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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던 시절>
축구시합 때 나름대로 열심히 뛰는 선수, 그라운드에 적응도 되어 시원한 골도 넣고 기가 살아 펄펄 나는 선수를 감독이 교체하겠다면 참으로 억울할 것입니다.
벤치로 돌아오는 선수는 속이 상할 대로 상해 아이들 표현대로 꼭지가 돌아버릴 것이며, 괜히 애꿎은 쓰레기통이나 물통만 발길질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무렵, 세례자 요한의 인생은 그야말로 황금기였습니다.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적극 추종하는 유능한 제자 그룹이 형성되어 있었고, 수많은 추종자들의 수효는 언제라도 정치 세력화할 수 있을 정도였기에 영주 헤로데 마저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가장 잘 나가던 시절, 끗발 좋던 시절, 메시아께서 도래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물러 나야할 때가 왔음을 직감합니다.
즉시 오랜 기간 공들여 갈고 닦은 자신의 지역구를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또 자기 뒤에 오시는 그분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의 겸손이 참으로 돋보입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가장 에너지가 넘치던 시절, 소나기 골을 마구 터트릴 수 있는 절정기의 순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멤버체인지가 됩니다. 일말의 아쉬움이나 아무런 미련도 없이 말입니다.
때가 왔음을 알게 된 세례자 요한은 망설이는 법이 없습니다. 확실하게도 뒤로 물러섭니다.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감춥니다. 주님께서 확실하게 뜨도록, 주님께서 활짝 꽃피어나도록 철저하게도 자신을 낮춥니다.
세례자 요한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이런 그의 겸손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매일 나 자신이 조금씩 사라지길 바랍니다. 내 안에서 매일 나 자신이 죽길 바랍니다. 나 자신이 사라지고 죽은 그 자리에 주님께서 현존하시길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서 점점 성장해나가길 기원합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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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스바 3,14-18ㄱ
제2독서 필리 4,4-7
복음 루카 3,10-18
어제 산책을 하며 묵주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날씨가 풀려서 산책하기에는 정말로 좋은 조건이었지요. 그런데 기분 좋은 마음으로 묵주기도를 하며 걷고 있다가 깜짝 놀랄 일을 겪었습니다. 글쎄 바로 제 앞에 커다란 고드름 하나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것입니다. 날씨가 포근해지면서 건물에 붙어 있던 고드름이 녹아떨어진 것이었지요.
정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만약 조금만 더 빨리 걸었더라면 그대로 머리로 떨어지는 고드름을 받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불과 몇 초 차이로 저에게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앞날을 아무도 알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몇 초 앞도 깨닫지 못하면서도 왜 이렇게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생활하고 있는지요?
어제 동창신부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아는 분들은 잘 아실 이야기이지만, 이 지면을 통해서 말해 봅니다.
어느 날, 거북이가 서울을 가고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서울로 가고 있는 지렁이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꿈틀거리며 가고 있는데 그 속도를 거북이가 보기에 얼마나 느리던 지요. 그래서 불쌍한 마음에 “야! 타!”라고 말했고, 지렁이를 등에 태우고 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이번에는 서울을 가고 있는 굼벵이를 보게 됩니다. 이번 역시 불쌍한 마음에 “야! 타!”라고 말한 뒤에 등에 태우고 다시 서울로 향했습니다. 이 둘을 태운 거북이가 으스대며 말합니다.
“야! 나 꽉 잡아야해! 나 되게 빨라!”
그리고 지렁이와 굼벵이는 감탄하며 말합니다.
“거북아! 너 정말 빠르다! 어떻게 그렇게 빠를 수 있니?”
지렁이와 굼벵이 그리고 거북이의 입장에서는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가 아는 속도와 비교하면 어떨까요? 너무 느린 속도이지요. 그러나 자신의 한계에 갇혀 있다 보니 자신의 속도가 세상에서 제일 빠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과 몇 초 앞도 바라보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한계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메시아를 준비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이에 세례자 요한은 나눔과 정의 그리고 사랑을 철저하게 실천해야 할 것을 이야기하지요. 이것이 바로 주님을 잘 준비하는 것이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준비와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어떨까요? 우리 모두의 궁극적인 목표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참 행복의 길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준비하기 위해 온 힘을 다 쏟았던 세례자 요한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세속의 기준들을 멀리하고 대신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불과 몇 초 앞도 바라보지 못하면서 자신의 한계에 갇혀서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어리석은 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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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일>(2012. 12. 16.)(루카 3,10-18)
<메시아>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것이다(루카 3,16-17)."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소개하는 말을 보면
메시아의 '구원'이 아니라 '심판'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것은 메시아는 '구원자'이면서 동시에 '심판자'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메시아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판'이 처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메시아의 심판은 구원받을 사람과 처벌받을 사람을 분류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심판을 함께 받아도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의 심판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처벌의 심판이 됩니다.
'회개'는 심판을 받기 위한 준비인데,
처벌을 피하기 위한 일이기도 하고 구원을 받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심판을
'알곡'과 '쭉정이'를 분류하는 작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밭에서 가라지를 뽑아내는 일로 표현하십니다(마태 13,30).
'알곡'과 '쭉정이', 또는 '밀'과 '가라지'로 표현되어 있지만,
이것이 구원받을 사람과 처벌받을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구원을 받아들인다면 전부 다 알곡(밀)이 될 수도 있고,
'모든 사람'이 거부한다면 전부 다 쭉정이(가라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각자 스스로 선택할 일입니다.
또 한 번 선택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알곡(밀)이었다가 쭉정이(가라지)로 전락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쭉정이(가라지)였는데 회개해서 알곡(밀)이 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는 한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탄절 때 보게 되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에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무서운 심판자의 모습이 없습니다.
또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애 동안
사람들을 심판하거나 처벌하는 일을 하신 적이 없고
오직 자비와 사랑만을 베푸셨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은
아직 예수님이 지상에서의 활동을 시작하기 전인데도
'종말의 처벌자'를 미리 소개한 것이 아니라
'그 심판 때의 처벌을 피하게 해 주시려고 오시는 구원자'를
소개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한 말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쭉정이인 너희들을 알곡으로 만들어서 구원하실 분이다.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려면 지금 회개하고 알곡이 되도록 하여라.
만일에 너희가 회개하지도 않고, 또 그분을 거부한다면
쭉정이인 너희는 알곡이 되지 못하고,
쭉정이인 채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이 알곡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회개도,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들이 이미 알곡이 되어 있으니까
그런 건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바리사이들이 죄인 취급했던
가난한 일반 백성들, 여자들, 어린이들, 세리들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자기들을 쭉정이로 생각했고,
그래서 알곡이 되기를 소망했고,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교도소 사목하던 시절에 늘 느꼈던 일인데,
재소자들의 고해성사(회개)가 대체로
일반 신자들의 고해성사(회개)보다 훨씬 더 진실하고 성실했습니다.
이미 사회적으로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힌 상태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알곡(의인)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적었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재소자는
자기의 억울한 사정만 하소연하고 회개 같은 것은 할 생각도 안 합니다.
(원한과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재소자는 복수할 생각만 하기도 합니다.)
교도소 안에 있든 밖에 있든 간에
진정한 회개는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메시아의 심판을 시험으로 비유한다면,
그 시험은 정원제가 아니고 자격제이고, 상대평가가 아니고 절대평가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라고 방심하거나
'저 사람보다는 내가 낫다.' 라고 자만하다가 탈락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성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더 자주 회개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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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어주는 연습 >
카네기멜론대 심리면역학 교수 셸던 코헨(Sheldon Cohen)은 4년 동안 18-55세 사이의 건강한 지원자 400명을 대상으로 재미있는 실험을 하였습니다. 인간관계의 폭과 면역력과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사회활동에서 맺는 관계의 폭을 알아내고, 모두에게 다섯 종류의 감기 바이러스가 들어 있는 콧물을 투여했습니다.
결과는 이렇습니다. 가족 친구 직장동료 등 교제그룹이 3개 이하로 적은 사람들은 6개 이상인 사람들보다 감기 걸릴 확률이 4배나 높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코막힘, 콧물의 양을 비교했을 때 그 증상도 훨씬 심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역할, 직장생활, 종교생활 혹은 취미생활 모임 등등 기본적으로 이렇게 다양한 사회 분야에 참여하는 사람일수록 바이러스에 대한 보호가 더 잘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세상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존재하는 진리가 있고 이치가 있습니다. 사람은 그 이치를 거스르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순천자흥(順天者興)’이요, ‘역천자망(逆天者亡)’이라 하였습니다. 세상의 이치를 잘 따른다면 행복해지고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자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 바닷물은 염분이 많아서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물을 기르려고 한다든지, 혹은 바다에 가서 마실 물을 떠온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사람입니다.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면 어떻게 될까요? 행복할까요, 불행해질까요? 답은 뻔할 것입니다.
몸도 자연의 이치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무병장수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사람을 많이 만나야 몸의 면역력이 증가한다는 말은 곧 좋은 관계를 잘 맺는 사람들이 자연의 이치, 혹은 자연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우주의 법칙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찾아와서 메시아를 맞아들이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요한은 많은 충고를 해 주지만 요지는 하나입니다. 즉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가진 것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은 흐르는 물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흐르면 생명이 넘치고 고이면 썩는 것이 물입니다. 이스라엘 땅에서도 갈릴레아 호수는 받은 물을 요르단강으로 계속 흘려보내는 물고기가 풍부한 생명의 호수이고 반대로 갈릴레아 호수에서 흘러오는 물을 받기는 하지만 내어주지는 않는 소금바다, 사해는 물고기가 한 마리도 살 수 없는 죽은 바다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신 분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모든 것 안에는 사랑의 법칙이 스며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전부인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기 위해 세상의 창조질서를 잘 따르는, 즉 만족하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을 사람이 되신 진리를 맞아들이는 가장 중요한 준비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테레사 효과라고 있습니다. 1998년 하버드 의대 연구팀은 흥미로운 실험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하버드 학생들에게 테레사 수녀가 인도에서 환자를 돌보며 봉사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여준 다음, 이들의 면역항체(Immunoglobulin) 수치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측정해봤습니다. 그 결과 면역글로불린의 수치가 이전보다 50% 이상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봉사를 직접 한 것도 아니고 단지 봉사하는 모습을 보기만 했는데도 우리 건강을 지켜주는 면역물질이 더 많이 생성된 것입니다.
이후 남을 돕는 활동을 통해 일어나는 정신적, 신체적 변화를 '마더 테레사 효과(The Mother Teresa Effect)'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마더 테레사 효과(The Mother Teresa Effect)'와 비슷한 말로 '헬퍼스 하이(Helper's High)'가 있습니다.
남을 돕는 봉사를 하고 난 뒤에 사람들이 느끼는 심리적 포만감인데, 이 경험은 몇 주 동안 지속되면서 혈압과 콜레스테롤 저하 및 엔도르핀 분비를 도와 몸과 마음에 활력이 넘쳐 건강해 집니다.
마더 테레사 효과(The Mother Teresa Effect) 와 헬퍼스 하이(Helper's High)는 남을 돕는 것이 자기 자신을 돕는 일이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돕는다면 건강해지고 행복해진다는 연구결과입니다.
인도 출신 의사이며 심신 의학의 창시자이고 영신수행 지도자인 디팩 초프라란 사람의 자녀교육 방법은 창조의 진리를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두 아들이 공부를 해야 될 나이가 되었을 때 초프라는 아들에게 지치지 않고 한 가지만 당부했습니다.
“네가 만약 공부를 못해서 실패해도 아빠가 다 책임질 테니까, 넌 한 가지만 생각해라. ‘네가 세상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그것 하나만을 생각하길 바란다.”
두 아들은 다 장학생으로 졸업하여, 하나는 하버드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하나는 사업을 해서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이것이 우주의 법칙이요 창조의 원리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교육은 남을 이겨야만 하는 경쟁주의로, 자신이 더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가고 남들보다 더 가지고 더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는 것보다는 자기 것을 먼저 챙기는 사람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부터 실현되어야 합니다.
저도 신학교 때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 친구들을 위해 시험에 나올만한 것들을 정리해서 돌렸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이것을 꼬덱스(Codex)라고 합니다. 사실 이렇게 나누다보니 다른 친구들보다 제가 성적이 더 잘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들음으로써가 아니라 가르쳐줌으로써 더 완전하게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남이 정리해 놓은 것을 흉내 내지만 가르쳐 준 사람은 그만큼 명확히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핀란드의 교육방식입니다. 등수를 없애고 협동하는 사람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로 키우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4-5명의 그룹으로 공부를 하여 서로 알려주는 방법을 택합니다. 만약 낙오하는 학생들이 많다면 교육부에서 그 학생들을 위해 재정이 1.5배가 더 배정되는 희한한 시스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학생들보다 공부시간이 반 정도밖에 안 되는 핀란드 학생들의 성적이 궁금하다고요?
OECD주관 국제학업성취도 평가 PISA에서 우리나라는 2위이고, 핀란드가 최근 몇 년간 계속 1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물론 학습편차가 세계에서 가장 적은 골고루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입니다. 이치를 깨달으면 행복하게 더 많은 성취를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제가 유학할 때 한 신부님과 아침에 만나기로 했는데 결국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날이 섬머타임이 바뀌는 날이었는데 저는 바뀐 시간으로, 그 신부님은 안 바뀐 시간으로 나왔다가 만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같은 규칙을 사용하고 있어야 만날 수 있습니다. 축구장에서 농구장 규칙으로 경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쫓겨납니다. 같은 운동경기 안에서는 그 같은 규칙을 사용하는 사람끼리 만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 태어나는 그리스도와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그 분의 법을 먼저 따르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고, 주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돈을 열심히 모아서 나중에 죽으면 사회에 다 환원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나누지 않으면 죽어서 나누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 그리스도의 법을 따라야 그 분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돼지가 소에게 찾아와서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왜 너는 좋아하데 나는 더럽다고 피하고 돼지 같은 놈 하면서 놀리는 것이지?” “네가 사람들한테 우유도 주고 밭도 갈아주고 하면서 도움 주는 건 인정하겠는데, 나도 말이야 죽어서 베이컨에 삼겹살에 족발에 그 아픈 가운데도 웃는 얼굴로 죽어서 머리까지 쓰게 한단 말이야. 이해를 못하겠어.”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소가 한마디 했답니다. “음 그건 말이야, 아마도 넌 죽어서 주지만 난 살아 있을 때 주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님은 나눌 줄 아는 사람 안에 태어나십니다. 가장 큰 자선은 자신의 공간을 그 분을 위해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 상징이 바로 마구간입니다. 내어줄 줄 아는 마음, 그 마음이 없으면 올 해도 예수님이 우리 안에 태어나시기는 틀렸습니다. 군인은 하루 쓰기 위해 10년 훈련을 시킨다고 합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처럼 그분이 오셨을 때 외면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언제 올지 모르는 그분을 맞아들이기 위해 바로 지금부터 내어주는 연습을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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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합니까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대림3주일입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대림3주일을 ‘자선주일’로 지내기로 정하였습니다. 이날 특별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의 기회를 갖습니다. 이 시간 자선의 의미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달 어느 날, 저녁미사를 시작하려는 시간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미사가 시작되니 기다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젊은 부부가 4살 박이 사내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사업에 실패하여 큰 아이는 보육원에 맡기고 이렇게 일자리를 찾아 떠돈다는 것이었습니다. 4살 된 아이도 맡길 수만 있다면 맡기고 싶다고 하면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하였습니다. 잠자리를 준비하고, 아이를 맡길 곳을 이리저리 알아봤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금일봉을 주고 보냈습니다. 다음 날 다시 연락을 취할 것을 부탁하고는 점퍼와 목도리를 둘러 주었지만 마음이 아팠습니다.
다음날 옆 본당 신부님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확인해 보니 제가 만난 분이 틀림없었습니다. 밥을 사주고 여관에서 잠을 재우고 돈을 얼마 쥐어 보냈지만 이대로 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날 청주지역의 성당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신부를 속이는 것인지, 신부들이 그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인지? 어찌되었든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나진 못하더라도 도움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는 신부님들이었습니다. 선의의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신부가 이럴 때 곤란함을 느낍니다. 알면서도 속고, 모르면서도 속고, 이래 속고, 저래 속고. 그래도 때가 되면 깨우칠 날이 오겠지? 나를 속여먹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히브리서 13장 2절에서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여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5,42).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 그렇습니다. ‘축복해 주는 이는 자기도 흡족해 지고, 마실 물을 주는 이는 자신도 흠뻑 마시게 됩니다’(잠언11,25). 받기위해 준다면 참 사랑이라고 할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지혜롭게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9장13절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하고 미사 봉헌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 당장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데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이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5-17).
오늘 복음을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3,8)고 한 요한에게 군중이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3,10). 세리도, 군인들도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같은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옷을 두벌가진 이는 못 가진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다른 이와 나눠야’ 하며, 세리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 것’이며 군인들도 ‘갈취하지 말고 자신의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자기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맞게 처신하되 베푸는 삶, 정의로운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법을 잘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누구든지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계명은 우리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거나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신명기 30,11-13) 성경은 말합니다.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30,14). 그런데 마음과 몸이 따로 이고 실천하지 않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성당에 오시면서 거울을 보고 몸단장을 하고 오셨을 것입니다. 오늘뿐 아니라 수시로 거울을 봅니다. 그리고 무엇이 묻거나 잘못되었으면 바로 고칩니다. 저도 거울을 자주 봅니다. 앞이 훤하잖아요? 흰머리라도 좋다 빠지지만 말아다오! 어느 분이 머리 염색약을 슬며시 가져 다 놓으셨는데 발라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머리카락이 더 빠지잖아요. 지금은 있는 그대로가 좋다고 생각하고 지냅니다. 어찌 되었든 아마 얼굴에 무엇이 묻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어디에 비춰봅니까? 거울에 비춰보면 보입니까? 우리 영혼의 상태를 거울에 비춰보면 그 상태를 낱낱이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의 상태, 영혼의 상태를 비춰보는 거울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거울입니다.
야고보서 1장21절 이하에 보면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나를 비춰보고 잘못되었으면 바로 고쳐야지요. 왜 고치지 않습니까? “저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어서 그 답을 가르쳐 주었는데 왜 그대로 실천하지 않습니까. 그대로 하면 축복이 주어지는데, 행복해지는데 왜 그대로 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느냐 말입니다. 그 사람은 거울을 보고 얼굴에 무엇이 묻은 것을 확인하고도 그냥 다니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 바보입니다. ‘가진 것을 ,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라’.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어라’ 하는 말씀을 듣고도 왜 그냥 넘어갑니까?
오늘 2독서 말씀입니다.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피4,6-7). 말씀을 들었으면 그대로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행복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찰떡궁합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당신은 너무 예뻐!”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아요!” 하였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옳아! 그러니까 우리는 찰떡 궁합이야! 꼬집어 말하지 않아도 용하게도 알아맞히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주님과 찰떡궁합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매번 지적하고 명하지 않아도 그분 뜻을 먼저 알아듣고 행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들며 무엇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 깨우치길 바랍니다.
다니엘 예언자는 임금에게 직언을 했습니다. “저의 조언이 임금님께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의로운 일을 하시어 죄를 벗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불의를 벗으십시오. 그리하시면 임금님의 번영이 지속될지도 모릅니다”(다니4,24).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자기 영광을 떨치려고 하다가 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제 정신을 차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높이 찬양했습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진실하고 그 길은 다 공정하니 그분께서는 교만 속에 걷는 자들을 낮추실 수 있는 분이다”(다니4,34). 기억하십시오. 선을 행하면 죄를 벗고 가난한 이를 도우면 허물을 벗습니다. 태평성대를 누립니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으로 기억 됩니다. ‘인정이 많고 동정 어려 남에게 꾸어주며 모든 일을 양심으로 처리하는 사람, 그 사람은 흔들리지 않겠고 영원히 의로운 사람으로 기억되리라’(시편37,25-26). 그러므로 “너희는 그에게 반드시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 줄 때에 아까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이 일 때문에,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하는 모든 일과 너희가 손대는 모든 것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명15,10).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암브로오시오 성인은 “자선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내고 암흑에 빠지지 않게 해 줍니다. 누구든지 자선을 베풀면 그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도 “자선을 하면 영벌을 면하게 됩니다. 사랑의 하느님은 적은 것에도 만족하시니 많고 적음을 떠나 할 수 있는 데까지 자선을 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결국 자선은 이웃을 구체적으로 돕는 행위이지만 내 자신의 영생을 보장 받는 것입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성 베드로 클리솔로그). 그러므로 이웃의 처지를 헤아리고 그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 주시고 동시에 영생의 복을 오늘로부터 누리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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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오 성인은 나눔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먹지 않는 빵은 굶주린 사람들의 빵이고, 너희의 옷장에 걸어 둔 입지 않는 옷은 헐벗은 사람들의 옷이다. 너희가 신지 않는 신은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의 신이고, 너희가 금고에 깊이 넣어 둔 돈은 가난한 사람들의 돈이다. 너희가 실천하지 않은 자선 행위는 너희가 범하게 되는 수많은 불의(不義)이다.”
성인의 이 말씀은 저의 폐부를 아프게 찌릅니다. 옷장을 열어 보면 일 년 동안 입지 않고 보관만 해 온 옷들이 많고, 책장을 바라보면 읽지 않고 먼지만 쌓여 있는 책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제 지갑의 두께는 두툼합니다. 생각해 보니, 한 해 동안 땀 흘리는 일 별로 없는 가운데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신자들에게는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며 살아가세요.”, “서로 사랑하세요.” 하면서 제 자신을 속였습니다. 이제 중독이 되어서 그런지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도 마비된 것 같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은 실천에서 완성이 된다고 하였는데(2,14-26 참조), 실천에 이르지 못하고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저의 믿음은 언제 완성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던 한 해를 조금이라도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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