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정병산
가을 태풍이 스쳐 지난 시월 첫째 토요일에 이은 일요일이다. 사나운 태풍이 언제 스쳐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하늘이 쾌청해지고 공기가 맑아졌다. 평소 출근보다 이른 미명의 새벽에 등산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시내버스가 다니질 않은 시각 집에서부터 걸어 반송공원 언저리를 지났다. 서늘한 밤공기에 날이 새도록 날개를 비벼댔을 귀뚜라미는 그때까지도 연주를 계속하였다.
퇴촌삼거리에서 사림동으로 건너가 사격장 방향으로 들었다. 한 달 전 여러 나라 사격선수들이 창원으로 모여들어 대회가 열렸던 곳이다. 날이 희뿌옇게 밝아오는 즈음 동녘 하늘엔 부메랑 같은 설치 미술이 눈길을 끌었다. 팔월 스무여드레라 하현에서 더 옴팍 파인 눈썹달이 걸려 있었다. 일찍 잠을 깬 새가 모이를 먼저 차지하듯 일찍 일어났더니 그림 같은 그믐달도 보게 되었다.
사격장을 돌아 소목고개로 향하니 새벽 등산을 나선 이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쉬엄쉬엄 걸어 약수터에 이르러 샘물을 한 바가지 받아 마셨다. 소목고개 쉼터에 이르니 날이 다 밝아왔다. 몇 갈래 갈림길에서 내가 가고자하는 방향을 정했다. 여름에 한 번 오르려고 마음먹었던 정병산 정상까지 산행이다. 근래 들어 임도를 걷거나 강둑길 산책은 다녀도 가파른 산길을 잘 다니질 않았다.
정병산은 창원대학을 에워싸고 도청에서도 가깝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뒤 베란다 창에서 빤히 쳐다보이는 산이다. 가파른 산세에 서쪽 정상부는 암반지대로 이루어졌다. 남사면은 돌너덜이 더러 있어 숲은 우겨지지 않아도 사계절 모습을 달리한다. 여름에 안개가 산허리에 걸쳐지면 인왕제색도를 떠올려 보았다. 어쩌다 겨울에 눈이라도 내리면 잠시지만 드문 설경도 아름다웠다.
내가 가을에 정병산을 오르려는 뜻은 이즈음 피어난 야생화를 보기 위함이었다. 안 씨네 무덤을 지나니 미역취가 노란 꽃을 피워 있었다. 그 근처에서 역시 노란 이고들빼기 꽃도 만났다. 가을에 피는 대표적인 노란색 꽃이다. 조금 더 올라 흙살이 적은 곳에 자라 잎줄기가 야윈 마타리가 꽃이 아직 지질 않고 있었다. 가을에 볼 수 있는 노란 색 계열 꽃 삼총사를 한꺼번에 다 만났다.
산비탈이 가팔라 천천히 오르면서 내 뒤를 따르는 산행객을 앞세워 보냈다. 산 아래 사는 사람들 가운데 주말이든 평일이든 매일 아침 정병산을 오르는 사람도 있을 듯했다. 산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니 창원시가지가 훤히 드러났다. 멀리 무학산과 봉암 갯벌과 마산 시가지 일부도 보였다. 창원공단 건너편 남쪽은 장복산 능선이 불모산으로까지 길게 이어졌다. 시야가 무척 깨끗했다.
내가 정병산을 오르면서 보려고 마음 둔 꽃은 구절초와 쑥부쟁이다. 이 둘은 서로 사촌쯤 되는 사이로 자라는 환경이 비슷하다. 구절초가 좀 더 거칠고 억센 곳에서도 자란다. 구절초는 흰색이 대부분이고 더러 엷은 분홍색도 있다. 쑥부쟁이는 엷은 보라색이다. 길섶에 피어난 구절초와 쑥부쟁이는 어제 지난 세참 비바람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제 임무를 다했다. 아직 절정은 일렀다.
남보다 시간이 더 걸려 정상에 서니 아주 드문 광경을 보았다. 그때가 아침 해가 뜨려는 즈음인데 주남저수지와 낙동강과 들녘 일대가 운무로 뒤덮여 장관이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보았던 운해에 비길 만했다. 태풍이 지나면서 습기를 머금은 대지에 맑아진 날씨에다 아침 기온이 낮아져 낮은 들판과 산골짜기는 온통 안개가 끼어 어디가 들판이고 어디가 마을인지 구분이 안 되었다.
정상 서쪽 능선에서 자여마을로 내려섰다. 아까 올랐던 길만큼 가파른 길이었다. 조심조심 발을 디뎌 암반지대를 통과하니 활엽수가 우거진 숲이었다. 길바닥엔 일찍 떨어진 도토리가 쌓여 썩어가고 있었다. 숲길을 지나 단감과수원 못 미친 산기슭에는 절로 자란 밤나무들이 자랐다. 아랫마을에서 올라온 두 아낙이 알밤을 줍고 있었다. 어제 지난 태풍에 밤들이 우두둑 떨어졌을 테다. 18.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