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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치 이규승입니다.
# 포럼(최명상 전 공군대학 총장)
* 6·25전쟁 진실은 최고의 안보교과서
6·25전쟁 73주년을 맞아 중국 신화사는 ‘미국의 협박 외교와 危害(위해)’ 보도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도발한 대형 전쟁을 열거하며 6·25전쟁을 첫째로 꼽았다. 소련 붕괴 뒤 공개된 사료로, 6·25전쟁은 스탈린이 결정한 김일성의 남침 전쟁으로 공인된 지금도 억지 주장을 계속했다. 시진핑(習近平)의 잘못된 역사 인식 ‘抗美援朝(항미원조)’ 탓이지만, 학계 책임도 있다.
2차대전 뒤의 미·소 냉전 원인을 소련 공산주의 때문이라고 보는 전통주의 학파와 미 제국주의 때문이라는 수정주의 학파의 상반된 논리를 6·25전쟁에 그대로 적용한 탓이다. 전통주의 학자들은 6·25전쟁을 스탈린 주도 남침설,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의 공모설, 김일성 주도 남침설로 주장했다. 반면 좌파 성향의 학자들은 맥아더와 이승만의 공모 북침설, 남한의 남침유도설, 미국 개입 내전설을 펴는가 하면 통일전쟁설, 소련 불개입설 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왔던 브루스 커밍스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 인민위원회 활동을 중시하며, 6·25전쟁을 1946년 10월 대구폭동과 1948년 제주 4·3사건 및 10월 여순반란 연장선상의 해방전쟁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커밍스 키즈’가 출현했고, 종북좌파는 미군을 점령군,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호도한다. 그러면 6·25전쟁의 역사적 진실은 무엇이며 스탈린은 왜 결심했는가?
1946년 3월 스탈린이 그리스와 튀르키예를 공산화하려 하자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으로 공산 세력 확장을 봉쇄했다. 스탈린이 1943년 해체한 코민테른을 코민포름으로 부활시켜 냉전이 본격화했다. 1947년 미국이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 회생을 위해 마셜플랜을 시행하자 소련은 코메콘으로 대항했다. 미·영·프가 독일 점령지역의 경제 발전을 위해 도이치 마르크(DM)로 통화를 통합하자, 스탈린은 1948년 베를린 봉쇄를 단행해 미·소 냉전은 극에 달했다. 서방측의 대량 공수작전으로 제3차 세계대전은 피했으나,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로 소련과 공산권을 포위했다. 스탈린은 압박을 받았고 공산 종주국 지도자로서의 권위마저 실추됐다.
사면초가인 스탈린이 압력 분산책을 모색하던 중 1949년 8월 소련 핵실험 성공, 10월 마오쩌둥의 중국 대륙 석권에 이어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 선언으로 한반도가 미국의 방위권에서 제외되자 6·25전쟁을 최종 결심한 것이다. 이처럼 6·25전쟁은 미·소 냉전체제 구조 결함의 희생물이고, 좌우파 정치세력의 대결과 소·중·북의 정책 결정 체제 결함,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의 전쟁광적인 성격 결함으로 야기된 것이다.
우리는 북핵 위협으로 6·25전쟁 이래 최대의 안보 위기를 맞고 있다. 미·중 패권 경쟁 속에 우크라이나 전쟁과 시진핑의 대만 점령 야욕으로 신냉전 체제화가 제2의 6·25로 비화하지 않도록 온 국민이 단합해야 할 때다. 국제체제 변화를 예의주시하면서 시진핑·김정은·블라디미르 푸틴의 일거일동, 특히 3선 연임된 시진핑의 主動作爲(주동작위: 제 할 일은 주동적으로 함)를 경계하면서 한·미 정상의 워싱턴선언에 더해 종북좌파 척결과 자주 국방력 증강으로 국가 안보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것이 자유 대한민국의 영원한 생존과 번영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