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와 간월암(看月庵)
무학(無學·1327~1405)대사의 출생은 참으로 기구했다.
무학이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 아버지 박인일(朴仁一)이 지인한테 속아 감당 못할 국채를 지게 됐다.
부부는 고향(경남 합천군 삼가면)을 버리고 전국을 떠돌다가 충청도 서산 땅에 이르러 관헌의 추적
을 받게 됐다. 아버지는 종적을 감추고 어머니가 대신 붙잡혀 호송돼 가던 중 갑자기 산통을 느껴 몸
풀 곳을 찾게 됐다.
때는 엄동설한이라 적설이 지천인데 기이하게도 한 곳(서산시 인지면 모월리)만이 녹아 있어 그곳
을 산실로 삼았다. 관헌은 옷가지로 갓난애를 덮어둔 채 산모를 현감 앞에 대령했다.
사실을 알고 난 현감이 관헌을 크게 질책하며 산모와 관헌을 급히 출산 현장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커다란 학이 두 날개를 펴 아이를 감싸고 포근히 품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는 무사했다. 보고를 전해 들은 현감은 이 고을의 상서로운 조짐이라며 국채를 탕감해 주고 ‘학
이 춤을 추었다’는 뜻을 담아 무학(舞鶴)이란 이름까지 지어 줬다. 지금 그곳에는 무학대사 출생지
기념 표지석이 서 있다.
<'출생 비화’ 인생의 근본에 회의 품게 돼..>
출생 비화를 뒤늦게 안 무학은 인생의 근본 문제에 관해 회의를 품게 됐다. 국가 권력과 돈은 무엇이
고 각별한 인연으로 맺어진 부모는 누구이며 욕정을 억누를 수 없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어떤 존
재인가. 그는 생존하는 것은 반드시 멸하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우주 법도와, 부귀빈천을 가릴 것
없이 찾아드는 인간세계의 생(봄)로(여름)병(가을)사(겨울)가 왜 멈추지 않는지도 고뇌했다.
이런 낌새를 눈치챈 어머니는 평소 다니던 절의 소지(小止) 스님에게 17세 된 아들을 의탁했다. 얼마
후 혜명(慧明) 국사를 친견해 불경을 배웠으나 의문은 안 풀렸다. 어머니는 무학을 서산 앞바다 천수
만에 떠 있는 외딴 섬에 내려놓고 육지로 떠나며 일렀다. “금생에서 우리 모자간 인연은 오늘이 마지
막이다. 이곳에서도 불법을 못 깨치면 무덤을 파고 죽어라.”
무학이 어머니와 생이별한 곳은 삼국시대부터 피안도(彼岸島)로 불리며 당대 운수납자(雲水衲子)들
이 무릉도원 선경으로 여기는 섬이었다.무학은 이 섬 끄트머리에 있는 자그마한 무인도에 토굴을 파
고 홀로 앉아 생사를 뛰어넘는 일념 정진에 들어갔다.백 일째 되던 날 삼경(三更)이 지날 무렵 유난히
도 희고 밝은 달이 돌연 무서워졌다.
천지간이 고요하고 아무도 없는 교교(皎皎)한 달밤에 불현듯 벌레가 기어 나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
는 듯하더니 달이 바닷속으로 뚝 떨어졌다. 질풍노도 같은 한 생각이 스치면서 마음의 빗장이 열렸다.
'일수사견(一水四見)이로다. 똑같은 물이거늘
▲천인(天人)은 보석으로 장식된 연못으로 보고
▲축생(畜生)은 단지 먹는 물로 보며
▲아귀(餓鬼)는 피로 보게 되고
▲물고기는 자신의 주처(住處)로 여김이 아니겠는가.
어찌 광대무변한 우주에 나 혼자뿐이랴. 오고 감이 없으니 가고 옴이 있을쏘냐.
무학은 활연대오했다. 신안(神眼)이 열려 땅속의 지기가 훤히 드러나 보이고 중생들의 음성을 듣거나
표정만 살피고도 미래를 꿰뚫었다.이후 사람들은 피안도란 섬 이름을 무학이 ‘달을 보고 깨쳤다’해 간
월도(看月島)라 고쳐 부르고 무학은 그 자리에 암자를 짓고 간월암(看月庵·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
리 16-11)이라 했다.
누구나 봐온 달을 보고 홀연히 득도한 무학의 구도 행각은 쉼 없이 이어졌다. 공민왕 1년(1353) 원나
라 연도에 가 인도승 지공(?~1363)을 만나 도를 인가받고 그곳에 주석하던 고려 국사
나옹(1320~1376)의 법제자가 됐다. 나옹 입적 후 제34대 공양왕이 왕사로 삼으려 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무학은 이미 땅 기운이 쇠한 개경의 고려가 멸하고 한양 땅에 새 왕조가 개국될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지공과 나옹은 신라 도선(827~898) 국사의 풍수 도참 맥을 잇는 신풍이었다. 나옹은 무학에게
‘더 배워야 할 것이 없다’면서 무학(無學)이란 법호를 내렸다.
무학은 태조 이성계(1335~1408)를 그가 고려 장군이던 때 만나 왕이 될 것을 예언한 바 있다.
조선왕조 개국 후 왕사로 책봉돼서는 한양이 새 도읍지로 타당함을 풍수 지상(地相)으로 설득해 천도
를 성사시켰다. 무학은 존경받는 국가 원로로서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임금의 자문에 응했다.
오리무중의 권력투쟁 속에서도 바른 판단과 소신으로 국초의 조선이 대과 없이 활착하도록 힘을 보탰
다. 팔도를 다니며 명당 혈처를 잡아 줘 가난한 이들을 발복시키고 유능한 인재가 출세토록 적선했다.
< 가야산 정기 해저용맥으로 응기 된 혈처 >
말년에는 천보산 회암사(경기도 양주시 회천읍 회암동 산 8-1)와 간월암을 오가며 입멸을 준비했다.
어느 해 섣달 초하루 손수 딴 간월도 굴을 소금에 절여 저녁 공양을 하고 있는데 남루한 걸승이 찾아와
물었다.
“그 굴은 살았는가, 죽었는가?” 무학이 노승을 보며 맞받았다.
“세 치나 긴 손톱을 자르는 게 살생인가, 몸단장인가?”
“그렇다면 지금껏 무학이 걸을 때 그대의 발밑에서 밟혀 죽은 미물은 무엇들인가?”
무학은 깜짝 놀랐다. 고개 들어 노승을 찾으니 천수만 앞바다에 초승달만 외로이 떠 있었다. “아하, 내가
갈 때가 됐구나!” 무학은 얼른 공양 수저를 내려놓고 간월암을 떠났다. 하루 두 번씩 바다가 육지로 변하
는 섬이 마침 썰물 때여서 금세 나올 수 있었다. 무학은 그 길로 금강산 금강암에 가 입적했다. 세수 79세
로 법랍 62세였다.
무학이 떠난 간월암은 500년이 넘도록 폐사된 채 토굴로만 전해 왔다.
1941년 수덕사의 고승 만공(1871~1946) 선사에 의해 계좌정향(서쪽으로 15도 기운 남향)으로 중건됐다.
평생 무학이 골라 놓은 좌향이다. 서산 가야산 정기가 해저 용맥으로 응기된 혈처로 방한암·이성철 종정
등 현대 고승들이 참선한 명소이며 조계종 황진경 전 총무원장이 이곳 출신이다. 서산 A·B 지구 간척지를
연결하는 절경으로 특히 서해 낙조가 아름답다. 성산(聖山) 현 주지는 무학대사 이후 또 다른 걸승의 출현
을 기대하고 있다.
글.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