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은 실체가 있는 말이다
“아리랑”이라는 세 글자는 한민족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말이다.
“아리랑”은 사랑, 그리움, 한, 님, 이별, 같은 관념어가 아니라
“아리랑”은 해, 달, 별처럼 실체가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랑”의 실체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그 해결방법은 “아리랑”에 대한 언어학적 접근방법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아리랑”에 관련된 우리말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원성왕 본기에
“周元 宅於 京北二十里 會 大雨 閼川水漲 周元不得渡”
“주원의 집은 경주북쪽 20리에 있었는데 큰비로 “閼川”이 넘쳐 주원은 입궁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알천”은 지금의 경주 북천이다.
경북일보 2016. 4. 28.(알천과 북천) 및 경북일보 2020. 7. 22.(삼국유사 오디세이)에 양주동 박사는 여기에 나오는 “알천”이 “아리랑”의 어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강을 “아리수”라고 부르는데 이것도 알천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였다.
즉 “아리랑”이라는 말의 모태가 “알천”이며, “알천(냇물)”이 “아리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강,낙동강,두만강,압록강,대동강,요하,난하, 송하강의 옛 이름이 “아리수”라는 것이다.(동아출판, 대조선제국사, 1993)
또한 제주도의 “한천” 하류에 “아라리(아라동)”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것은 “한천”을 “아라리” 또는 “아리랑”이라 했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삼천리금수강산 골짜기에서 바다로 흐르는 물길이 곳곳에 있는데, 물길의 명칭을 보면 산골짜기나 밭고랑 사이로 흐르는 “고랑물”, 논밭사이나 마을안길 따라 흐르는 “도랑물”, 도랑물이 합쳐 흐르는 “거랑물(큰 도랑물)”, 마을 밖으로 흐르는 “내”라고 하는 “알(아리)”이 있다.
이것을 정리하면 물은 고랑-도랑-거랑-알(아리)을 거쳐 바다로 간다.
그리고 정선 아오라지와 동강의 떼꾼들에 의하면 강을 따라 가면서 뗏목꾼들이 쉬어가는 주막집이 있었는데 이 주막을 송문옥(정선 떼꾼 1991년 사망)은 “아라리 주막”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아오라지에서 한양까지 흘러가는 물길을 “아라리”라고 하였기 때문이며, 만지나루 전산옥도 “아라리 주막”이라 하였다고한다. 즉 강을 “아라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강릉의 학산 오독떼기 후렴에 “아리 아리 아라리 아라리고개를 넘어 간다.” 라고 하는데, 강릉에서는 “아리랑”을 “아라리”라 한다.
동기달(강원도 무형문화제 제5호, 학산 오독떼기 기능보유자)
물길의 명칭(고랑, 이랑, 도랑, 거랑, 아리랑)에 공통으로 붙어있는“랑”은 명사형 접미사로서 그 의미가 다양 할 수 있겠지만 물이 흘러가는 물길에다 물이 졸졸 흐를 ”浪“이라는 의미 있는 접미사를 붙였다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알”은 “아리”에 준말인데, 강릉에서는 내(川)를 “알”이라고 한다.
1960년대 이전에 태어난 강릉사람들에게 물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 모두가 “알”루 간다고 말한다.
이것은 물이 아래로 간다는 말이 아니라 냇물(알)로 간다는 말이다.
이것 또한 경주의 “알천”과 무관하지 않은 말이다.
그런데 “알”을 삼국유사에 “閼”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한자의 음을 차용한 향찰식 문자로 보아야할 것이다.
당시 신라의 문자가 향찰, 이두문자였다.
때문에 “아리랑”을 향찰로 다양하게 阿里郞, 我理朗, 阿離朗, 阿里娘, 등으로 표기할 수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물이 졸졸 흐를 물결 “浪”을 붙여 阿里浪, 我理浪, 阿離浪, 으로 해야 옳은 표기가 아닐까한다.
굳이 “아리랑”을 향찰로 표기한다면 “涐里浪”이라 표기 할 수 있겠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阿里娘 打令”을 1894년 창덕궁 보수공사 때 노동자들을 위해 위문공연으로 부른 신성염곡(新聲艶曲)이라 하였다. 이 노래를 “아리랑(阿里娘) 타령” 이라 하였는데, 아리랑을 “阿里娘”이라고 한 것은 언어학적으로 볼 때 순 우리말 “아리랑”을 향찰식 표기 방법에 의해 의미와 관계없이 “음”을 차용한 글자로 보아야할 것이다.
“아리랑”은 1886년 미국의 선교사 헐버트가 “아리랑”을 채록하여 악보로 전했으며, 1920년1월 8일자 독립신문에 의하면 상해민단의 신년축하회에서 “아리랑 타령”을 불렀는데 최영년은 이 노래를 “말세의 소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1926년 나운규는 어린 시절 고향 회령에서 철로부설 공사를 하러 온 노동자들이 부르던 노래가사를 바탕으로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를 개사하였는데 노동자들 대부분이 한양에서 온 사람들이라 하여 이 노래를 “경기아리랑”이라 하였다고 한다.
1930년 6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에 김지연 이라는 이름으로 “조선민요 아리랑”을 기고하였는데, 여기에 신 아리랑, 별조 아리랑, 아리랑 타령, 원산 아리랑, 밀양 아리랑, 강원도 아리랑, 정선 아리랑, 서울 아리랑 등의 가사를 실어 놓았다.
이것으로 보아 “아리랑” 노래가 정착된 것은 1886년 미국의 선교사 헐버트가 채록하여 악보로 기록한 19세기 초로 보아야하며, 선소리 타령으로 불러 내려온 농요 “정선 아리랑”은 그 시기를 확실히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 강원도 아리랑, 등 각 지역마다의 아리랑은 1920년대에 창작되어 전해내려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쓰리랑”은 그 시대에 창작된 신종어로 노래의 흥을 돋우는 추임새였다.
이처럼 “아리랑”을 언어학적 접근에 의해 찾은 실체는 “강”이였습니다.
아리랑은 강(River)입니다.
물은 우리의 생명이고 삶의 원천입니다.
물을 떠나서 우리는 살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선조들의 삶 또한 물과 함께하였고,
수렵생활을 하면서부터 강가에 정착을 하면서 이웃을 이루고 혈연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함께 더불어 살았습니다.
이곳에는 어머니가 계시고 형제자매가 있고 친척과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곳이 정든 고향이고, 그리움이 있고, 이별과 삶의 애환이 서려있는 “아리랑”입니다.
아리랑 지킴이 김동철 씀
첫댓글 고맙습니다