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의 고인돌무덤
출처 : 강화도의 고인돌무덤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이형구 : 선문대학교(鮮文大學校) 고고연구소 소장 ]
우리나라 고인돌무덤은 그 수량과 특유의 무덤 구조, 형태의 다양성으로 인해 선사시대 인류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우리나라 고인돌무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무덤은 무려 2만 기가 넘게 전국적으로 발견되고 있어 그 숫자 면에서 세계 제일일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상 초기국가 형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역사 유적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북아시아 일대 청동기시대의 수장(首長)급들의 무덤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우리나라 고인돌무덤은 대체로 북방식 고인돌무덤과 남방식 고인돌무덤으로 나뉜다. 북방식 고인돌무덤은 땅 위에 4개의 판석으로 된 고임돌(支石)을 세우고 평면이 긴 네모꼴인 무덤방(墓室)이 되도록 널을 짠 다음 그 위에 평평하고 납작한 큰 덮개돌(蓋石)로 덮는 형식이다. 남방식 고인돌무덤은 대체로 땅 아래에 무덤방을 만들고 땅 표면에 다른 돌덩이나 자갈돌을 깐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얹는 형식이다. 또 남방식 고인돌무덤 중에는 땅 아래 토광(土壙)이나 돌널(石棺) 위에 덮개돌만 올려놓은 이른바 개석식(蓋石式) 고인돌무덤도 있다.
이형구(선문대학교(鮮文大學校) 고고연구소 소장)은 1992년, 『강화도 고인돌무덤[지석묘] 조사연구』[한국정신문화연구원]를 내놓은 바 있다.
강화도(江華島)의 청동기시대 문화유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유적이 고인돌무덤이다. 1980년대 이후 저자는 강화 본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고려산(高麗山, 해발 436m) 이북의 1개읍·4개면에서 무려 100여 기에 가까운 고인돌무덤을 발견 또는 조사하였다. 이때 조사에서 강화도에 있는 전체 고인돌무덤 중 절반에 남방식 고인돌무덤과 북방식 고인돌무덤이 함께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이때부터 강화도 고인돌무덤은 그 형태나 수량 면에서 세인의 주목을 끌게 되어 마침내 2000년 11월 29일 유네스코(UNESCO)가 주관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강화도 고인돌무덤의 고임돌이나 덮개돌에 사용된 석재는 같은 재질로 강화에서 흔하게 보이는 화강편마암이다. 무덤 주위에 이만한 석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먼 돌산이나 해안에서 바위를 채석하여 운반해왔을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의 산상에서 자연 판상석을 떼어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대형 판석을 떼어내 5리나 10리 길을 운반한다는 것은 지금의 육로 사정이나 운반 수단을 고려해보더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200명에서 300명 이상의 인력을 동원하여 이들을 지휘 감독할 수 있는 지도력이나 통치력을 상정해볼 수 있다. 당시 강화도 고대 사회의 사회적 구성과 농경 생활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활동, 권력의 집중 따위를 짐작할 수도 있다. 하나의 고인돌무덤을 만든다는 것은 이와 같은 엄청난 인력 동원과 운반수단, 역학적 구조 등을 고려해볼 때 불가사의한 일이다. 고려산 중북[해발 200m 정도]까지 올라가 고인돌무덤을 축조한 강화도의 고인돌무덤 사회 주민들이 고려산 북쪽에 집중적으로 무려 100여 기에 가까운 고인돌무덤을 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사회 조직보다 훨씬 더 큰 사회 조직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마한(馬韓)에는 50여 개의 작은 나라가 있다”고 했는데, 이 작은 나라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이러한 선대(先代)의 고인돌무덤 사회로부터 소국(小國)으로 형성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적 제137호인 부근리 고인돌무덤과 같은 대형 고인돌무덤 하나가 독립적으로 세워졌다면 이 일대의 사회적 구성이 소수일 수도 있고, 지도계급이 서로 단절되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형 고인돌무덤이 2기 이상이나 한데 모여 있고, 소형 고인돌무덤 10여 기가 함께 세워지던가 아니면 축조 세대(世代)를 달리하여 세워졌다면 당시의 사회조직과 경제적인 구조가 복잡했고, 나아가서는 정치적인 권력의 집중이 엄청나게 증대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강화도 북부에 고인돌무덤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것보다 훨씬 더 큰 사회조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강화도의 고인돌무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적 자원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강력한 사회조직이 발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1966년에 하점면 부근리 743의 4번지 점골 고인돌무덤에서 북쪽으로 약 70m 지점에서 청동기시대 집자리가 발굴되었다. 당시 동쪽 한 벽면의 길이가 2.5m, 남쪽 벽면이 1.6m 정도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반수혈식(半竪穴式) 벽면은 대부분 무너지고 동면만 15cm 높이로 남아 있어 형태만 짐작할 뿐 전체적인 윤곽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주위의 벽면 아래에서 일렬로 작은 기둥을 세웠던 기둥 구멍[주공(柱孔)]이 발견되었고, 이 집자리의 주거면 가운데에서 짧은 빗금무늬[단사선문(短斜線紋)]가 있는 이중구연(二重口緣)과 각형토기(角形土器)의 바닥 모양을 갖춘 토기 조각도 출토되었다.
당시만 해도 이러한 각형토기가 임진강 이남에서 발견된 것은 강화도가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서북부와 요동반도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고 있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유형인 각형토기가 유행한 시기는 고인돌무덤 시기와 비슷하다.
2000년 4월부터 2001년 10월까지 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 발굴단[단장 이형구]에 의하여 발굴된 오상리 고인돌무덤은 고려산 서록 낙조봉의 능선 끝자락에 위치한 해발 76m의 조그만한 야산의 낙타 등 같은 능선상에 12기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고려산 아래 약 200평 남짓한 구릉 위에 12기의 북방식 고인돌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2000년 4월~2001년 9월, 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소장:이형구 교수)가 발굴한 후 복원 정비되었다.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오상리 고인돌무덤의 축조방식과 고인돌무덤의 하부 구조는 고임돌에 쐐기를 박아 바로 세우고 마감돌로 막은 후, 시신을 넣고 덮개돌[개석(蓋石)]을 덮은 다음 주변에 돌을 쌓은 적석(積石) 또는 포석(鋪石) 방식을 사용하여 매우 특이하다.
고인돌무덤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묘제(墓制)이다. 이번 발굴 결과 청동기시대의 짧은 빗금무늬[단사선문(短斜線紋)]를 시문한 이중구연 조각들이 무문토기 편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들 토기 편들은 고인돌무덤 유적의 표토(表土)와 고인돌무덤의 하부구조 부근의 부식토층(腐植土層)에서 출토되고 있어 고인돌무덤 축조 당시에 함께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토기는 이중구연이 출현하고, 구연부와 구연부의 돌대에 빗금무늬를 시문하는 것으로 보아 일찍이 하점면 부근리의 청동기시대 집자리에서 출토된 바 있는 각형토기류의 파편일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각형토기류는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에서 청동기시대 무문토기로 이어지는 과도시기의 빗금무늬토기로서 대략 기원전 15~10세기경에 유행하던 토기이다. 이는 오상리 고인돌무덤의 주인공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일지도 모른다. 유물의 연속성은 바로 인류의 연속 성과도 통하기 때문이다. 발해연안의 고인돌무덤의 연대가 신석기시대 말기 혹은 청동기시대 초기인 점을 고려할 때 강화도의 고인돌무덤은 대체로 기원전 1500~10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고인돌무덤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만주 지방에도 많이 분포하고 있다. 북방식 고인돌무덤은 한반도의 경기도·강원도 서북부·황해도·평안남도·평안북도 지방과 요동반도 일대에 연결되어 있어, 이 지역의 고인돌무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한편, 고인돌무덤이 분포하고 있는 능선 위 부식 암반층[석비례층] 위에서 석영(石英)으로 만든 구형석기(球形石器)가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다면체(多面體)로 이루어진 이 구형석기는 구석기시대까지 연대를 올려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 더욱 주목을 끌고 있는 유물이다. 이 밖에도 신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에 계속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돌칼·돌화살촉·돌검·돌도끼·대롱옥[관옥(管玉)]·미완성 석기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왔다. 한 장소에서 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에 걸친 유물이 함께 나온 예는 지금까지 처음 있는 일로, 우리나라의 인류(人類)가 어디서 유입되어 온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까지 이어지면서 계속 살아왔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사례이다.
강화도 고인돌 분포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