임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는 의롭게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은 바로 의로운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4.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7-9절)
1) 7절에 [ 자녀들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 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이 어린아이에 머물지 아니하고 아비의 신앙으로 자라야 하며 예수님과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야 미혹을 받지 않습니다.
2)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8절 [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니이라 하나님의 아들의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
예수님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십니다. 마귀의 일을 "멸한다."라는 말은
"힘을 제거하여 무력하게 한다. 무장을 해제한다."라는 의미인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전히 마귀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이 순간에 마귀의 권세가 무장해제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16:33에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합니다.
예수 이름이 불러지는 곳에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마귀는 혼비백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패배를 의미합니다. 불행과 저주와 멸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 밖에는 없습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모실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씨가 내 속에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9절 [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났음이라 ]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거하도록,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7>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때 나타나는 삶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5.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아갈 때 나타나는 삶의 특징이 무엇입니까?(10-12절)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의 특징은 첫 번째로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나아가 적극적으로는 10-12절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고 마귀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혹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들으면 굉장히 기분 나쁜 소리지요. 그런데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구분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께 속했느냐? 아니냐? 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요1서4:7-8절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자는 바로 사랑하는 자인 것을 말합니다.
사랑의 손길 -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 저는 오늘 아주 평범하면서 진한 사랑의 손길 한 분 소개할까 합니다. 전북 익산이 고향인 키 150cm의 82세의 최(복순) 할머니이야기입니다. 다리 관절염 때문에 유모차에 의지해 걷지만 동네 국유지 공터를 일구어 자칭 [행복한 만물상 밭]에 채소농사를 짓습니다. 밭이 엄청나게 넓은데 할머니가 그 동네 이사온 후 황무지를 4년 동안 일구어 가꾼 밭이라고 합니다. 취재기자가 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많이 농사를 지어 무엇 하려고 하느냐? ] 고 물으니 [이 많은 걸 나 혼자 먹으려고 한 게 아니여. 이거 지어서 나도 먹지만 교회 노인대학에, 복지회관에 나눠 먹고, 이웃들과도 나눠 먹고, 오다가다 먹고 싶은 사람 뜯어 먹고, 뭐 그렇게 먹으려고 하는 거지] 라고 합니다.힘들지 않느냐는 말에 [모터도 오래 되면 녹이 슬고 고장이 나지 않겄어. 부속품도 삐거덕거리고 말야. 그런다고 안 써봐. 아예 녹이 더 슬어 아예 못쓰게 되지. 그렁께 더 녹슬어서 못쓰기 전에 자꾸 써야지. 녹슨 것에 기름칠 하드시 말여] 라고 합니다. 자신이 새벽에 일어나 새벽기도회 갔다가 일을 하러 오는 것은 <8> 고장 나고 녹슨 관절에 기름칠을 하는 거라고 합니다.하나님 앞에 가장 감사한 것은 1) 초등학교 3년 중퇴인데 그때 한글 깨우쳐 성경 읽을 수 있다는 것이고 2) 이곳에 오기 전까지 65세 때부터 약 20년 동안 병원 찾아가 자원봉사 할 수 있었던 것이야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요사이 교인들 좀 그래. 정직하질 않어, 좋은 사람들끼린 누가 안 친하게 지내겠어. 그런데 그건 그런 게 아녀. 안 친한 사람 함께 어울리게 하고, 나쁜 사람, 좋은 사람 만들고 하는 게 사랑이고 사는 거지. 요사이 교인들은 예수님을 잘 모르는 것 같어 내가 전도회 회장도 하고 그랬는데 나 그럴 땐 안 그랬어. 근데 요즘은 안 그래. 다들 끼리끼리 놀아. 그건 누구나 다 하는 거지. ]할머니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왠지 뜨끔하게 느껴지네요.
사실 사랑타령 처음 듣는 소리 아니지요 2000년 동안 이 강단에서 사랑타령을 하지 않습니까?
11절 [ 우리가 서로 사랑할찌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 한 두 번 들은 소리가 아니지요. 그런데 왜 교인들이 사랑의 삶, 실천하지 않습니까? 이기주의 신앙, 이기적인 삶 때문인 것입니다.
12절 [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
마귀의 자녀의 모델로 가인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가인은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의 모델입니다.
하나님도 형제도 자기 위해 존재하고 자기에게 손해나면 고개를 돌리는 이기주의자의 모델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너희는 가인같이 하지 말자고 합니다.
<맺는 말>
우리는 폭우 같이 쏟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포타포스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진가가 지금 당장 나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진 자로서 깨끗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손길로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인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가, 살인하는가?
요한일서 3장 11절~18절 / 설교자 : 조 정 의
극단적인 이분법은 위험하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빛과 어둠, 둘로 영역을 나눠 독자를 압박한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가? 어둠 안에 행할 수 없다.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하는가? 형제를 미워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세상을 미워하라. 진리를 따르는가? 거짓과 맞서 싸워라. 하나님 자녀인가? 죄를 짓지 말라. 회색지대는 없다. 왜 이토록 명백한가?
성별의 이분법으로 생각해보자. 남녀 성별 외에 제3의 성별이 있다는 걸 인정하면 큰 문제가 된다. 생물학적 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욕구와 싸워야 하는 사람의 존재와 고통을 부정하자는 게 아니다. 제3의 성별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성 정체성을 인정하고 내면의 갈등과 싸우며 하나님 기뻐하시는 길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막힌다. 존재하지 않는 제3 영역을 인정하면 그곳에서 사람들이 자기 욕구대로 살며 방종하기 때문이다.
요한이 명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소위 ‘세상적인 그리스도인’, ‘아웃사이더 성도’의 존재를 철저하게 부정한다. 영적 어린아이로 성장이 필요한 성도가 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 자녀와 마귀의 자녀 중간에 제3 영역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적당히 세상을 즐기고 죄를 범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를 섬기는 일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여도 괜찮다고 인정하고, 결국 방종하게 만드는 일을 절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은 참 하나님 자녀라면 누구나 맺어야 할 두 번째 열매를 가르친다. 첫 번째는 죄를 짓지 않는 것, 바른 적용으로 죄와 항상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회색지대 걸쳐 산다. 성령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 당신을 더욱 빛으로 인도하여 하나님 자녀의 참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시거나, 당신이 어둠에 속한 것을 명백히 드러내셔서 그곳에서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게 하시길 간구한다.
1. 기준: 하나님 자녀는 형제를 사랑한다(11절)
조금 전까지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난다고 말했고,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 곧 마귀의 자녀라고 분명히 선언했다(10절). 두 가지 열매가 모두 언급되었다. ①의를 행하지 않는 것—죄를 짓는 것, ②성도(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
그리고서 요한은 “우리” 곧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자녀가 된 자들은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 자녀로서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말이다. ①하나님의 자녀는 항상 죄와 싸우고 의를 행해야 한다. ②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신 모든 의로운 일의 완성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롬 13:8, “사랑은 율법의 완성”; 갈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이런 측면에서 참 하나님 자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열매는 서로 조화를 이룬다. 가장 크고 포괄적인 의의 열매는 사랑이다.
성도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요한의 독자(너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이다(요 15:12).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동일한 계명을 주셨지만(레 19:18), 이 계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계명이 되었다(요일 2:7-11).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근거),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분을 따라 서로 사랑할 수 있으며(본), 성령을 통해 능력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할 힘을 얻는다(원동력).
요한이 3장 본문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생각해보자. “보라!” 무엇을 보고 감격하라고 명하는가?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1절).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큰 사랑을 받은 자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요일 4:11).
2. 이유: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12-15절)
사실 ‘서로 사랑하자’라는 말은 하나님 모르는 세상도 캠페인 문구로 자주 사용할 정도로 일반적이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에게 더욱 요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한은 두 가문을 구분하고 성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미워하는 자를 악한 자 곧 마귀 가문 사람으로 구분한다. 생명 곧 영원한 생명에 속한 자는 사랑한다. 다른 말로, 하나님 가문 사람은 사랑한다. 결국 성도 사랑이라는 열매는 뿌리내린 곳, 우리가 속한 가문이 어딘지를 밝힌다.
자, 여기 마귀 가문에 속한 가인을 대표적인 예시로 만나보자(12절). 그는 우리 반면교사다. 가인은 누구에게 속하였는가? 그는 악한 자에게 속했다. 악한 자는 마귀다(요일 3:12; 5:18, 19).
가인이 무슨 일을 했는가? 그 아우를 죽였다(끔찍한 살인, 도륙, 도살, 잔인성 강조). 어떤 이유로 죽였는가? 필로는 ‘가인의 죄가 영원한 사망을 낳는 자기사랑에서 나오는 죄’라고 정의했다. 탈굼에선 가인이 심판, 내세, 의인의 보상, 악인의 처벌 등을 모두 부인하는 악인으로 평가한다. 심지어 유대인 문헌 중엔 마귀가 하와를 성적으로 유혹하여 낳은 자식이 가인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가인과 그가 행한 일을 이렇게 연결 지었다.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12절).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악한 행위를 낳는 자였고, 아우는 의로운 자에게 속하여 의로운 행위를 낳는 자였다. 그래서 가인이 아우를 죽인 것이다. 이것은 가문 간의 전쟁이다. 악한 자에게 속하여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의에 속하여 의를 행하는 자를 시기하고 미워한다(요 3:19-21).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요 8:42, 44). 아버지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13절에 요한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마귀에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미움을 받게 되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래 세상에 속했으나 거기로부터 건져내어 하나님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에 세상이 더욱 미워한다고 말씀하셨다(요 15:18-19). 하나님 자녀답게 살수록 미움은 더 커진다(현재형).
요한은 하나님 가문에 속한 자들에게 “가인 같이 하지 말라”고 명령한다(12절). 문자적으로 “악한 자에게 속한 가인과 같지 말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가 속한 가문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녀는 의로운 분, 하나님께 속했다(요일 3:7). 요한은 그것을 14절에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14절)
사망과 생명이 대조된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사망이 아니라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 곧 하나님과 분리된 관계가 사망이다(엡 2:1). 그럼 생명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믿어 죄와 허물을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된 상태다. 15절에 요한은 이것을 영생이라고 말했다.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자, 즉 소속이 바뀐 자들의 마땅한 열매는 “형제를 사랑함”이다. 이것은 토대가 아니라 표증이다. 구원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결과다. 이로써 우리 소속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이다(“알거니와”, 미래 분명하게 드러날, 현재 경험하는 실재).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의 소속은 어디겠는가? 사망이다. 종교적으로 얼마나 열심이 있든, 직분이 무엇이든, 교회 다닌 연수가 어떻든 관계없다. 사랑하지 않음은 여전히 그가 사망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날 때부터 속한 소속, 가문이 바뀐 적이 없는 것이다.
15절에서 요한은 더욱 강력하게 이 사실을 피력한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미워하는 것과 살인이 같은 수준의 죄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뿌리가 같다는 것이다(마 5:22). 형제를 미워하는 자나 살인하는 자 모두 처음부터 살인한 자 마귀에게 속해있다는 점에서 같다(요 8:44).
결론적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마다 영생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 즉 하나님과 화목한 가족 관계 안에 없음이 너무나 명백하다. 요한은 이 사실을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너희가 아는 바라.
잠시 당신의 뿌리, 가문이 어디인지 생각해 보라. 때로 성도를 향한 사랑이 부족할 때가 있다. 심지어 특정 성도가 미울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요일 1:9). 하지만 지속적, 반복적으로 성도에 대한 사랑 없음이 드러날 때, 오랜 세월 특정 성도를 향한 미움이 사라지지 않을 때, 회색지대에서 어둠 혹은 사망으로 당신의 소속이 드러나게 된다. 만일 당신이 그렇다면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라. 예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어 영생을 얻어라. 그러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것이다(요 5:24).
3. 방식: 하나님께 받은 사랑처럼 사랑한다(16-18절)
그러면 영생이 그 속에 거하는 자, 하나님 자녀는 어떤 열매를 맺는 것이 합당한가? 성도 사랑의 열매는 어떤 모양인가?
가인이 마귀 가문의 대표였다면, 하나님 가문의 대표는 16절에 나오는 그분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베푸셨는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요 10:11).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하지만 의인도 아닌 죄인, 선인도 아닌 원수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사랑의 크기는 얼마나 더 클까? 바로 그 사랑으로 하나님은 자기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셨다(롬 5:7-8). 요한은 16절에서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가 받은 사랑의 크기와 성격을 생각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형제자매에게 보여야 할 사랑은 어떠해야 할까?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가 맺어야할 성도 사랑의 크기와 형태다. 우리는 자기희생적인 사랑, 자기를 부인하는 사랑, 성도를 위하여 자아를 죽이는 사랑을 해야 한다.
흥미로운 대조가 아닌가? 마귀에게 속한 자는 남을 죽이는 자고 하나님께 속한 자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자신을 죽이는 자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 정의한 사랑은 말뿐인 사랑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이다(15개 모두 동사).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 자랑,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거나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 모두 자아를 죽이는 행위이다. 우리는 성도를 이렇게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런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혀 그런 사랑을 맺는 것이다(엡 3:17-21).
요한은 또 다른 행함에 주목하는데, 17절에 나오는 실질적 도움을 주는 행함이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나는 재물을 가지고 있고, 형제는 궁핍하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봤다(흘끗 본 것이 아니라 오래 주시함). 그런데도 도와줄 마음을 닫는다. 문자적으로 “자기의 내장을 닫으면”이다. 감정을 통제하는 장기(내장, ’속상하다’)을 닫는 것 즉 긍휼, 동정, 연민의 마음이 흘러나오는데 억지로 틀어막는 것이다. 그런 사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리 만무하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8절). 사랑은 말과 혀로 표현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에 부합하는 행함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요한이 특별히 주목한 행함은 성도의 필요를 보고 긍휼한 마음을 품고 실질적인 필요를 채우는 행함이다. 야고보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책망했다(약 2:15-16).
우리는 반드시 성도의 필요를 실제로 채우는 행함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왜 요한은 이것을 진실한 사랑이라 했을까?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은 다른 말로 ‘진리 가운데’ 하는 사랑이다. 복음의 진리와 일치하는 행함으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복음의 진리가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가르쳐 주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궁핍함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사 자기 아들을 내어줌으로 우리의 영적 필요를 채우셨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말한다(엡 5:25; 딛 2:14). 그 진리와 일치하는 행함이 무엇인가? 자기희생적 사랑, 자아를 죽이는 사랑, 그래서 성도의 필요를 채우는 사랑.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녀가 맺어야 할 사랑의 열매다.
적 용
오늘날 하나님 자녀는 큰 도전을 받고 있다. 갈수록 개인주의가 심해지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딤후 3:1-2, “말세에…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1980년대 세상과 2021년 세상은 얼마나 다른가? 이웃 사랑이 최고 미덕이었는데 이제는 자기 사랑이 최고 가치가 되었다. 교회도 그 막강한 변화의 급류 속에 서 있다.
하지만 교회는 달라야 한다. 그 터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랑, 세상이 갈급해 하는 그 사랑을 교회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 2장이 묘사하는 초대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행 2:42-47).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보라. 성도를 사랑하는 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에서 나온다. 요한은 그래서 3장 1절에 “보라”, ‘감격하고 열광하라’고 간청한 것이다. 당신이 뿌리 박혀 있는 사랑의 너비, 길이, 높이,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라(엡 3:19). 성도를 향한 사랑이 방전될 때마다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 사랑으로 충전되어야 한다. 마음에 미움이 싹틀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 그 사랑으로 미움을 제거하고 사랑을 심어라.
둘째, 사랑하지 않는 죄, 미워하는 죄를 자백하라. 마틴 로이드 존스는 본문에서 요한이 ‘사랑하라’ 명령했지 ‘좋아하라’고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어떤 성도는 기질적으로 잘 맞지 않고 좋아하기 힘든 면을 가지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사랑’이 그 불편함, 어려움을 뛰어넘어 ‘좋아하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우리는 반항심을 가지고 있다. 자아를 죽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런 죄를 우린 회개해야 한다. 주님이 당하신 수치와 부끄러움을 아는 자로서 주님께 용서를 구하며 불편함과 어려움을 넘어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라.
셋째, 성도에게 관심을 가지고 필요를 채워라. 절대로 자기 자신과 가족만 돌보는 성도가 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의 시간, 재능, 영적 은사, 재물의 일부는 반드시 다른 지체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성도에 관한 관심을 끌어올리는 최고의 수단은 기도다. 반갑게 인사하고 교제하며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도 필요를 발견하는 좋은 방법이다. 성도가 모인 곳에 함께 하는 것 역시 서로의 기쁨을 채우는 귀한 일이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실질적 성도 사랑으로 시험하여 보라(엡 5:10).
하나님의 자녀
요일 3:1-8 / 한경직 목사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이 시간,『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말씀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보편적으로, 넓은 의미로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자녀라,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지음을 받았다 하는 뜻으로, 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하는 뜻으로 우리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말씀하는 이「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뜻은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특수한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 복음 一장 十二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서 난 자들이라.』
다시 말하면, 우리 성경에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하는 말은 아무나 가리킨 말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를 믿는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으로 다시 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지 못한 이들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본문 중 一절에 보면『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요한 복음 八장 四十四절에 보면, 주님께서 당시에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 가운데『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그렇게 말했습니다. 듣기 좀 어려운 말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못되었으면 아직도 마귀의 자녀올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문제를 생각할 때에 먼저 깊이 나 자신을 살펴서 내가 과연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내 구주로 받들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무가 무엇입니까? 이런 몇 가지 점을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원수 되었던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크신 사랑을 베풀어서 독생자를 주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 해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원수 되었던 우리를 천지를 지으신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만 왕의 왕 하나님의 아들과 딸을 삼으셨습니다.
가령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 특권을 좀 기억할 수 있겠는지요? 옛날 우리 한국에는 임금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어떤 임금께서 우리 나라 백성 가운데 가장 천한 사람, 특별히 죄 많이 지은 젊은 남녀를 사람으로써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궁중으로 불러들여서 입양을 하고 왕의 아들과 딸을 삼았다고 한다면 그 젊은 왕자와 공주가 된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임금님의 얼굴을 쳐다볼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 생각이 많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이미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죄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람이요, 사실 그리스도를 못박은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 주실 뿐더러 우리를 종으로 삼아 주셔도 감사하겠거늘 하나님의 아들과 딸을 삼아주셨습니다. 아들과 딸의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제 생각에는 천사보다 더 높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천사는 하나님 앞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자이니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으면 천사 위에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의 그 지위, 그 영광, 그 특권이 얼마나 크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압니까? 만일 우리가 이것을 깨달아 안다고 하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감격한 마음이 많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과 딸은 지위만 그렇게 높은 것이 아닙니다, 상속자입니다. 후사(後嗣) 자입니다. 영원히 하늘의 기업을 이을 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그 특권을 먼저 기억해야 됩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소망이 어떠한지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기 보니 장차 어떻게 될 것이 아직 나타나지는 아니했지마는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는 우리도 그와 같이 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아직도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 앞으로 어떤 하루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때가 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사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시기에 우리가 믿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지, 우리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왜? 우리처럼 더럽고 우리처럼 부족한 것이 그리스도와 같이 될 때가 있어요? 그러나 여기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지금 불완전하지마는, 우리가 지금 부족하지마는, 우리가 사실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하면, 우리의 신령한 현관 속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죽음이 없는 불멸의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을 때에는 그 때부터 우리 마음속에 거룩한 성품을 새로 유전으로 받았습니다. 옛날 예사 사람의 유전은 우리가 버리고, 죄 지은 아담 혈통의 유전을 우리가 다 버리고, 하나님의 새 유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성결하심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풍부한 성품이 새로운 유전으로 우리 마음가운데 와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아직 다 나타나지 아니했지마는 이 앞으로 완성될 때가 있습니다. 마치 봄 동산에 자라나는 꽃나무와 같습니다.
그 꽃나무가 처음에 풀밭에서 싹이 돋을 때야 다란 풀이나 꽃나무나 뭐 별로 다른 것 있습니까? 그저 다 비슷하지요. 그러나 그 꽃나무가 자라면 마지막에는 아름다운 꽃이 핍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이렇게 아름다운 꽃으로 필 때가 있습니다. 마치 초생달은 아주 작고 빛이 희미하지만 이것이 점점 커져서 보름달이 될 때가 있다는 그 말입니다.
구름 속에 있는 잔 빗방울이 그대로 있을 때, 무슨 빛이 납니까? 그러나 햇빛을 받을 때에는 청, 황, 적…七색의 무지개가 될 수 있어요. 우리 믿는 자의 소망이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하나님의 딸로서의 우리의 장래가 이와 같이 아름답고 이와 같이 위대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현재 의무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현재 의무가 무엇일까요? 이런 특권이 있고, 이런 소망이 있고,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현재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달이 되었으면,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대해서 동양에서 오랫동안 늘 힘써서 가르쳐 온 효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효자와 효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젊은 사람들, 여기 말하지마는 우리 부모에게 대해서 효도하는 첫 길이 무엇인지 압니까? 그것은 우선 부모님의 마음 상하는 일을 안 하는 것이 효도의 첫 길입니다.
제 경험 가운데도 벌써 여러 가정에서 부모 된 사람이 자녀 때문에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왜? 그 아들과 딸이 있기는 있는데 아들과 딸이 죄를 짓습니다. 옳은 길을 가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 아버지의 좋은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하면, 우리가 제일 조심할 것이 무엇입니까? 죄를 짓지 아니해야 됩니다. 사실 요한 一서에 보면『하나님께로 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아무 죄도 안 짓는다는 말은 아니고, 계속해서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도 이 죄악 세상에서 살 때에 잠깐 잘못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어떤 것이 죄인 줄 뻔히 알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고 하면 제일 먼저 죄를 짓지 않아야 됩니다. 죄를 멀리 해야 됩니다.
또 그 다음에 효자가 되는 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래 우리 동양도덕에서 가르쳐 내려오는「양지」를 해야 됩니다. 뜻을 잘 받들어야 됩니다.『언제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라』는 뜻입니다. 제가 들으니 옛날 효자들이나 양반 가정의 자녀들은 아침저녁으로 꼭 부모에게 가서 문안을 드렸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풍속이 거의 다 없어졌지요. 아마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첫 길은 항상 부모님께 가까이 있을 것이요, 편지도 자주하고, 자주 문안하고, 안부를 항상 물어보고, 부모 가까이 에 있는 것일 거예요. 아마 그 비슷하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대해서도 효자 노릇을 하려고 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가까이 하는 것일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로, 묵상으로, 예배에 참석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뿐더러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언제든지 어디 있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려고 함으로.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신 말씀이『내가 세상에 온 것은 내 뜻대로 이루려고 온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고, 또 우리가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하면, 항상 부지런해서 부모님이 기뻐하는 일을 많이 해야지요. 좋은 사업을 많이 해야지요. 아마 그와 비슷할 것 같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좋은 효자가 되려고 하면 주의 일을 많이 해야지요. 아무리 잘난 아들과 딸이 있다고 할지라도 게을러서 일하지 않는 자녀를 두었으면, 그것이야말로 민망한 노릇이지요. 부지런해서 주의 일을 열심히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또 그리고 자식은 아무래도 부모를 닮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하면, 부모를 닮아야 합니다. 부모의 성품을 닮아야지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고 화평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떻든지 사랑과 화평의 성품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닮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도 산상보훈에 말씀하실 때에『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겠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좋은 아들과 딸이 되려고 하면 믿는 형제와 형제, 자매와 자매, 동포와 동포 사이에 사랑과 화평의 생활을 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귀하고 훌륭한 아들과 딸이 되려고 하면 혹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에 그 징계를 바로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잠언 三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며 꾸지람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사랑하는 이들을 채찍질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시기를『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지 아니하신다고 할 것이면 우리는 사생 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 참 아들은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이 징계를 받을 때에 기쁜 마음으로 받을 줄 알아야 참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될 것입니다. 제가 옛날 어떤 친구를 한 번 찾아가 보니까 책상에다 시계를 놓기는 놓았는데 엎어놓았어요. 그래서 시간을 보려면 제켜서 보고 다시 엎어놓는단 말입니다. 그것을 보고 내가 이상해서『그 시계를 왜 엎어놓았습니까?』하고 물어 보았어요. 그랬더니 그이가 얼른 대답하는 말이『그거 이상합니다. 이놈의 시계는 꼭 엎어놓아야 바로 갑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엎어놓을 때가 있어요 왜? 바로 가라고. 징계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말씀하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좋은 아들과 딸이 되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전적으로 그를 의지할 것입니다. 효자가 자기 아버지의 말씀을 의심할 수 있습니까? 효자가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까? 사실 세상의 부모는 요새 보니까 더러 아들과 딸을 내다 버립디다. 하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과 딸을 끝까지 그 손에 쥐고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성 프랜시스가 처음에 은혜를 받아서 그저 주님의 일만 하고, 옷도 해주면 가난한 사람에게 갖다주고 이렇게 되니까 자기 아버지는 크게 낙심하였습니다. 자기 아버지는 큰 부자요 포목상 주인이었는데 이 애가 커서 자기의 사업을 계 대할까 생각했는데 사업을 할 생각은 안하고 돌아다니면서 기도하고 주의 일만 하고 도무지 자기가 하라고 하는 일은 안 한단 말입니다. 책망해도 쓸 데 없고 때려도 쓸 데 없어요. 마지막에는 성이 나서『이놈, 내 아들 된 것을 아주 파면해 버리겠다』고 호적에서 빼어버리고 그 때 법관에게 가서 그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법관도 할 수 없이『이제는 아무개 아들이 아니라』고 호적에서 빼도록 선언을 했습니다. 그 때에 성 프랜시스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자기 입었던 옷까지 다 벗어서는 자기 옆에 계신 아버지에게 갖다 놓으면서『아버지, 이것 받으세요. 이 앞으로는 내 아버지는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부모는 혹 우리를 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성 프랜시스를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하면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모든 근심과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 것입니다.
더 길게 말할 시간이 없습니다. 여기 앉은 여러분이나 여기 선 저나 이렇게 다 부족하지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과 그 위신, 그 지위, 그 영광, 그 품성을 잊지 마십시다. 또 우리가 이렇게 부족하지마는 장래에 완성될 때가 있는 것을 바라보고 낙심하지 마십시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살 때에 어떻든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지 말고, 하나님을 항상 기쁘시게 하면서 사랑과 화평의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징계를 받을 때에도 기쁨으로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요한일서 3:9-10
신자는 세상 사람과는 다릅니다. 다르기 때문에 다른 점이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다르다 다르지 않다는 분별을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신자의 다른 점의 기준은 세상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신자의 다른 점을 보여주는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준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다르게 사셨습니다. 따라서 세상과 다르게 사신 예수님을 통해서 신자가 세상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점은 자유함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 매여 삽니다. 자신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매일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유로우신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항상 근심과 염려 불안과 초조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하나 벗어버리는 삶을 살기보다는 거미줄에 얽힌 파리처럼 세상에 얽혀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처지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우리가 과연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자유하기 위해 힘을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가 세상과 다른 모습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힘쓴다고 해서 자유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희미하게나마 그 맛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고, 그리스도에게로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철저한 절망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참으로 자유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자유하지 못하고 세상에 얽혀 살아가는 자신의 믿음 없음과 무능함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만 살아있는 예수님에 비해 세상의 온갖 근심과 걱정을 다 가지고 살아가는 자신의 악함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게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 없음을 볼 수 있어야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사랑에 붙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신자들을 믿음에 대해 자신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믿음에 대해 절망하기는커녕 할 수 있다는 큰소리를 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들이 십자가에서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에 깊이 빠져들 수 있겠습니까?
신자가 세상 사람과 다른 점은 자신의 죄에서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답게 사는 것입니다. 신자답다는 것은 착한 행위로 인해 세상의 칭찬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3:1절에 보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아버지도 아들도 모릅니다. 그런 세상 사람들이 신자를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칭찬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물론 욕을 들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세상 사람의 칭찬을 받으니까 신자다울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내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게 합니다. 그러한 가능성을 포기하기 위해 자유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자유하지 못한 우리의 못남과 악함을 깊이 자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이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계십니까?
요일 3:1-3 / 우인택 목사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예배가 비정상적으로 드려지고, 또 이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드릴 필요를 느껴서 그동안 말씀을 전하던 요한일서를 잠시 내려놓았었는데, 4개월만인 오늘부터 다시 요한일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앞부분에서 ‘처음 가졌던 신앙’을 잘 유지해야 하며 그를 위해 미혹하는 자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늘 성경을 가까이하고, 말씀대로 살기에 힘써야 함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2:3-6, 24, 27), 오늘 말씀은 그러한 삶을 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1. 먼저 1절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라는 멋진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여러분 스스로를 솔직하게 돌아볼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 알고 있습니까?
또 그것을 얼마나 생각하며 사십니까?
‘그것을 얼마만큼 생각하며 사는가?’ 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척도’이자, 우리의 삶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동기’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집중하면, 일을 빨리 배울 뿐만 아니라 좋은 성과도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에 대하여 많은 관심이 있지만 그럼에도 그 일을 생각하지 않고, 연구하지 않고, 그 일을 배우고 익히기에 힘쓰지 않는다면 그 관심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관심은 그저 상상에 불과할 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하고 배우고 행하기에 힘써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열심을 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또한 ‘온전히 믿지 않는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요한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러하도다”
자기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푸셨는지 분명하게 알고, 그렇게 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믿음의 삶을 살면 마땅히 그 삶이 형통하고 복되고 잘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믿음의 삶에 적색등이 켜질 때가 적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가족들에게 핍박받고, 어떤 때는 이웃에게 핍박받고, 어떤 때는 지금처럼 코로나사태로 주일예배 드리는 것까지 전 국가적으로 핍박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우리가 분명한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고, 우리의 믿음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핍박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요한은 이러한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요한복음 1:5에서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생명의 빛’을 비춰 주셨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 빛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에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2:14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육에 속한 세상 사람들이 영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은 잘 모르고 하는 것이기에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이고, 우리가 살고 전해야 하는 복음입니다.
이 때문에 순교하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도 처음에는 우리를 핍박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생명의 빛을 분별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던 우리들을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나를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알아주시고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 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은혜입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세상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포기할 수 없고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그들도 구원받을 그날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를 잊지 않고 항상 기억함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복음의 삶’을 기쁨으로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이어지는 2절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여기서 사도요한은 성도들의 신분을 ‘이미’와 ‘아직’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성도란 지금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그러나 ‘아직’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전에도 몇 번 설명했지만 ‘이미’와 ‘아직’이라는 말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지만, 동시에 재림하실 때 완성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의 삶은 2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지금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 한” 상태로 사는 삶입니다.
성도들의 현재 상태는 영적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지만, 육체가 이 세상의 죄악 가운데 있으므로 아직은 완전한 영광에는 이르지 못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2절 후반부에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 성도들이 예수님과 동일하게 될 것’임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당시 아직 그의 영광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아 세상 사람들이 그를 몰라보고 핍박했듯이 우리들도 핍박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예수께서 이 땅의 사역을 온전히 감당하시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권세를 받으셨듯이,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5. 그런데 여러분, 우리에게 이러한 영광이 약속되어져 있음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지금 이 땅에서의 삶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는 완전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그 날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어떠한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3절 함께 읽습니다.
“주를 향하여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여러분, 깨끗한 손을 가진 사람과 악수하려면 어떠해야 합니까?
내 손 역시 깨끗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눅 들지 않습니다.
더러운 것이 묻은 손으로는 악수를 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악수를 청해도 양심상 손을 내밀지 못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더러우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할 수 없습니다.
결코 거룩하신 예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 날이 되면 죄인들은 예수님께서 지옥으로 가라고 명하시지 않아도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스스로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천국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날에 거룩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천국으로 들어가기를 소망한다면 먼저 스스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6.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깨끗해질 수 있습니까?
요한일서 1:7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빛은 5절에 ‘하나님’,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까이하면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게 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길을 교훈 받고,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교훈받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려면 ‘주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행 6:4, 딤전 4:4-5).
설교 시간에 말씀의 은혜를 받았다 할지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그 말씀이 심령에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아갈 능력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함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가 수레의 두 바퀴처럼 병행되어야만 깨끗한 삶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사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소망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들음으로 삶의 나아갈 길을 교훈 받고, 또 기도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으며,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담대히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7. 특히 여러분, 교회는 ‘의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죄인들의 모임’ 임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러시겠지만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게 된 동기들을 물어보면 다 남다른 사연들이 있습니다.
불치의 질병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 사업에, 결혼에, 여러 가지 관계에 실패해서 믿게 된 사람, 버림받고 소외당한 외로움 때문에 믿게 된 사람...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험한 죄를 짓고 회개하고 뉘우치고 예수를 믿은 사람도 있습니다.
또 부모님을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믿게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찾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질병과 실패와 상처와 죄악된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교회란 의인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 됩니다.
죄로 물든 사람, 상처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서로 의지하며 힘을 모으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삶의 아픔과 상처와 죄악들로 가득 찬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끈을 놓친다면, 그 순간 교회는 서로 상처주고 분열되고, 무너지고 맙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교회는 오히려 사회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곳, 길 잃은 양이 아니라, 길 찾은 늑대들이 우글거리는 곳, 세상의 다양한 악들이 모인, 세상에서 가장 험한 곳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사탄은 마치 ‘굶주린 사자처럼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달려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그날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무엇으로 그 사랑을 간직할 수 있는지를 기억하며 거룩한 교회를 지켜나가는 ‘믿음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코로나사태로 어지러운 이때에 다시 한 번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고 이 시대의 방주인 교회를 깊이 생각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기도>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 잊어버리는 순간 구원에서도 멀어지게 됨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말씀과 기도로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고 삶을 거룩하게 살아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나라를 선물하는 저희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혹 믿음의 삶에 적색등이 켜질 때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함으로 더 큰 하나님의 사랑 앞으로 다가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일 3:1-10 / 정도열 목사
요한일서에는 여러 가지 주제들이 나오지만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진리와 의와 사랑입니다. 이는 당시 수신자들의 공동체를 어지럽히고 떠난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성도들을 지키고, 복음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필요한 주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진리를 부정했습니다. 또 부도덕하였습니다.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야말로 가장 신령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도록 우리가 확신해야 하는 복음진리가 무엇이며, 복음을 영접한 사람은 왜 빛 가운데 거하며,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가를 논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사도 요한은 남아 있는 성도들에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고 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자녀는 왜 죄 가운데 거할 수 없는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신령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며, 그들은 마귀에게 속한 자요, 마귀의 자식들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정체성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을 깨끗하게 합니다(1-3)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아버지께서 얼마나 큰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 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자녀라는 말은 친 자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양아들로 받아들여졌다고 하며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법적인 부자관계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휘오스’(양자)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테크나’(친자)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말은 법적인 아들이 아니라 친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친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가 그러하도다'라고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친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인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세상은 그 진가를 몰라준다는 것입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믿는 성도들을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무시하고 자기들은 신령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받았는지, 우리 내면에 얼마나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는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는,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알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든 특권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사귐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와 같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참 모습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우리가 '주와 같은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화됩니다(빌 3:21). 지금은 우리가 주님을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흐릿하게 보지만 그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주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날에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우리가 다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의 영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랑을 받고 이런 소망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큰 사랑에 보답해야 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사람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에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런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깨끗하고 성결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의 성결한 삶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모든 삶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친아들과 양아들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양아들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친아들은 아버지를 닮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택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입니다(롬 8:29).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많은 형제 중의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으로 그의 자녀가 되었고, 오실 주님을 소망한다면 자연히 자신을 깨끗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은 신령한 지식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깨끗한 삶을 살지 않아도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생활이 깨끗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며,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을 가지지 않은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자요, 다시 오실 주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에 우리도 주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확신한다면 그런 놀라운 특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서 깨끗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절제하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II. 하나님의 자녀는 범죄하지 않습니다(4-6)
하나님의 자녀들은 둘째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요한은 먼저 죄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립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죄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이 말씀은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은 죄가 없으며 불법을 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자들에 대해서는 1장 10절에서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자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그것은 구원과 상관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는 것이라고 했고, 죄는 곧 불법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불법이란 무엇입니까? 법을 어기는 것이 불법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 불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된다는 법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법을 어기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하는 것은 불법을 행한 것입니다. 또 하라는 법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는 것이 불법입니다. 안식일을 더럽히고 부모를 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죄는 곧 불법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불법을 행합니까?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법이라는 말은 무법이라는 뜻입니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은 무법자들입니다. 무법자는 정말로 법이 없을까요? 황야의 무법자는 무엇이 법입니까? 자기가 법입니다. 법이란 무엇이 옳고 그른가, 무엇이 선하고 악한가 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지켜야 할 도리가 무엇인가? 피조물로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성경에 그 기준을 제시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을 무시하고 자기가 법이 되어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는 사람이 무법자입니다. 사람들마다 자 자기 나름대로 법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경에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법을 만들어놓고 그 법대로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처럼 모든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불법을 행하는 죄인입니다. 어떤 면에서 모든 인간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없애려고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을 말합니다. 그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나타나셨지마는 그에게는 죄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같이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죄를 짓지 아니하셨습니다. 평생 죄 없이 사셨습니다. 죄를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모든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를 멀리 옮기셨습니다. 주홍같이 붉은 죄를 눈과 같이 희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십니다(2:1).
그러므로 6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마다 범죄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마다 정말로 범죄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한 번도 범죄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한 사람입니까?
1장 10절에서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마다 거짓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또 2장 1절에는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 변호해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은 누구에게 하는 것입니까? 모두 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죄인이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변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범죄하는 사람마다 그리스도를 보지도 못했고,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범죄한다는 말은 1장 9절에 나오는 우리가 자백하는 죄와는 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말하는‘범죄한다’는 말은 지속적이며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죄 가운데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근본적으로 거듭나지 아니하였고, 그리스도를 보지도 알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그런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말을 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죄에 거하면서도 자기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을 향하여 경고하는 것입니다. 또 그런 자들에게 미혹되기 쉬운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는 사람은 절대로 그런 죄를 짓지 않는다, 지을 수 없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저는 지난 한주 사무엘상 일용할 양식을 집필하면서 사울과 다윗에 대해서 많이 묵상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온갖 불법을 행하면서 끈질기게 다윗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때로는 자기가 잘못했다고 눈물도 흘리고, 다시는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에 대한 시기심과 증오심에 사로잡혀 그 죄를 끊어버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사울은 악령에 시달리다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울과 같은 사람이 바로 지속적으로 죄 가운데 거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실수할 수 있고, 어쩌다 넘어져 죄를 범할 수는 있습니다. 성도라고 완벽할 수 있습니까? 성도들도 죄를 짓습니다. 고의적인 죄를 짓기도 합니다.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서 싸우는 모습을 보면 불신자들보다 다 악랄하게 싸웁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욕을 얻어먹습니다. 그만큼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죄를 짓거나 죄 가운데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처럼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해 괴로워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를 지을 수는 있으나 죄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없애려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를 싫어하고, 죄를 멀리하고, 작은 죄라도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하게 됩니다.
1982년,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은 “깨어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s Theory)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어느 날 불량배가 가게의 유리창을 깨고 도망갔습니다. 가게 주인은 작은 피해라고 생각하여 깨진 유리창을 즉시 갈지 않고 종이로 대충 가리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에 깨어진 유리창 앞에 누가 쓰레기를 갖다 놓았습니다. 또 누가 와서 벽에 낙서를 해 놓고 갔습니다. 그러자 그 주변에 불량배들이 와서 싸움판을 벌였습니다. 그러면서 손님들이 눈에 띄게 줄어 갔습니다. 결국 가게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이 논문에서 이런 결과가 온 것은 깨어진 유리창을 방치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깨어진 유리창을 그냥 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게 주인이 건물을 관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쓰레기를 버리게 되고, 낙서를 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급기야는 불량배들이 모여들어 싸움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깨끗함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소한 죄라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항상 자신을 깨끗하게 관리하게 됩니다(살전 5:22). 죄 가운데 머물 수가 없습니다.
III. 하나님의 자녀는 의와 사랑을 행합니다(7-10)
7a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 말씀은 영지주의를 전파하는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비밀스런 지식, 즉 영지(靈智)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영지를 깨달은 사람은 육신에서 자유로워져 도덕적으로 방종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신학과 비윤리적인 가르침이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을 미혹시켰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다르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7b,8)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심과 같이 의를 행함으로 의롭게 살고자 합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의를 본받아 삽니다. 그러나 마귀의 자녀들은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죄를 짓고, 죄 가운데 거합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하였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범죄하였습니다. 마귀는 간교합니다. 창세기 3장에 기록된 대로 마귀는 여자를 온갖 감언이설로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했습니다.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그때부터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 때문에 마귀에게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히 2:15).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이 마귀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아시고 여자의 후손 가운데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창 3:15). 이 약속대로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고 있는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무장해제를 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죽기를 무서워하여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하셨습니다(히 2:14,15). 그래서 우리가 마귀에게 미혹을 당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녀들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 가운데 계속하여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를 짓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씨앗이 우리 속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씨가 무엇이냐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우리 그리스도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씨는 하나님의 말씀, 또는 복음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시 119:11 ; 렘 31:33).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씨앗처럼 심겨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계속해서 죄 가운데 머물면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심기어진 사람은 항상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게 되고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싹이 트고 자라서 백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좌우에 날선 어떤 칼보다 예리합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게 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우리에게 심겨진 말씀을 빼앗아가고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야 합니다.
또 칼빈은 그리스도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씨는 성령이라고 했습니다(롬 8:11; 고전 3:16).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지속적으로 죄 가운데 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항상 우리 마음에 진리의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성령께서 그때그때 들려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따라 행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를 행하게 하시고, 형제를 사랑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친 자녀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거룩함에 이르는 것이요, 성화입니다. 이 성화의 단계를 거쳐서 아버지의 영화에 이르게 됩니다.
똑같이 교회 생활을 해도 하나님의 자녀가 있고, 자녀가 아닌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은 죄를 지을 때마다 성령께서 그 안에서 계속하여 죄를 깨우쳐줍니다. 회개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래서 결국 회개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런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회개하지 못하고 끝내 돌이키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마귀의 자녀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마귀의 자녀들은 의를 행치 아니합니다. 불법을 행합니다. 끊임없이 범죄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형제를 미워합니다. 불법을 행하고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마귀의 자녀들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께서 의로우심과 같이 의를 행합니다. 형제를 사랑합니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확실히 구분되어집니다. 좋은 나무는 그 열매를 통해서 밝혀집니다(약 3 12).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행위가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에 마귀의 자녀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개정) 이처럼 죄에 거하는 생활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녀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고 마귀의 자녀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중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하든 마귀에게 속하든 하나입니다. 인간은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요한이 구분하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구별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의'와 '사랑'입니다. '의'와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이 성품은 서로 상반된 성품입니다. 의는 심판을 요구하고, 사랑은 용서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성품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죄는 철저하게 심판하시지만 죄인은 구원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귀의 자식들은 계속하여 불법을 행하고 형제를 미워합니다.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마귀의 자녀입니다. 사랑에 의가 없으면 죄가 틈타 들어오고, 의에 사랑이 없으면 저주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의를 행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첫째로 자녀는 자신을 깨끗하게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자녀는 죄 가운데 머물지 않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자녀는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