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 보는 바보-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
안소영 지음/ 보림 펴냄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조선 정조 때의 문인, 실학자로. 호는 청장관(靑莊館), 또는 아정(雅亭)이다. 서얼 출신으로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박학다식하고 시문에 능하여 젊어서부터 많은 저술을 남겼다.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등과 사귀었으며, 중국에까지 알려진 사가시인(四家詩人) 중의 한 사람이다. 이덕무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문에 빠지지 않는 말이 ‘서자 출신 문인’ ‘박학다식’이다.
이덕무는 왕족의 후손이지만 그의 아버지가 서자였기에, 태어나면서부터 고단한 삶이 시작된다. 내성적인 성격의 그는 집안 형편상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게 되면서, 더욱 말이 없고 조용한, 오직 책 속에서 책과 대화하며 자란다. 그에게 책은 단지 보는 대상이 아니라 듣고 보고 느끼는, 살아 있는 존재이며 세계였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어디에도 낄 데가 없었던 서자 신분의 그가 마음을 둘 곳은 책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이덕무가 책과 벗하고, 책 속의 사람들과 벗하는 나날들은 오래도록 계속된다. 책이야말로 그의 으뜸가는 벗이었다. 그러던 중 백탑(원각사지 십층석탑, 지금의 탑골공원 안에 있음)이 있는 대사동(지금의 인사동)으로 이사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그는 비로소 평생지기인 박제가, 유득공, 백동수, 이서구 들을 사귀게 된다.
이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이서구를 제외하면, 모두 서자 출신이었다. 힘든 세월을 견딜 수 있게 서로 의지가 되어 준 벗들이었다. 이덕무와 그의 벗들은 또한, 더 큰 세계로 눈을 뜨게 해준 스승격인 담헌 홍대용과 연암 박지원과도 깊은 친분을 맺게 된다. 홍대용과 박지원, 그리고 이서구는 명문가의 사대부였다. 당시 이들의 사귐은 신분과 처지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사람의 성품을 먼저 보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느 선비들처럼 유교경전만을 파고들어봐야 벼슬에 나아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기에, 이덕무와 그의 벗들의 관심은 주변의 자연이나 사물, 자신의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에 많이 쏠렸다. 이러한 시선은 자연스레 문학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각자의 개성과 감수성이 뛰어난 시와 문장들을 많이 남기고, 《백탑청연집(白塔淸緣集)》과 같은 문집으로 만들었다.
특히 이덕무와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가 함께 낸 시문집《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은 중국에까지 전해질 만큼 유명한 문집이었고, 시와 문장에 뛰어나다 하여 그들을 ‘사가(四家)’라고 불렀다. 또한 신분제도의 문제점을 몸소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이덕무와 그의 벗들이었기에, 감수성이 예민한 문학청년에서 사회현실에 문제점을 느끼고 새롭게 바꾸어 가려는 개혁적인 사상가로 변모해 가게 된다.
온종일 햇살을 따라 상을 옮겨가면서 책을 읽었다는 이덕무. 막히는 구절이 나오면 끙끙대다가 갑자기 뜻을 깨치면 너무 좋아서 미친 사람처럼 웃었단다. 가난한 그에게 책은 마음의 양식뿐 아니라 몸을 지켜 주는 힘이 되었다. 겨울밤 홑이불 한 장으로 추위를 견딜 수 없어 한서(漢書) 한 질을 꺼내 이불 위에 늘어놓자 중국의 역사로 무늬를 넣은 멋진 이불이 되었다며 즐거워했다고 전해진다.
이덕무는 자신을 스스로 간서치(看書痴)라고 불렀다.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이다. 젊은 날을 회고해 정리한 자서전 제목도 ‘간서치전(看書痴傳)’이다. 소품체의 다채로운 아포리즘이 문집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 책은 ‘간서치전’이 바탕이 됐다. 독서가 얼마나 기쁜 일인지 어린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책이 얼마나 향기로운 것인지 어른들도 새삼 깨달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