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한민국 헌법전문에는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1919년 4월 13일 수립된 임정의 공식 종료시점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도대체 언제 종료된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8·15 해방 후 한반도에 미·소 양군이 점령하여 군정이 실시되었으니 임정이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가
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환국 후 일정기간 활동한 임정의 실체를 부정하는 것은 애국선열들에 대한 모독인
동시에 역사를 외세에 의존하는 비자주적인 처사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일제 36년의 조선총독부 통치도 우리의 역사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경교장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반세기가 넘도록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임정은 비록 개인자격으로 환국하였지만 한국민의 입장에선 정부가 들어온 것이며 실제 이곳에서 국무회의와
임정포고령을 선포하는 등 완전한 자주독립의 의지가 곳곳에 배어있는 위대한 역사의 현장으로 필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라고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헌법전문에 임정의 법통이 아니라 미군정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닌가 심각히 고민해
볼 일이다.
서울시 종로구 평동 108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경교장 옆에는 서울시가 세워놓은 작은 표석이 있는데 여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광복 이후 사시다가 서거한 곳」
과연 이 내용이 경교장이 갖고 있는 진정한 역사적 의미란 말인가?
필자는 백범 김구 선생이 환국하여 안두희에 의해 살해될 때까지 3년 7개월(1310일)간 기거했던 경교장의
역사적 의미를 대략 3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이며
둘째는 최초의 남북협상 산실이라는 것이며
그리고 셋째는 백범 암살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임정 마지막 청사라는 주장은 임정이 환국한 후 바로 경교장에서 임정 당면정책을 발표하고 개인자격의
입국이지만 확고한 임정견지를 선언하였으며 최초의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비록 군정 하에서 좌절되었지만
임정포고령을 선포하는 등 1946년 2월 13일까지 4개월(82일)간 청사의 기능을 하였다는 이유이고,
최초의 남북협상 산실이라는 것은 48년 남북에서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려고 할 때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가 중심이
되어 옛 임정요인들과 함께 온몸으로 분단을 막고자 온갖 비난과 오해를 무릅쓰며 남북협상을 추진한 곳 이었다는 이유이고,
백범 암살 현장이라는 것은 평생을 오로지 조국의 해방과 통일을 위해 헌신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육군소위이자 미국 육군방첩대(CIC)정보요원인 동포의 손에 처참하게 살해된 비극의 현장이라는
이유에서 이다.
경교장은 일제 때 광산업으로 부자가 된 최창학이 1938년 조선제일의 건축가인 김세연의 설계로 지은
건평 265평의 양식2층(지하1층)건물로서 임시정부환국 환영준비위원회가 운현궁, 동대문 옆의 조선 기와집 등 임정의
숙사로 물색한 곳 중의 하나로 준비위원장인 김석황과 최창학의 인간관계가 작용하여 결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백범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이승만도 임정환국 며칠 전에 경교장을 방문하여 일일이 건물 내부를 둘러보며 세심한 관심을 보였다 한다.
그리고 원래 이름은 죽첨장이라고 불렸으나 김구 선생이 왜식 이름이라 하여 옛 지명(경교장)을 되살려 경교장으로 바꿔
불렀고 우연한 일이지만 백범 암살범 안두희의 아비 안병서와 최창학은 일제 때 압록강토지개량주식회사라는 사업체를 동업한
일도 있으며 또한 서울 인구가 140만일 당시 김구 선생 장례에 무려 124만 명의 조문객이 문상을 하였던 곳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서 깊은 경교장의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경교장은 백범 서거 후 소유주인 최창학이 유족에게 돌려받은 다음 자유중국 대사관으로,
6·25때는 미군 병원 주둔지로, 9·28수복 후에는 미군 특수부대 주둔지로,
이후 월남 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68년 고려병원에 인수되어
현재 삼성생명 소유로 강북삼성병원 부속 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며
국무회의장은 원무과로 김구 주석 집무실(암살 장소)은 의사들의 휴게실로 변하였다.
그나마 이러한 경교장에 위기가 찾아왔다.
그것은 96년 삼성이 이 자리에 17층 규모의 병원을 신축하려고 하여 철거될 운명에 놓였고 여론의 반대로
이 계획은 잠시 유보되었으나 언제 또다시 철거가 시작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필자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경교장복원운동에 나섰으나 현실의 벽이 이토록 높을 줄은 몰랐다.
그해 백범 47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유명정치인들과 기자들에게 경교장복원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으나
관심을 갖는 곳은 오직 용산 경찰서 정보과가 유일하였고 모두가 외면하였다.
따라서 삼성의 철거를 저지하기 위해 경교장의 문화재 지정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요청했으나 건물이 낡고
변형이 심해 문화재적 가치를 상실했다는 답변 뿐이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는 국가에 흔쾌히 헌납하기를 요구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또한 이 문제를 여론화하기 위해 거리에서 시민을 상대로 서명운동을 하며 경교장에 대해 질문을 해보면
그것이 무엇이고 어디 있는 여관 이름이냐고 오히려 되물을 정도이고 김구 선생도 독립운동을 하다
중국에서 사망했다는 시민들의 어처구니 없는 상식이 대부분이었지 경교장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이때 마침 백범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므로 집행위원장인 김덕룡 정무장관에게 경교장을 복원하여
이 곳을 백범기념관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했으나 이 역시 실현되지 못한 채 김영삼 정부가 끝나가면서
추진위원회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해가 바뀌어 1997년 국회에 경교장복원 및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을 위한 청원을 국회의원 62명의 서명을 받아
접수하여 해당 상임위에서는 경교장을 현장 답사하여 실태조사를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나 정작
청원심사소위에서는 차일피일 미루며 단 한번의 회의를 소집하지 않은 채 15대 국회의 회기가 종료하였다.
이런 가운데 98년 문화재 지정을 촉구하는 시민한마당 행사를 광화문네거리에서 개최하고 50년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경교장을 방문하여 백범의 집무실이었던 2층 암살현장에서 서거 후 처음으로 조촐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그런데 99년에 또 한번의 위기가 닥쳐 왔다.
이번에는 백범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이수성)에서 삼성과 협의하여 효창공원에 건립중인 기념관 옆으로 철거,
이전하려고 하여 필자가 각 언론사에 반대성명을 통해 국회에 경교장 건이 청원 접수된 상태에서는 법적으로 불가하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등으로 겨우 철거 위기를 넘겼다.
이런 가운데 2000년 김대중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여 문화재청에서 1년간의 심의를 거쳐 서울시로 하여금 문화재
지정을 요청하자,
96년엔 내, 외부의 변형이 심하여 문화재적 가치를 상실하여 문화재 지정이 불가하다는
서울시가 5년이 지난 2001년에 와서는 건물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다는 이유를 들어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고 그나마 철거의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한·중 수교 이후 수많은 국민들과 정치인, 대통령들까지 상해의 옛 임정청사를 방문하여 애국선열들의
항일독립운동정신을 높이 기리고 있지만 정작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임정 최후의 모습 경교장은
국민 모두가 잊고 산다.
그 이유는 정부와 삼성 때문이다.
백범 암살의 배후로 지목 받고 있는 이승만 독재자와 연이은 군사정권들은 경교장을 반세기에 걸쳐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방치하여 왔으며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 겨우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였으나 현재 안내 간판 하나 없는
이름뿐인 문화재로 전락되어 서울시, 국가보훈처, 심지어 청와대까지 뛰어다녀봤지만 원형,
복원의 길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더욱이 삼성은 경교장이 사유재산이라는 이유로 경교장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 조차 방해를 하였고 실제로
문화재 지정 전까지는 일간지에서 경교장 기사를 찾아 볼 수가 없었고 간혹 기사가 나도 김구 선생 집무실(암살장소)
내부사진은 실리지 못한다는 취재기자들의 하소연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삼성은 경교장이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됐을 때 문화재 지정 취소 행정소송까지 시도하려고 했다.
경교장은 이미 1949년 김구 선생 장례 후 국보(國寶)로서 영구 보존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실현되지 못한 채
안타깝게 반세기를 넘기고 있으며 비슷하게 백범보다 한 해 먼저 동족의 손에 숨진 인도의 성웅
간디의 숨진 현장을 집에서부터 저격받았던 곳까지 발자국 마다 붉은 샌드스톤으로 이어서 징검다리와 비를 세우고 기념관으로
만들었다는 인도인들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무엇을 하는지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런 가운데 각계의 중지를 모아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하였으나 공동준비위원장을 맡은 한화갑 민주당
최고위원이 외압에 시달려 중도 사퇴하는 상황까지 발생하므로 출범부터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이제 경교장은 스스로 일어서는 도리 밖에 없다고 판단한 필자는 국립도서관에서 50년이 넘은 옛 신문들을
복사하여 희미한 글자를 복원하는 등 관련자료를 수집하여 1년여의 작업 끝에 이 책을 발간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론 8년째 접어든 경교장복원운동이 하루빨리 끝나 구체적인 복원사업이 전개되기를 열망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할 때 내일신문 최영희 발행인이 쓴 「백범 김구를 존경하지 마라」는 분노의 칼럼이 문득 떠오르며
아직도 역사 속에 올바로 자리매김이 안 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의 영령 앞에 오늘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무한한 송구함을 가눌 수 가 없다.
그러므로 기필코 경교장을 복원하여
“임정기념관”으로 명명하여 영구히 자손만대에 물려주어 이 땅의 민족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나마 버림받은 경교장에 관심을 가져준 이들도 많기에 여기까지 왔다.
특히 97년 월간 ‘길’지를 통해 국내 최초로 경교장을 심층 취재 보도하고 이후에도 계속 경교장을 세상에
알려준 고동우 기자(현, 민주노동당 기관지)와 월간 “말” 한국, 한계레, 경향, 대한매일, 문화일보 등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아직도 경교장의 실상에 대해 침묵을 하고 있는 유력지 조선, 중앙, 동아일보에게는
민족의 이름으로 각성을 촉구한다.
끝으로
이 경교장에서 완전한 자주독립의 기치를 들고 전력투구 하시다가 억울하게도 반역의 무리들에게 살해되신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임정의 좌우합작노선에서 조국통일 운동까지 함께 하며 지금은 북녘 땅에
누워계신 김규식 부주석, 조소앙 외무부장, 엄항섭 선전부장, 김상덕 문화부장, 최동오 법무부장,
유동열 참모총장 등 임정 국무위원들의 영전에 이 책을 올리오니 선열들이시여! 편안히 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