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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바둑이
- 이 병 주 -
[작품 및 문학관 소개]
하동 이병주문학관을 둘러본 후 구입한 3권의 소설집에 든 작품입니다. 10년 전 출판한 책을 그대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일 수도 있겠지만 책이 읽히지 않는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소설 <바둑이>는 제목이 <망망이와 바둑이>여야 할 정도로 바둑이 어미인 망망이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안타깝게도 바둑이가 액사를 당하는 때문에 작가는 이런 제목을 붙인 것 같습니다. 일흔한 해를 살고 간 작가를 미구에 저 세상에서 만난다면 바둑이 소설 제목에 대해서 물어볼 참입니다. '작품해설'은 소설이 끝나는 곳에 있습니다. 이병주문학관 – 경남 하동군 북천면 이명골길 14-28 ☏ (055) 882-2354
<1986년의 가을은 내게 있어서 부득이 슬픈 계절로 되었다> 이렇게 써놓고 나는 뉘우친다. 결론부터 말하는 버릇을 삼가려고 하면서도 일을 당하면 언제나 결론적인 감정이 솟아오르고 결론적인 말이 불쑥 튀어나와버리는 것이다. 9월 4일 해거름에 바둑이가 죽었다. 바둑이는 그 어미 망망이와 더불어 다른 식구들과는 달리 무작정 나를 반겨주고 좋아하고 따르는 유일한 식구이다. 그 어미를 들먹이면 유이唯二한 친구라고 해야 하겠다.
생후 3개월이 되었을까. 흰 바탕에 굵다랗게 두 줄이 띠를 두른 것 같은 갈색의 무늬가 새겨진, 그림에 그려놓은 것처럼 예쁜 고전적인 맵시와 얼굴을 가진 강아지였다. 수월찮게 세상을 살았지만 나는 아직껏 그처럼 예쁜 강아지를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상냥하고 애교 있고, 그 때문에 더욱 매력이 있게 된 심술조차 갖춘 바둑이가 운전수의 사소한 실수 때문에 액사를 하고 만 것이다.
클랙슨 소릴 들으면 쏜살같이 대문 밖으로 뛰어나와 어미 개와 나란히 선다. 내가 자동차에서 내리면 꼬리를 흔들고 다가와서 어미 개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따라 들어와선 뜰 한가운데쯤부터 나에게 뛰어든다. 어미를 닮아 점프력이 강한 바둑이는 어느 땐 가슴팍에까지 뛰어오른다. 비오는 날이면 진흙을 밟은 발로 뛰어오르기 때문에 옷을 더럽히기도 하지만 그 반기는 모습의 귀여움에 비하면 옷 버리는 것쯤이야 문제도 되지 않는다. 어쩌다가 골목 어귀에까지 나와 기다릴 때도 있었다. 자동차가 보이면 확인이라도 하는지 멀찌감치 서 있다간 자동차를 따라 달려선 앞질러 대문 밖에서 기다린다.
솔직히 나는 가정의 재미라는 걸 모른다. 여편네라는 이름의 여자는 생활비 적게 준다고 투덜대고 술을 마셨다고 투덜대고 부드럽게 말상대 안 한다고 투덜대고 즈그 친정 식구들에게 대한 친절이 모자란다고 투덜대고 여자 친구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면 무슨 용무인가 어떤 관계의 여자인가 하고 따져들고 마음이 내키면 우유를 먹이자마자 야채즙을 들이대고 야채즙의 맛이 혓바닥에서 가시기도 전에 인삼즙을 마시라고 하고 거절하면 몸에 좋으라고 권하는 것을 왜 마다하느냐고 성화이다. 그런가하면 딸년들은 공부하라고 할까봐 슬슬 나를 피하면서도 용돈을 넉넉히 얻으려고 슬금슬금 눈치를 본다. 그런 가정이 가정이랄 수 있겠는가. 가정은 내게 있어선 공장일 뿐이다.
망망이와 바둑이는 일체 나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간섭하지 않는다. 그저 좋아할 뿐으로 꼬리를 치고 뛰어오르고 내 손이건 발이건 기회만 있으면 핥으려고 할 뿐이다. 아아, 눈앞에 바둑이의 그 귀공자연한 모습이 선하다. 우아하기가 그레이스 켈리 같고 민첩하기가 차스라프스카 같고 장난스럽기가 파스칼 프티를 닮은 바둑이와 그 어미의 내게 대한 사랑이 내 인생의 보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아아!
망망이는 2년 전 누렁이를 어미로 하고 태어났다. 갈색의 털과 순진무구한 눈을 가진 그저 수줍어만하던 강아지였는데 자람에 따라 대담해지고 그 모습이 삽상하게 변했다. 쭈뼛하게 단정한 귀는 셰퍼드를 닮았다기보다는 흥안령 근처에 살았음직한 먼 선조, 이리의 귀를 방불케 했고 몸 전체의 규격을 3배 정도로 확대했을 경우 사라브레드의 명마名馬를 상상케 하는 기품이 있었다.
무식하고 거만한 겉똑똑이들은 우리 멍멍이를 두고 똥개니 잡종이니 하지만 어째서 똥개이며 무엇을 순종이라고하여 잡종이라고 하는가. 도베르만은 흉측스럽고 셰퍼드는 지나치게 잘난 척하고 불도그는 너무나 희극적이고 ‘친’을 비롯한 꼬마 개들은 심하게 애완동물적이다. 이에 비하면 우리 망망이는 거북살스럽게 크지도 않고 마음에 차지 않을 만큼 작지도 않은 적당한 몸매이고 호오의 감정을 결연하게 표명하는 지극히 개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망망이는 출생 이래 십 수 명을 문 경력을 가졌다. 그러나 물었다고 해서 큰 상처를 내진 않았다. 무는 시늉을 했을 뿐이다. 이를테면 경각적인 행위의 정도 이상을 넘어서진 않았다. 달을 보고 짖는 로맨티시즘은 없었지만 꽃그늘 아래 넋을 잃고 조는 취미는 가지고 있었다. 상대를 선택해가며 짖는 신중성이 있었고 그 짖는 소리는 마리아 칼라스의 음성에 비교할 수 있었다. 가수로 치면 우리 마을에선 일등이다.
아내와 사흘에 네 번은 싸운다. 이렇게 싸움의 빈도가 잦은 것은 물론 내 책임이다. 사람은 너그러워야 한다,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고 글로 쓰고 강연회에서 말할 줄도 알지만 내 자신 그것을 실천하진 못한다. 그래서 나는 충고주의자일 뿐이라고 자기변명을 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특히 아내의 말과 행동에 대해선 도저히 느긋할 수가 없다.
“또 술을 마셨군요.”하면 “그래서 어쨌단 말이야.” 하고 거친 말이 나온다.
“조심을 해야 할 것 아녜요?”
“그런 말할 시간 있거든 집안 청소나 똑똑히 해요.”
“청소가 어때서 그러우.”
“네모난 방을 둥글게 닦았대서 그게 청소가 되었단 말요?”
그러곤 방구석을 침을 바른 손가락으로 후벼대면 먼지가 나온다.
“이래도 청소했다고 하는 거요.”
“당신처럼 짓궂은 사람 처음 봤어요.” 하기에
“누가 나를 짓궂게 만들었는지 알기나 해?”
“내가 그렇게 만들었단 말요?”
“아니까 다행이군.”
“당신은 나를 고문하고 있어요.”
“누가 고문을 시작했는데, 아니 누가 시비를 걸었는데?”
“그럼 아내가 남편더러 술 좀 적게 마시란 말도 못해요?”
“못하지 못해. 괴테의 아내가 괴테더러 그런 참견을 했겠어?”
“괴테가 당신처럼 술을 마셨을라구.”
“술을 마셔도 괴테는 그런 참견 안 했을 걸.” 이 단계까진 그저 티격태격하는 정도인데 아내의 입에서
“웃기지 말아요. 소설 나부랭이나 쓰면 모두 괴테가 되는 줄 알아요?” 하는 말이 나오면 내 모발은 관을 찌른다. 다행히 찔릴 관이 없으니 망정이지.
“소설 나부랭이라구?”
“그래요. 소설 나부랭이지 뭐예요.”
“그 소설 나부랭이 갖고 먹고 사는 건 누구들이지?”
“소설 나부랭이로 잘 먹여주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네요.”
“어떻게 먹여야 잘 먹이는 거야. 이만큼 먹고 살 수 있다면 소설에 대해 감사할 줄 알아야지.”
“소설 안 쓰는 사람들은 가족들을 굶기고 있습디다.”
“그게 불만이면 나갓.”
“누가 나가요. 싫으면 당신이나 나가슈.” 나는 부득이 숄더백에 원고지나 펜을 쑤셔 넣고 나가는 척이라도 안 하면 안 될 궁지에 몰린다. 그때부터 승강이다. 나는 나가려고 하고 아내는 “남부끄럽게 그 꼴이 뭐예요.” 하곤 잡아당긴다.
“놔라.”
“안 돼요.” 하고 육박전같이 되었던 어느 때의 일이다. 망망이가 ‘쾅’하고 짖었다. 놀라서 돌아보니 망망이가 슬픈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망망이의 눈은 분명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명색이 사람인 주제에 그 꼴이 뭐요.’
주춤 우리는 싸움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도 싸움은 사흘에 네 번꼴로 되풀이되었지만 망망이 보는 데선 삼가기로 하고 주로 실내 투쟁에만 국한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있었던 일이다. 싸움은 응접실에서 시작되었다. 원인은 서적판매원이 왔기에 영인본 두세 권을 산 데 있었다.
외판원이 오기 전 선풍기가 망가졌으니 새로 사자는 아내의 제안을 돈이 없다는 핑계로 거절하고선 외판원에게 돈을 건네는 것을 본 아내는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외판원이 돌아가자마자 아내가 눈을 삼각형으로 뜨고 응접실 건너편 소파에 앉았다.
“여보!” 아내가 차갑게 불렀다.
“또 무슨 시비를 벌일 참이야.” 내 말이 자연 거칠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 아까 돈 없다고 했지요?”
“없으니까 없다고 했지.”
“이제 책값 치른 돈은 어디서 났죠?”
“그건 책값으로 준비해둔 돈이다.”
“그런데 왜 한 푼도 없다고 잡아떼었죠?”
“잡아떼다니, 그 말버릇이 뭔가.”
“그렇게 예사로 거짓말을 하긴 가요?”
“뭐가 무서워 내가 거짓말을 해.”
“아까 거짓말을 했잖아요.”
“책 사기 위해 준비한 돈 이외는 한 푼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게 거짓말이 돼?”
“당신은 책만 보면 가족들은 더위에 지쳐 죽어도 좋다는 거죠?”
“한국의 더위에 지쳐 죽은 사람 못봤다.”
“어떻게 그처럼 인정머리가 없죠?”
“난 인정 많다고 소문난 사람이다.”
“남에게나 인정이 많겠죠. 나나 아이들에게 인정을 써본 일이 있기나 해요?”
“참으로 어이없는 말을 다 듣네.” 하고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다음과 같이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집의 가장이오. 가장에 대해선 응분의 존경이 있어야 할 것이오. 존경을 하려면 가장이 싫어하는 것은 안 해야 할 것 아니오! 지금부터 내가 싫어하는 걸 들먹일 테니까 어디다 메모라도 해두고 그걸 피해 주시오. 자 말하리다.” 하고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내가 싫어하는 건 첫째 뜸이 덜 든 굳은 밥이다. 반쯤 썩은 생선이다. 주둥아리에 칠한 루즈다. 밥상 위로 날아다니는 파리다. 목욕탕에 있는 빨래다. 손톱에 칠한 메니큐어, 발톱에 칠한 페디큐어, 면도질을 한 여자의 눈썹, 계 오야, 여자들의 수선 특히 당신의 참견이다. 알았어?”
나는 이렇게 점잖게 말했는데 아내는 발끈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켰다. 그래 나는 얼른 “한 가지 빠진 게 있다. 가장 싫어하는 건 여자의 히스테리다.”
“누가 날 히스테리로 만들었죠?”
“설마 나라는 말은 아니겠지.”
“당신이 아니구 누구겠어요?”
“당신 집안의 전통이겠지.”
“우리 집안의 전통? 당신 나를 모욕하는 것만으로 모자라 우리 친정까지 모욕하려 드는군요.”
“모욕하지 않았어. 나는 사실을 추리해보았을 뿐이다.”
“사실이라구? 무엇이 사실이오.”
“당신의 히스테리 증세는 유전성이란 말요.”
“당신헌테 시집오기 전 내겐 히스테리 증세가 없었소.”
“난 당신을 만나기 전엔 순진무구한 청년이었소. 이 세상에 악이 있다는 걸 모르고 살았소. 당신을 만나고부터 나는 술을 마시게 되었소. 여자란 건 귀찮은 존재란 걸 알았소. 만일 내가 여자를 모욕하는 소릴 한다면 그 책임은 당신에게 있소. 당신이 나를 여자 혐오증환자로 만들어버렸으니까.”
“여자 혐오증? 그래서 그년들과 놀아나는 거요.”
“난 여자들과 놀아난 적 없어. 당신을 닮지 않은 여성을 찾아보려고 애는 썼지만.”
이렇게 진행되어 이윽고 나는 집을 나가겠다고 하고 아내는 나가라고 했는데 막상 나가려고 하니까 또 육박전 같은 스타일이 되어버렸다. 뿌리치려하고 끄집어 당기려고 하다가 보니 탁자 위의 재떨이가 마룻바닥에 떨어지고 스탠드가 무너져 항아리에 부딪히고 쌓아놓았던 책이 열려있던 피아노 건반을 난타하여 굉음을 내고…….
문득 보니 언제 마루 위로 올라왔는지 망망이가 도어를 반쯤 열고 얼굴을 디밀고 있었다. 그 눈은 이리 눈처럼 빛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덤벼들어 갈기갈기 찢을 것 같은 노여움이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나는 멈칫하며 외쳤다.
“그만둬. 망망이가 당신을 물어뜯으려고 한다.” 힐끗 망망이를 보더니 아내가 쏘았다.
“왜 망망이가 나를 물어뜯어요. 당신이나 물어뜯기지 마시오.”
“흠 망망인 내 편인걸.”
“어째서 망망이가 당신 편이에요. 밥은 내가 주는데.”
“그 밥이 어디서 생긴건데.”
“망망이가 그런 것까지 따져요?”
“망망인 당신보다 영리해. 그러니까 다 알아요.”
망망인 자기를 두고 시비하게 된 것을 알았던지 꼬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뜰로 내려가 버렸다. 과연 망망이는 누구의 편일까. 내가 목욕탕엘 가면 꼭 따라와서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야 돌아가고 목욕을 하고 나오면 언제나 골목 어귀에 기다리고 있다가 따라서 집에 돌아오곤 했다. 보신탕이 성행했을 무렵엔 망망이의 외출에 각별한 신경을 썼을 테지만 작금의 사정으론 그런 걱정이 없을 것이고 해서 나는 망망이의 환송과 환영을 기분 좋게만 여기고 있었다.
그랬던 것인데 어느 기회에 하나의 의혹이 생겼다. 목욕탕으로 간 김에 Y라는 여인과 미리 전화연락을 해두고 S로의 다방에 가서 데이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자 대뜸 아내가 “방금 어떤 년을 만나고 왔느냐?” 하고 대들었다.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을 알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없었다. 너무나 빠르고 너무나 신통하게 아내가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추리한 끝에 망망이가 밀고자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목욕탕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늦으니까 아내가 목욕탕에까지 찾아와 보았던 모양이다. 벌써 나갔다는 얘길 듣자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버렸는데 저편에서 망망이가 나타났다. 망망이를 보고 아내가 물었다. ‘우리 집의 너절한 가장은 어디에 갔느냐.’ 하고. 그러자 망망인 돌아오던 길을 도로 걸어 S로의 다방 앞까지 왔다.
아내는 다방 문의 투명유리를 통해 내부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나와 Y녀가 마주앉아 얘길 하고 있었다. 아내의 성미로선 쳐들어왔을 것인데 망망이가 아내의 치마꼬리를 물고 끌었을 것이었다. 아내는 망망이의 성화에 못 이겨 집으로 돌아왔다. 사태를 파악하고 그 이튿날 따라나선 망망이를 흘겨보며 “너, 아침저녁 밥을 준다고 그 여자의 첩자 노릇을 한다는 건 대단한 잘못이다. 넌 사람들보다는 나아야 할 게 아닌가. 어떤 경우라도 고자질을 한다는 건 비열한 노릇이다. 알았지?” 하고 타일렀다.
그래도 망망이는 아내의 첩자 노릇을 그치지 않았다. 하룻밤, 아내와 사흘에 네 번꼴의 행사를 보통규모보단 세 배 크기쯤으로 해놓고 훌쩍 집을 나왔다. 아내가 싸움에 지쳐 붙들 기력을 잃은 것이 내겐 다행이었다. 도망친 노예가 가질 수 있는 해방감을 느낀 것까진 좋았는데 한길에 나와 보니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부득이 근처의 여관으로 들어갔다. 사정을 말하고 소주 한 병을 청해 마시려고 하는데 열려있는 현관으로 망망이 얼굴이 보였다. 마침 그때 나는 옆방에 있었던 것이다.
“망망이 여긴 웬일이냐?” 했을 때 아내가 들이닥쳤다. 여관집에서 밤늦게 연장전을 할 순 없었다. 미국 남부의 도망 노예처럼 끌려 집으로 돌아가며 울분을 억누르지 못해 나는 망망이에게 푸념을 했다.
“망망아, 내게 그럴 수가 있는가. 너는 왜 이 여자의 편만 드는가.”
“망망이 앞에서 이 여자가 뭐예요.” 아내가 앙칼지게 투덜댔다.
“이 여자를 보고 저 여자라 할까?”
“이 여자고 저 여자고 쌍스럽게 망망이 듣는데서 그게 무슨 소리냔 말예요.”
나는 아내의 투덜댐엔 아랑곳하지 않고 망망이를 향해 말했다.
“넌 이 여자가 네게 밥을 준다고 편을 드는가. 그렇다면 사리에 어긋난다. 네가 먹는 밥이나 고기는 내가 밤잠 안 자고 원고지 한 칸 한 칸을 메워 번 돈으로 산 것이란다. 네 집을 멋지게 꾸미게 된 것도 내가 번 돈이었다. 근본을 망각하고 피상적인 현상만 보는 건 얄팍한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다. 너처럼 영리한 개가 그럴 수 있는가.”
망망이는 땅을 내려다보고만 걷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반응을 나는 알 길이 없었다. 이윽고 나는 집 근처에 얼쩡거려 망망이 처지만 곤란하게 해선 안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피하는 것처럼 제대로 피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자동차를 타고 망망이의 후각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떠나야만 했다. 단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을 때의 얘기지만.
1년 넘어 세월이 지나고 나니 망망이는 제법 숙녀답게 자랐다. 우리들의 싸움에 전처럼 개입하지 않게 된 것도 성적인 성숙에 따른 지적인 진보 때문인지 모른다. 어느덧 망망이는 은근히 연애를 시작했던 모양이다. 나의 허락을 받지 않은 것은 약간 유감스러웠지만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곤 반가웠다. 그의 연애상대가 나처럼 아내와 삼일사전三日四戰하는 저열한 사내가 아니길 바라고 망망이 뱃속에 있는 것들이 맵시 좋고 슬기롭기도 한 새끼들이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월여月餘 동안 해외 나들이를 하고 돌아온 것은 5월 중순이었는데 그때 새 식구 넷을 맞이하게 되었다. 망망이는 귀여운 자식들 넷에게 젖꼭지를 물리고 있었다. 나를 부신 듯 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더니 이내 고개를 저편으로 돌려버렸다. 어머니가 된 망망이의 함수含羞였다고나 할까. 강아지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한 마리는 누런색이 가끔 섞인 갈색이었고 한 마리는 곰 새끼처럼 새까만 털을 가졌고 한 마리는 즉 바둑인데 하얀 털에 다갈색의 띠를 두 줄 두르고 있었다.
한 달쯤 되니 뜰을 운동장으로 하여 네 마리의 강아지는 한창 흥겹게 놀았다. 어린 것들 노는 것을 멀찍이 포도나무 그늘에 앉아 눈을 좁히고 바라보고 있는 망망이의 모습엔 숨길 수 없는 모성의 신성이 빛나고 있었다. 강아지들은 화단의 꽃을 꺾기도 하고 흙을 파헤치기도 해서 야박스러운 아내의 핀잔을 샀지만 나는 그 모든 장난이 재롱으로 보였다.
뿐만 아니라 유린된 꽃밭을 정리하도록 게으른 딸년들을 몰아세울 수가 있었으니 강아지들 덕택으로 교육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어 흐뭇했다. 또 한 가지 이득은 강아지들은 신이라고 보면 가죽 구두이건 운동화건 샌들이건 물어서 아무데나 버리는 장난을 즐겼기 때문에 딸아이들에게 ‘신은 신발장으로’란 오래 전부터 주장은 했지만 실행되지 못했던 구호를 구호에 그치지 않게 실천할 수 있었다. 전엔 시골 노름방의 문턱 밑 축담처럼 헝클어져 있던 우리 집 축담이 강아지들 덕택으로 제법 문명인의 주택처럼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 저런 점으로 하여 나는 강아지 네 마리를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우리 집에서 다 키울 작정을 세웠다. 흥겹게 놀고 있는 강아지들을 보며 가끔 망망이와 윙크를 주고받는 재미가 여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면이나 외면이 모두 여야차如夜叉인 아내가 나의 낙원을 그냥 둘 까닭이 없었다. 어느 날 외출을 하고 돌아오니 누런빛에 갈색이 섞인 강아지가 보이질 않았다.
“누렁이 어딜 갔느냐?”하고 고함을 지른 것은 당연하다.
“안양 김 서방 댁에 주었어요.” 하는 말에 나는 풀이 꺾였다.
안양 김 서방은 내 조카사위로서 장군이 될 일보 직전에 대령으로 예편되어 인생으로도 예편해버릴까 하는 위험천만한 말로써 내 간을 서늘케 한 사람이다. 누렁이를 갖다 준 곳이 김 서방 집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길로 자동차를 몰고 가서 도로 찾아올 참이었던 것이다. 그 대신 나는 호통을 쳤다.
“앞으론 한 마리라도 누구에게 주어봐라, 이 집에 일대 혁명을 일으켜 놓을 테니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자 외국에서 공부하다가 일시 귀국한 딸년이 “아버지이, 고함소리가 청와대까지 들리겠어요. 혁명이니 뭐니 해갖고 대통령 내뇌분의 잠을 깨시게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하고 달래는 게 아닌가. 어미에게서 나왔지만 딸년이 제 어미를 닮지 않은 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제 어미 같았으면 결코 그런 레토릭은 구사하지 못했을 것이니까.
“네 어미에게 내 뜻을 단단히 다짐해둬. 그럼 난 잠잠할 테니까.” 그리고 아내에게 들리게 중얼거렸다.
“여자는 뭐니뭐니해도 배워야해. 프랑스에서 세련되어 온 이 가시내를 봐.”
“나도 프랑스 유학 좀 시켜주소.” 아내의 앙칼진 소리에 나는 얼른 귀를 막았다.
그런데 내가 그만 실수를 해버렸다. 등산가서 점심 먹으며 어쩌다 혀를 잘못 놀려 강아지 자랑을 해버린 것이다. 동석해 있던 모 신문사 부국장 L씨가 “강아지 한 마리는 내게 주시오.”하고 탄원하는 게 아닌가. 세 마리를 다 키우겠다고 우기는 것은 이기주의자의 표본처럼 될 우려가 있었다. 나는 언제나 너그럽고 인정스럽다는 위선을 버릴 수 없는 허영의 소유자이다.
‘아차 실수했군.’ 싶었지만 후회는 하나마나한 노릇이다. L씨로 말하면 산행에 있어서 나의 선도자이자 내 등산의 사육을 맡은 주방장인 것이다. 강아지 한 마리를 주기로 하고 다음 일요일에 가지고 오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다. 세 마리 가운데 어떤 것을 줄까. 검은 곰 같은 강아지는 일단 제외하기로 했다. 모양이 우선 볼품이 없는데다가 곰처럼 미련한 데가 있었다. 모처럼 줄 바에는 귀염을 받을 수 있는 강아지를 주고 싶었다.
연한 밤색과 바둑이 중 어느 편인가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둘 다 애교덩어리였다. 총명했다 민첩했다. 장난꾸러기인 점도 흡사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은 연한 밤색은 내가 오라고 손짓을 하면 지체 없이 달려와서 손을 핥는데 바둑이는 뛰어오다가 1미터쯤 전방에 서서 힐끔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연한 밤색이 내 품에 안기기라도 하면 슬금슬금 매화나무 그늘로 기어들어가 토라진 시늉을 한다.
가족회의를 열었다. 어미가 같은 색의 계통이니 연한 밤색을 주고 바둑이는 남기자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내 손으로 안아 자동차에 태워 원효로에서 삼양동으로 가는 도중 연한 밤색은 차멀미를 해서 토하고 싸고 한 것이 털에 묻어 볼품이 없이 되었다.
“잘 씻어요. 씻으면 예뻐질 테니까.” 하는 말을 하며 살짝 센티멘털해진 기분을 숨겼다. 연한 밤색을 주었다는 사실에 핑계 삼았는지 모른다. 그 이튿날 외출에서 돌아오니 검은 곰이 없어져 버렸다. 그 미련한 것이 어딜 가서 구박이나 받지 않을까 싶어서 마음이 찡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이윽고 망망이와 바둑이만 남았다. 자식과 형제를 떠나보냈지만 두 마리는 서로 마음을 달래며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어쩌다 바둑이가 마루로 뛰어올라오면 망망이가 와서 살짝 목덜미를 물어 끌어내리기도 했다. ‘바둑아, 분수를 알아야 한다. 우리 개들은 마루에 올라가지 못하게 돼있다.’ 그로부터 바둑이와 고양이는 마루 밑과 마루 위에서 교환하게 되었다. 아마 그들의 대화 가운덴 다음과 같은 대목도 있었을 것이다. ‘고양이야, 너는 좋겠다. 항상 주인 방에서 놀 수 있으니까.’ ‘말 말아라, 강아지야. 그래도 넌 네 집 지니고 살지 않니. 나는 내 것이라곤 방 한 칸도 없단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망망이와 바둑이에게 인사를 나눔으로써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게 되었다. 뜰의 철봉대에 매달리고 있으면 망망이와 바둑인 나란히 서서 내가 운동하는 것을 지켜본다. 금년 들어 스물두 번째 열린 감을 버릇처럼 세고 있으면 그들도 시선을 한 방향으로 해서 스물두 개의 감을 헤아린다.
어느 아침엔 망망이가 싱긋 웃는 듯 눈짓을 했다. 나는 그가 말하려는 뜻을 알아차렸다. ‘매일 아침 감을 왜 헤아리는 거죠? 헤아린다고 불어납니까? 우리가 지키고 있는데 누가 따기라도 하겠습니까? 주책이 있으시오. 주책이.’ 그래서 나는 망망이를 쓰다듬곤 바둑이를 안아 햇빛 쪽으로 들어올린다. 그러곤 중얼거린다.
“알았다. 알았어.”
술에 취해 늦은 밤에 돌아오면 언제나 나를 마중해주는 건 망망이와 바둑이다. 그들이 외출을 좋아하기 때문에 언제나 샛문은 잠그지 않고 밀어붙인 채로 있는데 멀찍이서 클랙슨 소리만 들어도 비집고 나와 문 앞에 나란히 서있는 것이다.
밤샘을 해서 글을 쓸 땐 가끔 뜰로 나가 바람을 쐬면 언제이건 망망이와 바둑이도 뜰로 나온다. 그리고 같이 하늘을 본다. 망망이는 ‘밤샘은 몸에 해로울 텐데요.’ 하고 바둑이는 ‘우리 신나게 놀자.’ 고 한다. 그런 까닭에 나는 여행을 떠나도 그들을 잊지 못한다. 두고 온 집이란 마음이 들 땐 그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내도 아니고 딸년들도 아니고 오직 망망이와 바둑이다.
나는 딸년들을 보곤 “대학에 붙으면 느그 좋고 못 붙으면 내가 좋다. 담배공장에 취직해서 애비 담뱃값쯤은 벌어올 테니까.” 하는 것이 입버릇인데 아내는 “저런 무심한 아버지가 어디 있을까. 강아지에 대한 반쯤이라도 딸애들 생각을 해보소.” 하고 싸움을 걸어오지만 나는 시들도 안 한다. 망망이와 바둑이가 더 좋은 걸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하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지만 차마 그렇게 발설하진 못한다.
그 바둑이가 사소한 실수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실수로 죽어버린 것이다. 밤중에 들어가면 망망이 혼자 서있다. 부둥켜안고 통곡을 터뜨리고 싶지만 망망이의 심중을 짐작하고 나는 꾹 참는다. 머리를 쓰다듬고 이렇게 말할 뿐이다. “망망아, 우리 꾹 참자꾸나. 생명이란 슬픈 것이다. 원래 이 세상에 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여기까지 써놓고 뜰에 나갔더니 망망이는 자기 집에 외롭게 앉아 있었다. 그 눈빛이 왜 그렇게 슬퍼 보이는지 자세히 들여다보니 망망이의 얼굴은 철학자의 얼굴을 닮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시몬 베이유의 얼굴을 닮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안젤라 데이비스의 얼굴을 닮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1986년 가을은 이렇게 해서 내겐 슬픈 계절이 되었다. 산뜻한 이름이라도 지어주었을 것을. 바둑이란 평범한 이름으로 죽게 한 것이 한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작품해설]
소설 속 인물들이 깊은 애정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다투는 것은 돈 때문이다. 여유없는 생활에 지친 아내는 마음으로는 어떻게 여기든 고장난 선풍기를 그대로 둔 채 책을 사는 남편의 속을 ‘소설 나부랭이’라는 말로 긁어놓는다. 남편이 바둑이에게 정을 쏟는 것은 아내와 딸들의 애정으로도 달랠 수 없는 고독 때문이다. 개에 대해 말할 때도 작가는 천재의 비유를 사용한다. 바둑이는 그레이스 켈리 같고 파스칼 프티 같으며 망망이는 시몬 베이유 같고 안젤라 데이비스 같다. 이 소설이 나온 1986년에 안젤라 데이비스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마르쿠제의 흑인 제자로서 70년대까지 그녀의 행동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