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나그네
최용현(수필가)
‘겨울영화’ 하면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닥터 지바고’(1965년)와 눈이 오면 어김없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snow frolic(눈장난)으로 유명한 ‘러브 스토리’(1970년)가 떠오른다. 우리나라 영화로는 살을 에는 맹추위가 실감나게 느껴지는 ‘만무방’(1994년)과 첫사랑의 아픔이 잔잔하게 묻어나는 ‘겨울 나그네’가 생각난다.
‘겨울 나그네’는 슈베르트의 연가곡집의 이름이다. 연가곡(連歌曲)이란 하나의 줄거리를 이루는 여러 가곡을 차례대로 모은 것인데, 슈베르트는 1824년 빌헬름 뮐러의 시에 붙인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라는 연가곡집(20곡)을 냈다. 1827년에는 다시 뮐러의 시에 붙인 ‘겨울 나그네’라는 연가곡집(24곡)을 내어 찢어진 사랑에 상심한 겨울 나그네의 쓸쓸한 심경을 곡으로 만들었는데, 제5번 ‘보리수’가 가장 유명하다. 슈베르트는 그 이듬해인 31세에 가난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영화 ‘겨울 나그네’는 곽지균 감독의 데뷔작으로, 젊은 네 남녀의 사랑과 번민, 방황을 섬세하면서도 감성적인 영상으로 담아낸 청춘영화이다. 1986년 개봉 당시 서울관객 22만 명을 기록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당시 평단(評壇)으로부터 우리나라 멜로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당시 한 유명 가전사에서 VTR을 사면 이 영화 비디오테이프를 사은품으로 끼워주었다.
의대에 다니는 약간 내성적인 성격의 민우(강석우 扮)는 교정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부딪친, 첼로를 전공하는 음악학도 다혜(이미숙 扮)에게 첫눈에 반한다. 민우는 친하게 지내는 복학생 선배 현태(안성기 扮)의 도움으로 다시 다혜를 만나게 되고 둘은 점차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민우는 임종을 앞둔 아버지의 병실을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채권자를 제지하다가 실수로 그 사람을 죽이게 된다.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하던 민우가 집행유예로 풀려나 보니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남은 식구들은 모두 이민을 떠나고 없었다. 민우는 아버지가 남긴 편지를 보고 자신의 생모가 기지촌의 여성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망연자실한 민우는 갈 곳마저 없어지자 자신을 쓰레기라고 자학(自虐)하며 차를 타고 기지촌으로 간다. 그곳 나이트클럽에서 죽은 생모를 잘 아는 왕마담(김영애 扮)을 만나게 되고, 다시 거기서 일하는 은영(이혜영 扮)이라는 양공주를 알게 된다. 은영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은 민우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녀와 동거를 시작한다. 연락이 끊어진 민우 때문에 힘겨워하던 다혜는 기다림에 지쳐서 점점 현태에게 의지하게 된다.
왕마담의 일을 돕던 민우는 범죄사건에 연루되어 수감생활을 하다가 출감하자마자 다혜를 만나러 학교로 달려간다. 온종일 교정을 돌아다녀도 만나지 못해 집으로 찾아가는데 이사를 가고 없었다. 밤늦게 기지촌으로 돌아와 보니 은영이 민우의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었다. 이제 부양가족까지 생긴 민우는 왕마담의 수족이 되어 점점 타락의 길로 빠져든다.
어느 날,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현태가 기지촌으로 찾아와 민우와 은영이 아이와 함께 사는 모습을 보고 돌아간다. 졸업 후 잡지사에 취직한 다혜도 기지촌에서 민우가 사는 모습을 확인한 후 현태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인다. 다혜와 현태의 결혼식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돌아선 민우는 다시 왕마담의 밀수에 가담한다. 그러다가 거래현장에서 발각되어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동승자를 내리게 한 후 차를 몰고 저유소(貯油所)로 돌진하여 폭사한다.
5년 후, 은영이 현태를 찾아와 민우가 몇 년 전에 죽었다고 알려주고, 자신은 미국인과의 결혼 때문에 다음 달 미국으로 떠난다며 7살이 된 민우의 아들을 맡아줄 것을 부탁한다. 현태와 다혜가 흰 눈이 소복이 쌓인 민우의 무덤에 가서 헌화하고 민우의 아들과 함께 돌아오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1986년, 이 영화로 대종상 감독상을 받은 곽지균 감독은 영화평론가협회에서 주는 신인상도 함께 받았는데, ‘그후로도 오랫동안’(1989년) ‘젊은 날의 초상’(1991년) ‘장미의 나날’(1994년) 등 연 이어 내놓은 감성적인 멜로영화로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다가 ‘사랑하니까 괜찮아’(2006년)가 흥행에 실패한 후 크게 좌절하여 2010년 자신의 노트북에 ‘일이 없어 괴롭고 힘들다’는 메모를 남기고 독신으로 살아온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56세였다.
이 영화에서 양공주 역을 맡아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받은 이혜영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년) ‘만추’(1966년) 등을 연출하였고, 1975년 ‘삼포가는 길’을 연출하다가 44세에 간경화로 타계한 거장 이만희 감독의 딸이다. 그녀는 나이가 들어서도 영화에서 감초 같은 조연 역할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겨울 나그네’의 원작은 소설가 최인호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이다. 그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탁월한 필치로 그려내어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2013년 68세에 침샘암으로 별세했다. 또, 기지촌 나이트클럽의 왕언니로 나오는 김영애는 주로 TV에서 활약하다가 2017년 췌장암으로 66세에 세상을 떠났다. 모두들 자신의 분야에서는 발군의 베테랑들인데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이 영화의 세 주인공인 청춘남녀들은 모두 환갑을 넘겼다. 이제 원로가 된 안성기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민배우로 확고히 자리를 굳혔고, 비운의 남자주인공 강석우는 영화와 TV에서 활약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풋풋한 여대생 역을 맡은 이미숙은 충무로를 대표하는 여배우로 성장했으나 나이 들어서는 이미지가 많이 변한 것 같다.
어쩌다 ‘겨울 나그네’ 영화가 생각날 때면, 교도소를 나온 민우가 눈발이 흩날리는 교정에서 ‘보리수’ 노래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다혜를 찾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운동장 계단에 멍하게 앉아있던 장면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시려온다.
첫댓글 언제 한번볼 기회가 있을지 모르겟습니다.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유튜브나 카페 등에서 잘 찾아보면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영화입니다.
한번 뒤져서 봐야 겠습니다
위쪽은 추워서 어떻게 지내십니까?
저는 추우면 꼼짝도 안하고 방콕합니다.
미뤄놨던 책도 읽고, 원고도 쓰고...
그러다 보면 봄이 오더라구요.ㅎㅎㅎ
@월산거사 멋진 동면 방법이군요. ㅎㅎ
@여정 네, 그런 셈이지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